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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제� 1장

=====1:1� � 태초에� -�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본� 구절을�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구약과�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시작인� � 천지�

창조의�기사로부터�시작하여�그리스도에� � 이르러�계시가�완성된다고�볼때,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 원래� '시간과� 공간

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 뜻으로�이� �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 �

말씀이� -� 원어상� '말씀(*� � � � � � � � � � ,�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 등을� 의미한다.� 그리

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 구조의� �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

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

드리아의� 필로(Philo� of� �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 세상을� � 연결하며,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 부

각시키는것이라고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늪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

(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

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 부각시킴으로써,� �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

자이신�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

성이� � 뚜렷이� � 표현되고� � 있다.� � 본서에서� � '믿다'(*,� 피스튜오),� '사랑'(*� � � � � � � � � � ,�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쓰인� 이� �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

미'� 참조).� � �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 � � � � � � � )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

'(*� � � � )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 창조된� � 것이아니라� 계

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유대교적�신관(神觀)의� 오류를�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

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

(A.D.� 325)에서� � 이단으로규정되었다.� � � 이� 말씀이�하나님과�함께�계셨으니� -� '하나님과�함께'(*� �

� � � � � � � � � � � � � � � � � � � � � � ,프로스�톤� 데온)에서�전치사� '프로스'(*� � � � � � � � )� '...와� � 함께'란� � 뜻의� �

전치사들(*,� 엔;* � � � � � � ,� 메타;* � � � � � � ,� 파라;* � � � � ,�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

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 '프로스'는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 있는� 것을� 의미하며,�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

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 전치사를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

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 알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 '친교'(Robertson)를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

다(Calvin).�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본문에서� '하나님'(*� � � � � � � � ,� 데오스)� �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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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사� '호'(*� � )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

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

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

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

지고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

오스� 엔� 호� 로고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서� �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

(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 하나님의� � 신성에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 20:28의� � 도마의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기술된�본절은�원문� 구조상� � '말씀이�계시니라'(*� � � � � � � � � � � � � � � � �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 신성을� � 드러낸다.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

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

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

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

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

의� 반복�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이러한�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그것을� 상대방(피교육

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

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 � � � � � � � � � � � � � � � ,� 아멘� 아

멘)라는� 표현이� 다른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

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

을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무척� 늙어서� 강대

상에� � 올라� 갈� 수� 없었을�때,� 제자들이�그를� 의자에�앉히고�강대상에올려�줄� 때마다� '어린� � 아들

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

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

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

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상고(詳考)하고� 배우는�자세는�구약� 시대부터�현대에�이르기까지�말씀과�더불어�살아가는�성도들의�참다운�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1:3� � 만물이� -� 원문상� � '만물'(*� � � � � � � � � � ,�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현

재의�시점에�국한된�전� 우주를�지칭하는�것이�아니라�과거,� 현재,� 미래에존재하는전� 우주를� � 가

리키고�있다.� 따라서�이� 용어는�역사와� 더불어�존재하는�만물을� � 의미한다.� � 이와는� 다른� 관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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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도�바울은� '하늘과�땅에서� � 보이는� � 것들과� � 보이지� � 않는� � 것들'(골� 1:16)이라고�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 �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 � � � � � � � � � � � � � � )

라는� 표현은� �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

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 � � � � � )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 (1)창조(히� 2:10)

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

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

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 창조시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

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 아니라� � '우리의형상을� 따라�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

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 �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 � � � � � � � � � � � � � )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헬라어� '기노마이'(*� �

� � � � � � � � � � � � )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 � � ,�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

를� 명확하게� 한다.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

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 이로써� � (1)말씀

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우주적�사역의�현장이며,� 수단임에�비하여,� 말씀은�하나님과더불어�항상�존재해�왔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 � � � � )는�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

(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본문의�경우도�그러하다.� � 한편� 구약성경에서�하나님은�생명을�죽이기도�하시고�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 생명의�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구약성경의�생명관이� 반영

된� 것이� 본문의� '생명'9*� � � � � � ,� 조에)이다.따라서�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 생명(영

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성도들에게는� 영생이�부여

된다.� 그러므로�성도는�바로� 그리스도�안에�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있는�영생을� 매개로�하여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 �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

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 가리키거나� � 빛과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

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피력하고� 있다

(1:9).� 그리고� 본절의�두개의�문장에서� � '에이미'(*� � � � � � � � � ,� �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

형인� '엔'(*� � � � )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이러한� 생명과�빛은창조되었거나� 형성된�것이� 아니라�본

래부터�삼위�일체�하나님�안에 존재하고� � 있었던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

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찬양에� � 이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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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 � � � � � � � � � � ,� 스코티

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그리고�

빛이�어두움� � 안에서�비추고�있다'(* � � ,� �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

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 승천� 후에� 생명

의� 빛은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 � � � � � � � � � )의�

3인칭� 현재형을� � 구사함으로써� �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

은� 지금도� �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

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 � 어두움

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 � � � � � � � � � � � � � � � � � � )의� 원형� '카타람바노

'(*� � � � � � � � � � � � � � � � � � � � � � )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

로� 본서의�전반적인� � 맥락이다.이러한 � � � 증거는� � � � � 예수의 � 말씀에서� � � � � 여러� � � �

� 차례 나타난다(4:5-26,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

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 이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세력에� 휘말린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 기

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세력을�궁극적으로는� '이길�수�없는'는�사실을�보여준다(히� � 11장).

=====1:6�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

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 터를� �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

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 � � � � � � �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인격적�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않은�관계

를�나타낸다.� (2)� '보내심을�받은'(* � � ,�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

을� 지닌� '아포스텔로'(*� � � � � � � � � � � � � � � � � � )의� �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위임받아�파송될�경우에�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선지자들을�보내실�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 나타낸다(7,� �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완료� 수동형을�사용함으로써�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 � � � � � � �

� � � � � � � ,에게네토)라는�부정� 과거형�동사를�사용함으로써�그� 사람이�하나님과�동등하게�존재하는�

말씀과는�달리�단지� 피조물에�불과한�존재였음을�보여준다.� � � 이름은�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

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 기자들이� � 독자들의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

에�사도�요한은�자신의�저작이므로�이를�구별할�필요성이�없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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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 � � � � �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증언하다'라는뜻으로서,� 요

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 �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 있다.� � '빛'에대해서는� 4절� 주석

을� 참조하라.� � �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증거를� 통하여�그리스도를�믿게�될� 대상들을�명시한� � '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벧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

려�믿음으로�증언한�말씀이�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

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

고� 볼� 수� 있다.� � �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 � '자기를� � 인하여'의� � 헬라어� � '디� � 아우

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 � � � � � � � � � � � � � ,� 디� 아우투)와� 같은� � 단어이나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 사역을나타낸다면,�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 요한의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같은� 요한의�사역은�사람들로�하여금�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대해� 일말의�의구심을�표했던�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

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 찬양했

던� � 사람이다(15,� � 26,� � 27,� � 29-34절;3:28-30).

=====1:8� �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간략하게�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그리스도와의� 관계를� � 확실하게� �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에베소에는�세례�요한의�제자들이�적지않았던�것으로�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예

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것이�하나의�과제였다.

=====1:9� 참빛� -� � 6-8절에� 걸친� �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 다시� 이어지고� 있다.� �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그는� 참빛

이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엔� 토� 포스� 토� �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

곧� � 참빛� � 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 번역될� � 수� � � 있다.� � � 여기서'참'(*� � � ,� � 알레디논)은� � 사도� �

요한이� � 즐겨� � 사용하는� � 용어로서� � '거짓에� � 반대되는� 참'(*� � � � � ,�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

을�완전케�하는� 참'(Calvin)을� � 의미한다.따라서 '참'(true,� NIV)이란� � 용어는� 말씀이신� 그

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

참된� 주님이�되신다는�사실을�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주님께서는�말세에�어두움의� 권세를�종식

(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 �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 � � � � � � � � � � � )는� 원래�질서와� � 연관된의미를�지닌�용어로서,� '각부분들

이� 모여서�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이� 용어는�개인이나�단체�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상태에�있을� 때� 사용될�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각각의�통일된�구성체들(*

,� 코스모이)이� 질서와� �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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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각각의� �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 � � �� � � � � � )라고하였다.� 그러나�신약성경은�이러한�개념을�도입하지�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 자

들은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 복음을� � 전파하였음에도불구

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

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 (3)� � 타락한� �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

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

만,� 인간의� 타락과�함께� 부패된�곳,� � 다시� 말해서�어두움의�세력인� 사단의�권세가�지배하는�곳이

다.� � � 각� 사람에게�비취는�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 ,� � 판타안드로

폰)이란� 인류라는� 집단�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

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 의미도� � 포함한다.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 비추신다는� � 뜻이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

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는�사실을� 보여준다.� � 따라서�그리스도의�몸이요�신부인�교회에서는�유대인이나�이방인이나�종이

나� 자유인이나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

게�된다.

=====1:10� 그가� 세상에�계셨으며(* � � � � � � ,� 엔� 토� 코스코� 엔)� -� 1절

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

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 지은바� 되었다'는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 해석하고� 있다.� 이에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하고� � 9절과� 11절의연관�관계를�살펴� 보는데�있다.� � 주지하다시피�본절은�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왔지만�자기의�소유들로부터�따돌림당했다는�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문장의�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 그러므로� 본절의� �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오신� 그리스도를� 묘

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

자가� 더� 타당하다.� �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예수를� 따

르던�군중들도�예수를�기적� 행위자�내지는�정치적�메시야로�판단했다는�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

스도에�대한�세상의� 무지함은�적나라하게�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 � � � � � � ,� 에그노)는� '알다

'(*� � � � � � � � � � � � � � ,� 기노스코)의� 3인칭�단수로서� � (1)감각적인�지각(*� � � � � � ,� 아이스

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대한� � 지식(* � � � � � � ,� 도케인),� (3)� 선천적인�지식(* � � � � ,�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

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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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

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 있다.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 것이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의미하는데�주로�사용되었다.� 하나님과�그리스도의� �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성도들의�관

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

되고,� 사랑을�매개로하여�계속�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

사랑',� 그리고� � '영원한�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1�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 � � � � � � � � � � � )는� '자기� 자신의'(*� � � � � � � � � � ,이디

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

리�세상이�타락되었고�사단의�세력이�흥왕(興旺)할지라도�세상의� � 궁극적�소유권은�그리스도에게�있다는�것이다.� � � 자기�백성� -� 구약� 시대의�이스라엘은�하나님의�백성으로�택함을�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 부

여받았다(출� 19:6).� 그러나�타락된�세상�속에� 휘말려버린�이스라엘은� � 자신의� � 역할을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 알지� � 못했고배척하였을뿐만� 아니라� 극랄하게

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상실하였다.� � 이와� � 같은� � '소유'(*,� 타� 이디아)라는�관점은�선민� 이스라엘에서�예수의�제

자들(13:1)로� � 넘어간� � 것이다.이� 영광스런�특권은� 영생과�아울러� 영원한�것이다(계� 20:6).� 이렇

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 하였음을�볼� 때,� 현대의�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이데올로기(ideology)가� �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 소유'라는확신과� 긍

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 �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 � � � �

� � � � � � � � � )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 � � � � � � � � � � � � � � � � �

� � � � )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

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 제자들의� �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재판,� 그리고�예수의� 죽음을�요구하는� � 군중들의� � 함성,� 예수의�십자가� 처

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

절),� '알지� 못하였고'(10절),� � '영접지� �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알지�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 나귀는� � 주인의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

지� 못하는도다"(사� �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

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 새끼

를� �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 아니하

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

셨다(8:44).

=====1:12� � 영접하는� 자� -�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 '데'(*� � � � ),�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 11절의� '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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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 � � � � � � � � � � � )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즉� � 구원이� �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 요한은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

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

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 그� 이름을�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 � � � � � � � � � � ,�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

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상황에서� 살았기� 때

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

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 � � � � � � � � � � � � ,� 피

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 여격인� '피스튜우시'(*� � � � � � � � � � � � � � � � � � � � � � )을� 사용하여� '그리

스도를�영접한� � 후부터끊임없이�계속되는�강력한�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 믿

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 보다� 구체적

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

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

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 바로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 여기서� � '되는'에� � 해당하는� � 헬라어� � '게네스다이'(*� � � � �

� � � � � � � � � � � � )는� �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

서� � 영원히� �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자녀가� 된다는�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 신분

의� � 변화가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 � � � � � � � � � � )-이와� 유사한�의미로서�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

'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

의�자녀가�되었다는�의미를�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 변화를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

으로만�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 그리스도를�믿고�중생하여�하나님의�자녀가�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 � � � � � � � � � � � � � )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

스도에게� �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 나타낸다.� �

성도는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권

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 자유로운� 권능

은�하나님�나라의�확장� 사역에�사용되어야만�한다(고전� 9:12,� 18).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

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본문에서� � 저자는� � 부정사� � '우크',� � '우데'(*, � � )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수� 없는� 부정

적인(negative)� 세� 가지� � 요인� �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 � � � � � � ,� �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 � � � � � � � )의� 복수� 소유격으

로서,� 육체적인혈연�관계를�의미한다.� 혈연� 관계가�구원과�무관하다는�사실은� � 세례요한과 예 수

께서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 바이다(8:39-44;마

3:7-9).� 둘째로,� 육정(* � � � � � � � ,� 델레마토스� � 사르코스)이란�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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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 인간의� 육체적� 쾌락

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

망,� 권력,� 부)로써는�구원이�불가능함을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뜻(*

� � � � ,� 델레마토스� �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노력이나� 수양,� 율법� �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 위에� �

열거한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타락한�세상에서�비롯된�인본주의적�구원의� 욕구이기�때문이다.� 따라서� � 이세상에서�육체

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 결국� � 저자는이� 세계의� 절망(어두움)

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

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 15:14),� � 그� � 인도자는� �

도둑이며,� � 삯꾼� � 목자에� � 지나지� � 않는다(10:10-13).� �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

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 � � � � � � � )가� 먼저� 나타난다.� 이�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

으며,� 본문에서는� �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

적,� �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

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 비결에� 대해서는�3:1-15절�주석을�참조하라.

=====1:14� � 말씀이�육신이�되어� -� 본문은� 9절에�서술한�성육신�사건을�다시 언급하는� � 내

용이다.� � 여기서� � '육신'(*� � � � � � ,�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그리스

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소마'(*� � � � � � � � )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

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

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

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성육신을�

나타낸다.� �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

(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

(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

운데'(*� � � � � � � � � � � � � ,�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성육신은�이� 세상에서�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속에서�발생한�역사적인�사건이

다.� 그러므로�요한은� '천막을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 � � � � � � � � � � � )의� 부정과거� � 능동태인� �

'에스케노센'(*)을� � 사용함으로써� � 그리스도의� � 성육신의� � 역사성을� � 실증한다.� � 따라서� � 본절은� �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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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현현(顯現)� 장면과�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 제공해� �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

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

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

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 광경을� � 보다'라는뜻의�

'데아오마이'(*� � � � � � � � � � � � � �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상태에서� � 실제로� � 목격했다'라

는� � 의미를� � 포함한다.� � 이는� � 아마도� � 저자� � 요한이� � 예수님의� �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기초로�하여� � 사용한�용어인�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 성육신과� � 공생애와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

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 것이� 아니라� 그

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

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 � � � )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 '외

아들')라고� � 번역된� �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 � � � � � � � � ,� '유일한')와� '게노스'(*� � � � � � � � � � ,�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 또는� �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있

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아니며,� 오히려하나님과�하나님의�자녀

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관계를�지니신�대등하신 분(1절 주석� �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신성을� � 부인하는�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무시하고,� '하나님께로

서� � 나신� � 자'라는� � 요일5:18의� 내용을�증거로�하여� '그리스도란�하나님에�의해�창조된� � 존재'라

고� � 주장한다.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 아들됨을� � 나타

내기위해서�사용한�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참조)� � � 은혜와�진리가�충만하더라� -� '은혜와�진

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

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 지

상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 '은혜

'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

는�것이다.� 한편� '가득차서�넘치는'이란�뜻의� 헬라어�서술적�형용사� '플레레스'(*� � � � � � � � � � � � )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 말해서� � 그리스도께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차고�넘치게�흘러�나와� 성도들에게�임하여�역사(役事)한다는�것이다.

=====1:15�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 � � � � � � � � � � � � � ,� '증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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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3인칭� 단수� 현재� � 직설법인� '마르튀레이'(*� � � � � � � � � � � � � � � �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

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 �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그에� 대하여�증거해� � 왔다'라고� 번역될�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혹자들의� 이해대로� 세

례� 요한의�사역에� � 대한저자�요한의� 삽입적인�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

도에�관한� � 세례� 요한의�부단한�증언이라고�봄이�문맥상�타당하다.� � � 나보다�앞선� -� 앞에서�언급

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

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시작뒤에�공생애를�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예

수가� 세례� 요한보다� � '앞선'� �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

요한은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 못할� � 분'(막� 1:7)� 등으

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 없었음에도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 (1)� � 예수의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

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요한은�이러한�비교를�통하여(1)� 예수께서�참�메시야요�하나님의�아들이라는�사실과� (2)� 요

한� 사역의�핵심이� � 바로예수�그리스도를�증거함에�있다는�것을�명시하고�있다.

=====1:16� � �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 헬라어� � '플레로마토스'(* )는� '플레로마

'(*� � � � � � � � � � � )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

에서는�바로�그리스도의�충만하신�은혜가차고�넘쳐서� � 성도에게�미치는� � 상태를�의미한다. 한 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충만힘이� 하나이며,� 하나안에�있기� 때문이다.'� 이러한�범

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

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

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풍성'이다(엡� 3:8).� 그리고�루터는�그리스도의�충만함을� '아무리�물을� 퍼내어

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 �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 헬라어� � '안티

'(*� � � � � � � � � )는� �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

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 능력을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뜻으로�번역

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 밝히고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

학들�그리고�형식주의적 유대교라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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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구원의� � 빛과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

을� � 만한� � 때요보라�지금은�구원의�날이로다"(고후� 6:2)라고�선포하였다.

=====1:17�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를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저자는�

이제�구약의�율법�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

의� 말씀이다.� �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

할�뿐이다.� � � 은혜와�진리는�예수� 그리스도로�말미암아�온�것이라� -� 율법에�대조되는�은혜와� � 진

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응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

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

침된다.� 은혜와� 진리는�율법의�경우처럼�수동적으로�주어질�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성육신

(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 � � � � � � � � � �

� � � )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 � � � � � � � � � � � � �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

거를�확고한�참신앙의�반석�위에� 세우는�말씀인�것이다.

=====1:18� � 본래�하나님을�본�사람이�없으되� -�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적이� 없는� 하나님'

이란�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 대면했다는� 명성을�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죄악된� 인생이� 거룩

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

서� � 자신을� 하나님의� �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

력하였던� 것도� � 이런� 맥락에서� � 이해된다(10:20-33).� � � 아버지� 품속에�있는� -� 이� 표현은�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

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 품속에� �

있는'이라는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 � 독생

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 은혜와� 진리의� 부여

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

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

할� 수� 있었던�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기독교� 박해시�성도들�사이에�암호로�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 � � � � � � � � �

� )로서,'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아들,� 구주'(에에수스�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

� � �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이와� � 같은굳건한� 신앙� 고백

을�토대로� 교회가�온갖� 박해를�이기고� 어두움�속에� 빛을� 비추었듯이,오늘날의� 물신주의와�이데올

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 있는� � 기반이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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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도'를�믿는� 신앙이라는�사실은�두� 말할� 나위도�없다.

=====1:19�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예수� 그리스도의�공생애�직전부터�복음서의� 본문을�기술하고�있다.� 사도� 요한은�그리스도

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

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

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

교� 지도자들의� � 공회인산헤드린은�요한의�정체를�탐지할�사람들을�파견했던�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 �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

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1:20� 드러내어�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본절에서�헬라어� 접

속사� '카이'(*� � � � � � )를� 무려� � 3회에� 걸쳐� �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

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 드러내고자� 하였던� � 의도를� 보여준다.� � 특히'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

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 � � � � � � � � � � � � � � � � )의� � 부정�

과거형으로서�요한의�증언이�믿음의�호가신으로말미암은�고백적� 증언임을�보여준다.� � � 나는� 그리

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 강조법으로써� � 예수의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

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

기에서�세례� 요한이�강력하게�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

라어� �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

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

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증언자로서의�사명을�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하여금�자신을�제국에�반대하는�

정치적�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않도록�하기�위한� 의도를�내포하고�있다.

=====1:21� � 네가� 엘리야나� -� 이것은�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입고,(2)금욕적인�식사를

하고,(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

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 �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

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

이� '드러내어� � 말하고� � 숨기지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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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답은� � 23절과도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

한의� � 대답이�거짓이�아님을�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랍비들이�주로�이용한�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

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

이미'(*� � � � � � � � � � � � � � )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우크� 에

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 � � � �

,�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

11:14;17:12)도정당한�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실제� 엘리야가�아니라�단지� 선지자 말 라

기가� � 예언한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 수행하는� � 자'였다(말� �

4:5,6).� � �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접

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있게� 드러내

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 � � � � � � � � � � � � � � � � � � � �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

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

령� 강림(降臨)후에�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 바로� � 예수 그리스도라는� � 사실을� �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 � 이를� � � 선포했다(행3:22;7:37).� � � 아니라� -� 이것의�헬라어� '우'(*� � � � )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

을�보여준다.

=====1:22� � 또� 말하되� � 누구냐� - 산헤드린의�조사단이�짐작했던�요한의�정체는�그들의�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더욱� 난감

하게�하였을�것이다.� � '또'라고� 번역된�헬라어� '운'(*� � � � � � )이� 논쟁적�어감을�띠고� 있는� 것을� 감

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조급함의�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찾는� 자들

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

문인� '너는� 네게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 않은� � 질문� � 형

태로서'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

다..

