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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釜山大) 崔德卿(釜山大)**

    Ⅰ. 머리말

    Ⅱ. 漢代의 自然觀과 畵像石

    1. 災異思想과 天罰圖

    2. 天人相應說과 祥瑞圖

    3. 天命思想과 昇鼎圖

    III. 맺음말

    Ⅰ. 머리말

    漢武帝(재위 B.C.141-B.C.87)를 비롯한 漢의 통치자들은 天命사상을

    통하여 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天人合一사상의 天人相應說을 통하

    여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있다. 周書에는 夏와 商의 지배자가 天命에순종했더라면 왕조가 지속 될 수 있지만 두 왕조의 지배자가 經德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천명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1) 이시대의

    天은 통치자의 수명을 결정하고, 賢者를 탄생시켜 왕의 통치를 돕고,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天은 日月星辰이나 風雨雷電에

    의한 자연현상이 발생되는 곳이며 이는 천인감응설을 근거로 하여 상

    서와 재앙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자연현상은 하늘의 의지를 나타낸

    다고 보며 인간에게 天의 권위를 암시하고 있다. 즉 인간이 虐政을 만

    나면 天災가 보이고 仁政을 베풀면 祥瑞物이 출현하는 것이다. 한무제

    *이 논문은 2010도 부산대학교 박사후 연수과정 지원 사업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고혜련(제 1저자), 최덕경(교신저자)

    1) 書經 周書 , 召誥篇, “我不可不監于有夏,亦不可不監于有殷. 我不敢知曰。有夏服天命, 惟有歴年, 我. 不敢知曰,不其延。惟不敬厥德,乃早墜厥命.”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때의 유학자 董仲舒는 災異論을 통하여 이러한 천재와 상서물의 출현

    을 災異가 발생하기 전에 보이는 징조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신비주의

    를 나타내는 당시 유가사상이 특징이다.2)

    天命에 따른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간인 지배자의 행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특히 군주는 무질서한 행동으로 자연과 인간의 전체적인

    조화에 혼란을 야기시키며 이것은 당시 天에 대한 관념과 직접 연관되

    어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역사성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

    게 한다. 이러한 통치자의 행위는 천인상응설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그에 따른 인과관계가 하늘이 내리는 상벌이며 재이론에서 자연재해로

    나타나게 된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天命思想과 동중서의 천인상응

    설에 나타난 天의 성격을 통하여 漢代의 自然觀을 부분적으로나마 파

    악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儒家의 신비주의적 관점이 산동지역 화상

    석3)에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4)

    2) 황희경, 董仲舒 哲學의 과학적 성격과 이데올로기적 성격 -災異說을 중심으

    로 (현상과 인식 14-1 2, 1990).3) 秦대의 화상석이 발견되어 상한선이 올라가고 하한선은 위진 남북조 때까지이

    다. 漢代 화상석은 대체로 한무제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였고 후한말까지 약

    300여년 존속하였다(蔣英炬 楊愛國, 漢代畵像石與畵像磚 (北京: 文物出版社,2003, p.19). 화상석 연구는 信立祥, 中國畵像石綜合硏究 (北京: 文物出版社2000)과 번역본 김용성, 漢代 화상석의 세계 (학연문화사, 2005)가 있으며 신립상의 연구는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圖像을 天上의 세계, 仙人의 세계, 人間

    의 세계 외에 鬼魂의 세계로 나눠 분석하였으며 이제까지의 중국 화상석 연구

    를 포괄한다. 우리나라의 화상석 연구는 김재원, 武梁祠石室 畵像石에 보이는

    檀君神話 (檀君神話論集, 李基白 編, 새문사, 1988)의 화상석 관련 논문을필두로 전호태, 중국 화상석과 고분벽화연구 (솔, 2007)에서 중국 漢에서 唐까지 畵像石에 표현된 서왕모와 사신도 등을 분석하였다. 그 후에 박아림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와 화상석의 연관 관계를 연구한 연구서들이 있다. 단군신화

    와 무량사 화상석의 연관 관계는 Wu Hong, The Wu Liang Shrine: TheIdeology of Early Chinese Pictorial Ar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9)의 논문을 통하여 김재원의 이론이 논란의 여지가 있음이 밝혀졌다. 최덕경, 중국 고대 산림보호와 환경생태사 연구 (신서원, 2009)는 畵像石에 등장하는수렵도, 어로도, 농경도 및 포주도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식물의 모습과 초목에

    서 漢 시기의 생태계와 생활 환경을 가늠케 하였다.

    4) 필자의 화상석 연구가 산동지역에 국한된 것은 post-doc 연구논문이라는 시간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3漢代 畵像石은 한무제 때부터 유행되기 시작하여 후한말까지 조성

    되었다. 화상석은 무덤 벽의 돌 판위에 선각이나 부조로 당시 유행했

    던 유교적 고사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사당이나 묘의 문에 장식하였

    다. 화상석의 유행은 여러 관점에서 논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후장

    풍습과 墳墓제사의 발달과 관리 추천제인 孝廉에 의한 것이라 본다.

    동중서의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여, 출생 연도에 관하여 가장 일찍은

    기원전 198년, 사망 연도로 가장 나중인 것은 104년이다. 동중서는 漢

    高祖(재위 B.C.202-B.C.195)의 치세 때 태어나 武帝(재위 B.C.141-B.C.

    87)까지 다섯 황제의 치세에 걸쳐 살았으며 한무제보다 일찍 죽었다.

    동중서의 학문적인 기반은 다른 제자백가 사상을 이단으로 모는 獨尊

    儒術론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원래 춘추시대의 儒家는 자연이나

    초자연의 문제를 거의 논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만을 다루었고, 陰陽

    家는 사회적 문제보다 자연현상의 원리에 집중하였는데 동중서는 이

    두 관점을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다. 동중서는 춘추 공양학을 공부하여

    유교적인 도덕을 기준으로 인물과 사건을 평가하였다.

    주희는 춘추의 명분론을 “춘추의 대의란 난신을 폄하하고 賊子를 성

    토하며, 중화를 가운데 두고 오랑캐를 주변으로 내치며, 군주를 귀하게

    여기고 신하를 천하게 여기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

    한 위계질서는 陽과 陰, 중국과 오랑캐, 황제와 신하, 정통과 이단 등

    으로 구분된다. 이는 세상의 구조를 상위가치와 하위가치로 구분하여

    상위가치만이 정통성과 명분을 갖는다는 명분론이다. 이와 같은 논리

    에 따라 漢의 유학은 강력한 황제권을 확립할 수 있는 중심사상이 되

    었으며 治者의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후한의 유학자 王充(27-?)

    은 동중서가 서술한 “춘추의 도리는 위반되는 것이 없다”하며 그가 논

    한 도덕과 정치는 찬미할 만하다고 하였다.

    적인 제약에 의한 것이며, 또한 같은 이유로 漢代의 신비주의적 자연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심사자의 의견은 필자의 차후 논문에 수렴하고자 한다.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4

    II. 漢代의 自然觀과 畵像石

    1. 災異思想과 天罰圖

    天人感應 사상은 春秋 左氏傳에서 정의하기를, “하늘이 時令을 어기면 재난이 발생하고, 땅이 사물의 본질을 거스르면 요괴가 발생하며,

    백성이 德을 어기면 혼란이 발생하며 혼란은 요괴와 재난을 탄생시킨

    다.”5)고 하였다.

    西周의 伯陽父는, “천지에는 氣가 있어 그 질서를 잃지 않는다. 만약

    질서를 잃으면 백성은 혼란에 빠진다. 陽이 숨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

    고, 陰이 궁핍하여 솟아 나오지 못하면 地震이 발생한다.“6)고 하였다.

    동중서는 이같이 인간의 좋지 않은 행동이 天地의 질서를 파괴하고

    지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陰陽家 이론을 유교에 채용하여 합리

    적인 사고를 통한 자연현상을 해석하고자 하였으며, 세상 만물은 모두

    음양오행의 규칙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추연(B.C.305

    -B.C.240)의 오행론에서 오행과 역사의 주기적 패턴과의 상응관계에서

    설명되기도 한다.7)

    진시황제는 가뭄이나 홍수가 있으면 가벼운 범죄자들을 사면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조심했는데,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의 울분이 陰

    氣가 되어 陽氣를 침범함으로써 天災地變이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

    5) 春秋左氏傳 宣公 15年條, “天反時爲災, 地反物爲妖. 民反德爲亂, 亂則妖災生.”