=====1:23� � 가로되� -�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 � � � � � � � )의� 부정

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 � � � � � )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

각시키고�있다.� � � 선지자�이사야의�말과�같이� -� 선지자�말라기가�예언했던�엘리야의�도래에� 대한� �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 위하여� � 세례요한은�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

야�예언의�성취라는� � 관점에서� � 반영되어� � 있다(마 3:3;막 1:2-4;눅3:3-6).� � � 주의� 길을...외

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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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세례�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

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 즉� � 이사

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 소리와� � � 서로� � � 일

치한다. 특히� � � '외치는� � � 소리'의� � � 헬라어� � � '포네� � � �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 � � � � � � � � � � � � ,� 사� 40:3)를� 헬라어�문장� 양식으로�번역한� 것으

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파견하신� 하나님의구원의�메시지임을�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세례�요한의�이와� 같은� �

대비를� � 잇는용어� '카도스'(*� � � � � � � � � � ,� '...같이')가� 사용됨으로써�사도�요한의� � 문학적� �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 그리스도가� � '말씀'으로� 나타

난�점에서�볼� 때,� 언어�구사에�있어서�요한의�능수� 능란함을�엿보게�한다.

=====1:24� 저희는�바리새인들에게서�보낸�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

와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

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 그러나� 19-28절까지

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

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큰� 영향력을�행사했다는� � 당시의� 상황에�기인한�것으로�보인다.� 즉� 산헤드린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따라서� 당시� 사두개

인들은� 자신들의� �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이어지는�세례�요한의�증언을�일관성있게�이어주고�있다.

=====1:25� �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

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

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

방인들이� �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

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

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 겔� 36:25;37:23;슥� 13:1� 등에

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

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

과�같은�질문을�던졌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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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다시� 말

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물론� 요한의�세례가�백성들을�그리스도께�이끌기�위해� 그들의�심령을�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

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

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

의� 소리'(23절)인�세례� 요한의�사역의�성격을�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

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족히비교

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 �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메시야로�착각한�것은� 그들의� � 영적� 무지를� 스스로�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

세상이� 그를� 알지� � 못하였고'(10절)라는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

내포하고� � 있다(8:44).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1:27� � 나는�그이� 신들메�풀기도�감당치�못하겠노라� -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

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

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

자기� 진술형식으로�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

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

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

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

와�성령의� � 충만한�계시를�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1:28� �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

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언급한� 것

은� 단순한� �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저자� 요한은� 당시� 상

황이� �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 것이

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

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 본서에서� '베다

니'라는� 두� 개의�지명을�구분하여�사용된�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

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지리에� 익숙했던� 사도�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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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부분�참조).

=====1:29� � 나아오심을�보고� -� 생동감을�느끼게�하는� 현재� 중간태�분사� '에르코메논'(* � � � ,�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 효과를� 연출한

다.� � � 보라� -� 헬라어� '이데'(*� � � � � � )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 적대자들이� 떠나

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찬탄과� 감격을� 극

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 간

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 증언한다.� �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문장을�종결하거나�서술하는�동사가�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이어�

'하나님의�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표현되어�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

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

세상을� � 은혜와진리의�세계로�변화시킬�그리스도의�모습을�선명하게�보여준다(17,� 18절).� 한편� '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 � � � � � � � � � )는� 신약성경에서� � 4회� � 사용되었는데,두� 번은� 본서의� 본

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 번은� �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 53장의� �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 적용시키고� � 있다

(12:38;마� � 8:17;눅� � 22:37;행� �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

는�구약의�여러� 부분에서도�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 본문은� 15절의�말씀을�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

한에게� 나아온� 예수� �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 � � � � � � � )에� 주의

할� � 필요가� 있는데� � � '아네르'는� � � 일반적인� � 의미인� � '인간'을가리키는� '안드로포스'(*� � � � � � � � � �

� � � )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용어는�예수그리스도께서�그를�따르는� 성도들의�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됨을� 암시한다.� � �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 � � � � � � � )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 � � � � � � � )로서� 세례� 요한에게�증언을�받는� 현장에서의�그리스도를� 선명

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 부정과거형

인� '엔'(*� � � � )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선재하고�계신� 그리스도를�나타낸다

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

장감(現場感)을� 느끼게�한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

데인� 아우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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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

는� � 헬라어� '에데인'은�경험에�입각한�앎을�뜻하는� '기노스코'(*� � � � � � � � � � )와는�달리� '영적인�앎

'(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 �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

축적으로� � 명시하고� � 있다.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 받게� � 하는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 속에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 관해� � 언급한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

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신앙적�본질에�기초하고�있음을�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1:32�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 � � � � � � � � � � � � ,� 우라노스)은� � 일

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

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

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

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

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 그리고� 여기서� 성령

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총애를�받으시는그리스도

의� 사역(아� � 1:15;마� �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

한�성령은�초자연적인�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 눈으로� 볼� 수� 있게끔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1:33� �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

다.즉� 이� 표현� �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자의� 소리'로� 증언한�것처럼� � 자

신이�구약의�선지자들과�같이�그리스도의�도래(到來)를� 예언하고�준비하는�자라는�사실을�시사하고� 있다.� � � 성령이� 내려서...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 요한의목

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 � 성령으로� 세

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

는�중생의�경험을�가리킨다.� 이� 근본적인�변화의�체험을�통해어두움의�자녀가�빛의� 자녀로(12절;

고후� 5:17),� 그리스도의�지체로�된다(고전� � 12:13,14,� 27).� 한편� 여기서�물과� 성령은�서로� 대조

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 세례'(눅� � 3:3)는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역사는� � 오순절�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가졌다는�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세

례는�성령세례를�예표하고�준비시키는�의의를�지닌다는�점에서�서로� 밀접하게�연관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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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아들이신�그리스도에�관해�보다� 심도있게�묘사하고�있다(3:18;5:26;17:5;19:7;20:31).

=====1:35� �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 간의� � 대면

이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 공생애를� � 처음시작하는� 사건� 전체

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 예수와�제자들과의�초기�만남에� 관해� 다루

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 �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

제� 안드레였다(40절).� �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

스도에� 대한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 불구

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 익명의� 제자

는�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가능성이�농후하다.� 세례� 요한의�주요� 메시지가하나님의�어린양을�

증거하는�것이었기�때문에,� 그의�제자들의�전(全)� � 관심은� � 예수께집중되었을�것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

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 제

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하나님의� 어린양이

라고� � 선포한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신앙자세를�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주석을� � 보라.

=====1:37� � 두� 제자가�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헬라어� '에쿠산'(*� � � � � � � � � � � � � � )

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

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

을�듣고�곧�그�말에� 순종하여�예수를�따랐다는뜻이다.� � � 예수를�좇거늘� -� 말씀을�들음은�곧� 순종

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 � � � � � � � � � � � � � � � � � � � � � )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입장을� 받아들이고� � 추종한다는�의미로�사용되었다.� 그리고�신약성경에서�이� 용어는�주

로� 그리스도의�제자가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

스도를� �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 의미한다.� 결

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흔쾌히�인도하는�세례�요한의�거인적(巨人的)� � 면모를�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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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 � � � � � � � � � � � � � � )는'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 구해야� � 할� � 것을� � 의미하는� 동사로

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 사용되었다(마� 18:12;

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요한의�두� 제자가�예수를�따르는�동기를�확고히� � 상기시키는�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

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

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 � 랍비여� -� '랍비'(*� � � � � � �

� � � )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 지닌� � 아람어이다.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

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이� 용어는 제자들이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 있는데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

호로� �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

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 예수를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 (2)그러나� 그들

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 이시라는� 말을� � 들었지만,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 � � � � � � � � � � � � � � � � � )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

함께�사용되었던� 유대인의�관용적�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율법� � 교사들에게�대화를�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

며�또한�겸손하게�말씀을�듣고자�하는� 자세를� � 보여준다.� � � � � 번역하면 -� � � '번역하다',� � � '해석

하다'라는� � � 뜻의� � � 동사� � � �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 � � � � � � � � � )에서� 파생된�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 � � � � � � � � � � � � � � � � � � � � � )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 표

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 1회(히� 7:2)쓰였

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

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

시의�상황을�현장감있게�재현하기�위하여 아람어를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

해될�수�있도록�번역을�첨부한�것이다.

=====1:39� �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 � � � � � � � � � � � � ,� 에르코마이)의� 현재� � 명령형

과'보다'(*� � � � ,�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 � � � � � )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

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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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 표현형식으로서,� � '랍비여� �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

습과�그들을�초청하시는예수의�모습을�생생하게�보여주고� 있다.� � � 저희가�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명령형과�미래중간태� � 직설법으로�표현된�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

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 보라'는� �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

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

느� �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관

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

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

실을�나타내려는�저자�요한의�의도에�기인하는�것으로�보인다.� � �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부가적�기록인듯이�보인다.� 그러나�이� 시각이�명시되어�있는�것은� 그� 만남이�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따라�오후� 네� 시라는�견해도� 있으나,�(1)� 본서의�저자가�바로� 현장을�목격한�사도�요한이라는�점과� (2)� 본서가�에베소에서�헬라인들을�

위하여� � 기록된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 사용되

었다는�점등을�고려한다면�로마식�표기법을�따르는�것이더�타당하다.� � 그렇다면 제자들이예수

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

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

적인�날이었다(Westcott).

=====1:40� �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

은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 떠나기� � 전까지였다(1:44;6:8;마

4:18;10:2;막� �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

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 뿐만� 아니

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사도�요한과�함께예수의�첫�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

는�엄연한�역사적�사실을�사도�요한은�소상히�밝히고�있는� 것이다.

=====1:41� � 우리가�메시야를�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 발

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

소� 구성�인원인� 2인을�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람의�동시적�증언(testimony)은 이 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 �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 � � � � � � �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 �

� � � � � � � � � � � � )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 �

� � � � � � � � � � � � � � � � � )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

관점에서� � 보다는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 될� �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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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

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 명백히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

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

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 9:24).� � 그후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 그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

로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 멸망을� 초래

한� 요인이�되었다.� 신약성경은�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설교에서�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 신앙에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

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 빠진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

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

시야�사상의�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예언의�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1:42� � 보시고�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아우토...에이펜'(*� � � ... � )이

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 � � � � � � � � � �

� � � � )의� 부정�과거� 분사로서�예수께서�베드로의�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 �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 '시몬'(Simon)과� � '게바'(Cephas)가� 서

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

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암시한다고�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 � � � � � � � � � � ,� 쉬메온)이라고도� 불

리었다(행� 15:14).� � 그렇다면� �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

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

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 예수는� �

시몬이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 � � � � ,�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

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베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

회를�위한� 사도적인�터전을�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반석� 중의� � 하나가�된� 사실을� 상기케한다.�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

(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

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

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

에게는�예수가�그리스도라는 신앙� � 고백으로 인해� � '베드로'라는� � � 칭호가� � � 공식적으

로� � �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 � 번역하면� -� 헬라어� � '헤르메뉴에타이'(*� � � � � � � � � � � � � � � � � �

� � � )는� �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수동태로서�자세한�것은� 38절�주석을�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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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

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 �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

의� 침투(浸透)가� � 극심한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곳이다.� 따라서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 대상이었다(46절).� � 그

러나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 갈릴리로� 채

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 언급이� � 많다).� 이렇듯� 사

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

약� 예언의�성취라�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

로운�교회� 공동체를�만들고자�하신 예수� � 그리스도의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 16:7,� � 15-20;눅� � 24:44-53;행1:3-14).� � �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

스케이'(*� � � � � � � � � � � � � � � � )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빌립의�만남에� 현장감과�생

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

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

되고� 있다.� � �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부르심이다.� � '좇으라'의� � 헬라어'

아콜루데이'(*� � � � � � � � � � � � � � � � � � )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 '만나'(*� � � � � � � � � � � � � � � ,휴리스케이)

와� '이르시되'(*� � � � � � � � � � ,�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

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

께서�제자들을�모으실�때� 자주�사용되었다는사실은 � � 주목할� � � � 만하다(8:22;9:21;19:21;막

� 1:18;2:14;6:1;10:21, � � � 52;눅5:27;9:59;18:22;요� 21:19).

=====1:44� � 빌립은...벱새다�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 '벱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

서�생략한� 예수의�예루살렘�사역을�강조하고� 있다.� 따라서초대�교회의�성도들은�벱새다라는�지명

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벱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벱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벱새다임을� 암시한다.� � 또한� 안드

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벱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

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벱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 벱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벱새다를�비롯한�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를�많이� 따랐음을�알� 수� 있다.� � 그러나�그들은�일용할� 양식을�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

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벱새다를�위시한�갈릴리� � 사람들에� � 대한� � 예수의� � 저주는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1:45�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 '나다나엘'(*� � � � � � � � � � � � � � � � )이란� '하나님의� 선물'이

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 충실했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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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벱새다에� 있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공

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

유� 명칭이� 아니기�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것과�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명칭의�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 이상의� �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

다.� � �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 하여� 말한

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 열정을� � 잘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 모든� � 말씀을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

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

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 �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 � � � � � � � � � � � � � �

� � � )은� � '휴리스코'(* )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

립의� �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 �

요셉의� 아들� 나사렛�예수� -� 빌립이�만난� 메시야의�인간적인�신분이� 제시된다.� 원래예수의�출생지

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

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 아무런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 성육신하신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

로�결국�나다나엘의�반론을�야기시킨다.

=====1:46�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 � � � � � � � � � � � � � )으

로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

므로�율법주의자의�입장에서�볼때�멸시당해� 마땅한�지역이었다(7:52).그러므로� 본문은�당시� 율법

주의자들이�갈릴리�지방을�조롱할�때� 쓰던� 관용어였을�것으로�추측된다.� � �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 이데'(*� � � � � � � � � � � � � � � � � � � � � � � � )이다.� '에르쿠'는� '오다'라

는� 뜻을�지닌� '에르코마이'(* )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 '호라

오'(*� � � � � � � � � )의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

와� �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 제자를� 랍비에게�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 율법적인� � 논리보다는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실체를�목도(目睹)하여�보라는�말이다.

=====1:47� �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그리스도의�신성이�잘� � 나타난�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 � � � � � � � � ,� 알레도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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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한'(*� � � � � � � � � � �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 반영한

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 고기

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 '간교한'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 나다나엘이� 야곱

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기자는� '마음에간사가�없는'� 자가� 복이�있다고�했다(시� 32:2).

=====1:48�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

과나무� 아래'라는� � 표현은� 공간적� �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번영을� 상징

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특히� 무화과나무는� 무

성한� �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

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

인� 측면� 뿐만� 아니라�주목하고� 있었다는�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용어이다.� � 이는�예수께서�이미�나다나엘을�당신의�제자로�지목하였다는�뜻이다.

=====1:49�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 � � � � � � � � � � � � � � � )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힘에� 이끌리

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

고� 말았다.� � �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 �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

나엘은� 이� 고백� 속에� � 담긴� � 진의를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

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

란� �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네서는� 십자가에� � 달리신� � 예수를조

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 그리고본서� 12:13

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인식되었으며(삿� *:22,� 23;시� 84:3)� �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대리(代理)하실� 왕적�메시야에�대한�기대가�두루� 퍼져있었다.

=====1:50�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 나다나

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동안� 수많은�이적과�권능들을�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메시야되심을�입증하셨다.

=====1:51� � 진실로�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

는� �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

실로�진실로'라는� 표현으로�사용되었다(3:3-5;5:24,� 25;6:47).�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강조

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 �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 순간이라도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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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

수�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 인간

의�관계가�온전히�회복된�것이다.� 이런� 맥락에서�우리는� '하늘이� � 열리고'라는� � 말을,예수�그리스

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그� 나라를� 소유하게되

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 �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

'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

이� 상징하듯,� �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 '인자칭

호에�관하여'를� 참조하라.� � � � � 요한복음�제� 2장

=====2:1� � �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_� � "사

흘� 되던� 날"� 이것은,� 1:43에�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지� 기

록한� 것은,� 그�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레스틴에는� 이�

밖에� 또� 다른� "가나"� 란�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란� 말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은� � 기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그�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일� 것을� 표상(表象)한다.

=====2:2�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를� � 가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 전하셨다.� 이것은�

그의�겸손인�동시에�그의� 긍휼이다.� 성결은�격리(隔離)가� 아니다(Sanctity� is� not� singularity).

=====2:3�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

니� -� 당시에� "포도주"는�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 과즙으로� 된� 음료가� 필요

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 없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

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마리아로서�그에게서�이적을�기대할�만�하였다.

=====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

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 이것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니다(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

야의�공적� 역사(公的役事)에� 있어서는,� 하나님의�뜻만이�주장하고�혈통적�모친� 된� 권세가�간섭할�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 예수님의� � 모친도� 하난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

데(Grosheide)는�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부르실�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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涯)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의� 하실� 바�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 그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 것이었다"라고� � 하였다(Het� � Heilige� �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런� � 표

현은� � 구약에도� � 많은데(삿� � 11:12;� � 삼하� 16:10;� 왕상� 17:18;� 왕하� 3:13),� 반드시� 냉정한� 어

투는� 아니다.� 이� 말씀은,� �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 도울� � 중보자

(中保者)가� � 없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내� 때"란� 말은� �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7:30,� 8:20,� 13:1,� 17:1).�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 것은,그�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 아니고,� �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에� 대하여� 고데이� (Godet)는� 해석하기를,� 그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는� 예루살렘

에서야�될� 일이고� 가나에서�될� 일이� 아니라는� � 의미라고� � 한다.� 그러나�그것은� 잘못된�해석이다.�

그가�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 메시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

는가?� 11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 � 이른바,� "내� 때"는�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 중보� �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 하나님� �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절대�완전하신�순종이다.

=====2:5�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 하니

라� -� 이것을� 보면,� 그�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 예수님께서� � 하나님� 아버지에

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그� 모친에게� 알려졌다.� � 예수님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

여금�일하시게�하는�비결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이적보다�낫다"고� 하였다.

=====2:6<기적에�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항아리>� �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 드

는� 돌� 항아리�여섯이�놓였는지라� -� 유대인의�가정에는,� 연회할�때에� 물을� 많이� � 사용하기�위하여�

돌�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것은,� 주로� 식사� � 전후에� 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 그� 풍

속은�성경이� 제정한�것이므로,� 진정한�종교적� � 의의와� 효과를�가진� 것은� 아니었다.� � 예수님은� 이

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 � 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 기독교를� 상징함)로� 변화시켰

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 � "두� 세� 통� 드는� 항아리"의� 용량(用量)은,�약�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큰� 항아리가�여섯이나�놓여�있었다.� �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

그의�이적의�놀라운�사실을�지적하려는�까닭이다.

=====2:7,8�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

는� 떠서� 연회장에게�갖다�주라� 하시매�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이제는� 떠서

"라는� 말을,� 샘물에서� � "물을� 길어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Westcott),확실치� 않다.� "연

회장"은,� 그� 때� 풍속에� � 연회의� 손님들� 중�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바� 없고,� 다만� 고요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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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기적이�나타났다.

=====2:9� � 연회장은� 물로� 된� � 포도주를� 맛보고�어디서�났는지� 알지� 못하되� �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

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4절),� 침묵하며� 순종한�후� 하인들더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5절).�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다.� 무조건� 순종은� � 하나님

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의�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 무

슨� 일을� 지정해�드리지�아니하고,� 자신을� � 그리스도에게�복속시킨다(Wahrer� � Glaube� � schreibt�

Christus� � nicht� �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 � (2)� 변화의� 원리(6-9).결례의� �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변화된� � 것은,� 예

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

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

다.� 1733년부터�선교사들이� 5년� �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인상도� 받지� � 못하던�

에스키모족� � 중에서도� � 마침내� 그리스도를� � 믿는� � 자들이� 생겼다.� � 루터(Luther)는,� 하나님의� 말

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Evangelien�

Auslegung,� � 4,P.98).� 그리스도의�구원�운동은�죄인들을�변화시키는�운동이다.

=====2:10� �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이� 세상보다� 선미(善美)한�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좋은� 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는� 취할� 수�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술� 인� 것인� 만큼� 취하

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수� 있다.(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

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 않은,� �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없다.� 설혹� � 예수님께서�만드신� 술은� 취할� 수� 있는� 성질을�가졌다�할지라도,그것을� 절

제� 있게� 마시는� � 사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의� 덕을� 가르친다(갈�

5:23).� 금주(禁酒)를� 규칙으로� 가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이적이� 문제될� 것� � 없다.� 한국인의�특수한�사정(술� 취하기�잘� 하는� 한국인)으로�보아,� 금주는� � 당연한� �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가르친� "절제"를� 위한�것이다.

=====2:11� � � 예수께서�이� 처음� 표적을�갈릴리�가나에서�행하여�그� 영광을�나타내시매� � 제자들

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 � � � � � � � � � � � � � )이란� 말은� 예수님을� � 메시야로� � 알리는� 신령

한� 증표라는� 뜻이다.�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 권능을� 나타내셨다

는�의미이다.

=====2:12� �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 여

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공중� 성역(公衆聖役)에� 헌신하시기�때문에�가정에서�지체하시지�않게�되는� 사실을�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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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이� 귀절부

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

여준다.� 성전� 청결� 사건은�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이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Das� Evangelium� fur� die� Priester)이라고� 하였

다(Der� Evangelist� Johannes,� P.74).� � � 여기� "유월절"이란� 말에� "유대인의"란� 설명을� 붙인� 것

은,� 사도� 요한의�상대한�독자들이�이방인들이었기�때문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모세의�인도

로� 애굽에서� 나온� 구원을� 기념하면서� 지킨� 것이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다가� 해방될� 임

시에,� 애굽의� 장자를�죽이는� 여호와의�형벌이� 내렸다.� 그� 때에� 이스라엘�집만을� 그� 재앙에� � 들지�

않게� 하려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다(출�

12:12-20,� 13:2,� 12).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

어서�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다.� �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

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이다(신� � 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신�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복음을� � 증거하시려는�것이었다.

=====2:14� �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 보

시고� -�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리를� � 위하여� � 고요히� 예배� 드릴� 장소

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

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 취하는� �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 가지고� �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

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

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다(사� 56:7;� 렘�

7:11).

=====2:15�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

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이� 말씀을� 보면,� 이� 때에� � 예수님의� � 의분(義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찾기� 어려웠을�것이

다.