    6) 國語 周語 , “天地之氣, 不失其序, 若過其序,民亂之也. 陽伏而不能出, 陰迫而不能烝,於是有地震.”

    7) 蘇輿 撰, 春秋繁露義證 (北京: 中華書局, 1992). pp.361-371. 예를 들면 중국의 역사에서 夏-商-周는 각각 木-金-火가 득세하였으며 火 즉 周를 멸망시키

    는 다음 왕조는 水가 득세한다는 五行相勝說이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를 통일

    한 진시황제는 의례, 의복, 깃발의 색을 水와 결부하고자 하였고 黑을 자신의

    상징적인 색깔로 삼기도 하였다.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5다. 이와 같이 천인상응설에서는 天과 人間의 길흉화복은 상호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天은 自然과 동일시되었다.

    동중서는 災異, 祥瑞 등의 특이한 자연현상은 통치자의 정치 실태와

    연관되어 출현한다고 하며 이는 서경 홍범편 에서 좋은 징조(休徵)와 나쁜 징조(咎徵)의 천인감응으로 구분한 것에 유래한다.

    좋은 징조란 [왕이] 심사숙고할 때 時雨가 내리고, 편안하게 다스릴 때

    햇빛이 따사롭고, 명석할 때 여름 더위가 알맞고, 지략이 있을 때 겨울

    추위가 알맞고, 지혜로울 때 時風이 분다. 나쁜 징조란 [왕이] 번잡할 때

    끊임없이 비가 오고, [왕의 자리가] 분에 넘칠 때 오랫동안 햇볕이 비추

    고, 풍류만을 즐길 때 지칠 줄 모르는 더위가 오며, 조급할 때 맹추위가

    몰아치며, 어리석을 때 바람이 끊임없이 분다.8)

    따라서 동중서는 나라에 일식·홍수·지진 등의 재앙이 있으면 모두가

    통치자의 정통성과 失政이 그 원인이라 하였다. 하늘은 오행의 주기성

    과 함께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할 때에도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것

    들을 필연적으로 생산하여 자연스럽게 징조를 보여준다고 하였다.9) 유

    학자들은 이를 통하여 災異를 논하였다.

    재이사상은 천인상관설의 하나이며 災와 異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음양오행이나 천체운행과 결부하여 사고하는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10)

    이는 천인상관설과 함께 書經의 洪範 11)과 呂氏春秋 明理 등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墨子 尙同中篇 에서 인간이 天子의 뜻만 따르고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天災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12) 즉 묵자는 하늘이 외

    8) 書經 洪範篇 , “曰休徵 曰休徵 曰肅 時雨若 曰乂 時暘若 曰哲 時燠若 曰謀時寒若 曰咎徵 曰狂 恆雨若 曰僭 恆暘若 曰豫 恆燠若 曰急 恆寒若 曰蒙 恆風

    若.”

    9) 蘇輿 撰, 앞의 책. pp.357-362.

    10) 侯外廬, 中國思想通史 2. 兩漢思想 (北京: 人民出版社, 1957).11) 書經 洪範篇 은 서주초기에 周의 무왕이 商의 기자에게 자문을 구하여 기록되었다고 하였으나 후대에 가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2) 墨子 尙同中篇 , “是以天下治夫旣尙同乎天子. 而未上同乎天者. 則天災將猶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6형상은 自然이지만 意志를 가진 신이며 천자와 백성의 의지가 같아도

    천자와 하늘의 의지가 통일되지 않으면 天災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동

    중서는 이와 같은 묵자의 天意를 그의 천인상응설에서 더욱더 체계적

    으로 발전시키고 있다.13) 동중서는 인간이 하늘에 적절한 의례와 윤리

    적인 행동을 하면 자연과 질서가 유지되며, 따라서 천자가 반드시 하

    늘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 인간이 아버지를 봉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동중서는 조화로운 天人 관계를 해치는 것은 인간이며

    그에 대한 하늘의 반응을 天意로써 설명한다. “自然 속의 天意는 결코

    그 정해진 운행 경로를 벗어나는 법이 없으나 인간 군주가 실책을 범

    하여 하늘이 자연적 혼란과 재난을 통하여 반응한다는 것이다. 즉 군

    주의 德治 유무에 따라 상서물이 출현하게 되고 이는 天人相與之際로

    서 天道와 인간사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14)

    동중서는 春秋繁露 人副天數篇 에서 천인합일설에 부응하여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副本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에게 五臟이

    있듯이 하늘에는 五行이 있고, 인간에게 四肢가 있듯이 하늘에는 사계

    절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의지와 행위의 목적이 뚜렷한

    것처럼 하늘 또한 당연히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15)

    동중서는 천인상응설에서 재해와 정치를 논하며, 국가가 失道한다면,

    하늘은 먼저 災害를 내려 경고하고, 그래도 자성하지 못하면 怪異를

    내어 놀라게 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傷敗가 닥치게 되지만 반면

    善治를 하면 재해는 사라진다고 하였다.16) 漢代에는 사회적으로 자연

    재해가 통치자의 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天譴)의 의미를 갖게 되어

    未止也.”

    13) 章炳麟(章太炎, 1869-1936)는 동중서를 중심으로 漢代 今文經學派가 墨家學派

    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天人 부분에서 이 둘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다.

    14) 漢書 卷56, 董仲舒傳 , “視前世已行之事, 以觀天人相與之際, 甚可畏也. 國家將有失道之敗, 而天乃先出災害以譴告之, 不知自省, 又出怪異以警懼之, 尚不知

    變, 而傷敗乃至. 以此見天心之仁愛人君而欲止其亂也.”

    15) 蘇輿 撰, 앞의 책. pp.356-357, “內有五藏, 副五行數也. 外有四肢, 副四時數也.”

    16) 漢書 卷56, 董仲舒傳 .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7현군의 치세 기간 동안에 자연재해를 만나면 그는 더 이상 현군이 아

    닌 것이다. 따라서 황제 또한 災를 만나면 하늘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반성을 하고(恐懼修省), 왕의 반찬 수를 줄이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다(減膳撤樂). 宰相은 재해에 대하여 황제가 경외의 마음을 갖도록 유

    도하고 있다(啓人主敬畏之心). 재상도 정사를 처리하는 직책 외에 음양

    을 조화시켜야 했다. 그는 음양 질서의 조절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

    며 자연계 내의 사물의 변화에도 책임을 져야 했다. 재이가 발생하면

    백성이 겪는 굶주림과 溺死의 피해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三公을 면

    책하는 제도가 있었다. 漢書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황제는자신을 자책하며 조서를 내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관료와 학인 등

    에게 의견을 구하였다.17)

    前漢의 대표적인 자연재해는 황하 범람이었다.18) 한무제 元光 3년

    (B.C.132)에는 瓠子(지금의 하남성 복양시)에서 제방이 무너져 황하가

    범람하여 泗水와 淮水가 합쳐지게 되고 하남성, 안휘성, 절강성, 산동

    성 남부에 홍수가 발생하였다. 그 후로 제방을 쌓았으나 계속 실패하

    여 20여 년간 해마다 흉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元封 2년(B.C.109)에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 돌아오

    는 길에 직접 공사를 독려하여 제방을 완성시켰으며 이로 인해 홍수를

    방지하게 되었다.19)

    한무제 원광 3년에 瓠子지역의 제방 붕괴는 사수와 회수를 통하여

    황하가 처음으로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호자의 제방을 쌓아 황정이

    실시되는 기간이었던 元狩 3년(B.C.120)에 또 한 번 큰 범람이 발생하

    여 산동의 백성 다수가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元狩 4년(B.C.119)에 70

    여만 명의 수재민을 新秦中으로 이주를 시키기도 하였다. 元鼎 2년

    17) 김석우, 자연재해와 유교국가 (일조각, 2006). pp.42-43.18) 황하범람의 원인에 관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譚其驤, 何以黃河在東漢以後會

    出現一個長期安流的局面 (學術月刊 2. 1962); 楊振紅, 漢代自然災害初探(중국사연구 1999-4); 王子今, 秦漢時期氣候變遷的歷史學考察 (歷史硏究 1995-2); 陣業新, 兩漢時期氣候狀況的歷史學再考察 (歷史硏究 2002-4).

    19) 史記 卷29, 河渠書 .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8(B.C.115)에는 산동의 홍수로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발생하였다. 또

    한 太始 2년(B.C.95)에 황하가 범람하여 몇 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었

    다.

    전한과 왕망시대까지 자연재해는 약 201회가 발생하였는데 이중 49

    회가 한무제 때에 있었고 이중 가뭄이 13회, 황재가 10회, 수재가 9회

    로 빈번하였다.20) 이러한 빈번한 자연재해 상황을 천인상응설의 천인

    합일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보면 무제의 정통성에 하늘이 의구심을 갖

    고 天意를 내보이며 계속 견책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호자 제방 축

    조 사업은 54년의 무제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23년간의 황제의

    책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제와 자연재해의 관계는 宣帝 때의 일화

    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宣帝(재위 B.C.73-B.C.49)는 무제의 묘를 군국

    49개소에 세우려는 등 그의 공적을 새삼 칭송하려 하였는데 夏侯勝은

    무제 때에 무리한 전쟁과 사치 행각으로 백성 중에 유리걸식하다가 죽

    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고 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선제가 그를 감옥

    에 가두자 그로부터 2년 후에 49개 군국에서 동시에 대지진이 발생하

    여 약 6천여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대지진이 하늘의 뜻임을 깨달은

    선제는 하후승을 사면하였다.21) 이와 같은 한무제 재위 시기의 빈번한

    자연재해와 선제와 하후승의 일화는 역사적으로 中華思想을 확립하여

    天下의 중심이 되었던 한무제의 위상과는 상반되는 자연현상이었다.

    무제의 빈번한 자연재해에 대한 현실적인 상황은 동중서의 천인상

    응설보다는 오히려 순자가 언급한 明於天人之分의 “하늘과 사람간의

    분별을 명확히 인식한다.”는 개념이 적합할 수 있다.

    荀子 天論 을 보면, “하늘은 음양이 변화하고 사계절이 교체하는것을 직분으로 삼고, 인간은 교육과 도덕적 수양을 통하여 나라를 다

    스리는 것을 직분으로 삼는다.”22) 이와 같은 하늘과 인간의 직분은 인

    20) 漢代에는 황하 중하류 지역에서 대략 201회의 재해가 나타난다(김석우, 앞의

    책, p.78의 ). 화북 지역의 기후와 산동성의 강우량은 최덕경, 앞의 책,

    pp.86-87 에서 참고 하였다.

    21) 漢書 卷75, 夏候勝傳 .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9간의 의지로 자연의 법칙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서로가 간섭할 수 없

    다고 하였다. 이러한 순자의 이론은,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고 바람과 비가 시시때때로 몰아치며 괴이한 별

    (유성)이 거듭 보이는 것은 세상사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늘 있는 일이

    아니다. 위로 (왕이) 현명하고 정치에 공평하면 비록 이 시기에 위의 일

    이 일어나도 해를 입힐게 없다. 왕이 정치를 위태롭게 하면 비록 위의 일

    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아도 이익될 것이 없다. 별들이 떨어지거나 나무가

    울어도 이것은 천지의 변화일 뿐이다. 음양의 변화로 사물이 드문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23)

    그는 또한 자연재해는 신의 경고가 아니며 인간은 현실 정치만 잘

    하면 이러한 재해가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人妖, 즉 인간에 의한 재앙 이라고 하였

    다. 이러한 인요를 방지하기 위해 교육을 통한 도덕과 예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순자는 천인상응설에서의 초월적인 天의 개념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통치자의 虐政으로 산림이 파괴되어 수원

    이 고갈되면 초목이나 생물이 자라지 못하여 음양의 기가 쇠하고 결국

    용과 물고기가 사라지고 새나 짐승이 떠나게 되어 흉조가 든다고 하였

    다. 당시 무제는 황정으로 사민정책을 실시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둔

    전이 개발되어 산림이 경작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림의 파괴는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각종 새, 짐승, 어류의 서식처가 파괴되었

    다.24) 그러나 무제는 당시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를 순자의

    明於天人之分 관념보다는 이를 전면 부정하는 동중서의 天人相應說에

    따른 天論으로 해석하고자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漢代에 이르러 널리

    22) 荀子 天論 , “天有其時,地有其財,人有其治,夫是之謂能參.”23) 荀子 天論 , “‘夫日月之有蝕 風雨之不時 怪星之黨見 是無世而不常有之 上明而政平 則是雖幷世紀 無傷也 上明而政險 則是雖無一至者 無益也 夫星之隊

    木之鳴 是天地之變 陰陽之化 物之罕至者也.”

    24) 최덕경, 앞의 책, pp.126-127.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10유행하였다. 이는 무제가 당시 신비주의적 성격을 띤 동중서의 儒家

    이론이 天命에 의한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에 더 적합한 것이라 본 것

    이라고 추측한다.

    재이의 원인을 살펴보자. 천지간 사물에 이상한 변화가 생긴 것이

    異이고, 그 중 작은 것이 災 이다.25) 재가 통상 먼저 이르고 이가 뒤따

    른다. 재란 하늘의 견책이고, 異란 하늘의 위협이다. 재이의 근원은 전

    부 국가의 失政에서 생긴다고 생각하며 국가에 실정이 싹트기 시작하

    면 하늘은 재이를 내려 그것을 견책하여 알린다. 견책을 했는데도 깨

    닫지 못하면 怪異로 위협을 하여 두렵게 한다. 그래도 하늘의 뜻을 경

    외할 줄 모르면 그때 재난이 닥친다.

    한무제 치세에 발생한 자연재해가 49회에 달하는 것은 하늘의 견책

    이었으나, 한무제는 백성을 상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동요시키면서 四

    夷의 정벌과 자신의 무덤인 戊陵 축조 등 항상 치란의 기운이 발생하

    게 하였다. 春秋繁露 天地陰陽 을 보면 “세상이 혼란해져 백성이반목하고 뜻과 기운이 어그러지면 천지의 조화가 손상되어 요상한 기

    운이 생기고 재해가 발생한다.”26)고 하였다. 또한 무제의 후계자 창읍

    왕이 말을 타고 사냥할 때에 행실을 고치지 않고 출입을 가볍게 하고

    절도가 없었다. 당시에 오랜 기간 날이 개지 않고 흐리므로 하후승이

    ‘황제의 하는 일이 적당하지 못하므로 그 벌로 일기가 항상 흐리는 것

    입니다’라고 간하고 있다.27) 한무제와 창읍왕의 행동을 동중서의 이론

    에서 보면, 하늘과 인간은 동류이므로 황제의 행동이 하늘을 움직이고

    자연적으로 서로 감응하고 있으므로 이는 천인상응설의 근간이 된다.

    반면에 재이론은 天을 우월한 존재로 두어 하늘은 희노와 상벌이 있고

    災異는 하늘의 의지(天意)에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재이론은 후

    한시대의 도참과 결합하여 天의 개념이 경이와 공포의 대상으로 발전

    한다.28)

    25) 김석우, 앞의 책, pp.65-76.