=====2:16� �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드러난다.�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

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다.� � � � "내� 아버

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

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않아야�할� 것을� 가리키신�것이다.� 공관� 복음에서�취급된�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

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이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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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씀에는�성전�안에서�그런� � 영업을�할� 수� 없다는�뜻이� 포함되어�있다.

=====2:17�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 기억하

더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인데,�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

을� 가리킨�말씀이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성전� 청결의� � 날카로운�행사를�보고� 그

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

님의�교회를�위하여�핍박을�받아� 죽으실�수�밖에� 없었다.

=====2:18,19�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 동안에� 일

으키리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

한� 일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이다.� � 그러므로� �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이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

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다(마� 26:61).�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다(20

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때에� 믿음이�굳세어지는�법이다.

=====2:20� �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 일

으키겠느뇨�하더라� -� 요세보�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성전건축은�주전� 20년에�시작하였다고�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

(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 되었다.� � 영적(靈的)으로� 어두운자들은� 언제든지�하나님의�말씀을�피상적으로�해석하다가�저렇게�오해한다.

=====2:21� �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 � 성전

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다.� � 신약에는� 교회

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

시� 살아나실�것을�예언하셨다는�것이다.

=====2:22�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하신� 말씀을�믿었더라� -�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말은,� 구약에�있는� 부활� 예언을�가리

킨다.� 예를� 들면,� 시� 16:10� 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

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

험과�체험을�경유하기�전에는�깨닫기�어려운�까닭이다.

=====2:23� �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이다.� � 그러나� 기적보다�하나님�자신�때문에�생긴�믿음은�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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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5� �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

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

이니라� -�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

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밝히� 아시는� �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다.� 오늘날� �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된다(요일�

4:1).�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 없는� �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이다.� 그�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되

고� � 심히� 부패한�것은� 마음"이기�때문이다(렘� 17:9)� � � � � 요한복음�제� 3장

=====3:1� �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

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 70년� �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

고� 있었는데� �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

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 백� �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

다.(2)� 엄격한� 유대교를� � 신봉(信奉)하는� �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하나님의� 백성되는�자격이�아브라함을�통해� 계승되는�자연적,� 육적� 출생에�있음을�강조한

데� 반해,� 예수는� 영적� �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 �

� � � � � � � )은� �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사제들과�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

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

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

다.� 율법� 학자가�된� 사람은� 종교법과�의식(儀式)의� 문제들에�대해�독자적임�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

관들과� 함께� 판결을� � 내리거나� �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내릴� 수� � 있었고� � 또한� � 랍비라

는� � 칭호를� � 가질� � 수� � 있었다(Jeremias).

=====3:2� �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

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

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

신� 예수에게로� � 나아온� � 셈이다(the� Anchor� Bible).� � � 랍비여� -� 니고데모는�안드레와�요한�그리

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

(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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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 비

로소� �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독자적인�판결을�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 '랍비'가� �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 행사할� 수� 없었다

(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의해서� �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

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예수를� � '랍비'라고� � 부른� 것은� 유대의�상층� 계급에�속한� 사람으로는�처음�있었

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

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 � � 하나님께로

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받은�모세,� 예레미야,� 세례� �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중의� 한� 사람으

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

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일이� � 니고데모의� 방문의�주목적이었는지도�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 � � � � � � � � � � � � � � )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 보여주는�

이적을�가리킨다.� 따라서�이� 표적은�그것을�목격한�자의� 주의(注意)를� 그� � 행위� � 자체� 보다는�그�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 교훈� �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

러나�그는� 여전히�예수의�교훈보다는�표적� � 자체에�더� 큰� 관심을�드러내고�있었다.

=====3:3� �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 � � � � � � � � � � )은� � (1)'처음

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

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개종하면�그를�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

인간의� � 노력에� �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 본성이� �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

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

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근본적이며� 전인적인�변화를�의미하는� 것이라�하겠다.� 그리고�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것이�아니라�죽은� 자가�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 � �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

라어� 동사� '에이돈'('� � � � � � � )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 � � � � � � �

)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

미한다.� 따라서�본� 구절은�하나님�나라에�참예하는�것을�뜻한다(눅� 9:27).�

=====3:4� � 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 말씀에� �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 의도는� 없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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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

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

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말씀의�뜻을� 제대로�파악하지�못한�채� 깊은� 의문에�휩싸였던�것이다.

=====3:5� �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

를� '세례� 요한의�세례'� 혹은� '기독교의�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 하고� �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출

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

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 마� �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

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수� 없었으며,� � 엣세네파(Essenes)에서도�개종자를�받아들일�경우�물세례를�행하던�관습이� �

있었다.� �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

기�전에� 이미� 성령의�선물을�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내시도�또한� � 그러했던�것으

로� 추측해�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 본절의�의미에는� 큰� 변화

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뿅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

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

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

도와의� 연합� 곧� 성령� �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상징적�의식으로서의�의의를�지님을�가르치는�것이다.

=====3:6� � 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 � � � � )�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

서는� �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

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 보다� �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

체적)을� 구분한�것으로�이해된다.

=====3:7�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 � � � � � � � � � � )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

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방법이�과연� 가능한가� � 하는� � 의혹(疑惑)에� 잠겼을�것으로�보인다.

=====3:8� �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 � � � � � )와� 이에�대한� 헬라어� '프뉴마'('� � � � � � � � � )는� 둘� 다� '바람'을� � 의미할� 수도� 있다.� �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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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 뜻으로� � 사용되고� '바람'이라는�의미로는�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 :� 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

에� � 보이지� � 않지만� 소리를� 통해� �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

해� 인식되어질� 수� � 있다.� �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 바와� � 같은� �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과학을� 총동원�해도� 바람이�어디서� 생겨나�어디로�향하는지를�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

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

을�알� 따름이다.

=====3:9� 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한�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

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상태에서�그� 방법을�보다� � 구체적으로� �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던지고� 있

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 중생의� �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

나의� 고정� �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 교훈

을�지극히�생소하다고�여긴�것이다.

=====3:10�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

시� 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 이스라엘의� 지도

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 없지만� � 헬라어� 본문에� '호'(� �

)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

(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 산헤드린의� �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직책을� 가리키는�것은�아닐까� � 라고� 생각한다.� � 아무튼�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

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 선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때문이다.�

=====3:11� 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 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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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yer)는,� � 주님께서� � 단순히� � 자기� � 자신만을� � � 가리켜� � � '권위의� � �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 (2)� �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

(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 전체'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

(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

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 � � 아는� 것...본� 것� -� 니

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 알지� �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

다.� � � � 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이르지�못한� 무지한�유대인들을�가리킨다.� � � � 증거를�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

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 유대� �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

터� � 어두움은� � 빛을� � 깨닫지� � 못했던� � 것이다(1� :� 5).� 여기서� �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

침이� 단순한� �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

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수� 있는� 비밀에�속한� 것이라�하겠다.

=====3:12� � 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 의

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 '하늘의� 일'이

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 '땅의� 일'이란� 니고데

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

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 육신이� �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의미한다고�보는�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으로� 이해� 하기도�한다.� 즉,� 예수께서�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

해� �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 것이�

자명하다는�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견해가�무난하리라�짐작된다.

=====3:13� � 하늘에� 올라간� 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아나베베켄�에이스톤�우라논)� -� 직역하면�이�말은� '하늘에�계신� 자'란�뜻이다.� � 그리고�여기� 사용

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 이� �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 :� 9-11)가� 승천(昇天)� 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 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 올

가간� �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 계셨던� �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인간� 구원과�새창조롤�위해�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예수는�일체의�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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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유한한�이성(理性)으로서는�도무지�설명할�길�없는� � 비밀이다.

=====3:14� � 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 사업� �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 하나님과� 모

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

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 될� �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 것이� �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

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

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 쳐다봄으로

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

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 � � � � � � � � � )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

가에� �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 속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을�가리킨다.�

=====3:15�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 십자가� 희생의� �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 구원

론� (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 요한이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 대한� 믿음이� 지적� 되

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

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 � � � � � � � � � � � � )은� 현재� 분사형으로

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함을� 강조한다.� � � 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 '올� �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하나

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 복

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

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

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

어진다(14:3).

=====3:16슨?�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한다.� �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 �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 '코스모스'('� � � � � � � � � � � � � � �

� )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하나님

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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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 이는� 곧� 복음의� � 보

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

지의� 사랑이� �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 � � � � � � � � � )는� � 요

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인생의� 연약함과�죄성을�끝없이�감싸� 안으신다고�하는�뜻을� 내포하고�있다.� 사랑은�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 :� 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 아니라� 자

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

생자'이시다.� �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 해당하는� � 헬라어� '모노게네스'('� � � � � � � � � � � � � � � � � )는� '외아들'이란�뜻�외에� '그� 속성과�성품에�있어서�유일�무이하

신�분'이란� 의미도�내표한다.� 그리고�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 '휘오스'('� � � � � � � � � � )를� 주로� 그

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

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 � � � � � � � � � � )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

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

자가에� �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의미하고�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재물을� 바치

는� � 일을� �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 �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

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

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 택일의� �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 � � � � � � � � � � � )�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

한(10번� � 정도)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 '상실하

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

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

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 때� �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

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 등의� �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

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

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

망을�뜻한다.

=====3:17� �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 � � � � � )

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심판하시는� � 그리스도(5:30;8:16)에� � 관해� 즉,� 그리스도의�말씀

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 그러나� 적어도�예수의� 초림� 목적을�말할진대는� 심판

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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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하는� �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 하셨지만� �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

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 천재� �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

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 � � � � � � � � )는'선과� 악을� � 분별하다'(discriminate),� �

'분리하다'(separate)의� � 의미와� �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

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

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 � � � � � � � � � � � � � � � )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

기� � 속에� �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 그리스도

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

한다.

=====3:18� �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요한은� 세상을�향한� 하나님의�사랑과� � 독

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 불구하고� 예

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

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

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

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 아담의� �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

암아�사람들은� 구원과�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구분되었다.� � � �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

리타이'('� � � � � � � � � � � � )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

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장차� 있을� �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삶(즉�

정죄된�삶)을� � 살아가고� � 있는� 것이다.� 이들은�진리� 안에서�자유하지�못하고�죄에� 얽매여�죄에게�

종노릇을� � 하고� � 있다.

=====3:19�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표현을� 반

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 � �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것� -� 여기� 사용

된� '빛'의� 헬라어� '포스'('� � � � )는� �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

의미하는� � 말로,� �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 빛

'(the� � one� �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 '스코토스'('� �

� � � � � � )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 의미

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

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 있는� 자는� 빛의� � 존재� � 자체를� 인정하려� � 들지� �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 것으로� �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 � � � � � )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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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사용되었기�때문에�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사랑

을� �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 사용되고� � 있음을� � �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 :� 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아니라�하나님과의�단절된�삶을� 사랑했던�사실을�지적하고�있다.

=====3:20� �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 � � � � )가� 사용되었�

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

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 더� �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

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 성향에� � 대해� 도덕적� �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

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

수록�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 �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

코'('� � � � � � � � � � � � )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

'(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회개조차�하지�않으려는�습성이�있음을�나타낸다.

=====3:21� �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 자가� � 아

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 신앙과� 삶

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 여

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

어� 오면� 회개와�전인적�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 이르는�것이다.� � � � �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

이� 프로스�토� 포스'('� � � � � � � � � � � � � � � � � � � � � � � )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3:22� �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 위치에서� � 옮겨

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

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 있기� �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

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

다고�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평야이거나�아니면� 여리고빠�

근접한� 지점일�것으로� 추정된다.� � � �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

다는� 기록은� �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 :� 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

푼� 자는� � 예수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예수께

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 관련하여� �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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練)의� 맥락에서� � 이해된다.� � 이� 제자들은�훗날에�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체험하고�난�후� � 죄사함을�얻게�하는� 세례를�베풀어야�할�것이었다(행� 2:1-4,� 37-41).

=====3:23� �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지� 않

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 '애논'(Aenon)은� '샘'

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 보는� �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

마일�정도� 떨어진�곳에� � 현재� '아이눈'이라고�불리는�곳이� 있는데�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보는�

견해.� 비록� �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 살렘을� 의미하는�것으로� 받아듸여졌었다고�하는� �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 아니라� 완전히� � 사마리아� 지역이라

고� 하는�점에서� 본문과�다소� 거리가�먼� 것으로� 여겨진다.� � 한편� �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확실

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 있게� �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

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

(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

인�의미로써�사용된�것일� 수� � 있다고�믿었다(the� Anchor� Bible).

=====3:24� �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 직접적� 독자

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세례� �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 대해� �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

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 있기� � 때문이라는� � 점� �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 사역

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 등에서� �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 한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

지방에서� � 전도� 사역을�행하셨던�셈이다.

=====3:25� �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 �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 행하는� 세례에� � 관한�

것인지�또는� 요한과�예수가�각자� 따로� 행하는�세례에�관한� 것인지� �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

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 � � � � � � � � � � � � � )가� '세례'와� 동

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 � � � � � � � � )에� 대해� 바

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 분노에� �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

파와� � 엣세네파� �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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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 더� �

확실한�근거를�가질� � 것인가에� � 관한�변론이었을�가능성이�다분하다.

=====3:26� � 함께�요단강�저편에�있던� 자� -� 요한의�제자들이� '예수'라고�하는� 정확한� �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 저편인� 베다니에

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

만�도리어�세례�요한의�명성을�떨어� 뜨리는� � 경쟁자로� � 나선� 것처럼�보였다.� � 따라서�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

수께�대한� 불평과�비난으로�변화되었다.� � � � 곧� 선생님이�증거하시던�자� -� 역시� 예수의�이름을�피

하고�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 � � � � � � � � � � � � � � )는� 현재� 완료로서�과거�

어느� 한� �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

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 왔으나� 그의� �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

긍정적인� 자세를�취하지� 못하고�있었던� 것� 같다.� � �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 � � � � )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

(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 � � � � � � � � � � � � � � )는� 연속적인� � 행

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

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반응을�일으켰다는�사실은�본서에서도�잘� 나타난다(11:48).

=====3:27� �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

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키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

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 � 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

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 명성에� � 대해� �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바로� 하나님께� � 그� 기욍을�두고� 있다는�점을� 역설하고�있다.

=====3:28�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 요한� �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

낸다.� � � �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 뜻을� �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 했던� 알롄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온전히�이해할�수� 있도록�가르쳐�준� � 바� 있다(행� 19:1-7).

=====3:29�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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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

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자신이� 아니라� � 그긔스도가� �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

조하고� 있다(C.K.� Barrett).� � � �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 � � � � � � � �

� )은� 신랑의� � 친구로서,� 신랑과�신부� 사이를�중매하는�역할과�신부를�신랑에게�무사히�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 역할� 까지

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잔치에� 있어서�그� 중매자� �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 :� 2).� 이런� �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 친구로서,� 그� 잔치를�주관하였을�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 신랑의� �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 같은� �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

� �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 � � � � � � � � � � � � � � )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

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또한�그토록�바라던�메시야를�친히� � 목격하고�증거했기�때문이다(A.� M.� Hunter).

=====3:30� � 그는� 흥하여�야...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나오는� 세례� 요한의�마지막� � 진

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 목표를� 내걸고

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 주지시키고� �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 하는� 일에� �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 더욱� �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

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

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 '주의� � 길을�곧게하는�자'� 로서의�생애를�마감하게�된다(막� 1� :� 14� ;� 눅� 3:18-20).

=====3:31� � � 위로부터� 오시는� 이...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 본문은� �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 처음부터� � 끝까지� � 이� � 주제가� 일간되게� � 부각되어� � 있다.� �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

대해서� 이다.� � 세례� 요한이� '여자가� � 낳은� �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 생

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 � 세례� � 요한에� � 의해� � � 사용되곤� � 했다(1:30;마� � 11:3;눅�

7:19).� � 그리고� 위로부터� �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 그리스도를� �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 반면에� � 여기서� '땅'(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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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 '악한� �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

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

� �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 근거하여� �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

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

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올라가신� 이후의�모든� 제자들의�사역도�결코� 예수에�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넘지�

못한다.

=====3:32�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하신� � 말씀과� �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

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

재성과�관련시키며�후자를�공생애�동안의�사역과�관련시킨다.� 그리고�이러한�시제상의�차이로�인

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있다고�하는� � 주장을� � 펴는�사람도�있다.� 그러나�요일� 1� :� 3에는� 보

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 강조되어� �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

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 사실� �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

이나� 하나님이� � 그의� �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

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 포함한다.� � � �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 � � � � � � � � � � � � � � )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

한�자세가�어떠해야�하는�지를�보여준다.

=====3:33� 하나님을...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 때

문에� 그의� 증거를� � 받아들이지� � 않는� � 것은� � 하나님을� � 거짓말장이로� � 만드는� � 것이다

(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

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 셈이라는� �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 것은� �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

침(certification)은� 하나님�자신을�위함이� � 아니라� � 인간의� � 구원을�위한� 것이라�하겠다.� '인치다

'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 � � � � � � � � � � )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 ��

=====3:34� �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 보는� �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 � � � � � � )은� '계속적인� 수여'

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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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성령� 충만한�은사를� 받을� 수� � 있음은�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그리

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엠� 4� :� 7)라는� 말씀이� �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

으로� 성령을� � 부어주신다고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신성(神性)을� 지니셨고�성령과도�하나이셨던�것이다.

=====3:35� �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 권세를� � 내게� 주셨으

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분임을�의미한다.� 따라서�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관계에�절대적으로� 의존되어�있

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 하나님께� �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

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 진정한� � 한� 인간으로서� �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

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 모범을�보게�된다.

=====3:36� �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 예수를� � 구세주

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 � �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

고� 만물의� � 지배권을� �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

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 있

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 � �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

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 하나님의� 진

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

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

이나�분노를�의미하는�헬라어� '뒤모스'('� � � � � � � � � )와는� 달리,� 과거와�현재와�미래에�있어서�패역

한� � 세대에게� � 내리시는� � 일관된� �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 � � � � � )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 � � � � � )를� 직역하면� '남아�있다'(remain)의� 의미가�된다.� 따라서�이는�

하나님의� �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 하나님은� � 그들을� 악의� 세력� 속

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 � � � � � � � � � 요한복음�제� 4장

=====4:1,2� �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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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남들과�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 그는,� 종종� 바리새

교인들과� 변론� 하신� 일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그들과� 충돌하기를� � 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따르는� 사람들이�많아진�때에� 시기심을�발하였다.� 예수님께서�실상�세례를� 베푸신�일은�

없었으나� 소문이� 잘못� 퍼져서� 그가�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선전되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사실대로�믿는�것보다�뜬� 소문을�얼른� 청취하여�쉬이�전한다.� � �

=====4:3,4�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 유대에

서� 갈릴로� 가는� 길은,� 일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베뢰아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 � 이유는,�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할� 필요를�느끼셔서�그곳을�직접� 통과하시게�되었다.

====4:5�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 준� � 땅이�

가깝고� -� "수가"라는� 곳은� 세겜을� 가리킨다고� 하나,� � 유세비우스(Eusebius)이래로� � 이� 두� 지방은�

각각� 다른� 곳으로� 생각되어� 왔다.� "수가"는� 오늘날의� 아스카(Askar)라는� 지방이었을� 것이다.� "야

곱이�그�아들� 요셉에게�준� 땅."� 수� 24:32;� 창� 33:19� 참조.

=====4:6� �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제� 육시쯤�되었더라� -� 여기� 이른바,� "그대로"란� 말은� 피곤한� 태도를� � 숨김� � 없이� 그대로�나

타내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그대로� 나타내신� � 태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5).� "제� 육시"는� 유대시간으로� 말한� 것인데� 우리� 시간으로는�정오를�가리킨다.