    26) 春秋繁露 天地陰陽 , “世亂而民乖,誌僻而氣逆,則天地之化傷,氣生災害起.”27) 漢書 卷75, 夏候勝傳 .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11또한 맹자의 放伐論에 등장하는 天은 백성들의 눈과 귀를 통해 民

    心을 살피고 군주를 징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것을 보고 하늘은 백성이 듣는 것을 듣는다.”고 하였다.29) 또한

    마을 백성을 얻으면 天子가 된다고 하였다.30)

    맹자는 四端의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을 갖추지 않

    으면 인간이 아니며, 그의 성선설에서 인간은 누구나 善한 본심을 소

    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善한 본성을 가진 자만이 인간이라는 것이

    다. 맹자는 齊선왕의 질문에 걸왕과 주왕을 왕이라기보다는 義를 해치

    는 者로 보며, 방벌론에서는 民心이 이러한 잔인한 인간들을 처형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즉 天人合一의 民心이 재이론에서

    는 風雨雷電 등의 상징으로 대변되며 이를 통하여 통치자를 벌할 수

    있는 방벌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天罰圖가 표현 된 산동 무량사는 중국 산동성 가상현 동남쪽에 있

    다. 무량사는 일찍이 북송대 1117년에 완성된 趙明誠의 금석록에 최초로 기록되었다. 武氏祠廟는 지상 건축물이었으나 元 至正 4년(1344)

    경 이곳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사당이 무너져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있

    게 되어 침식된 부분이 상당하였으나 돌에 새긴 畵像은 예서로 된 방

    제가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산동 가상 무씨사 좌석실 앞 천장

    서쪽 천벌도 화상석(그림 1)은 상하 4단으로 나누어진다. 넷째 단의 중

    앙에 거인이 두 손으로 힘껏 나무를 뽑고 있으며 그 오른편에는 죽은

    호랑이를 어깨에 맨 거인과 죽은 소를 역시 어깨에 맨 또 다른 거인이

    둘이서 함께 죽은 호랑이를 운반하고 있다. 이둘 사이에는 두 마리의

    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이 거인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무리 뒤에는 말을 탄 인물이 따르고 있으며 이들 뒤로는 새 한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셋째 단의 오른편에는 신체가 거대한

    28) 후한시대 도참사상과 결합하는 天에 대한 개념 변화는 차후의 과제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29) 孟子 萬章 上, “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30) 孟子 盡心章 下, “是故得乎丘民而爲天子.”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12

    산동 가상 무씨사 좌석실 앞 천장 서쪽

    거인이 큰 입을 활짝 벌려 인간을 잡아먹고 있는 형상이다. 그 옆에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듯한 곰神이 머리에 冠을 쓰고 있다. 그는 머리에

    활을 쓰고 있고 앞발로 검을 잡고 다른 발로 가지창을 잡고 뒷다리에

    는 갈고리와 짧은 창을 잡고 있다. 사지를 완전 무장한 곰神 오른편으

    로 관을 쓴 거인이 양손에 각각 무기를 들고 곰神을 향하여 가고 있

    다. 그 옆으로 한 神人이 관을 쓰고 목이 긴 항아리를 쥐고 곰神을 향

    하고 있다. 곰은 祥瑞圖에서 통치자가 賢人과 奸人을 구별할 수 있을

    때 보이는 상서로운 상징물이다. 또한 신립상은 漢代 황궁에서 매년

    섣달에 大儺 라는 귀신을 쫓는 의식이 거행 되었는데 여기서 귀신을

    쫓는 方相氏가 곰의 가죽을 쓰고 손에 창과 방패 등 병기를 잡는다고

    하며 천벌도의 곰神을 해석하고 있다.31)

    31) 김용성, 앞의 책, p.207. 周禮 夏官 에는 방상씨는 곰 껍질을 덮어 쓰고 황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13

    산동 가상 무씨사 전석실(무영사) 앞 천장 서쪽

    둘째 단의 화상은 화면 왼쪽 끝에 있는 풍백이 바람을 뿜어내어 뇌

    거를 보내고 있다. 뇌거위의 뇌공은 노한 눈으로 아래를 보며 오른손

    으로 망치 모양의 북채를 휘둘러 건고를 힘차게 치고 있다. 뇌거 앞에

    는 우사가 두 손으로 물 항아리를 잡고 기울여 인간세계에 비를 내리

    고 있다. 우사의 오른쪽에는 용의 몸이 아치형으로 휘어 무지개인 채

    홍을 만들고 그 안에는 한사람이 공포에 질려 엎드려 있고 한 神人이

    그를 징벌하는 장면이다. 이는 뇌공이 번개와 벼락으로 극악한 인간에

    게 천벌을 내리는 도상이다.

    무씨사당의 또 다른 천벌도(그림 2)은 무씨사 전석실 천장 서쪽에서

    금으로 네 눈을 만들고 검은 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꺽창을 잡고 방패를 휘날

    리며 백예를 거느리고 방마다 찾아다니며 역귀를 몰아낸다. 문헌에는 춘나, 추

    나, 동나가 보이고 동나의 규모가 가장 크고 성대하여 대나라고 부른다.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14볼 수 있다. 이 천장석은 역시 4단으로 구성된 구도이며 첫째 단은 제

    신출행도상이고 둘째 단이 천벌도상, 셋째 단은 풍백도상이고 넷째 단

    은 천제도상이다. 화상석 둘째 단 화면의 왼쪽에는 뇌공이 뇌거 위에

    앉아 있다. 여섯 명의 神人이 구름을 타고 상하 2열로 나누어져 뇌거

    를 끌고 가는 형상이다. 뇌거의 앞뒤로 건고가 세워져 뇌공이 북채로

    건고를 치고 있다. 뇌공이 치는 건고의 소리는 천둥소리를 내며 魄이

    쪼개지는 소리와 같다. 이는 사람을 죽일 때에 때리는 소리와 같다고

    한다. 뇌고를 끄는 神人 앞으로 세 여신이 목긴 항아리에서 물을 붓고

    있어 이들이 비를 내리는 우사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단의 오른쪽

    끝 부분에는 한 사람이 머리를 산발하고 땅에 엎드려 있고 두 신인이

    구름 위에 서있다. 이들은 몸을 구부려 오른손에 망치를 잡고 왼손에

    정을 잡아 엎드려 있는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의

    무씨사당 천벌도에서 뇌공이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는 天을 내세워 폭

    군을 벌하는 民의 경고인 것이다. 後漢書 黨錮列傳 을 보면,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간에는 황제는 게으르고 정치는 혼란스럽고, 나

    라의 운명은 환관에게 맡겨졌다. 선비들은 이런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비분강개하였다. 처사들은 곧고 옳은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 명성이 [전국에] 세차게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 비방

    하고 아첨하였으며 公卿을 평가하였고 정치를 마음껏 자기 판단에 의해

    집행하였다. 비꼬며 말하며 도리에 맞지 않는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32)

    산동성 무씨사당의 무덤주인 무량은 후한 桓帝(재위 147-167) 때의

    處士들에 속했으며 무량의 생존 시기인 환제 때는 조정이 외척과 환관

    에 의해 부정부패의 온상이었으며 賢者는 이들의 모함에 빠져 살해되

    거나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무량도 학식이 높았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궁핍하지만 義를 쫓아가는 생활을 하였다.33) 또한 무량이 생존한 시기

    32) 後漢書』卷 67, 黨錮列傳 , “逮桓靈之閒 主荒政繆 國命委於閹寺 士子羞與爲伍 故匹夫抗憤 處士橫議 遂乃激揚名聲 互相題拂 品覈公卿 裁量執政 婞直之風

    於斯行矣.”

    33) Wu Hong, The Wu Liang Shrine: The Ideology of Early Chinese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15와 무량사를 건축한 시기는 환제와 영제(재위 168-189) 시기로 두황제

    의 재위 기간은 43년이다. 이 기간 동안의 자연재해 빈번도는 환제 때

    53회와 영제 때 37회로 거의 90회에 달한다.34) 거의 매년 2차례 씩 자

    연재해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무량사 천벌도의 뇌공은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는 조정의 외척과 환관들을 향한 것이며 이시

    기의 지진과 수재는 황제의 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인 것이다.

    무량사에는 천벌도 뿐만 아니라 천장석에 상서도(그림 3)가 표현되

    었으며 여기서 상서도는 天意의 알레고리로써 어지러운시절에 성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무량의 기원이다.

    2. 天人相應說과 祥瑞圖

    천인상응설은 동중서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天人一也, 其道一也의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그 道 역시 하나이다”는 天人合一의 관념이

    다. 즉 하늘의 자연현상과 인간의 사회현상 사이에는 마치 거울에 비

    친 듯한 상관관계가 수립된다는 설이다. 이는 자연 속에 발견되는 실

    체, 과정, 현상들이 인간 세계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조화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우주 인간 합일론 이다.35) 또한 천인상응설은 夏, 殷,

    周이래로 내려온 天命과 禪讓 사상을 보충하는 이론이었으며 중국역사

    의 질서를 바로 잡는 데에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천

    인상응설은 畵像石에 표현된 상서도와 연관되어 해석할 수 있으며, 이

    는 思想의 유행이 역사성을 갖고 유물에 표현 된다는 것을 새삼 증명

    한다. 이 논문에서는 산동지역에 국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량사 화상석(그림 3)은 신선, 瑞獸, 역사인물 등 풍부한 내용을 지

    녔으며 무량사 천장석부분에 새겨진 상서도 도상은 문헌과 송. 원대의

    Pictorial Ar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9. p.25; 우홍. 김병준 역, 순간과 영원: 중국 고대의 미술과 건축 (서울: 아카넷, 2001). p.529.

    34) 김석우, 앞의 책, p.78.

    35) 侯外廬, 中國思想通史 2, 兩漢思想, (北京: 人民出版社, 1957).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16

    무량사 천장석 상서도

    탁본에 근거하면 40여 폭의 상서도가 있었다. 信立祥은 무량사에서 판

    독이 가능한 열 개의 상서도를 명문과 함께 나열하고 있다.36) 이는 大

    甕, 單魚, 雙魚, 雙頭鹿, 雙頭鳥, 穀紋圭, 穀璧, 連理木, 玉英, 大熊, 角馬

    등이다. 이는 또한 唐의 天地瑞祥志에 기록되어 있는 90여종의 상서물과 중복된다. 宋書의 符瑞에서도 상서물의 기록이 보인다. 송서에서는 상서로운 상징으로 麒麟, 鳳凰, 神鳥, 黃龍, 靈龜, 白象, 白狐,

    赤熊, 九尾狐, 白鹿, 三角獸, 一角獸, 六足獸, 比肩獸, 獬豸, 白虎, 白狼,

    白獐, 銀麂, 赤兎, 比翼鳥, 赤雀, 福草, 蒼烏, 甘露를 나열하고 있다.37)

    梁 孫柔之의 瑞應圖38)에는 이들에 대한 설명과 상징이 보이며 상서로운 상징뿐만 아니라 흉조도 나열하고 있다. 예를 들면, 白鼠는 길이

    가 일척에 가까우며 네 발이 붉어 요사스러운 쥐이다.39) 野狐는 머리

    36) 信立祥, 漢代畵像石綜合硏究 (北京: 文物出版社, 2000), p.165-166.37) 宋書』卷二十八, 符瑞中 .38) 藝文類聚 卷九九, 瑞應圖 .39) 이후 상서물의 旁題는 梁 孫柔之의 瑞應圖을 따른다. “長一尺而四脚赤是妖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17

    무량사 천장석 상서도 2

    무량사 천장석 상서도 1

    는 하나에 몸이 두 개이고 팔다리가 여덟 개이며 대흉의 상징이다.40)

    鼠也.”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18

    1986년 滕州市 三山村 출토

    異雨는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리는 것으로 흉조이다.41) 武鴻은 그의

    논문에서 무량

    사 상서도를

    복원하고 제문

    을 해석하였

    다.42) 무홍은

    16폭의 상서도

    (그림 4, 그림

    5)를 나열하며,

    이들 도상은

    기원전 1세기

    에 등장하여

    기원 후 1-2세

    기에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했

    던 祥瑞라는책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43)

    등주시 삼산촌에서 1986년에 발견된 화상석(그림 6)는 한무제 시기

    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祥瑞物 중에서 玉璧과 赤熊이 보인다. 그

    림에서 보면 중심에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나무가 서있고 그 주위로 네

    마리의 크고 작은 새가 날고 있다. 나무의 上. 下 방향으로 좌우에서

    날고 있는 큰 새 두 마리는, 논어에 나오는 鳳鳥와 같아 공자의 탄식에 나오는 瑞圖를 상징한다.44) 이는 공자시대에도 성인이 나타나기

    40) “一頭兩身八足大凶之象.”

    41) “天雨魚大凶之象.”

    42) Wu Hong. 앞의 책(1989) pp.235-245.

    43) Wu Hong, 앞의 책 (1989) pp.76-80, pp.234-235.

    44) 공자는 “鳳鳥가 이르지 아니하고 河水에서 圖가 나오지 아니하니 나는 희망

    이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19

    赤態 圖像

    전에 봉조와 서도

    가 나타난다는 상

    서물에 대한 관념

    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鳳鳥

    아래로 좌우에 각

    각 동물이 표현되

    어 있는데 나무의

    왼편에는 赤熊이

    나무를 보며 서있

    다. 오른편의 동

    물은 네발로 서있고 적웅은 두발로 서있는 표현이다. 적웅은 후한 무

    량사(그림 4 상단 첫 번째 그림) 祥瑞圖의 赤熊과 거의 유사한 표현이

    다. 상서의 상징으로 적웅은 붉은 큰곰(그림 7)으로 어진 것과 간악한

    것을 명확히 하는 것에 이르는 것이다45). 군주가 현인과 처사를 존경

    하고 기용하며, 아첨꾼을 몰아내라고 요구하는 의미로 본다.46)

    경운산(그림 8) 출토의 화상석 역시 한무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림의 중심에는 가옥이 있어 그 안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으며 가옥 좌우에 나무가 서있다. 가옥의 왼편에 璧47)이 있어 옥벽

    표면에 마름모꼴로 선을 규칙적으로 교차시켜 문양을 새겼다. 무량사

    상서도의 옥벽은 투명한 유리옥으로 왕이 감추는 것이 모두 투과되므

    로48), 군주가 자기의 잘못을 숨기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은 산동지역의 畵像石에 보이는 상서물을 살펴보기로 하자.

    大甕은 “형법이 곳곳에 옳게 펼쳐지면 은옹이 나타난다.”49)고 하였

    45) “赤羆, 仁姦明則至.”

    46) Wu Hong, 앞의 책(2001). p.535

    47) 連璧: 夏候湛(243-291)과 潘安仁과 같이 용모가 수려한 사람들이 늘 같이 다

    니는 것을 일컫는다.

    48) “璧琉璃, 王者不隱過則至.”

    49) “銀甕, 刑法得中則至.”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0

    1984년 山東省 臨沂市 慶雲山 출토

    白魚 圖像

    다. 漢書 董仲舒傳 을

    보면 형벌이

    바르게 적용

    되지 못하면

    요상한 기운

    이 생기고 이

    러한 기운이

    쌓이면 위로

    원망과 증오

    가 생겨 상하

    가 불화하게

    된다. 이로 인

    해 음양이 어그러져서 재앙이 발생하게 되고 재이가 일어난다고 하였

    다.

    單魚와 雙魚는 白魚(그림 9)와 比目魚를 나타내며 백어는 무왕이 맹

    진을 건널 때 왕의 배에 들어온 것을 상징한다.50) 비목어는 ”왕이 나

    라를 통치하며 어둠과 밝음이 명철하면 나타나는 상서물이다.“51) 史50) “白魚, 武王渡孟津, 入于王舟.”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21

    木連理 圖像

    記 周本紀 에서 보면, 주무왕 9년조에 왕이 맹진(현재 섬서성 경수현)에 이른다. 무왕은 司馬, 司徒, 司空, 諸節에게 상벌을 명확히 하여

    공적을 치하 한다고 하였다. 또한 비목어는 “군주가 현인과 처사를 존

    경하고 아첨꾼을 멀리하라는 뜻이다.”52) 單魚와 雙魚는 무왕이 周의

    걸왕을 치고자 하였을 때 뜻을 같이 하는 800여 제후들과 서로 화합하

    는 것을 상징하는 상서물이다. 화상석(그림 9)에 배를 타고 있는 무왕

    의 모습과 물고기의 표현이 보인다.

    상서물인 쌍두록(그림 11)과 쌍두조(그림 12)는 “왕의 德이 물고기와

    과부에 까지 이른다.”53) 白鹿은 “왕이 어질고 명철하여 그의 헤아림이

    아래까지 이를 때 나타난다.”54)고 하였고, 이는 또한 “왕이 옛 성인의

    51) “比目魚, 王者幽明無不衙則至.”

    52) 화상석의 어로행위는 최덕경, 앞의 책, p.308 참고.