=======4:7� �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예수

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동기는,� 그� 자신의� 갈증을� 멈추시기� � 위함보다�

그� 여인의� 영적� 요구를� 채워�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청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청구는,� 언제든지�우리를�유익하게�해� 주시기�위한� 동기에서� � 일어나는�것이다.�

=====4:8�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

자에게� 물을� 청하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면�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

여�물을�공급하였을�것이다.�

=====4:9� �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

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알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그의� 옷을� 보고� 알았는지,� 혹은� 그의� 말을� 듣고� 알

았는지� 우리는� 추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예수님은� � 일반� � 유대인과는� 달리� 민족� 차별의� 기분이

나� 감정을� 전연� 가지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자로서도� 놀랄� �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른� 민족을�

형제시하심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 일찍부터� 이스라엘� 민족더러� 그들� 중에서� 거주하

는�이방인들을�동포와�같이�대우하라고�하셨다(레� 19:34).�

======4:10� � �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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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을� 가리키고,�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란� 말은� 메시야를�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 샘에서� 솟아는� "생수"로써� 성령

을�비유하셨다.�

=====4:11� �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靈的)으로� 알아� 듣지� 못하고� 오해하였다.� 곧,�물� 길을� 그릇도� 없고� 그� 우물은� 깊은데� 거기서� 생수를� 길어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어디� 다른�

우물에서� 길어� 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실상� 그� 지방에는�다른�우물이� 없었다.� 옛날에� 야곱도�

그� 우물을�사용했던�것이다.� �

=====4:12� � 당신이�야곱보다�더�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다고�하니,� � 그� � 여자는,�

야곱보다� 위대한� 자가� 아니고는� 그런� 더� 좋은� 물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생수"란�것을� 이� 세상의�음료수로�아는�착각에서�한� 말이다.�

=====4:13,14�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 내가� �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 속에서� � 영생하도록� 솟

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예수님은,� 여기� 물질적� 생수와� 영적� 생수와의� 구분을� � 말씀하신다.� "내

가� 주는� 물을� 먹는� 자"란� 말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을� 다� � 함께� � 가리킨� 것이니,� 기독교� 구원

의� 보편성,� 곧,�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 "목마르지� � 아니하리니"란� 말은� 영적� 기갈이� 없다는� 뜻이

다.� � 성경은� � 하나님과� � 성령님을� � 생수로� � 비유한다(사� 58:11).� "솟아난다"는� 말은� 그� 영적� 생

명이�무궁� 무진할�것을� 가리킨다.�

====4:15� �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 오

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 여자는� 또� 다시�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늘� 갈증� 없이� 생(生)의� 욕망을� � 채우고자� 하며,� 또한�물� 길러� 다니는� 수고도� 면하려� 한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의� � 욕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인간은�언제나�영적�요구를�채우려�함보다�육적� 요구를�채우려�하는데�급급하다.�

=====4:16� �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고데이(Godet)는� �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

는� 그� 여자의� 주인공� 없는� 환경에서� 중대한� 생명� 문제� 있는� 말씀을� 주시기� 원하지� 않으셨기� 때

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만� 여자에게� 전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취하므

로(불법하게라도)� 이세상� 만족을� 찾았다.� 심지어� 방금� 예수님의� 전도를� 듣는� 중에� 생수란� 것도�

이� 세상�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 먼저� 그릇된� 인생관이� 깨어져야한다.� 그� 여자의�

생활은�개편되어야� 한다.� 그� 뒤에야� � 진정한�생수를�받을� 만한� 준비가�성립된다.� 생수� 곧� 복음이

라는� 보화는� � 우리에게� � 있는� 것을� 다� 팔아서야� 사는� 법이다(마� 13:45-46).�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 육

은� � 무익하다"(6:63).� 사마리아� 여자의� 육적사상은� 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 � 남

편을�부러� 오라"고�하셨다.� 이� 말씀은�그� 여자의�육적� 심리에�대한� 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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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18� � 여자가�대답하여�가로되�나는� 남편이�없나이다�예수께서�가라사대�네가�남편이� �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그� 여자는� 한� 남편을� 사귄�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나� 사귀었던� �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그� 여자의� � 생활상을� � 지적하시면서� 그� 가슴을� 뜨끔하게� 하였

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다섯� 남편이란� 것을� �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한다.� 곧,� � 사마리아� � 지방에는,� � 바벧론,� � 구다(Cuthah),� � 아와(Auva),하맛(Hamath),� 스발와임(Sepharvaim)등� 다섯�

나라� 사람들을� 식민하였는데(왕하� 17:24),� 그� 다섯� 나라에서� 들어온� 이방� 신(異邦神)이� 역시� 다섯이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은�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있

는"� 남편은,� 이교� � 사상(異敎思想)과� 혼합하여�여호와�하나님을�잘못�섬기는�그들의�종합� 종교를�가리킨다고� � 한다.� 이� 해석은� 너무� 상상적이다.� 차라리� 여기� 이른� 바� "남편"들은,� 그� 여자의� � 생

활에�여러번�개가(改嫁)하게�된�것을� 지적하시는�말씀으로�생각된다.�

=====4:19�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

지식에� 놀라� 이제� 겨우�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여자는� 중심에� � 있어서� � 이제부터� 종교적

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초자연(하나님)을� 접촉하기� 전에는� 진정한� � 종교심과� 영적� 사색

을�가져보지�못한다.� 그� 여자는�이제부터�정상적으로�예수님에게� � 돌아오기�시작한다.� �

=====4:20,21� � 우리�조상들은�이�산에서�예배하였는데�당신들의�말은�예배할�곳이� 예루살렘에� �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 예루살렘에서도� 말

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 예배하여야� 할� 것을� 본

래부터� 주장하여왔다(신� 12:5,� 16:2,� 26:2).� 사마리아� 사람들은� � 게르심산에서� 예배하여야� 정당

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바벧론� �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

전을� 게르심산에� 세웠다(400� B.C).� 그� 뒤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미워하였다.� � � 그� 여자

의�의문에�대하여,� 예수님은�신약적�예배를�보여� 주시므로�문제�해결을� � 주신다.� 곧,� 이제부터는,�

게르심산이니� 예루살렘이니� 할� 것� 없고,� 오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영적� 예배를�

드릴�때가� 왔다는�것이다.� "아버지께� � 예배할� � 때"란� 말은� 이� 부분에�있어서�커다란�의미를�가진

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약적�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는� 예배는�

어떤� 장소의� 제재를� 받는� � 외부적� 예배가� 아니고,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의

식(意識)하고� 부르면서�드리는�영적� 예배이다.�

=====4:22�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

대인게서� 남이니라� -�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5경만� 믿고� 다른� 선지서들을� 버렸으니� � 만큼,� 하

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 유대인들은� � 구약을� 전부� 가졌으니�

만큼,� 진정한� 종교를� 받았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보수하였고� 메시야(그리스도)도�그들� 중에서�나오실�것인�만큼,� "구원이� � 유대인에게서�난다"고� 말씀하시게�되었다.�

=====4:23�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 이때

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 "아버지께� 예배

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

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 남은� �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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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거듭�난�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 그가� � 성경� 말씀을�듣기�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

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 �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사건(예수� �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 것이� � 아니

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 � � � � � � � � � � � � �)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

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 밖에� �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 "믿음이� �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자기를�찾는�자들에게�상�주시는�이심을�믿어야�할�지니라"고�하였다.�

=====4:25�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 오

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이�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대망하였던� 것이� 분명하

다.� 아마도� 신� 18:15-18에� 있는� 모세의� 예언에�기준하여,� 사마리아인들도� � 메시야를�대망하였을�

것이다.� 그들은�모세� 5경만을�성경으로�가지고�있었던�것이다.

=====4: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는,� 그� � 여자

의� 심리가� 이제� 진정한� 종교로�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메시야인신�

것을� 알려� 주신다.� 이� 부분(1-26)의� 의미를� 좀� 더� 명백히� 알기� 위하여� 앞에� 있는� 강해를� 자세히�

읽음이�좋다.�

=====4:27�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

무엇을�구하시나이까�어찌하여�저와�말씀하시나이까�묻는�이가� 없더라� -� "제자들이�돌아왔다"� 함

은,�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동네에� 들어갔다� 온� 것을� 말함이다(8절).� � 유대� 랍비들의� 예법대

로는,� 유대� 남자가� 거리에서� 여자로� 더불어�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못했다

고� 한다.� 이런� 사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

심이� 이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에�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하시는�일에는�반드시� � 이유가�있을� 것이라고�믿었기�때문에�질문하지�않았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그때의� � 물동이

는� 상당히�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것을�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 � 여자는�그처

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중하였다.� 그는� 급히� 동네에� � 들어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것이다.�

=====4:29� �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알아� 맞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 때문에� � 그를� � 믿었다.� 그

는� 이제�그�사실에�대하여�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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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34�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 -� 제자들은� 육신의�양식만을�양식으로�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참된� 양식

이라고� 생각하셨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 구속사업을� 완성하심이다.� � � 슐라

텔(Schlatter)은� 이� 귀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근거가�되며,� 그의� 능력의�원천이�된다"라고�하였다(Dieses� Einssein� mit�

dem� gottlichen� Willen,� das� ihn� dem� gottlichen� � Wirken� dienstbar� macht,� ist� der�

Grund� seines� Lebens� und� � der� � Quell� � seiner� � Kraft.-Der� Evangelist� Johannes,� P.130).�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수한� � 의미로� �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신자도� 하

나님의� 일을� 하므로� 하늘의� 생명력을� 받는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이런� 귀한� � 은혜를�주신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이룰�하나님의�일은�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같이� 설명할�수� 있다.� 곧,� 우리가�예수� 그리스도를�믿는�것이� 무엇보다�중요한� � 일이� � 된

다는�것이다.� 요� 6: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보내신자를�믿는�것이� 하나님의� � 일이니라"고� 하였

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하다(엡� 2:8;� 벧전� 1:7).�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

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딤전� 6: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으며,�

히� 12:4에는� 말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 하였다.� � � 그리고� 신자는� 믿음으로� 남

들을�위하여�행해야�될� 선한� 일들도�책임� 지고� 있다.� 행함이�없는� 믿음은�실상� 죽은� 믿음이다(약�

2:17,26).� 엡� 2:10에� 말하기를,� "우리는� �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

하여�지으심을�받은�자니"라고� � 하였다.�

=====4:35� �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 이

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넉달이� 지나야� � 추수할� � 때가� 이르겠

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속담으로서,� 사람들이� 추수� 때를� 고대한다는� 의미이다.� 그

러면,� 이� 귀절의� 뜻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일에� 대하여는� � 미리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

적� 추수에� 대하여는� 등한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적� � 추수의� 때는� 그때에� 임박하였으니� 만큼,�

예수님은� 화급히� 일하셔야� 될� 것을� 느끼고� 일하셨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영적�

추수를� 염두에� 두고� � 하신� � 말씀이다.� 영적� 추수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 두었던� 진리가�

이제� 예수님의� 역사로� � 말미암아� 성취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성취된� 진리,� 곧,� 복음을� 전하여� 사

람들을�교회로�모으는�영적�추수이다.�

=====4:36�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삯도� 받고"란� 말씀은� 그� 아래� 말씀이� 해설한다.�

곧,� "삯"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받음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복음을� 전

하여�사람들로�하여금�믿게� 하여� 영생에�들어가도록�인도함이다.� 믿음에�순종하여�돌아오는�자들

은� 그� 전도자에게� 상급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 복음으로� 돌아온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

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빌� 4:1),� "

우리의�소망이나�기쁨이나�자랑의� � 면류관"이라고�하였다(살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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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 � 그런즉�한� 사람이�심고� 다른� 사람이�거둔다�하는� 말이� 옳도다� -� � 심은자는� � 수고

할� 뿐이고� 거두지는�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수고에� 해당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이�거둔다"함은�제자들의�수고에�해당된다.�

=====4:38� � 이� 귀절에�대하여는,� 37절�해석을�참조하여라.�

=====4:39� �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여기� 말한대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은� � 예수님의� 선지자

적� 역사(役事)때문에� 생겼다.� 예수님께서�사마리아�여인의� 과거� 역사를� � 누구에게� 물어보신�일도�없이�아신� 것은� (16-18),� 그들을�놀라게�하였다.�

=====4:40� �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

시매� -� 이것은,� 마치�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바울에게� 한� 말과� 같다.� 그� � 여자는� � 말하기를,"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하였다(행� � 16:14-15).� 전도자를� 귀하게�

아는�그들� 자신도�귀하다.�

=====4:41� �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그들의� 믿음은� 점점� 높은� 수준에� �

도달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친히� 예수님� 자신을� 보았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예수님을�가리켜� "세상의�구주"라고�한� 것도� (42절)� 퍽� 자라난�믿음으로�한� 말이다.�

=====4:42� �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 이것은,� � 남들의� � 증거에� 의뢰함

보다� 자기들이� 친히� 예수님을� 듣고� 본� 사실에� 근거한� 신앙을� 말함이다.� � 예수님의� 교훈은� 서기

관의� 그것과� 달라서�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 말씀을� 들을� 때에� 신앙을� 얻는

다.� � � �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 그리스도로� �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

라는� 약속)을�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다(Godet).�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세상의�구주(사마리아�사람들에게도�구주)이신�사실을�가르치셨다.�

====4:43� �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로� 가시며� -� "이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

아에서� 역사하신� 기간을� 말한다(40절).�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사마리

아에서�역사하신�것은,� 하나의�도중� 행사였다.� 그런데도�불구하고� � 그� � 일에� 이틀을� 잡으신�것을�

보아,� 사마리아�사람들의�회개하는�열심이�많았던�것을�알�수� � 있다.�

====4:44� �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 이� �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가시는� 동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는� 대접을� �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 왜� 그리로� 가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다.� (1)� � 고향이란� �

말은� � 유대를� � 가리켰거나(Keil),예루살렘을� � 가리켰다고� � 한다(Hoskyns).� 그렇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유대나�예루살렘에서는�환영을�받지� 못할� 줄� 아시고�갈릴리로�가신다는�뜻이겠

다.� (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 가심은� �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다.�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고,� �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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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Lagrange).� (3)� �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그는� 이제� 사마리아�전도에�성공하셨음에도�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환영�받

지� 못할� � 줄� 아시면서도� � 초지(初志)대로� � 관철하시기� � 위하여� � 그리로� � 가신다는� � 의미라고� �한다(Grosheide).�

====4:45�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

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

님의� 하신� 일(권능� 있는� 일)을� 본� 까닭이었다.� 그것은� � 사마리아� �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 믿었다(41절).� �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믿는� 것은� 더욱�아름다운�신앙이다.�

====4:46� �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왕의� 신하"는� 헤롯� � 안디

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 "그�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에� � 관사(冠詞)가� 있음을� 보아� "외아들"을� 의미한다(Grosheide).�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 애굽으로� 갈� 때에� 지나

게�되는�도시로서�거기�관리들과�세리들이�많이�거주하였다고�한다.�

====4:47� �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 아들

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

히� 예수님을�찾아�온�것을� 보니,� 예수님께�대한� 그의� 존경이�컸다.�

====4:48� �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 아니하리라� �

-�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저�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

짖으신다.� 예수님의�말씀(하나님의�말씀)에�근거하여�그의�인격을�믿는� 것이� 건전한�신앙이다.�

=====4:49� � � 신하가�가로되�주여�내� 아이가�죽기� 전에�내려� 오소서� -� 왕의�신하의�신앙은� � 저

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재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못�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취급하신다.�

=====4:50� �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 하신� � 말

씀을�믿고� 가더니� -� 예수님은,� 그�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아

무�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마디� � 말씀만� 하시므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 여기� � "살았다"란� 말의� 헬라� 원어(*� � �

� )는� 현재동사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 현재에� �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 � �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 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

는� 말이� 요한� 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예외의� 의미

(곧,� 육신적� 생명의� 뜻)를� 가진다는� �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

계된� 것이다.� � 그러나� �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 만큼,� �

그것이� � 도외시(度外視)될것은� 아니다.� 나사로를�다시� 살리신�일도� 육신적� 생명과�관계된�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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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 예수님은�그것으로써� � 영생에� � 관한� � 설교(11:25-26)의� � 기회를� � 삼으신� � 것이다.� � 스밀데

(E.Smilde)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곧,� 4:46-53의� � 말씀은,� 5장에� 있

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 복음에� �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

단이다.� 요한� 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귀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 않다"라고� � 하였다(Leven� � in� � de� �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 � 왕의� 신하

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부딪혀�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 과연� �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

씀은� 그�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 주셨으니,� �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병(불신앙� 병)을� 고

치시는�것을�위주한다.�

=====4:51,52�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 낫기� �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이� 말씀은,� 왕의� �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

고해� 보므로� 그�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시간과� � 일치한�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 신앙은� 한층� 더� 굳세어졌다.� "제�

칠� 시"는�우리� 시간으로�오후�한� 시� 경이다.�

=====4:53� � �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 온� �

집이� 다� 믿으니라� -� 아비가�예수님을�믿음에�따라� 그의� 온� 가족이�믿음은,� 계약� � 원리(契約原理)로� 나타난�하나님의�구원�역사의�실현이다.� 아버지는�하나님� 앞에서�그� 집의� � 대표자인�만큼,� 하

나님은�그를� 통하여�그� 온� 집을� 축복하신다.� 창� 17:7;� 시� 105:8-10� 참조.�

====4:54�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 "표적"

이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2:11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 만드신� 표적으로

써,� 예수님은�자연계의�주님이신�사실을�나타내셨다.� 여기�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거리(距離)를�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거리�관계로�못하시는�법이�없다.� � � � � 요한복음�제5장�

=====5:1� � �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 본다면,� 예수

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

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신� 16:9-12).� 칼빈(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

들에게�생명의� � 말씀을�전하기�원하셨다.

=====5:2<베데스다� 연못>� �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

는데� � 거기� �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

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느�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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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은�현관식으로�지은�시설을�가리킨다.

====5:3,4� �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

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 어떤� 병에� 걸

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 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 사본들(A,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논쟁건이�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아

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Het� � Heilige� �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는,� "이것이� �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 소신(所信)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 of� � John,� P.191).� � �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

을� � 사용한� �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

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 같이� � 말하였

으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 하나님

에게� � 있음을� � 알려주는� � 증표이기도� � � 하다"라고� � �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5:5� �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 유리하며�고생한�사

실(신� 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상징한다고�한다.� 그러나� � 그렇다면,� � 왜� 40년이란�연수를�채

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

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

보다�많으니�그� 치료가�어려울�것이라는�것이� � 암시된다(A.Marack).

=====5:6� �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 절망� 상태

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 곧,� �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 의미에서,� �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

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 만한� �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

에서�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병자를� � 고쳐� 주시고�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어떠

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 생기를� �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

기에�믿음을� 건설하시려고�하신다.� � � 우리가�한� 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그곳에�병자들이� 많았는

데� 하필�그� � 38년� � 앓던� 병자� 한� 사람만�고쳐� 주셨을까�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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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달리�저런� � 놀라운�구원을�받았기�때문이다.

=====5:7� � 병자가�대답하되�주여�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없어� � 내가� �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 예루살렘의� � 인심이� 무정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

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 모르게� �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죽는다.

=====5:8,9� �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 명령하시는� � 말씀은� 동시

에�능력이�되는�법이다.� � � � 그� 사람이�곧� 나아서�자리를�들고�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 말씀의�비상� 능력을�보여� 준다.� 주님의�병� 고치시는�능력의�역사(役事)는� 저렇게�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

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하였다.� 주님께서�병�고치신�날은�안식일이었다.

=====5:10� � � 유대인들이�병� 나은�사람에게�이르되�안식일인데�네가�자리를�들고� 가는� 것이� 옳

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 렘� � 17:21-22).� 그러

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 운반하는� 것까지� 금

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

동을�정죄하는�일에�율법을�오용하였다.

=====5:11� �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한대� -� � 이것은,� � 그

가� 예수님께� 책임을�돌리고�자기는� 발뺌을�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 그가� 예수님

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 것이다.� �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복종할�만하였다.� 9:11;� 행3:9-10� 참조.

=====5:12� �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 그� 때� � 유대인들

이� 강퍅하였던� 것이�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그� 불쌍한�병자의�고침� 받은� 반가운� � 사실을� 묵살시

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

다,� 사람들의�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 9),� � (2)� �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사람을� 헛

되이�정죄하여�죽이는�것을�유쾌하게�여겼던�것이다.

=====5:13� � � 고침을�받은� 사람이�그가� 누구신지�알지�못하니�이는� 거기�사람이�많으므로�예수

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 자리를� � 피하셨다.� 그는� 병� 고쳐� 주

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

을,� 그는� 더욱� 원하신�것이다.

=====5:14� �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그� 고침� 받은� �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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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이제는� 그런� �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

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

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

음에�그가� � 병든� 원인)를� 염두에�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 계속� 범죄� 하던� 것

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 de� � man� � leefde� nu� � in� � zonde,� � had� � zich� � niet� � aan� �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 � 위의� 예수

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다(히� 2:2-3).� � �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

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 하였다(dass� �

man� an� � die� � Genugtuung� � Christi� glauben� �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5:15,16� �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 안

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그� 병�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보고한�것은� 예수님을�배반하는�의미가�아니었을�것이다.� 유대인들이� � 예수님을�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 "핍박하게� �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

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 동사(*� � � � � � � � � � � � � � � )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주셨고,� 그� 자신은�그� 일� 때문에� � 고난을�받으신다.

=====5:17�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

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 결코� 하나님

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이다.�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

님과� 동등되신� � 증표이다.� � 예수님의� � 이� � 변론(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

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 동등이신� �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돌림이다"라고�하였다(Asleep� in� Jesus,� P.55).

=====5:18� �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

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 � "이를�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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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을� 아버지라고�하신것과�하나님께서�이제까지�일하시므로�자기도�일하신다는(하나님과�자기는�동

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 반대한� 셈이다.� � �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 의미에서� �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 아들이시기� �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

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 아들"� � 이라는� 이름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 함께� �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 �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

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

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

서� � 성령을� �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

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요� 1:33-34).� 그� 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

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의� "그가� 그� 보고�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 관한� � 동사는� 완료� 시

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 있는� 그의� 화육� 사실

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 � (2)� 종교� 윤리적� 신자설

(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 복음에�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

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 격(神子格)이�하나님� 아버지에게� � 대한� � 그의� 순종(종교� 윤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0:18,� 12:49,�

14:31,� 15:10).� 그러나� �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

지� 못한다.� 요한� � 복음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 생

활은� �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 격의� 성립� � 원인

은� 아닌� 것이다.� � �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하여� � 역사적� �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 � � � � � � � � � � � � � � � � � )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 을� 보면,�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

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

이� 아니고�우리로서�측량하기�어려운� � 영원(永遠)에� � 속한� 일이다.

=====5:19�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

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바� "본다"는� 말은� � 현재사로서� 부자� 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 되는� �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從屬的意志行爲)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부자(父子)의� 중복(重複)� 행위를�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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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다.

=====5: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 헬라� 원어

로� 필레오� -� (*� � � � � � � � � � )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적� 관계에� 나타

난� 사랑을� 가리킨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 3:17,� 11:27).� � �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 일"이란� 뜻이니,� 38

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 자들을� 부활시키실� 큰� 일을� 가

리킨다.

=====5:21�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 살리

느니라�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 � � � � )이� 있다.� �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 )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

다.� � � �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 귀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 �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자"(*� � � � � � � � � � � � )란� 말,� "일으켜"(*� � � � � � � � � � � � � � )란� 말,� "살리심

"(*� � � � � � � � � � � � � � � � )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 아니라,� 여기� "

일으켜(*� � � � � � � � � � � � � � )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 � � � � � � � � � � � � � � � )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 � 스밀데

(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 운동의� � 일반적� �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

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 부활을� � 가리킨다"고� � 하였다(Leven� � in� �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5:22�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이� 귀

절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 � � � � � )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사람은�그� 본래�정죄된대로�두시는�그의� 행위를�가리킨다.

=====5:23�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곧,� � 아버지를� 공경

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이� 뜻은� 하반절에� � 밝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 � 24-29.�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

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24-25),� (2)� 하나님� 아버지와�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 원리와(26-27),� (3)� � 내세(來世)에� � 신자들에게� � 육체의� � 부활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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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실� � 것을� � 가리킨다(28-29).