    53) “比肩獸, 王者德及鰥寡則至.”

    54) “王者仁明則來又王者惠及下則白鹿至.”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2

    雙頭鹿 圖像

    雙頭鳥 圖像

    법도를 따르니 잃는 것

    이 없어 백록이 나타난

    다고 한다.”55)

    쌍두조인 比翼鳥56)는

    붉은 털이 나 있는 것과

    푸른 털이 나 있는 것이

    있는데, 모두 아름답다.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밖

    에 없고 눈도 하나뿐이

    라서 혼자서는 날아오를

    수 없고 2마리가 몸을

    합쳐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다.

    옥규(玄珪)는 “수원이 막힘이 없이 흐

    르고 사해에서 합쳐지니 현규가 나타난

    다.”57)는 뜻으로 왕이 주변 국가를 잘 다

    스려 사통팔달 한다는 뜻이다. 사신들이

    규를 들고 예를 갖춘 것과 연관된다.

    또한 연리목(그림 10)은 “왕이 덕으로

    잘 융합하여 팔방이 한 가족을 이루면

    목연리가 자라난다.”58)는 뜻이다. 이는

    “천자가 천하를 화합하여 뿌리는 다르지

    만 가지가 합쳐지는 것을 말한다.”59) “하

    나의 本이란 작은 민심도 잃지 않는 것을 상징하여”60) 나라 곳곳에 두

    55) “王者承先聖法度無遺失則白鹿來.”

    56) 爾雅 釋地 , “南方有比翼鳥焉,不比不飛,其名謂之鶼鶼.” 郭璞注: “似鳧,青赤色,一目一翼,相得乃飛.”

    57) “水泉流通四海合同則玄珪出.”

    58) “木連理, 王者德純洽八方爲一家則連理生.”

    59) “異根而枝合也.”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23

    角馬(산양) 圖像

    루 천자의 德治가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옥벽은 “왕이 자기의 죄를 투명하게 할 때 보인다.”61) 백벽은 “왕이

    현명하고 양심적이며 미덕을 갖출 때 나타난다.”62) 옥영은 유교의 윤

    리도덕이 지켜질 때 보인다. 붉은 곰(그림 7)은 “왕이 賢人과 奸人을

    구별할 때 보인다.”63)

    각마는 산양(그림 13)의 머리모양이며 “一角獸는 태평의 상징이다

    .”64) “三角獸는 왕이 선왕

    의 법도를 따르면 나타나

    는데 백록과 그 뜻이 같

    다.”65) 붉은색 갈기를 가

    진 白馬는 “왕이 청명한

    현자를 존중할 때 보인다

    .”66) “천하가 태평하면 상

    산에서 옥마가 출현 한다

    .”67)

    이러한 상서도의 방제에

    는 군주가 德과 올바른 판

    단으로 나라를 다스려야하

    는 王道政治를 지향하고

    있다. 군주는 儒家를 윤리규범으로 삼으며, 유학을 공부한 賢者를 임용

    해야 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사악하고 아첨하는 관리를 몰아내는

    바르고 공정한 정치를 해야 한다. 나라는 부강해야 하며 태평성세를

    60) “一本曰不失小民心則生.”

    61) “璧琉璃, 王者不隱過則至.”

    62) “白璧 王者賢良美徳則白璧出.”63) “赤羆, 仁姦明則至.”

    64) “一角獸太平之徵.”

    65) “三角獸王者承先王法度不遺□則至.”

    66) “玉馬, 王者淸明尊賢者則至.”

    67) “天下太平常山出玉馬.”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4이루어야하는데 군주 스스로는 이에 적합한 지를 판단해야 한다.

    3. 天命思想과 昇鼎圖

    天命思想은 天子가 천명을 받아야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封禪

    의식을 거행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천명의 受與여부는 상서로운 징

    후나 사물로서 알 수 있다.

    史記 封禪書 를 보면, 秦穆公 즉위 9년 때에 齊桓公(?-B.C.643)이패주가 되어 제후들과 봉선의식을 거행하려 하였다. 이에 管仲(B.C.723

    혹은 716-B.C.645)이 하, 은, 주의 통치자들이 모두 天命을 받은 후에

    봉선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하며 이를 말렸다. 관중은 또한 천명을 받아

    봉선을 거행할 때에는 귀한 곡물과 동해의 忠貞과 愛情을 상징하는 奇

    魚인 比目魚, 서해의 比翼鳥 등 열다섯 가지의 상서로운 동물이 요구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타난다고 하였다.68)

    미산현(그림 14)출토 화상석은 전한 宣帝(B.C.91-B.C.49)에서 元帝사

    이(B.C.74-B.C.33)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泗水에서 九鼎을 건

    져 올리는 升鼎圖69) 도상이다. 화상석 상단에는 가옥의 중심에 진시황

    이 앉아있고 좌우에는 시중이 시황제를 향하여 앉아 있다. 화상석 하

    단 중심에는 사수 안에서 두 사람이 구정을 받쳐 들고 강 바깥쪽에서

    는 좌우로 각각 3인씩 구정을 강 밖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승정도에 표현된 九鼎은 夏의 禹왕이 九州에서 청동을 거두어 주조한

    큰 솥을 말하며 천하를 상징하기도 한다.70) 鼎은 2개의 손잡이와 3개

    의 다리가 있는데, 夏, 殷이래로 天子의 정통성과 국권을 상징하는 귀

    중한 보물로 궁중에 보관하였다고 전해진다.71)

    68) 史記 封禪書 .69) 전호태, 화상속의 신화와 역사 (소와당 2009), pp.224-231.70) 春秋左氏傳』宣公3年條, “鑄鼎象物.百物而為之備.使民知神姦.故民入川澤山林.”

    71) 杜正勝, 鼎的神話與傳說 (臺北: 三民書局, 民國85), pp.212-219.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25

    1976년 微山縣 출토 화상석: 승정도 도상

    後漢의 금문학자 何休(129-182)는 公羊傳 桓公2년의 기록에서 禮祭에서 天子는 九鼎을, 諸侯는 七鼎, 卿大夫는 五鼎, 元士는 三鼎을 사

    용한다고 하였다.72)

    아홉 개의 정은 [희생된] 제물을 익혔으며 서쪽 계단 앞에 배열하고

    안을 청결히 하였다. 동면의 북쪽 상단에 碑를 두고 남쪽에 牛, 羊, 豕,

    72) 何休는 公羊傳 桓公二年條에 나오는 列鼎制度에 대하여 注를 달기를:“禮祭,天子九鼎,諸侯七,卿大夫五,元士三也.”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6魚, 腊(포), 腸胃, 膚(저민고기), 鮮魚, 鮮腊 순으로 진열한다. 정의 빗장을

    채우고 쇠고깃국(膷), 양고깃국(臐), 돼지고깃국(膮) 뚜껑을 덮어 소, 양,

    돼지 [순으로] 배열한다.73)

    이와 같이 九鼎은 天子가 제례를 지낼 때 사용했던 중요한 祭器이

    며 宗廟에 보관한다. 墨子 耕柱篇 에는 정이 옮기는 것이 아니고스스로 움직인다(不遷而自行)고 하였다.

    “鼎이 완성되고 세 개의 다리로 네 각을 이루었다. 끓이지 않아도 스

    스로 익고, 높이 치켜들지 않아도 훌륭하며, 옮기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

    인다. 또한 말하기를 九鼎이 완성된 후에 세 나라로 이동하였는데 夏后

    씨가 정을 잃고 殷人이 그것을 받고, 은인이 그것을 잃고, 周人이 그것을

    받았다. 夏后, 殷, 周가 서로 받았으니 수백세가 지났다."74)

    이를 통하여 九鼎에 대한 관념이 묵자가 생존하였던 전국시대에 이

    미 정권 이양과 함께 왕권을 상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은 紂王을 물리치고 殷을 정벌하자 곧바로 구정을 낙읍

    으로 옮겼다. 이때 구정의 所在가 이동하는 것은 천하의 대세가 교체

    되며 天命이 周로 옮겨 진 것을 상징한다. 史記 周本紀 를 보면 주군 왕난이 죽자 주의 백성들은 마침내 동쪽으로 도망을 가고 秦은 보

    물 구정을 얻었으나75) 봉선서 에는 宋國이 망한 후에 구정은 泗水에

    떨어졌다고 한다.76) 史記正義를 보면,

    73) 儀禮 聘禮 , “一牢,鼎九,設于西階前.陪鼎當內廉. 東面,北上,上當碑,南陳牛,羊,豕,魚(중략)腸胃同鼎,膚,鮮魚,鮮,設(중략)蓋陪牛,羊,豕.”