=====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는� 영생을�얻었고� 심판에�이르지� 아니하나니�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 "내� �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 듣는� 것을� 말함이� 아

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 말씀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

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 오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

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범신론� � 사상(汎神論思想)이� 가르친�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들음은,� "나� � 보내신� �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 �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 현세에서부

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 부분에서도� � 가르친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5: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 때

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복음

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 그러나� �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 가리킨다고� �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 때라"고� 하신� � 말씀(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

리킨� 것이� 분명하다.� � �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 만데안

(Mandean)� �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 점에� � 있어서,� �

그는� � 오데벌키(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Mandean)�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실제로� � 보

여� �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Ginza� Left� 596,9)라고� 한� 말,� (2)� "생명의� 소리를� �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Ginza� Righe� � 12)라고� 한� 말,� (3)� "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

"(Ginza� Right� 12)고� 한� 말이다.� � �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Mandean)문헌의� 내용은,� 사

도� 요한의� � 사상과� � 아주� 다르다.� (1)�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 인간성을� �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 인물이다(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Mandean)문헌에서는� 성령을� � 가리켜� 흑암의� 신

(神)이라� � 하였고,� � 예수님을� � 가리켜� � 거짓� � 메시야라고� � 하였으니(C.H.� Dodd,The� Fourth�Gospel� 1953,� P.119).�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 섭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Mand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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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 영혼이� �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

활을�구원의�완성으로�본다.� 이렇게�이�둘은� 서로� 다르다.

=====5:26�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

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

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役事)를� �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그것은,� 인류를�구원하시는�생명� � 운동의�근원이다(요� 1:4).�

=====5:27� �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

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빌� 2:7-10).� (2)� 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

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 인자(곧,� �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

을�계시하시어� � 믿는� � 자들에게� � 주신다는� � 뜻이라고� � 한다.(3)� 구속� 사업� 전체를�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것

(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 하나

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 자

정죄(自定罪)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 못하고� � 넘어진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곧,� 그것은� � 그들의� �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 말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 �

� � � � � � � � � � � � � � � � � � � � � � � )란� 말이� � 관사를� �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

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

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이�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란� 말이� �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

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

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 인간성에게� �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절)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 수� � 있다"라고� � 하였다(Het� �

Heilige� � Evangelie� �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

은� 다음과� � 같이� � 해석한다.� 곧,� 이� 부분� 말씀에�하나님의�아들이신�그는� � 생명의� � 창조자이시고

(25절),� � 인자(곧,�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

죄자(곧,� 인간성으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

다.� 그�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대한� 것이다(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간성으로�죽으심에�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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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as� Hauptstuck� des� � Gerichts� �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

�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취하는�것도� 무방할�것이다.�

=====5:28� �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

니� -� 이것은�별세하였던�신자들이,� 주님께서�재림하실�때에�몸으로�부활할�것을�가리킨다.

=====5: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

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 도의적� 선을�

말함이�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포이에-

산테스(*� � � � � � � � � � � � � � � � � � � � )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 완전히� �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

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 원형은� 프라쏘(*� � � � � � � � � � � � )이니,�

상습적으로�행한것,� 혹은� 일생의�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이렇게�쉽고� 상습적이다.�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 �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

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불트만(Bultmann)의� � 이같은�주장은�억측에�불과하다.� � � (1)� 이� 귀절들에�대

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 점에� �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 그것은,� �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 아니라,� �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문맥상으

로도� 본래의� 원본인� � 사실을� �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 연속이라고� � 하였다.� � 그� � 뿐� �

아니라,� �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 권세는,�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 �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

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 뜻은� �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

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

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 알려진

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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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사실이�알려진다.

=====5:30� �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 원대로� �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 이� � 말씀은� 19

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 이유는,� �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

한다"는� 말(*� � � � � � � � � � )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살릴� 자를�살리시는�주권행위를�가리킨다(3:18).

=====5:31�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

들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신다면,� 그들은� �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상�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 당연하다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8: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

든지�자율적(自律的)으로는�그에게�대하여� 증인이�될� 수� 없다.� 그들도�성령을�받아야� 그리스도의�증인이� 될� 수� 있다.� �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

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 복음의� 특색

을� � 나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 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

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 유대인들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 재판정에� �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 Christus� � in� �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5:32� �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의견과� 반대로�알렉산드리아

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 가리킨다고� � 하였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키지� 않고� 세례� � 요한의� 증거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

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 증거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 in� � het� � nieuwe� Testament,� p.� 162).�

=====5:33� �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 유대인

들이� 세례� 요한에게� 심문자들을� 보낸� 것은,� 1:19-28에�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표준이었다.� 그는� 진리� � (眞理)대로� � 말한� � 증인이었다.� � 그러므로� 10:41-42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말한� 것은�다�참이라�하더라�그리하여� � 거기서� � 많은� 사람이�예수를�믿으니라"고� 하였다.� �

� "증거하였느니라."� 이�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 � � � )는� 현재� 완료� 동사로서,�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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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에� 행한� 일의� 결과가� 아직�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시형(時形)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도� 아직� 효과적이고�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Grosheide).

=====5:34� 그러나�나는� 사람에게서�증거를�취하지� 아니하노라�다만�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 자증적(自證的)으로� 진리이시며� 빛이시다.� 그의� 참되심의� 성립은�어두운� � 인간에게� � 의존하시지�않는다.� 빛은� 그� 자체의�증거

로� 알려질� 뿐이고� 어두움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 밝히� 비추고� 있는� 태양의� 존재를� 증거하

기�위하여�우리가�촛불을�켤� 필요는�없다.� � 태양은�그� 자체를�자증한다.� � � 그러나�예수님께서�여

기�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목적은,� 세례� 요한의� 증거� 목적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만큼,� 그것을�그들에게�기억시켜�그들로�하여금�믿어�구원� 얻게� 하시려는�것이었다.

=====5:35� �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 "비취는� 등불"은� 일시적으로� 좁은� 범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

하여�적당한�비유이다.� 그러나�예수님은�빛� 자체이시고,� 온� 세상을�비추신다.

=====5:36�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

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 것이요� -�

"나의� 하는� 그� 역사"는�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 역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란� 말은� 그가� � 메시야로� 오셨다는� 뜻이다.� 불

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그� 역사"란� 말이� �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

(21-29절이�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 하였으나,� � "그� 역사"란� 말이� 그런� 특수한� 일들만� 가리킨

다고�할�수�없다.� 10:25의� � 해석을� � 참조하여라.

=====5:37,38� � �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 거하지� 아니

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 증거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퍅했다.� 그들은� 그� 증거의� 형태("형용")를� 전연� 모르는� 자와� 일반이었다.� 그� 이유는� 이

렇다.� 곧,� 그들이,� 구약�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처하며� 그의� 형용을� 보았다

고도�자처하나,� 그들이�예수님을�믿지� � 않는� 한,� 그� 자처하는�생각은�망상에�불과한�것이다.

=====5:39,40�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 아니하

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

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

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 앎이� �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못한� 것과� 같다.

=====5:41-44� �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 예수님은� �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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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다(41,43).� � 그러나� � 유대인들은� 실

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큼�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는� � 차이가� 있다.� 따

라서�그들은�그리스도를�믿지�않는다.

=====5:45-47� � � 이� 귀절들은,� 다시� 39-40절� 말씀에� 연속하여� 구약� 성경(모세)에� � 대한� � 유대

인들의�무식,� 혹은� 불신의�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이�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 예수님을� � 믿었을� 것

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것은� 구약을� 배척한�것과� 같다.� 그러므로�그들을� � 정죄할�자는� 구

약� 성경이다.� � � � � 요한복음�제� 6장

=====6:1� �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바다"란� 말에�첨부한�것이다.� 디베랴�바다라고� � 해야� � 당시� 이방� 사람들이�잘� 알

았다.�

=====6:2� �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표적"이란� � 말(*� � � �

� � � � � � � � �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 대

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 2:11을� � 참조하여라.� 그러

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

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

이다.

=====6:3� �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 � � � � � � � � )

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데�앉아서�그� 제자들을�가르쳐�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 가리킨다.

=====6:4� �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 � � � � � � � � � � � � � � )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

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6:5� �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눈을� � 드시고� 큰� 무

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

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 앞에� � 두고� � 당한� � 난제와� �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

았다(왕하� 4:42-43).

=====6:6�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 예

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군중을� 먹이실�대책을� 벌써� � 생각하고� � 계셨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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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 신앙� �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 아시려는� �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

(Grosheide).� 이와� 같은�시험은�신앙을�배양하는데�유익하다.

=====6:7� �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 부족

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 데나리온이면� 상당

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 것이다.� �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6:8� �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빌립과� 안드레

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 안드레의� � 말(9절)은,� 이� 부분� 기

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

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

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

레의�말을�위반하는�것이니,� 그것은� � 그릇된�해석이다.

=====6:9� �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 그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보리떡"은� 가난한� � 사람들의� � 양식이다.� "물고기

"라고� 한� 것(*� � � � � � � � � � � � )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믿지� 못하고�현실주의�견지에서�낙심하고�만� 것이다.

=====6:10�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

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

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 �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

다.�

=====6:11� � � 예수께서�떡을� 가져�축사하신�후에�앉은� 자들에게�나눠�주시고�고기도�그렇게�저

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 개의� � 보리떡을� 받으셨

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

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

나님께�감사하셨다.� 감사하는�자리에�더� 많은� � 축복이� �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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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13� � 남은� 조각을�거두고�버리는�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선물을� � 관대

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 아니다.� � �

� 남은� 조각이�열� 두� 바구니에�찼더라� -� 유대풍속에,� 식사에�봉사하고� � 남은� � 음식은�그� 봉사자들

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

은�저렇게�필경� 받은�상급이�컸다.

=====6:14� � �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 예언되었으니� �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 임금� � 삼으려고� 하였

다(15절� 참조).

=====6:15�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 알지� 못하였

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 것이다.� 그런� 생각으

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이적이� 얼마나�위대하였던�것을�증명해� 준다.� 그들이�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

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 예수님을� �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

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

다.�

=====6:16� �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 이렇게� � 하였

다(마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그것을�성공으로�알고�안심한다.

=====6:17� � �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그� 때에� 예수님을�더� 믿었어야�될� 것이었다.� � 신32:11� 참조.

=====6:18� �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피드나� 낮은� 갈릴리� � 바다

에는� 사방� 높은� 언덕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 일이� �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 교회가� �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동안� 그� 배로� 찾아� 오시지� 않았으나,� �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같이,� 환란중에�있는� 교회도�마침내�주님의� � 권고로�말미암아�평안해진다.

=====6:19� �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 오

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 아니고� �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 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 것임이� 분명하다.� 그�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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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명백히�보여주기�때문이다(막6:29;� 마14:26).� � �

=====6:20� � � � 가라사대�내니� 두려워�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 � � � � � � � � � � � � � � )은,� 예수님

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 구원하시는� �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계신�곳에� 안전과�평안이�있다.

=====6:21� �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 주목해야� �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

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

14:33� 참조).

=====6:22� �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 보았더니� -� 곧,�

떡�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바다� 이� 편(저희� 있는� 곳)에� 계신� 줄� � 알고� 안심한� 적이� 있

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만이� 거기� 한� 척� 밖에� 없었던� 배를� 타고�

건너갔고,� 바다� 이� 편에� 남아� 계셨던� 예수님은� 아직� 머물러�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 밖

에도�예수님도�거기�계시지�않은� 사실을�그들은�발견하게�되었다(24절).

=====6:23� �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 왔

더라)� -� 이� 귀절� 말씀은,� 그� 무리가� 어떻게�바를� 건너� 가게� 된� 사실을� 알게� � 하는� � 것이다.� 본래

는� 배� 한� 척� 밖에� 없었으나,� 그� 뒤에� 여럿이� 왔으므로� 그들이� 그� � 배� � 편들을� 이용하게� 되었다

는� 사실이� 여기� 알려진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아서도� 이� 사실에� 대한� 목격자였던� 사도� 요한

이�이책을�기록한�것이� 분명하다.

=====6:24� �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이� 말씀을� 보니,� 그들은� � 예

수님을�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는� � 못하였으니,� � 그것은,� 예수

님을� 찾는�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는� � 동기는,� 예수님의� 말

씀이�바로� 전해지는�여부에�중대한�관계를�가진다(Grosheide).

=====6:26�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 "진실로� � 진실로"란� � 말은,� 그�

장차� 말씀하시려는� 사실의� 중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 찾은� 이유는,� 그를�

영적� 메시야로� 바로� 안�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떡을� 위하여� 따라� � 다녔던� 것이다.� 곧,� 그들은,� 5

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떡� 먹이신� 그� 이적에서� � 그리스도의� 증표를� 깨달음보다� 물질적인� 떡에� 흥

미를�가졌다.� 인간은�예수님을� � 믿는다고� � 하면서�육체적�만족을� 위하는�때가� 많다.� 그것은�인간

의�부패성의�결과이다.� � �

=====6:27�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이� � 양식

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 "영생하도록� � 있는� 양식"

은,� 그리스도께서�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 영적� �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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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

시는�이로� 여기는�죄악이다.

=====6:28� �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를� 직역하면,� � "하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

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 아니었다.� �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

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 �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

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

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

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

직� 믿음에� 의하여�그리스도의�은혜로만�천국에�들어간다.� 그러므로�유대인들의�질문에�대하여�예

수님은�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보내신�자를� 믿는� 것이�하나님의�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6:29�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 하나님의� � 일이니

라�하시니� -� 사람들로�하여금�주님을� 믿도록�하심이�하나님의�일이다.� � 인간은� � 하나님을�신앙하

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

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

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 � � � � � � � � � � � � � � )은� "그� �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

이다.� �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

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

(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

버리신�무의�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자이다.� (3)� 하나님�자신을�인간의�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

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 �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

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

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홍수에� � 의하여�세상이�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6:30� � � 저희가�묻되� 그러면�우리로�보고� 당신을�믿게� 행하시는�표적이�무엇이니이까� � 하

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 하나님� �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 문제� 곧,� 구원론에� 접

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

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 표적다운� �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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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 되었다"라고� �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깨닫지� �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떡� 다섯�개와� 물고기�두� 마리로� 5천명�이상의�

무리에게�먹이신�표적(메시야�표적)을�그들이�깨닫지�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6:31� �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 듯하다(Belser).� �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 내려� � 먹게� � 해� � 줄� � 것으로� � 잘못� �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

로�그들은�예수님에게�그렇게�하여� 주시기를�간접적으로�청원한�것이다.

=====6:3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 주시나니� � -� 예수님

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 말씀이� 아니다.� 이것

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 유대인들은,� �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

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

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

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

던�것이다.

=====6:33�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

"(*� � � � � � � � � � � � � � � )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 한다(Goebel).그렇다면,� � 이� 어귀가�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 교훈에� �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 만큼� �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

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

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

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는,� 현재� 분

사로서�계속적으로�내려오는�활동을�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영적�양식은�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끊임� 없이�내려온다.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

을�부린다.� 여기서�그들은�그것을� "항상"� 주시기를�청원한다.

=====6: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

이요�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목� 마르지�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자신을�가리켜� "생명의�떡"

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

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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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

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

게�대한�이론만�알고� 그를� 내게� � 섭취시키지�않으면,� 그것은�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굶어� 죽는�것과� 같은� � 가석한� �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주림을�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먹고� 마시

는�행동에�비유한�것은,� 성경에�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 자들아� �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 젖을� 사라"

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

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

(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 제물도� �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받아� 누리며�따라서�그와� �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연합하게�된다.� 그가� 자기를�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

"란� 말과� "나를� � 믿는� �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

를�지향한�영적� �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함은� 계속적으로�그리스도와�밀접하게�연합해� � 있음을� � 가리킨다(Grosheide,� � Het� � Heilige� � Evangelie� � Volgens� � Johannes,� �

Kommentaar� I,P.439).

=====6:36� �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

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

시�믿어지는�것은�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최선의� � 방법은� � 아니다.� 보지� 못하고�믿는�

것이�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6:37-40� �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 인도로� �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 �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그것

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 내가� �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 신앙가요� � 과학자인� � 미카엘� �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 어떻게� �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 가련한� 죄인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

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 �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

나� 영원토록� �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

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 곧,� � "나� 여호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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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

한다"는� 말씀을�맏고� 세상을�떠난다고�고백하였다.

=====6:41,42�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 가리켜,� � "하늘

로서�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원망하였다.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 위대(偉大)를�그의� 인간성� 때문에� 의심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낸신� 그의� 지극

한�사랑이다.

=====6:44�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그를� � 내

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못한� 이유는,� 그� 실상� �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오신�증표가�없는� 까닭이�아니었다.� 다만� 그들만은�하나님께서� � 그리스도에게로�이끌지�

않으신�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동시에,� 그의� 백성도� 이끌어� 그에게

(그리스도에게)로� 모으신다(호� 11:4).� 이끈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가리킨다

(롬� 8:9;� 고전� 3:16,� 6:19,� 12:3;� 요일� 3:24).� 그� 때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었음으로�

여기서는�성령의�인도에�관한� 말이� 사용된지�않았다.

=====6:45� �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선지자의� 글"은� 사� 54:13을� 가리킨� 것이다.� � 우리와� 신

학처지가� 다른� 버나드(Bernard)도� 이� 귀절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 신자가� 되려면� 진리를�

배워야� 되고,� 한번� 듣기만� 해서는� 신자가� 되기� 어렵다.� 예정의� 도리가� 요한� 복음에� 있으나� 이렇

게�인간편의�책임있는�노력을�무시하지�않았다"라는� � 의미로�말하였다.�

=====6:46� � �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 자만� � 아버

지를� 보았느니라� -� 윗절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로� 한� 말씀이� 있었다.� � 그것은,� 사람

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 � 사자들로� 말미암은�

전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에게로� 오게� 된다는� 뜻이다).� � � �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자� 곧,� 예수님� 뿐이시다.� "하나님에게서"란� 문구의� "에게

서"란� 말(*� � � � � � � � )은� 본래의� � 근원으로� 부터� 관계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말이다.� � � � "보았느니라."이�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는,� 보았고� 또� 그� 본� 결과를� � 계속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보셨고,� 또� 그� 보신� 사실이� 그에게� 계속해� 있

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1:18,� 14:9;� 마�

11:27).� �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

서만이�하나님�아버지를�보셨고,� 또� 그의� 말씀을�들으셨기�때문이다.

=====6:47,48� � �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믿는� 자"란� 말은� 예

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 표현

을� 강력하게� 하려는�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 명료한� � 진리� � 표현이다.� "내가� 곧� 생

명의�떡이로다."이� 문구에�대하여는� 35절의�해석을�참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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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

인�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믿음으로�그를�영접하는� � 자들은� � 영생한다.

=====6:50,51� � �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 대신하여�십자가�위에서�죽임이�되시므로�그를�믿는� 자들은�영생을�얻는다.

=====6:52� �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 살을� � 우리에

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

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

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 진리는� �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

가?

=====6:5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 아

니하고� 인자의�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없느니라� -� � 여기서는,� �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

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완성을� 위하신� � 것이다.� �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이

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

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

수� 그리스도의� �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

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 � � � 이� 말씀에�

근거한�기독교� 성찬� 교리에�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 그것이� � 헬라� 신비� 종교의�영향을�받

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

에� 참여한� 자들이�신(神)을� 먹는다고�한것(그들의� �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 근거한� �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

신(後身)이다.� � 예수님께서� 성찬을�제정하실�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신자들이�그의�살을� 먹으며�그의� 피를� �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

치의�영적� 의미가�성찬의�그것과�같다.� (1)� 유월절�잔치를�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구속을�준� 것

처럼(출� 12:13),� 성찬을�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그런� � 의미를�가지며,� (2)� 유월절의�만찬이�애

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 양식이� �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

기도� 한다.� � �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ysys)란� 신을� 예배하는� 제사에서는,�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

의� 신을� 상징하는� 소의�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 하므로� � 그들� 자신이� 신화(神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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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믿었던� 것이다(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pp.� 281-282).� 이런� 사상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인� 기독교와�반대된다.

=====6:5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 � � � � � � � � � � � )이� � 이때까지� � 사용된� 먹는다

는� 말(*� � � � � � � � � � )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

을�얻고�내세에는�몸의�부활까지�받는,� 구원의� � 복락� � 전부를�가리킨다.

=====6:55�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 은혜)는� 참

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

의�은혜는�실물이요�영원히�살리는�효과를�가진� 것이다.

=====6:56�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 있는� � 자는,� (1)�

주님의� 계명을�지킴(요일� 3:24),� (2)주님을� 본받음(요일� 2:6),� (3)� 열매를� 맺음(요� 15:2),� (4)� 죄

를� 범치� 아니함(요일� 3:6),� (5)� 기도� 응답을� 받음(요� 15:7),� � (6)� 생명을� 가졌음(요� 6:57),�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요일� 2:28).(Bernard,�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 St.� � Jhon,� � p.� 212)

======6:57� �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살리라� -� "아버지로�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 영원� 자

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

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

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 받아� � 누린다.�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열매가� 떡덩이로� �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 그리스도를�믿어야�그가� 우리에게�영생을�주신다"고�하였다.

=====6:58� �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

은,� 그� 말씀을�힘� 있게�하려는�목적으로�그리한다.

=====6:60� �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가� 있느냐� 한대� -� 그들이� 듣기� � 어렵다는� � 부분

은� 어느� 말씀이가?� 그것은� 58절� 말씀이� 대표한� 사상,� 곧,�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 마시는� 자

는�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그� 말씀� 뜻이� 어렵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 답변하시기를,�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다(62절).� 곧,� 그가� 승천하시

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사람들로� 거듭� � 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여� 살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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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뜻이다.

=====6:61� �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만큼,� 그� 때� � 그들의� 불평

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

다.� 그러므로�그들은�그� 말씀에�걸려� 넘어진�것이다(벧전� 2:7-8).

=====6:62� �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 하려

느냐�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여기� 이른� 바�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키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시�

살아� 승천하심에� 이르는� 한� 계단임),� 그� 때에는� 그들이� 더욱� 예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의

미라고� 한다.� (2)�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말씀이� 피와� 살로써� 설명될� 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

였다.� 그렇다면,� 그가� 승천하셔서� � 그의� � 속죄를�영적으로� 이루시며� 나타내실�때에는� 더욱� � 깨닫

기� � 어려울� � 것이라는� � 의미라고� � 한다(Westcott),� (3)�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

로� 올라가시는� 때에� 저희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는� 내막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과� 같은� 속죄� 신앙의� 효과가� 그의� 승천하시는� 때에� 확실히� 성립되고야� 만다

는� 것이다.� � � 여기� "볼� 것� 같으면"(*� � � � � � � � � � � � � � )이란� 말은,� 하필�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

이� 아니고� 심령의� 눈으로� 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앙을� 육안(肉眼)으로� 본�것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음에� � 근거하도록� � 한� � 것이다(Er� band� den�

Glauben� nicht� an� das� Sehen,� sondern� an� das� Horen� des� � Worts.-Schlatter,� Der�

Evangelist� Johannes,� P.181).

=====6:63� �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 선언이다(Schlatter).� � 이것은,� "인자

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

다.

=====6:64� �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제자들� 중에�

불신앙�사실이� 있음을�지적하시어�그들을� 경성시킨다.� 우리는,� 우리의�죄악을� � 알게� � 될� 때에� 경

성하게�된다.

=====6:65� �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 예수님께

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의� 주장이� 저렇게� 탁월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

는�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 예수님을� 안믿는� 원인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불충분

하여서가�아니었다.� 그것은�하나님의�오묘한�작정에�달려� � 있는� � 것이었다.

=====6:66� � 제자� 중에� 많이� 물러� 가고� -� 이� 귀절에� 대하여� � 어거스틴(Augustine)은� � 말하기

를,� "그들이� 생명체와� 교제를� 끊었으니� 만큼� 그들의� � 생명은� � 떠났다"고� � 하였다.� � 고데이

(Godet)는�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역사(役事)의� 비결이� 나타난� 것을� �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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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렇게� 오합� 군중(烏合群衆)은� 일단� 헤어질대로� � 헤어지고� � 소수(少數)만� 남게� 된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는�많은� 군대보다�오히려�유력하였다.

=====6:67� � 너희도� 가려느냐� -� 열� 두� 제자는,� 외부적� 관계로� 볼� 때에� 언제든지� 모두� 다� 예수

님을� 따를�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외부적�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가룟�유다가�있었다는�것은�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이런�일을� 염두에� � 두시고� "너희도�가려

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그들도� 늘� 경성하여� 있을지언정� �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기� 암시

하신다.

=====6:68�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 가오리이까� �

-� "영생의� 말씀"이란� 것은� 6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베드로는� 언제나� 모든� 제자들� 중

에서�대표자�격으로�솔선하여� � 나서곤� � 하였다(13:6,24,36,18:10,20:3,21:3,7;� 마� 14:28).

=====6:69�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 "하나님의� � 거룩하

신� 자"란� 말은,� 메시야의� 성역을� 위하여� 성별하여� 보내심이� 된자란� 뜻이다.� 막� 1:24;� � 눅� 4:34;�

사� 43:14� 참조.

=====6:70,7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

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주

의� 하나로�예수를�팔�자러라� -� 이�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생활에�있어서�너무� � 자신� 있게�지나지�

말아야�할� 것을� 암시하신다.� 그가� 택하신�열� 두� 사도� 중에도�넘어질� 자가� 있다고,� 그는� 경고하신

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 그가� �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이다.� � �

� � 요한복음�제� 7장

=====7:1� �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 � 하심은� �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 다니신다는� 말은,� 제자들과� 성역(聖役)하시고� 계심을� 가리킨다.� 그는� 때가� 되기� 전에� 일부러� 위험� 중에� 들어가시지� 않은� 것이다.� 박해를� 당할� 때� 구차스러이� 면하는� 것도� 옳

지� 않지만,� 일부러�박해를�청하여�받는�것도� 지혜롭지�못하다.

=====7:2� �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초막절"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 광야에서�

40년�동안� 장막에�거주한�사실을�기념하며,� 하나님의� � 은혜를� � 기억하는� � 명절이다(레� 23:34).

=====7:3� �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 일설에,�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보다� 연로한� 자들이었다고� 하나

(Bernard),� 성경적이� 아니다(눅� 2:7).� "제자들"이란� 말은� 12제자�밖에� 일반� � 신자들을� 가리킨다.� �

�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은,� 예수님에게� 또� 한� 번� 고통을� � 드린� �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명예주의자로� 오해하고� 저렇게� 권면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 형제� 관계이면서도� 예수님

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그

의� 형제들의� 권면은,� 마치� 저� 떡� 먹은� 무리가� 그를� �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것과� 같고(6:15),� 자

기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고� 한� 마귀의� 시험과도� 같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엄밀하게도�

하나님�중심이었지만,� 그� 형제들은�이� 세상주의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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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 하거

든�자신을� 세상에�나타내소서�하니� -� 이� 말은� 이� 세상� 처세술을�보여준다.� 그러나�그것은�인본주

의에서� 취할� 원리이다.� 신본주의에서� 행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대로� 움직인

다.

=====7:5� �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믿지� 아니함이러라� -� 행� 1:14을� 보면,� � 그들이� � 후에�

믿는� 자들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현재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 여기� 이른바�

"믿지� 아니함"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함을� 말함이다.� 신앙은� � 혈통� 관계로� 발생되는� 것

이�아니다.� 그� 이유는,� � 그것이� � 하나님의� � 선물이기� � 때문이다(엡� 2:8).

=====7:6� � 예수께서� 가라사대�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때는� � 늘� � 준비되어�

있느니라� -� 여기� "내� 때"란� 말의� "때"(*� � � � � � � � � � � � )는,� 여기서� 하나님이� 친히� � 정하신� 시간을�

가리킨다(Grosheide).� 이것은� 주로� 예수님의� 수난� 시기(受難時期)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의�예루살렘에�올라가실�시기를�가리킨다.� 예수님의�행동은� 그� 어느� 것이든지�하나님�아버지의�시키

시는대로� 하신� 것이다(5:19,30).� 그� 이유는,� 그는� 아버지와� 일체(一體)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다른�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인� 만큼,� 언제든지� 그들의� 원대로� 행

하는� 그� 때가� 그들의� 때이다.� 그들은� 굴레� 벗은� 송아지와� 같아서� 자율주의로� 덤빈다.� 따라서� 그

들의�행동은�하나님�앞에서�가치를�가지지�못하고�겨와� 같이� 가벼운�것이다.

=====7:7�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 악하다�

증거함이라� -� 이� 세상은� 타락하여� 본질적으로� 악해졌으므로� 완전히� � 선하신� � 예수님과� 정반대이

다.� 거기서� 예수님은� 미움을� 당하신다(창� 3:15).� 그가� 미움을� 당하시는� � 사실이� 도리어� 그가� 세

상의� 구주� 되신� 증표이다.� 우리는,� 그의� 미움� 받으신� � 사실을� � 보고� 도리어� 그를� 진심으로� 믿어

야�된다.

=====7:8� � 이� 귀절에�대하여는� 6절의�해석을�참조하여라.

=====7:9� �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그의� 머무심은,� 그� 어떤� 다른� � 힘이�

변동시킬� 수� 없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 밖에� 다른�

것이�없다.

=====7:10� �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 하시니

라� -�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교훈하실� 때에는� 비밀히� 하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 하셨다

(26,28,18:20).그런데,� 그가� 올라가실� 때에� 비밀히� 하신� 것은,� 도중에� 원수들의� �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었을�것이다.� 그는� 때가� 이르기�전에� 그의�생명을�함부로�내버리기를�원치�않으셨다.

=====7:11-13� �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 한다� 하

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 명절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조심하였다.� 그� 이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이� 어떻게� 나올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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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옳은� 의견도� 공적으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리보다�사람을�더� 무서워한�잘못이다.

=====7:14� �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이� 명절� 기간은� 한�

주간이었다(레� 23:36).� 이제� 그� 중간이� 되었으니,� 사람들이�가장�많이� � 모였을� � 것이다.� 이� 때에�

그는�가르치기를�시작하셨다.� � �

=====7:15� �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 여기서� "글"이란� � 말

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 � � )는,� 문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갈� 6:11),� 성경을� � 의미하기도�

하나(딤후� 3:15),� 여기서는� 학문을� 가리킨다(W.Hendriksen).�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의문은,� 그

의� 교훈이�권위(權威)있기� 때문이었다(마� 7:28-29).� � �

=====7:16� � � 예수께서�대답하여�가라사대�내� 교훈은�내� 것이�아니요�나를� 보내신�이의� 것이니

라� -� 예수님께서�만일�자기는� 아무의� 제자도�아니라고� 하셨더라면,� 서기관들은� 그를�가리켜� 속이

는� 자라고� 하였을지� 모른다(Bernard).�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 아버지의� 교훈을� 그

대로� 말한다고� 하신다.� 그는� 나면서부터� 아는� 이라고� 하기보다� �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서� 받으신� 것을� 말씀하시는� 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하여,�또는�아버지의�뜻을�대언하시기�위하여� � 보내심을�받았기�때문이다.

=====7:17�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 되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다.� 그� 방법은,� 사람의� 지능(知能)을� 첫째로� 하는� 것이� 아니고� � 종교�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말씀을� 행하려고� 하는� 자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 것인� 줄� 알게� 된다.� 크로솨이데

(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교훈을� 알� 수� 있는� 자는� 지능의� 인물

이거나� 혹은� 통찰력의� 소유자가� 아니고,� 그� � 말씀을� 행하려는� 자라고� 하셨다.� 영적� 지식을� 얻는�

방법에는� 이렇게� 종교� 윤리적인� 것이� 먼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론이� 첫째가� 아니고� 순종이� � 첫째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

우는�좋은� 학교이다"라고�하였다.

=====7:18� �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 자는� � 참되

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즈안(Zahn)은,� 여기� "스스로� 말하는� 자"란� 것은� � 그� � 때의� 불신�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란� 것은� 예수님을� � 가리켰다고� 하였다.� 불신�

유대인들은�하나님의�계시에�의지하지�않고�자율적으로�생각하며� � 말하였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존중히�하는� 듯하며�그것에�기준하여�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상은�그것을�자기들의�사욕을�위하여�

그릇되이�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율주의� 자들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

님의� 영광을� 구하시는� � 처지(보내심을� 받은� 처지)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시는�

처지(보내심을� 받은� � 처지)� 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 대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 말씀은� 참되고� 그의� 행동� 원리에� 불의가� 없다.�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 사명대로� � 순종하시

니,� 그� 사실(보내심을� 받은� 사실)� 앞에서� 참되시고� 또� 불의함이� 없다.� 일반인도� � 하나님의� 영광

을� 구하는� 생활을� 하는� 자라면� 비교적� 참되고� 불의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

야� � 할� � 보이지� � 않으시는� � 하나님� � 앞에서� � 진실히� � 행하기� � 때문이다.� 8:29,49-50,54,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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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 참되고� 불의가� 없는� 생활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 구하는� � 경건이다.� 그것

은�예수님과�및� 그를� 믿는� 사람의�생활이다.� 그러나�참되지�못하고� � 불의한� � 생활(불의로�진리를�

막는�생활)은�모든� 경건치�못한� 자들의�것이다(롬� 1:18).

=====7:19� �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 없도

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이� 귀절부터� 24절까지는,� 윗절� 끝에� �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변증하신다.� 곧,� (1)� 자기의� 반대편인�

유대인들� 측에� 불의가�있다는� 것.� 그들은�모세의� 율법을�어겨� � 가면서,� 율법의� 예언대로�오신� 메

시야를� 죽이려고� 하니,� 그것이� 불의하다.� (2)� 예수님께서� � 안식에� 병자를� 고치신� 것(5장)은� 율법

을� 어김이� 아님.� 만일� 그것이� 율법의� 안식법을� � 어긴� 것이라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그것이,�

종교� 의식으로서� 혹은� 사람을� 위생적으로� 돕는� 자비의� 일로서� 허용된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 자비의� 일로서� 허용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저것이� 정죄되지� 않는� 한,�

이것도�정죄되지� � 않는다(21-24).

=====7:20� � � 무리가�대답하되�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하나이까� -� 유대인

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독한� 미움을� 품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희� � 마음� � 속에� 숨은�

악독을� 몰랐다.� 그들은,� 도리어� 그들의� 악을� 바로� 지적하신� � 예수님을� � 미쳤다고� 지적하며,� "당

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모든� 불신앙의�

사람들은�무언�중에�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욕하는� � 자들인�셈이다.

=====7: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

괴이히� 여기는도다� -� 여기� "한� 가지� 일"이란� 것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 주신� 일을�

가리킨다(5:10)."괴이히�여긴다"함은,� 그들이�불신앙으로�인하여�도리어�놀람을�가리킨다.

=====7:22� �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 조

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 할례가� 모세의�

법(구약� 율법)에� 제정되어� 있다.� 그� 만큼� 그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실상� � 모세� 이전� 부조� 시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부터� 내려온� 법이다(창� 17:10,21:4;� � 행� 7:8).� 유대인은� 부득이�

하여� 안식일에도� 이� 법을� 지키는� 일이� 있었다.� 곧,� 그들은� � 난지� 8일� 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

였는데,� 제� 8일이� 안식일에�해당하면�그것을�그� � 날에도�행한�것이었다(Rabbic� Akiba).

=====7:23� �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 여기� � 나타난� 대조

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1)� 유대인들이� � 안식일에도� 하나의� 의식적� 제

도인� 할례를� 행한다면,� 행치�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으랴?� � (2)� � 할례는,� 의식적(意識的)� 의미로�그것을� 받는� 자의� 한� 지체에� 축복이� 된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은,� 그�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할례는,� 그

것을�받는� 자의� 한� 지체를� � 위생적으로�건강하게� 하는�정도이지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

치신� 것은,� 그� 사람의� 온� 몸을� 건강하게� 하셨다고� 한다.� (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할례를� � 위생적� 유익에� 관계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 유익에�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

하고� � 해석하기를,� "할례는� 다만� 그것을� 받는� 자에게만� 영적� 유익을�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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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병자의� 온� 몸을� 고치신� 일은� 모든� 시대를� 통한� 교회에� 유익을� 주는� 계시이다"라고� �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p.516).

=====7:24� �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 "외모로� 판단하지� �

말고."� 외모로만�본다면� 안식일에�병을�고치는� 것이� 죄� 되는� 것� 같다.� 그러나� � 안식일에� 할례� 받

는� 것도�같은� 원리이다.� 저것이�죄라면�이것도�죄이다.� 이� 문제는�공정하게�다루어져야�한다.

=====7:25,26� �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 사람이� �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 -�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실은,� 여기� 예루

살렘� 사람의� 증거로도� 알려진다.� 그러므로� 20절의�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한� 군중

의� 변명은� 무식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말씀하셔도� � 당국자들(유대의� 지도자들)이� 그를�

잡지�못한� 원인은,� 때가� 이르기�전에는�하나님께서� � 그것을�허락하시지�않은�까닭이었다(30절).

=====7:27� � � 그러나�우리는�이� 사람이�어디서�왔는지�아노라�그리스도께서� � 오실때에는� � 어디

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이것은,� 예수님� 나시기� 전� 중간� 시대에� 나온� 계시� 문학에� � 있는� 사상인� 듯하다.�

계시� 문학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난다",혹은� "해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제�

4� 에스라� 7:28,13:32).

=====7:28,29�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 너희는� � 그를� 알

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 하신대� -� 유대인들

이� 예수님의� 내력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편의� 역사와� 환경을� 아는데� 불과하였다.� 그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 예수님의� � 신성(神性)에� 관계된�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그러므로� 그는� 그�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 � �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그(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그� 앎이� 참되

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심이다.� 하나님(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을� 참으로�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안다.� � 그� � 이유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가� 진정한(*� � � � � � � � � � � � � � � � � )하나님이시기� �

때문이다.� (2)�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실도� 참되다는�

뜻을�가진다(Grosheide).� 그가� 참으로�메시야이신�것� 만큼,� 사람들은�그를� � 절대로�믿어야�된다.� �

� "내가� 그에게서�났고,"이� 문구의�헬라� 원어(*�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 "내가� 그에게서�

왔고"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에� "났고"라는� 개념은� 도무지� 들어� 있지� 않다(Calvin).� 이� 문구

의�강조점은,� 그가� 하나님을�아시는데�있어서�근본적으로� � 참되시다는�것이다.

=====7:30� � �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그는� 많은� 위험으로� 포위되었으나� 잡히우지� 않으셨다.� � 그� � 이유는,� 하나님

의� 뜻이� 아직�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 위험� �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보호

하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났다.� 그는,� 일반� 신자들에게� 대해서도� 꼭� � 마찬가지로� 보호하신다.� 그

러므로�우리는�불신앙을�가장�위험한�줄�알고� 경계해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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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 무리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 무리가� � 있었던� 반면에

(30절),� 그를� 믿는� 큰� 무리도� 일어났다(31절).� 진리가� 박해를� 당할� � 때에� � 택한� 백성들은� 자던�

잠을� 깨어� 진리편으로� 오는� 법이다.� 어두운�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와� 오는� 것처럼(롬�

13:12),� 죄악이� 혹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의감이� 일어나게� 되면서�

진리� 편에� 가담하게�되는�일도� 있다.� 그러나� � 그들이� � 구원� 받을� 믿음을�가지게�될� 근본� 원인은,�

그들이�하나님의�예택을� � 받은� � 사실에� � 달렸다.� 6:37,� 44� 참조.

=====7:32� � �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 "수군거리는� 것"은� 윗절� 하반에� � 기록된� 내용과�

같은� 것이겠다.� 그렇게�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제�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를� 잡으려고� 한다.� 종교가들도� 부패하면� � 저렇게� 남의� 잘� 되는� 것을� 시

기하는�악독을�발한다.� 좋은� 것이� 썩으면�더욱� � 괴악하여지는�법이다.� � � � �

=====7:33,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

이것은,�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역사하시는� 기간이� 길지� 못할� 것을� � 가리킨� �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는� 하늘에� 가실�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그를� 핍박하던� � 유대인들은� 그의� 가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 물론� 예수님을� 해하려는� 자들의� 종

국(終局)에� 대한� 말씀이다.� � �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여� 찾는� 신자들은� 벌써� 어느� 정도� 그� (예수)를� 소유하고서,� 더욱� 풍부히� 그를� 소유하기� 위하여� 찾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찾음은� 헛되지�

않다.� � 이� 세상의� 우물에� 물을� 길러� 가는� 자는� 물을� 못� 길어� 올때가� 있어도,� 구원의� � 생수(예수)

를� 얻으려고�찾아�가는� 자들은�언제나�기쁨으로�찾아�만난다.

=====7:35,36� �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

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유대인들은,� 위의�

예수님의�말씀을� 이해하지�못하고�의문을�품었다.� 그들은�예수님께서�가신다는�곳이� 어디인지�몰

라서� 잘못� 생각하기를,�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 자들"이란� 말은,� 헬라와� 기타� 외국에� 분산하

여�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외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천하게� 보았으며,� 특히�

이방인(헬라인)들을� 멸시하였다(Bernard).� 그러므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란� � 말은,� 예수님의� 권위를� 업신여긴� 말이다.� 그들은,� "나를� 찾아도� 만

나지� 못할� 터이요� �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신� 무서운� 말씀� 앞에서도� 두려워� 회개할�

줄� � 모르고,� 오만한� 태도로� 그저� 한� 번� 의문하고� 지나간� 것이다.� 불신앙은,� � 이렇게� � 내세(來世)에� 당할�일에� 대하여�둔감(鈍感)하다.

=====7:37�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 내게

로� 와서� 마시라� -� 초막절은� 한� 주간이지만,� 거기� � 하루를� � 더하여� � 8일� � 동안� � 지켰다(레�

23:36;� 민� 29:35).�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매일� 실로암못에서� 물을�길어� � 가지고�행렬을�

가지고� 행렬을� 지어� 성전� 문에� 돌아와서�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광

야에� 있을� 때� 바위에서� 이적으로� 솟아나온� 물을� 기념하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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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초막절� 행사와� 관련하여� 영적� 생수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 �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권

위는�마� 11:28� 말씀과�같다.� 사� 55:1� � 참조.� 이� 말씀을�보면,� 예수님만이�인류의�갈증을�멈추어�

주실� 수� 있음이�확실하다.� � 인간은�작은� 자이지만,� 그의� 소망과� 요구는�무한한� 것으로야�채울� 수�

있다(전� 3:11).� 이� 무한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

이렇게� 인류의�갈증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는� 사실은,� 약� 2,000년� 동안의�진실한� 기독� 신자들의�

경험이�증거한다.

=====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 경우에는� � 그� �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

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

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

수한� 사람들에게� �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

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 기억하게� �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등이다.� 여기� 이

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성령님께서�신자의�가장� 깊은� 심령� � 속에서� � 역사하실�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

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 성령님을� �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 성령님의� �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6:63).

=====7:39� �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가리켜� 말씀하신�것이라(예수께서� � 아직� � 영광

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계시지�아니하시더라)� -� "영광을�받음"에� � 관한� 말씀

은,� 여기서는� 특히� 그의� 승천을� 가리킨� 것이다.� 14:26,16:7을� 보면,� � 성령님의� 강림은� 그의� 승

천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뷕셀(Buchsel)은,� 여기� "영광"이란�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

으심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Theo.,� S.74).� � � 슐라테르(Schlatter)는,� 이� 귀절들(37-39)에� 있는�

성령� 관설은� 그리스도의� 말씀� 운동,� 곧,� 신약� 시대의� 전도� 운동을� 가리킨� � 것이라고� � 하였다

(Theo.,� � d.� � Apost.,� � S.� 152).� 그러나� 여기� 이� 말씀은� 신자에게� 대한� 성령님의� 내적� 역사,�

곧,� 거듭� 나게� 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역사하셨으나,� 신약� 시대의� 역사는�

그� � 성격이� 특이하다.� 이� 시대(오순절� 때)에� 임하신� 성령은� 강수와� 같이� 풍성하고,� 교회� 안에� �

유하시며� 교회를� 근거점으로� 하고� 일하신다(Grosheide,� Hij� in� de� gemeente� � woonte� � en�

uit� de� gemeente� � werkt.� � Het� � Heilige� � Evangelie� � Volgens� � Johannes,� � Kommentaar�

I,P.535).