    74) 孫詒讓, 墨子閒詁 (北京: 中華書局, 2001), pp.422-426, “曰: 鼎成,三足而方,不炊而自烹,不擧而自臧,不遷而自行,以祭於昆吾之虛,上. 曰: 九鼎.成,

    遷於三國. 夏后氏失之,殷人受之;殷人失之,周人受之. 夏后、殷、周之相受

    也,數百歲矣.”

    75) 史記 周本紀 , “周君, 王赧卒. 周民遂東亡. 秦取九鼎寶器, 遷西周公於憚狐.後七歲,秦莊襄王滅東(西)周.東西周皆入于秦,周既不祀.”

    76) “周之九鼎入于秦. 或曰宋太丘社亡,而鼎沒于泗水彭城下. 其後百一十五年而秦

    並天下.”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27

    山東의 兗州 農機校出土 泗水升鼎圖

    그릇은 보정이라고 칭한다. 우왕이 구목에게 금을 공물로 받아 형산

    아래에서 정을 주조하였다. 정은 구주의 형상을 장식하였으므로 구정이라

    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은나라를 지나 주나라 赧王 19년에 진나라 소왕이

    구정을 취하였다. 그중 하나가 사수에 떨어지고 나머지 여덟 개가 진나라

    에 들어갔다.77)

    이와 같이 周가 멸망한 이후 혼란기 때에 진으로 이동한 구정은 다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구정의 상징이 당시 세간에 인지되어 있다면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자국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찾으려 하였

    을 것이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을 하면서 팽성까지 이르러 泗水에

    77) 瀧川龜太郞, 史記會注考證 (臺北: 大安出版社, 1998), p.102, “器. 謂寶鼎也.禹貢金九牧 鑄鼎于荊山下 各象九州島之物 故言九鼎 歷殷至周赧王十九年 秦昭

    王取九鼎 其一飛入泗水 餘八入于秦中.”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28빠진 구정을 건질 뻔한 고사는 진시황본기 에 전해진다.

    시황이 돌아오는 길에 팽성을 통과하였다. 재계를 마치고 사당에서 기

    도하고 사수에서 주나라 정을 건지고자 하였다. 사람 천명을 강에 넣어

    이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서쪽으로 회수를 건너 형산에 이

    르렀다.78)

    山東의 兗州 農機校出土 泗水升鼎圖(그림 15)는 두 번째 인물 아래

    에 “大王”이라는 명문과 함께 화상석에 표현된 진시황제를 밝히고 있

    어 이채롭다.

    미산현(그림 14) 승정도는 진시황본기 에 근거하는 사수승정 圖像

    이다. 전, 후한 시기의 산동지역 화상석에는 이러한 승정도가 24개 정

    도 보이고 전한 시기에는 원제시기에 2개 정도 보인다. 또한 한무제

    때 산서성 汾水에서 정을 발견하여 연호를 元鼎79)(B.C.116)으로 고쳤

    으나 구정과의 연관성은 알 수 없다. 史記 孝武本紀 를 보면,

    우왕이 구목의 동(金)을 받아 구정을 주조하였다. 모두 그것으로 [음

    식]을 삶아 상제와 귀신에게 맛보게 했다. 그것은 성인 즉 흥할 때 나타

    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 상으로 옮겨지고 주의 덕이 쇠하여 송의 사당이

    없어지자 정이 물에 떨어져 볼 수가 없었다. 송80)을 보면 당에서 기로,

    양에서 소로, 내. 정에서 자까지 보고, 염려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으면 멀

    리 살펴보며 휴식할 수 있다 하였다. 오늘 정이 감천궁에 이르니 그 빛이

    용의 변화와 같다. 이를 영원토록 받들고 머무르게 하였다. 중산의 玆와

    합하여 황백의 구름이 내려와 덮으니 짐승 모양으로 변하였다. 이는 상서

    로운 징조이다. 제단 아래 활과 화살이 모여 [또한] 이를 얻었다. 이에 보

    답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연회를 베풀었다. 오직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된

    자만이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덕을 합할 수 있다. 정은 마땅히 아버지의

    사당에서 보여야 하므로 帝廷에 보관하였다. 이로써 명확하게 대응하였

    78) 瀧川龜太郞, 앞의 책, pp.114-115, “始皇還過彭城, 齋戒禱祠, 欲出周鼎泗水, 使

    千人沒水求之, 弗得, 乃西渡淮水, 之衡山.”

    79) 史記 孝武本紀 , “有司言寶鼎出爲元鼎.” 漢書에서도 元鼎년간에 汾水 주변에서 寶鼎을 얻었고, 동 4년에 后土 사당 옆에서 보정을 얻었다는 기록이 보

    인다.

    80) 詩經 周頌 絲衣篇.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29

    산동 가상현 성동북 오노와에서 발견

    다.81)

    이와 같이 승정도 도상과 연관된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하여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고, 한무제는 中華思想을 확립하고 四夷를 정복하여

    중국을 동아시아의 漢帝國으로 발전시킨 통치자이다. 이들은 九鼎의

    출현을 本紀 에 적고 있으며, 이를 소유하고자 무던히 애를 쓰고 있

    다.

    南朝 梁 孫柔之의 瑞應圖에는

    81) 史記 孝武本紀 , “禹收九牧之金 鑄九鼎 皆嘗鬺烹上帝鬼神 遭聖則興 遷于夏商 周德衰 宋之社亡 鼎乃淪伏而不見 頌云自堂徂基 自羊徂牛 鼐鼎及鼒 不虞

    不驁 胡考之休 今鼎至甘泉 光潤龍變 承休無疆 合玆中山 有黃白雲降蓋 若獸爲

    符 路弓乘矢 集獲壇下 報祠大饗 惟受命而帝者心知其意而合德焉 鼎宜見于祖禰

    藏于帝廷 以合明應.”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30神鼎은 성질이 온화하고 섬세하여 길흉을 알고 가볍고 신중할 수 있

    고, 멈추고 행할 수 있고, 은근하게 끓고 가득 채워 넘치지 않으며 연기

    와 약한 불꽃에서도 스스로 소생한다. 심산에 깊이 감추어져 있으며 이것

    은 왕에게 [나라가] 흥할 때와 망할 때를 알게 한다.82)

    九鼎은 祭器일 뿐만 아니라 天意을 함유하는 상서물로써 하, 은, 주

    부터 내려오는 천자의 正統性을 상징한다. 승정도의 泗水에 빠진 鼎은

    하늘이 진시황제에게 天命을 전하는 알레고리인 것이다.

    산동 가상현 성동북 오노와(그림 16)에서 발견 된 後漢 초기의 승정

    도 도상을 살펴보자. 승정도 도상은 3단 구성이며 제일 윗 상단 중심

    에 인물의 크기로 보아 진시황제인 인물과 그에게 무언가 건네주려는

    인물이 마주보고 서로 절을 하며 예를 갖추고 있으며 그들 뒤로 각각

    3人씩 앉거나 서있다. 그 아랫단에는 다리 위에 좌우로 4인씩 강에서

    寶鼎을 끌어 올리고 있다. 다리아래 강에는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물고

    기를 잡고 있다. 이는 화상석 승정도 도상의 전형적인 구성 요소이다.

    흥미로운 것은 끌어올린 鼎 안에서 용의 머리가 나와 줄을 끊고 있다.

    용이 구정에서 나와 줄을 끊는 것은 “龍齒齧斷其系”라는 전설이 전한

    다. 즉 용이 진시황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어 泗水에서 나오지 않으

    려 하며 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83)

    사수 승정도는 산동에서 대략 24개의 화상석 도상으로 발견되며 후

    한 광무제 때에는 산동지역 이외의 지역에서도 발견이 된다. 이는 후

    한의 광무제가 황제의 적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틈타 황

    제위에 오른 것에 근거한다. 광무제와 승정도 도상의 연관성은 아래의

    승정도 도상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함께 다음 연구로 미루고자 한다.