=====7:40-43� �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 그리

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 -� 인간들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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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인하여� 어두어졌기�때문에,� 유일한�진리이신�예수�그리스도에게�대해서도�저렇게� 견해가�달라

졌다.� � � "그� 선지자"란� 말은� 모세가� 예언한�바(신� 18:15)� 메시야� 명칭이다.� � "다윗의� � 씨."� 삼하�

7:12� 참조.� "베들레헴에서�나오리라."� 미� 5:2� 참조.� � �

=====7:44� �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그들은� �

진리를� 신앙하므로� 구원� 받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그를� 잡아� 치우려고� 한다.� 그것은,� 어두움이�

빛을� 물리쳐� 보려는� 어리석은� 일이다.�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리의� 존재가� 괴로운� 것이�

되어진다(계� 11:10).�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눌러� 보려고도� � 하며,� 잡아� 치우려고도�한다.� 그러

나� 그것은� 그들이� 멸망을� 자취함이다.� 그들이� 그� 때에� � 그를� 잡지� 못한� 원인은�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않았기�때문이다(30절).

=====7:45� �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 여기� 나타난� 그들의� 질문을� 보아서,� 그들이� 얼마나� � 예수님을� � 해하려는� 마음으

로�불� 타고�있었음을�알�수�있다.

=====7:46� �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 하속들(성전�

경비원들)의� 느낌에도� 예수님의�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그� 말씀은�권세� 있는� 자의� 말

씀으로�나타났을�것이다(마� 7:29).� 그러므로�저� 하속들도�압도되어�그를� � 잡지� 못하였다.

=====7:47� � �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예수님을� 잡으려던� 하속들은,� � 그

래도� 그의� 말씀� 앞에� 압도를� 당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미혹된� 자들이라고�

한다.� 그� 만큼� 바리새인들은�더욱�강퍅하였던�사실이�드러난다.

=====7:48� � � 당국자들이나�바리새인�중에�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 이� � 점에� � 있어서� � 어거스

틴(Augustine)은� 해석하기를,� "그� 때에� 율법을� 모르는� 무리는� 도리어� 율법의� 제정자이신� 그리스

도를� 믿었으나,� 율법을� 가르치노라고� 하는� 자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그것은,� 그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리라는� 말씀(9:39)의� � 성취이다"라고� 하였다

(Catena� Aura� IV,P.279).�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 진리의� 표준인� 듯이� 여기서� 호언�

장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시기로� 인하여� � 발표된� 역설(逆說)이다.� 그들� 자신이�그들� 자신의� 죄악에� 미혹되었다.� 그들의� � 이� � 말은� 그� 자리에서� 모순된� 것으로� 탄로된다.� 곧,� 그

들의� 이� 말� 끝에,� 그들중� 하나인� � 니고데모가� 그리스도� 신앙의� 방향으로� 돌아온� 표를� 나타내었

다(50-51).� 여기에�따라서� � 그들의�호언� 장담은�수포로�돌아가고�말았다.

=====7:49� �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

는�자들을�가리켜�율법을�모르는�자라고�망단(妄斷)한다.

=====7:50,51� �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

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 니고데모의� 이� 말은,� � 바리새인들의�

호언�장담한� 내용,� 곧,�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 믿는� 자가� 없다는� 주장(48절)을� 수포화

시켰다.� 그� 이유는,� 니고데모는� 관원이요� � 바리새인(3:1)이면서도� � 이� 때에� 예수님을� 변호할� 정

도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이제� 드러났기� 때문이다.� � 그� �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또�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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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언� 장담,� 곧,� 자기들딴은� 율법을� � 안다고� � 하면서� 율법을� 모르는� 무리를� 저주한� 것도,� 니고데

모의� 이� 말� 한� 마디로� 인하여� 헛된� �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남들을� 율법� 모르는� 자들인� 사실

이,� 니고데모의� 이� � 말로� � 확증되었다.� 그들은,� 남들을� 정죄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자신을� 정죄

한�셈이다.� 신� 1:16;� � 출� 23:1-3� 참조.

=====7:52� �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

지자가�나지�못하느니라�하였더라� -� 그들이� 니고데모를�업신�여기는�태도로�이� 말을� � 하였다.� 그

러나� 이것도� 모순된�말이니,� 율법과�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식을� 자증한� 것� 뿐이다.� "상고하여� 보

라"는� 것은� 율법책(혹은� 성경)을� 상고하여� 보란�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도전적으로� 자기들딴은�

율법이나� 성경의� 권위자인� 듯이� 자처하며� 남들을� � 무시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그들� 자신의�

무식이�여기� 이� 말로� � 나타났다.� � "갈릴리에서는�선지자가�나지못하느니라"고� 한� 것은� 사실과�부

합하지�않는다.� 사� 9:1� 참조.

=====7:53� � 이� 귀절은,� 8장� 초두에�취급된� 사본� 문제와�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 � � � � 요한복

음�제� 8장

=====8:1� � 예수는�감람산으로�가시다� -� 7:53-8:11까지의�기사는,� 사본상�문제가� 있는� �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 사본들(D,� � E)에만� 있을� 뿐

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 역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다(I.W.� Burgon,� C.H.� Van�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 �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

음의�순정� 부분이�아니라고� � 하는�학자들의�이유는,� (1)� 여기�있는� 어떤�낱말들이�요한의�기록한�

다른� 책들에는�나타나지�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 번역

에� �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 있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 삽입되었다고� � 한다(Introduction� to� the�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 �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

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 제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 유세비우스(Eusebius)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

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

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

없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히� 역사적으로� 있

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제외시키는�것보다는�차라리�우리의�유익을� � 위하여�마땅히�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 John,� � II.� pp.� 33-3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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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

이었다.� 기도하심과�가르치심은�그의�주요한�일이었다.

=====8:3,4�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

들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 감행하였다.� � 죄인은� 법정에

서�취급되어야�하는데,� 법관이�아닌�그들로서�죄인을�끌고�다닐� 권리는�어디� 있었는가?

=====8:5� �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

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 되었을� � 뻔하였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

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

하였다.유대인들은�저렇게�교묘하게�예수님을�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시험하였다.

=====8:6� �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얻고자� 하여� 예수를� � 시험함이러라� �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공의회에�걸리게�될� 것이었다.� � � 성경에� 기

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 한번� �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

은�무엇이었는지�알� 수� 없다.

=====8:7� � 저희가�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이에�일어나� 가라사대�너희� 중에� 죄� � 없는� �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 실언하시는� 허물

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 먼저� �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 이� �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이렇게�말씀하셨으므로� � 저희의�올무에�걸리지�않으시고,� 도리어�그들의�양심을�찌르셨다.

=====8:8� �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름의� 소유

자들이� � 생명책에는� � 기록되지� � 않았다는� � 것을� � 보이려� � 함이라고� � 한다(렘� 17:13).� 그러나� 이

런� 해석은�추측에�불과하다.

=====8:9� �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 하나

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그

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는� 의미로� 말하

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

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 수� � 밖에� � 없었다"고� �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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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 나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권위� � 앞에서�그들은�아무�대답도�하지�못하고�모두�다�물러갔다.

=====8:10�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

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 정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주님을�믿을� 때에�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될� � 수� 있는� 사실을�암시한다.

=====8:11�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 아니하노니� � 가

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가지셨

다.� 그러니�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회개를�권고하실�뿐이고� � 정죄하지� � 않으셨다.

=====8:12� � � 예수께서�또� 일러� 가라사대�나는�세상의�빛이니�나를� 따르는�자는� 어두움에�다니

지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의� 빛"

이란�말씀이,� 우리로�하여금�만물� 창조의�근본을�이룬� 첫째� 날의� � 빛을� � 연상케�한다고�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 말미암아� 비로소� � 질서� � 있는� � 우

주가� � 되었다고� � 하였다(Het� � Heilige� � Evangelie� �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 �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

은,� � 예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 나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 것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 해석되어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빛"� � 이라고� �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

면,� 생명을� 얻음이,� � 그리스도의� 선물인� � 빛을� � 소유함에� � 달렸다.� � 폰� � 슈렝크(Von� � Schrenk)

와� � 푸리브노우(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고,� 진리는� 생명으로� � 인도한다"라고� � 하였다(Das� � Licht� � fuhrt� � zum� � Erkennen� �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8:13,14� �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 모른� �

것이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 그� � 빛된� 사실

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 못하는� 높은�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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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 나타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있는� � 설교를�참조하여라.

=====8:15� �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 바리새인들은� 남들

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 위하여� �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 사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구원하시기�위한�처지에서�그는�판단하실� � 필요가�없으셨다.

=====8:16� �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을� 가리

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 이(하나님� �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증거이기�때문이다.

=====8:17,18� �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 증

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나를� 위하여�증거하시느니라� -� "두� � 증인"에� � 관하여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 사실을� 여기� 지

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

의� 증거를�가리킨다(5:37-39).� � � 여기� 이� 귀절을�보아서도�신약에�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

란� 말이� 법정의� � 증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 법정� �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

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

거한�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정당성� 있다고� � 간주해야�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있어

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

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 증거하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

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말씀하신� �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리는� 법이

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신앙하지� 않는�자는,� 하나님의�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 사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 van� � Jezus� � Christus� � in� �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8:19� �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

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 � 그들은,� 예

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

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 예수님을� �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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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예수님은�하나님을�계시(啓示)하시는� � 중보자(中保者)시다(5:38,� 14:7,� 9;� 마� 11:27).

=====8:20� 이� 말씀은�성전에서�가르치실�때에�연보궤�앞에서�하셨으나�잡는�사람이�없으니�이

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 여자들이� �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고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

구하고�그들이�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 하락하시지� � 않기�때문이었다.

=====8:21� 다시� 이르시되�내가�가리니�너희가�나를� 찾다가�너희� 죄�가운데서�죽겠고�나의� � 가

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 유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 그들에게� 늘� 있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 온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

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 후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

회를� 귀한� 줄� 몰랐다.� � 그들은� �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

면,� 그들은�저희�죄� � 가운데서�영원히�멸망할�것�밖에� 없다.

=====8:22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

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 드러냈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 무서운� 말씀인데도� 불구

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 토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너희는�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너희는�이� 세상에�속하

였고�나는� 이� 세상에�속하지�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그� 때� 강퍅한�유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 속하여� 죄악에� 젖었고,� 예

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가시는�곳(하나님�아버지의�계신� � 곳)에� � 갈� 수�없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말하기를� 너희가�너희� 죄� 가운데서�죽으리라� 하였노라� � 너

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 "내가� � 그� 이"란� 말

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

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 믿음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

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 뿐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

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 영멸하리라"는� � 뜻이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8:25� �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

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

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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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

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

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 본질적으로는� 나

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 말씀이� 계시하

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 � �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

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그� 아래�문맥에�잘� 부합하기�때문이다.

=====8:26내가� 너희를�대하여�말하고�판단할� 것이� 많으나�나를� 보내신�이가� 참되시매�내가�그

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 말씀이� 많아

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 이,� �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

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주장하심과�같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 말씀하신바� "나를� 보

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

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

다.

=====8:28� 이에� 예수께서�가라사대�너희는�인자를�든� 후에� 내가� 그�인줄을�알고� 또� 내가�스스

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예

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는(27절)� 유대인들

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 이런� �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

씀을�근거해서는� 믿지�않던� 그� 이를,� 장차� � 그에게�일어날� 사실(십자가에�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

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

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 하나님� �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 보내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 십자가에� �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인간들의�죄악의�장벽을�없애는�능력이다.

=====8:29�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 일을� � 행하므

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매우� 강퍅하

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 않으시고� 외축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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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

는� 일을� "항상"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 아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

어서�그�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 함께�하여� 주시는�혜택을�누릴�수�있다.

=====8:30�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 믿

더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 생긴다.� 곧,� 그

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 예수님을� �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포함되었던�일부�불순� 분자들일�것이다.

=====8:31�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 거하면� �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 없는� 자들이다.� 이� 사

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 말에� �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8: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 � � � � � � � � � � � � � � � � �

� � � � � )은� "그� 진리"란� 뜻이니,� � 그� � 유일하신� � 진리를� � 가리킨다(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

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 계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 아들(예수님� �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

신다는�뜻이다.� � � 그런데,� 이� 귀절에�있어서�왜� 예수님�자신을� "진리"라고�하였는가?� 그것은� � 다

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

님을�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 보내신� 성령의� 하시

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지니고� �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역사

(役事)는� 성령의�것이�아니다.

=====8:33� �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 어찌하

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

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

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부당하다.� 유대� 나라는�그� 당시에도� � 로마의� � 속방(屬邦)으로서� � 이미� 종이� 되어� 있지�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 여러번� �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

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이스라엘�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

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

나라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버렸음).� � �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 하나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 이루어� 가시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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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택하신�백성을� 버리지도�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신관을� � 가지고,� 또� 저런� 든든한�구원

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된다.� 그리고� 그는,� � 저렇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

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서�기관으로서의� 성격을�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

체가� 포함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

은,�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 성립된

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 치중하여� 나타나

는�단체들이�있다.� 그것은�교회라고�하기보다는�종파(sect)라고� 함이�적합하다.� 이런�종파들이�있

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 계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

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 New� �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 �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 점이� 잘못된� 것이

다.

=====8: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 자마다� � 죄

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받게� 되어진다는� 뜻

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

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 배를� �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 잘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

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 것이라도�사람을� 주장하여�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

내� 지체� 속에서� 한� �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

를� 사로잡아� �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

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서운� 뱀을� 하

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 구경을� �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

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 물었으므로� �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

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

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

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하는�자와� 같다.� � � 종이� 속량되어�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다음�귀절들의�해석에서�참조하여라.

=====8:35,36�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 누릴자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 된자는� 하나님의� 나

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 � � 그러나� 아들,� 곧,� 예

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 구속자(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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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다.� � � �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 집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

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

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 해방시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하나님의� 집이� � 되도록� 하시는�이는,� 하나님의�아들

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 하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

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 우리가� � 물질로는� 죄에서�건짐이�되지� 못한다.� 하나님은�우리를�죄에서� 건지시

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

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

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있

는�여부를�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아들이�우리를�해방하신� � 혜택� � 아래서는�우리가�확실

한�소망을�가진다.� 그러므로�히� 3:6� 하반절에�말하기를,� � "우리가� � 소망의�담대함과�자랑을�끝까

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 담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 그렇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경건은�범사에� � 유익하니�금생과�내생에�약속이�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 아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창고에서�굶어�죽는� 자와�

같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 말하기를,� "나

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 없어� � 그럽니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

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 하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

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

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

이시다.� 우리는�이� 귀한� 소식을�믿음으로�구원�받는다.�

=====8:37� 나도� 너희가�아브라함의�자손일�줄�아노라�그러나�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

으므로�나를�죽이려�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 육적으로� � 아브라함의�자손인�것

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

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

에게�용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된� � 것은,� 그들이�예수님과�영적으로�한� 계통이�아닌� 사

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

시야(56절)를� 죽이려고�하였다.

=====8:38� �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 행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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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

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

라함의�참� 자손이셨던�예수님과�일치했을�것이다.� 그러나�그들과�예수님�사이에는�불일치가�있었

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

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 유대인들의� � 언행은,� 그들이�예수님을�믿지�않는� 한,� 그� 모든�것이� 다� 죄악이다.�

=====8:39,40� �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 실상� �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지적하신다.

=====8:41,42� �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

=====8:43� � � 어찌하여�내� 말을� 깨닫지�못하느냐�이는�내� 말을� 들을� 줄� 알지�못함이로다� -� � 이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 없었던� 까닭이다.� 그

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 있었다.� �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

려워해야�되며,� 자신을�걱정해야�될�처지였다.�

=====8:45� � �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

인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지적하신다.

=====8:46�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

아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 만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진리를� 말하여도�그� 말하는� 자� 자신에게�허물이�있으면,� 듣는�

자들이�잘� 믿어주지�않는다.

=====8:47,48� �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 유대인

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 옳지� 아

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자와� 율법을�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 "사마리아� � 사람"이라고�욕

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

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 또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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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8:49-51�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 그� �

말씀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 극치(極致)의� �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 것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

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

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아니고� 하나님� � 아버지의�영광을� 찾아� 드리기�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 주장이� �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

는� 것이다(50절).� � (3)� �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

난�것과� 같이,� � 예수님의�말씀은�중대하다.� 그런데도�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귀신� 들

린� 자의� � 미친�소리라는�뜻으로�모욕하였으니,� 그들이�극도로�강퍅해진�것이�드러났다.

=====8:52,53� � �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

유대인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 아브라함도� � 다� 죽지� 않았는가?"한

다.

=====8:54-57� � 예수님은,� 그들의�난제들을�다음과�같이� 해결하여�주셨다.� 곧,� (1)� 그의�말씀은�

절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 주장,� 곧,� 그의� 말씀

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 그는� �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

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

(54-55상반).� (2)� 그가�유대인들의�그릇된�사상(예수님을�선지자들이나�아브라함보다�낮게� � 보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

가�보고�기뻐하였느니라� � (56절)� -� 랍비들의�사상에도,� 일찌기�아브라함에게�메시야�시대가�계시

되었다는� 신념이� � 있었다(C.K.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

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

은,� "네� 씨로� 말미암아�천하�만민이�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내용을� � 가진� � 것이다.� 그

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

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 �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

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 출생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

는� � 뜻인� �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 말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

가서� �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 Evangelie� � Volg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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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 목

적이�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예수님을�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 아브라함보다�자기

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 �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여기� "오십도� 못� � 되었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

하여�생각해�본다.� 곧,� 그� � 때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못� 되었는데"라고�한� 유대

인들의� 말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 � � � � � � � � � � � � � � � � � � � � � � � )이라고� 읽었다.� 그러나�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 것

이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 가까왔을� 것이

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 거리(2000년동안)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 �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 있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은,� *�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 � � )의�

독구이다.� � �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 초자연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

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 인격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

의� 헬라� � 원어(*� � � � � � � � � � � � � � � � )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뜻이�

아니고,� 그� 때나� �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 있느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

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 bin� � ich� � "bringt� � er� � zum� � Ausdruck,� � dass� �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 Johannes,� �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계시고�지금도�계시고�장차도� 계시는�하나님이란� 뜻과� � 마찬

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

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 시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

는다.� � �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

았다.� 그� 바위의�꼭대기�면적은�비록� 좁았으나�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리� 박고� 있었

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

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

합하는데�있다.

=====8:59� �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 나가시니라� � -�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

들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 못할� 수도� 있다.� � � � � �

요한복음�제�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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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 예수께서�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 가로

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 부모오니이까�

-�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적� 권능을� 가지신� � 하나님의� �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

다.� 제자들의� 물어본� 말,� 곧,�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

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라고� 한� 것은,� 한� 번� 생각할� � 만하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무슨�

죄를� 지었겠기에� "자기오니이까"(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대로,� 사람이� 나기� � 전에� � 그� 영혼이� 벌써�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말은� 진리에� � 합당치� �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납득되실� 수� 없는�

그릇된� 말을� 한� �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상으로� �

보아� �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이나� 고통도� � 있으니,� �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답변에서� 그런� 의미를� � 밝히신

다.

=====9: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

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

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3절� 말씀은,� � 마치� 나면서�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 아니다.�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러

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

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베푸신다.� � �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

명사(*� � � � � � � � )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

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 � �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

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

에�계실� 때에� 국한하여� � 하셔야� � 될� 일들이�별도로�있었다.� 그러므로�그는,� 이런� 의미의�사명� 실

행의� 기회를� 놓치지� �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

는� 때가� � 온� �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 번만� � 문을� � 두드린다

"(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9:5-7�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예수님께서� 이제� 빛을� 소유하지�

못한�소경에게� 눈을�밝히는�권능을� 행하시기� 위하여,� � 먼저� � 자기가� 누구심을�알려�주신다.� 여기�

그의� 알리는� 말씀,� "내가� 세상에� 있는� � 동안에는� �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신� 것은,� 영적� 의미를�

가진� 넓은� 범위에� 속한다.� 그는� 소경을� 고치시느�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소경� 되어� 하

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영생의� 빛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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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먼저�알려� 주신다.� 실상� 이� 소경은,� 자기의�눈이� 밝아지기를�원함보다�이� 말씀을�잘� 들어야�

한다.� 그에게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

도로� � 명백히� 알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눈� 뜨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 � 이�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것은,� 혹설에� 의학적� 치료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 침은� 안질에� 도움

이� 된다고�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이� 행동은,� 그런� 자연적�치료에� 의하여�그� 소경의�

눈을� 밝히시려는�것이�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여러가지� 해석이�있다.� � 예수님이� �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그로� �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1)� 그가� 어떤� 피조물을� 가지시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라고� 함.� (2)� 진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비유하고,� 침은� 그의� 말씀의� 신성을� 비유한다고� 함.� (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맨처음에� 사람을� 지으실때에� 흙으로� 하신� 것� 같이,�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

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 의미라고� 함.� 그러나� (4)� 이것은,� 그�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소경은� � 본래� 보지� 못하여� 매우� 갑갑함을� 느끼는데,�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갑갑함을�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수

님을� � 신뢰하고�그� 명령을�따라� 실로암�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나아만으

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게� 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 � 받도록� � 한� 것과� 마

찬가지이다(왕하� 5:10-14).� 비켄하우젤(Wikenhauser)도� 이와� 같이� � 해석하였다(Nicht� weil� das�

Wasser� des� Teiches� besonders� heilkraftig� ware,� sondern� um� seinen� Glauben� auf� die�

Probe� zu� stellen.-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7).� � �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

실로암"이란� 것은,� 히브리� 원어� 쉴로아크(*� � � � � � )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해명한�

것과� 같이� "보냄을�받았다"는� 뜻이다.� � 그러므로�예수님께서�그� 소경을�실로암�못에� 보내신�목적

은,� 그� 소경의� 눈을� 예수님� � 자신이�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 �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을� 관설하신�

것은,� 실상� 그�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를� 반영시킴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교

는� 요란스러운� 폭력이나�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고요히� 진리로� 역사

한다(왕상� 19:12).� 그러나� � 유대인들은�옛날부터�이것을�좋아하지�않았다.� 그러므로�이사야도�말

하기를,�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 그

러므로� �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 창일하고� � 목에까지� 미치리

라"고� 하였다(사� 8:5-8).�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실로암� 물로� 상징된� 여호와의� 종교를� 반대

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 불신앙으로� � 놀란하였으니,� 그것이� 14-34절에� 기록되

어� 있다.� 여호와의� 참�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었으며,� 실로암� 물로� 상징되었다.� � � � "실로

암� 못"은�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성� 안에�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왕이� 전쟁�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팠던�것이다.