    산동지역 승정도는 다음과 같은 곳에서 발견된다.

    82) “神鼎者質文精也 知吉知凶 能輕能重 能息能行 不煩自沸 不及自滿中烟煴之氣自然所生也 乱則藏於深山 王者興則出襄則去也.”

    83) 水經注, “周顯王四十二年 九鼎淪沒泗淵,秦始皇時而鼎見於斯水,始皇自以德合三代,大喜,使數千人沒水求之,不得,所謂‘鼎伏’也; 亦雲係而行之,未出,

    龍齒齧斷其係,故語曰: ‘稱樂大早絕鼎係’,當是孟浪之傳.”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311) 山東兗州農機校出土泗水升鼎圖

    2) 山東鄒城臥虎山北槨板內側升鼎圖(前漢-王莽前後)

    3) 山東微山島像石槨(前漢)

    4) 山東微山島溝南村畵像石槨(前漢宣、元時期)

    5) 山東微山縣微山島畵像石槨(前漢)

    6) 山東兗州畵像石槨升鼎圖(前漢)

    7) 山東平邑功曹闕西面畵像(後漢章帝章和元年,87年)

    8) 山東平邑皇聖卿闕東闕畵像(後漢章帝元和三年,86年)

    9) 山東長淸孝堂山石祠隔梁東面畵像(約後漢早期-順帝以前)

    10) 山東汶上孫家村升鼎畵像(後漢早期)

    11) 山東泰安畵像石闕升鼎圖(後漢早期)

    12) 山東鄒城前營畵像石墓升鼎圖(後漢中期)

    13) 山東嘉祥縣城東北五老窪第一石升鼎圖(後漢早期)

    14) 山東嘉祥縣城五老第七石升鼎圖(後漢早期)

    15) 山東嘉祥縣城五老窪第九石升鼎圖(後漢早期)

    16) 山東嘉祥縣劉村洪福院升鼎圖(後漢早期)

    17) 山東嘉祥縣紙坊敬老院畵像石祠第四石(後漢早期)

    18) 山東嘉祥縣紙坊鎭敬老院畵像石祠 第一石(後漢早期)

    19) 山東鄒城市郭里鄕高李村畵像石墓升鼎圖(後漢中期

    20) 山東武氏祠左石室東壁下石升鼎畵像(後漢)

    21) 山東武梁祠三角隔梁正面升鼎畵像(後漢)

    22) 山東滕州市官橋鎭後掌大村畵像石槨(後漢 147-189年)

    23) 山東濟寧城南魚臺升鼎圖(後漢 147-189年)

    24) 山東安丘漢墓中室南壁西側方柱畵像(後漢)

    Ⅳ.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漢代의 自然觀을 고찰하고자 天命思想과 天人相應說

    에 보이는 天의 개념을 파악하고 畵像石에서 상서도와 승정도 도상을

    살펴보았다. 이들 사상은 하늘(天)과 통치자의 관계로써 상서물 중의

    하나인 寶鼎은 천명사상과 관련되어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되었으

    며 화상석에서 泗水昇鼎의 도상을 갖는다. 역사적으로 夏, 殷, 周를 지

    나면서 정권이양의 중심에 九鼎의 소재가 중시되었고, 秦이 周를 멸하

    자 구정의 일부분이 泗水에 떨어지게 되었다. 산동지역 畵像石에 보이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32는 24여개의 승정도 도상은 모두 진시황의 사수승정과 연관된 도상이

    다. 추측컨대, 진시황제에게는 사수승정 도상이 단순히 잃어버린 寶鼎

    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하, 은, 주의 정통성을 잇는 것이며 그의 전국

    통일로 인한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보정은 국권승계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상서물인 것이다. 특히 수경주의 기록에서 보면 진시황이 1000여 명의 사람을 사수에 넣어도 보정을 찾지 못한 것은 九鼎 안에 있는 용이 鼎이 강 밖으로 올라오기

    전에 줄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진시황이 天命을 부여받지 못한

    왕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진시황이 스스로를 皇帝라 칭하고 玉璽를

    천자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

    지만, 사수승정도를 보고 광의적으로 보면 九鼎이 인정해주지 않는 그

    의 정통성을 民 앞에서 스스로 확립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인상응설에서는 군주가 虐政을 하거나 善政을 하면 天은 梁 孫柔

    之의 瑞應圖에서 전하는 90여 개의 祥瑞物을 통하여 군주에게 경고하며 天意를 전한다. 또한 하늘은 상서물 뿐만 아니라 風雨雷電으로도

    통치자에게 경고한다.

    漢武帝는 54년의 재위 기간 동안 49회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였고 그

    의 재위 기간 중에 무너진 瓠子 제방은 23 여 년 동안 복구되지 않아

    그는 제방이 축조될 때까지 통치 기간의 절반 정도를 황하 범람으로

    수재와 기근으로 고심해야만 했었다. 이와 같은 빈번한 자연재해는 천

    인상응설에 의하면 하늘의 경고이다. 무제는 또한 대규모 사민정책과

    같은 무리한 정책 수행과 中華思想에 의한 주변 국가 정벌 전쟁으로

    백성들을 곤란하게 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또다시 자연을 파괴하게

    되고 민심이 흉흉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漢書』에는 무제가九鼎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연호를 元鼎(B.C.116)으로 바꾸고 있는데,

    그 진위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한무제가 왜 보정고사가 필요했는지,

    왜 四夷를 정벌하는 대외적인 영토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짐작

    할 수 있다.

    무제의 경우는 대내적으로는 寶鼎故事와, 대외적으로는 中華思想의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33확립으로 황제의 정통성을 내세우고자 하였으며, 전자는 夏대부터 내

    려오는 정통성 승계의 알레고리를 함유하고 있고 후자는 대내외적으로

    통치자인 것을 인정받고자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는 동중서의 천인

    상응설에서 말하는 하늘의 뜻(天命)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재고의 여지

    가 없지만,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전통사상과 연관시켜 인위적

    으로 가미하고 역사서에 서술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中國史硏究 第76輯 (2012. 2)34(abstract)

    A Study of revealed Natural Concept in

    Huaxiangshi (Han-Dynasty Pictorial Stone

    Carvings)

    Koh, Hey Ryun

    In this article, I tried to declare the thought of natural concept of

    Heaven in China binding the Pictorial Stone Carving of symbol

    Good Omen. It is analysed on stone relief in Shandong. There is

    one principle between Heaven and Human Being, which are

    dependent on each other(天人相應說). There are about 40

    Iconographies of Good Omen on Pictorial Stone Carvings in

    Wuliang Sanctuary(武梁司), in that are indicated whether emperor

    are doing well on his policy or not. If he won't do well for the

    people, will be happened natural disaster.

    Specially, the Han-period are expressed on pictorial stone reliefs

    of the episode ‘finding Tripod 昇鼎'for the first emperor Qin(秦始皇

    帝), which was dropped one of tripod(鼎) to Nine Tripod(九鼎) in

    river of Si(泗水). The symbol of Tripod means the legitimacy of

    emperor status from Ha(夏)dynasty to Zhou(周)Dynasty, in which

    meaning the power of emperor blessed by Heaven(天命).

    It showed on the Pictorial Stone Carving, that Chinese Emperor

    are also doing to take the mind of his people and they tried to

    control him in heavenly authority.

  • 漢代 畵像石에 나타난 自然觀 (高惠蓮) 35

    주제어: 화상석, 상서도, 승정도, 천벌도, 천인상응설, 천명사상. 자연관, 재이론

    關鍵詞: 畵像石, 祥瑞圖, 昇鼎圖, 天罰圖, 天人相應說, 天命思想. 自然觀, 災異論

    Keywords: Pictorial Stone Carvings, Iconography of Good Omen, Rising Tripod

    and Judgment, Effective Reaction between Heaven and Human Being,

    Natural Concept, Natural Disaster

    (원고접수: 2011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2년 2월 12일, 수정

    원고 접수: 12월 20일, 게재 확정: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