=====9:8,9� �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이� 소경이� 그� 이웃�

사람에게만� 잘�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그� 지방� � 모든� � 거민들에게도� 걸인(乞人)으로� 알려졌던것이�확실하다.� 모든� 사람이�알고� 있었던�소경이� � 이제� � 눈을� 떴으니,� 그� 이적은�의심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도� 변론하면서� � 그� 이적을� 유쾌하게� 믿지� 아니하려는� 경향을� 나타

내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 능력이� 명백하게� 나타나도� 인간성은� 거기에� 대하여� 희박하게(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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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적게)� 믿는� 악한� 근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그들의� 의심은,� 그� 이적을� 사실

로�드러내는데� � 도움이�된�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그� 눈� 뜬� 소경에게�힐문할수록�그의�증

언은� 더욱� 확실히�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진리는� 모든� 반대와� � 시험을� � 겪을수

록� 더욱� 빛난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John's� Gospel,� P.372).� � �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이것은,� 저� 눈� 뜬� 소경이� 그� 받은� 은혜에� 대하여� � 증거한� 제� 일보(第一步)이다.�그는,� 소경으로서� 눈을� 뜨게� 된� 큰� 은혜를� 받고,� 그� �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

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자기(하나님)� �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심이다.� (1)�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가� 그� 사실을� 증거하지� � 않으면,� 하나님의�은혜는� 그에게� 계속될�수� 없다.� (2)� 그리고�사

람들� 중에는� 은혜� 받은� 사실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

폐단도� � 있다.� 이것이� 역시� 그� 증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근심되

게� 하는� 행동이� 되어진다.� 그러나� 이� 눈� 뜬� 소경은� 최후까지�주님을� 나타냈다.� "내가� � 그로라"고�

한� 말도� 그� 자신을� 자랑하는� 의미가� 아니고,� 소경� 되었던� 자기� 처지를� 밝혀� �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9:10-12� �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 되었노

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고침� 받은� 소경은,� 여기서�

(1)� 자기의� 신념� 그대로를� 발표한다.� 곧,� 그는� 자기의� 개인적� 체험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 이것

은,그의� 순수한�확신을�남들에게�알게� � 하여� � 주는� � 고백이다.� (2)� 그� 뿐�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

에게�대한�순종의�열매가�얼마나� � 확실하다는� � 것을� 보여준다.� "실로암에�가서�씻으라�하기에�가

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 하였으니,�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틀림� 없이� 효과를�

가져왔다는�고백이다.�

=====9:13-16� � 이� 부분의� 중요한�문제는,� 예수님께서�안식일에�진흙을�이겨� 소경의�눈에� 발랐

으므로�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고침받은� 소경더러� "어떻게� 보게� 되었는

가?"라고� 물은� 것은,� 안식일에�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는� 말을�듣고자� 함이었다.� 저렇게�바리새

인들은,� 계명을� 존중히� 한다고� 하면서� 계명의� 정신(사랑)은� � 알지� � 못하고,� 외모를� 따라� 머리털

을� 쪼개는� 듯한� 기계적� 해석에� 흘러� 번쇄주의에� 빠졌다.� �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

님께� 드릴� 예배에� 방해될� 영업을� 중지하라는� 뜻이고,� 무슨� 동작이든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

히�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취할� 수� 있는� � 동작은� 안식일에�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은,� 주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선행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계명의�

정신을� 모르고,� 안식일에는� 사소한� 동작이나� 일까지� 일체� 할� 수� 없는� 듯이�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는,� �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 고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 바

리새인들과의� 의견� 충돌을� 각오하시고� 진리를� 행동으로� 드러내신� 처사이다.� 진리는,� � 비진리로�

더불어�충돌되는�기회에�도리어�그� 빛을�나타내고�더욱�힘있게�전파된다.

=====9:17� �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 너는� � 그

를� 어떠한� 사람이라�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 바리새인은,� 고침� 받은� 소경이�저희들

의� 마음에�맞는� 대답을� 할까� 하여� 또� 다시�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실이나�진리� 그대로를� 알고자�

함보다,� 자기들의� 편벽된� 고집을� 그� 어디서든지� 통과시키려는� 완강한�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사

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부패한� 고집을� � 끝까지� 애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간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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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진리나�사실� 앞에서� 실패를�당하였다.� � 그� 고침� 받은� 소경은�사실� 그대로에� 입각하여� 대

답하였는데,� 그것이� 그들의� 간장을� �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고침� 받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라

고� 증거하였다.� 물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 기대하였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여러가지로� 곤고(困苦)한� 처지에�설�때마다�도리어�빛을� 나타낸다.

=====9:18-21� �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

러� �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 보느

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 것을� � 아나이다� 그러나� 지

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의�사건에�있어서�믿으려는�마음으로�질문하지않고,� 어쨌든지�믿지�않으려는�악한�

마음으로� 거듭거듭� 질문한다.� 신자들은� 믿으려는� 목적으로� 사실과� 진리를� 찾으나,� 악도들은� 어쨌

든지� 믿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끝까지� 진리와� 사실을� 피하며� 또� 힐난한다.�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

은� 소경의� 부모에게서� 저희의� 불신앙을� 지지하는� 좋은� 재료가� 나타날까� 하여� 저렇게� 질문하였던�

것이다.� � � 그� 부모는�정직하게�그를�저희� 아들이라고�증거하였다.� 그러나�그가� � 어떻게� � 눈을� 뜨

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이것은,�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의� 어두운� 태도인� 동시에,� 진리� 증거를� 회피하는� 겁약인� 것이다.� � 그들이� 저렇게� 겁약하여진�

이유는,�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까닭

이다.� 그들은� 저런� 불의한� 법을� 무서워하였다.� 진리와� 경건을� 떠나서� 인간의� 고집을� 세우기� 위한�

법은� 실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 저렇게� 두려워하였으니,� 그들의� 심령의� 어두움과� 생활의�

부패가�이로써�추측된다.� �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그의�교회에�출교권을� 주신것은�

교권자들로� 하여금� 영혼들의� 목을� 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함이

다.� � 집권자는� 하나님� 뿐이시고� 사람들은� 그의� 사역자가� 되는� 것� 뿐이다.� 소위� 감독이라는� 자들

로� 하여금� 그들의� 소원대로� 교권을� 가지고� 우뢰와� 같이� 덤빌려면� 덤비라고� 하여라.� 그들의� 공허

한� 소리는,� 진리를� 배우지� 못하여� 의심�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 � 외에� � 아무도� 두렵게� � 하지� � 못

한다"고� � 하였다(Calvin's� � Commentary,� � John's� � Gospel,� � Eerdmans� Publishing� Co.�

1949,� Vol.� I,P.381).

=====9:24,25� �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여기� "이에"란� 말의� 헬라� 원어(*� � � �

� � )를� 직역하면,� "그러므로"란�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 불신앙을�고집하기�위하여�이� 때까

지� 이론하여� 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번째� 그�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한� 말은� 진리를� 말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판정한다.� 이것은� � 그들이� 저희의� 구원� 받지� 못한�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말이다.� 실상은�저희들이� 죄인이고� � 예수님은�절대의� 의인(義人)이시건만,� 그들은�이� 사실을� 거꾸로� 인식하였다� 사� 5:20� � 참조.� � � 이� 원통한� 사실에� 대하여,�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가득한� 확

신을� 발표하려고� 일정� 풍자식(諷刺式)으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곧,� "그가� 죄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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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알지�못하나"라고�한� 것은,� 예수님께서�죄인이�아닌� 사실을�그가� 참으로� � 모른다는�말이� 아

니고,�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판단을� 풍자하는� 말이다.� 그리고� � 그의� � 말한� � 바,� "한� 가지� 아는� 것

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 이론보다도� 실제적� 사실에� 호

소하여� 바리새인들의� 이론을� 사정� 없이� 꺾어� 버림이다.� � 우리는� 이론을� 존중히� 하여야� 한다.� 원

칙상으로는� 진정한� 이론이라면,� 거기에� � 기준하여� 사실이� 결론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참되지� 않은� 이론으로� 사실을� 매장하려는� 일도� 없지� 않다.� 그런� 때에는,� 이론보다도� 사

실이� 계속적으로� � 주장되어야� 한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여기서� 그런� 방법을� 취하였다.� 그는� 사

실을� 그대로� � 주장하였다.� 크로솨이데(F.W.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의�

심리를� 바로� 파악하고� 말하였다.� 곧,� "그가� '한� 가지'를� 안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상� 그에게� � 있

어서� 한� 가지이면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다.� 곧,� 그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 Evangelie� � Volgens� � Johannes,� � Kommentaar� II,1950,�

P.82).

=====9:26-29� �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

냐� �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 하나이까� �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 알지� 못하노라� -� 바리새

인들은� 그� 불신앙의� 고집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소경� 되었던� � 자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이것은,� 듣기� 싫으리� 만큼�

역스러운� 질문의� 중복인� 것이다.� 그들은� 담벽을� 문이라고� 할� 만큼� 어두워지고� 강퍅해진�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소경의� 눈� 뜬� 놀라운� 사실� 앞에서� 여지없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데�

없는� � 질문을� � 거듭했던�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자의�

신앙의� 뱃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를� 산산히� 깨뜨릴� 만큼,� 날카롭게� �

사정� 없는� 풍자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꾸지람하는� 방식으로� 나오면서,� � "내가� 이

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라고� 한� 말이다.� 신앙자는� 어떤� 때에� 그� 대적을� 향하여� 조롱하는� �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것이�

상대방의� 영혼을� 증오하는� 악독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불신앙� 사상� 그것에� 대하여� 사정� 보지� 않

는� 심판의� 철퇴(鐵槌)인� 것이다.� 저런� 사정� 없는� � 철퇴를� 효과적으로� 사용� 할� 수� 있는� 자는,� 실상� 상대방의� 영혼을�위하여�울� 수� 있는� � 자이다.� 신앙자의� 속에는�악독이� 없다.� 이제는� 바리새인

들이� 하는� 수� 없이� 악독과� � 욕으로� 저� 소경� 되었던� 자를� 대적한다.� 불신앙자의� 무기는� 저렇게�

불법과� 악독인� � 것이다.� 사람이� 악독해지면� 사상과� 이론도� 어두워진다.� 그들은,� 이론에� 있어서�

모순성을� � 띠었다.� 곧,� 그들� 자신이� 자칭� 모세의� 제자라고� 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세의� � 제

자가� 못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제자였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 것이기� � 때문이다.� 요�

5:46에� 말하기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고� 하였다.

=====9:30-33� � �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 하였으되� � 당

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 오지� �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 가운데서� �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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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 소경� 되었던� 자는� 이� 점에� 있어서도� 자기의� 굳센� 신앙을� 나타낸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 "이상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불신앙자에게�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심리는,� � 천국과� 맥(脈)을� 통하고� 있는� 굳센� 신념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론에�기준하여� 그들의�불신앙을� 이상히�여겼다.� (1)� 하나님이�죄인을�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한� 자를� 들으신다는� 확신(31절).� 이� 사상에� 대하여� 버나드(Bernard)는� 성경에서� 여러� 귀절

들을� � 참조하였으니,� 참고할� 만하다.� 욥� 27:9;� 시� 66:18;� 잠� 1:28,� 15:29,� 28:9;� 사� � 1:15,� �

59:2;� 렘� 11:11,14:12;겔� 8:18;� 미� 3:4;슥� 7:13;행� 10:35.� (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 자

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은� 전연�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위대한�일을� � 행하셨으니,� 어찌� 그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확신(32-33).�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 의한� 힘있는� 논증이다.� � �

�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자� 한� 사람의� 신앙적� 증거� 앞에서� 산산히� 실패를� � 당하고,�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를� 출교하였다.� 소경� 되었던� 자는� � 초신자(初信者)였다.� 그러나� 그의� 올바른�신앙이�확신� 있게�증거를�나타낼때에,� 많은� 바리새인들도� � 여지없이�패배하였다.

=====9:35-38� �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 가

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주님은,� 불법하게� 출교� 당한� 신자를� 가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만

나서�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곧,�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시어,� 그의� 신앙� 수준을� 높

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때까지� 소경� � 되었던� 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온� 자"로� 알� 뿐이었다.� 물론� 그만한�신앙� 지식에�강력한� 신념이�함께� 하였던�것

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좀� 더� 명백한� 진리� 지식이� 필요하였다.� 곧,� 예수님을�

인자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였다.� "인자"란� 말� 뜻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 � 이런� 친절한� 주님의� 계

시� 앞에서� 그는� 신앙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신앙은� � 무한히�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

의� 영적�부요(富饒)를� 상대하고�있다.� 확신의�소유자도�또� 다시� 더� 깊은� 신앙에�들어가기를�원해야� 된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것을� 원하였고,� 또한� 그� 소원을� 구체화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고�하였다.

=====9:39-4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

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 되었더면� �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 있어서�인류를�소경이라고�생

각하신�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 된다.� �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의� 육안은� 어떤� 짐승의� 눈만도� 못하

다.� 예를� 들면,� 매는� 여러� 십리� 밖에� 있는� � 작은� 것도� 밝히� 본다고�한다.� 사람의� 눈의� 표준은� 심

령의�눈이다.� 심령의� � 눈은� � 하나님� 보기를�목적한다.� 심령이� 하나님을�보기�전에는� 소경임을� 면

치� 못한다.� "만물보다� �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 미련한� 자이다(잠� 28:26).� 인간은� 이렇게� 소경인데도� 자기가� 본다고� 하며,� 불행� 가

운데� 아주� 떨어진다.� 요� 9:41에,�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 하니� �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자기들이� 소경인� 줄� � 알았더라면� � 주님을� 믿었을� 것

이고,� 따라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무죄한�자처럼� 되었을�것이라는� 말씀이다.� � � 우리가�영적

으로�소경이�아니라고� 자처한다면,� 죄를� 더욱� 범함이다.� � 그것은,� � 곧,� 요일� 1:8에� 말한대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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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요일� 1: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

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 안니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

이면서� 소경�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죄와�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

는�죄를�범함이다.� � � � � 요한복음�제� 10장

=====10: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

다른�데로� 넘어가는�자는�절도며�강도요�문으로�들어가는�이가�양의� 목자라� -� 이� � � 말씀은,� 사람

이� 합법적으로� 양에게� 관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도� � 하나님의� 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 본문의� "문으로"� � 들어간다는� � 말씀은,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

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

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

이다.� 사람이� 자기� � � � � � � � 스스로는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 결국� � � � � � � � 하나님의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

친다.� 그는,� 무의식�중에,� 혹은� 의식�중에� 저렇게�불행한�생활을�보내기�쉽다.

=====10:3-5� �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

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 도리어� 도망하

느니라.� -�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 이것이�세례� 요한을�의미한

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

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 문지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

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 문지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 보아서� 이� 해석이� 적당하다.� � �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

장에�많이� 나온다.� 4,5,27절을� � 참조하여라.� 양이� 목자의�음성을�듣는다는�것은,� 택한� 백성이� 하

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 말씀을� 알아� 듣는� 사실을� 비유한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

님(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이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 하나

를�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

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 그들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 그대로� 정미롭게� 전파할� 뿐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된다.� � �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 행스텐벌키(Hengstenberg)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

적인�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름을� � 각각� 불러� 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 본위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

마음으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된다.� 그런� � 역사(役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힌다.� 그것은� 마침내� 광범위에� 미치는� 구령� � 운동(救靈運動)도�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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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다.� 설혹� 그의� 역사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 소수의� 열매로써도� 만족한

다.� 비루마에�처음� 선교사로�갔던�저드슨(Judson)� 목사는� � 7년만에� 세례�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

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도� 천하를� 얻은� � 듯이� 기쁨을� 느꼈다.� � � �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이란� 말은,� 그가� 우리에� 있는� 양들을� � 인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갈� 때에� 양�

한� 마리라도� 빼놓지�않기� 위하여�노력한� 표를� � 보인다.� 곧,� "다� 내어� 놓은� 후에"란� 것이� 이� 뜻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양� 한� � 마리라도� 등한히� 여기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

양하는�인도자는�소자�한� � 사람도�가볍게�여기지�않아야�된다.

=====10:6� �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 알

지� 못하니라.� -� 목자와�양에� 대한� 비유는�구약에도�많이�있다.� 시� � 23편,� � 79:13,� �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10: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 대한� 머리

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 의하면,� � 여기� � "문"이란� � 말이� � 사히딕(Sahidic)� 사본에

는� � "목자"(*� � � � � � � � � � � � � � � � )란� � 말로� � 읽게되어� � 있는데,� �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

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 그것을� �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

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

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

을� 해석하면서� � 말하기를,� � 문은� �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 야곱,� �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 순종하는� � 양들을� �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 (dieser,� �

namlich� � der� � Christus,� � ist� � das� � Tor� � Gottes.� �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

Joh.� � die� � dem� � Christus� � gehorenden� �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10:8�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나보다�

먼저"(*� � � � � � � � � � � � � � )란� � 말에� � 대하여는� � 사본상� � 차이가� � 있다.� � � 곧,� � � 몇몇사본(*� � � � � �

,A,B,D,L,W)이� 우리� 본문과� 같이� 이� 문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사본(*� � � � � )은� �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우리가,� 이� 문구를�가지고� 있는� 것이� � 원본적이라고� � 생각하는� 것은� 그� 사본들의�

증거가� 강하기� 때문이다.� � � � "나보다� 먼저"(*� � � � � � � � � � � � � )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

도의� 권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이다.� (2)� 이것은,� 시간

적으로�예수님보다�먼저�온� 자들을�가리킨다는�것.� "먼저"라는�헬라� 원어가�그런� 뜻으로�요한� 복

음에� 많이� 나와� 있다(11:55,� 12:1,� 13:1,� � 19,� � 17:5,� � 24).�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 � 이� �

� 해석을� � � 합당하게� � 여기는� � � 이유로서� � � 그� � � 아래� � � 나온� � � � 에이신(*� � � � � � � � � � � � � ),곧,� "

이요"로� 번역된� 동사가� 현재사라는� 것을� 들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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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한다.�

=====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 나오

며� 꼴을� 얻으리라.� -�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 없이� 관계한

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

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

유로운� � 활동을� � 의미한다(신28:6;� �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양식을� � 섭취할�수� 있다.� 그리고�그의� 주시는� 양식은�영원한�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

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양으로�생명을�얻게� 하고�더�풍성이�얻게�하려는�것이라"고� 한� 말씀이�그� 뜻이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

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거짓� 스승들이� 종

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 거짓� 교훈을� 가진� 자

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 여기지� �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

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

적�생명을�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장성케� � 하신다(시23편;� 히13:20-21).

=====10:11-13�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

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양을� 돌아보지� � 아니함이나.� -�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

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

으니,� 그것이� 무슨� � 뜻인가?� �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

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때에,� 사53:10을� �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란� 말씀이,� �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

고�하였다.�

=====10:14,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여기� 목자와� � 양이�

서로� 안다는�것은� 어떤� 지식을�말함인가?� 예수님이�그의� 백성(양)을� � 아신다는� � 것은,� 그들이� 선

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 뜻이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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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지(全知)� 성품에�의한� 것이다.� 그리고�그의� 백성이�그를� 안다는�것은� 성령에�의하여� 성립된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하고�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자율적인� 지식이� 아니다.� 마11:27� �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 없느니라"고� 하였다.� � � 볼트만(Bultmann)은,� 여기� 양이� 목자를� 안

다는� 지식이� 노시스(Gnosis)의� 실존� 각성(Seinsverstandnis,� Existenzverstandnis)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는�다음과�같이� 말하였다.� 곧,� "이와� 같은� 지식은�노시스�신미� 문건에서�왔을�터인데,� 그�

지식은,� 아는� 자와� 알리운� 자가� 서로� 일체로� 관련된� 사실을� 결정함이다.� 그런� 지식은� � 이론적� �

지식이� 아니고(nicht� ein� rationales,� theoretisches� Erkennen),�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 실존

적으로� 결정함이다"라고� � 하였다(ein� � Innerwerden,� � in� � seiner� � ganzen� � Existenz�

bestimmt� ist.-Johannes� Evangelium,� p.290).� 그는,� 요한� 복음의� 이� 부분� 사상이� 분명히� � � 노

시스를� � � 배경하고� � � 있다고� � � 한다(Der� � � gnostische� � � Hintergrund� � � dieser�

Gedankenbildung� ist� unverkennbar.-Johannes� Evangelium,� p.� 285).� � � 그러나� 신약이� 말하

는� 양과� 목자� 사이의� 지식은� 그런� 빌려온� 것(Lehnsatz)이� � 아니다.� 요한� 복음의� 구속자(목자)는�

노시스�문헌의� 그것과�다르다.� (1)� 사도들이� � 전파한� 그리스도는� 명백한�역사적�인물로서�죽었다

가� 다시� 살으셨고,� 노시스(만데안� � 문학)에서� 말한� 구속자는� 전사� 시대(前史時代)의�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2)� 사도들이� 전파한� 구속자(救贖者)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구속자요,� 노시스에서� 말한� 구속자는� 이원론적인� 우주� 세력들과� 싸운� 상상적인� 전쟁� 영웅이다.

=====10:16� �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이것은� 이방� 선교에� � 대한� 예수

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 예언되었다.� �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

는�말씀이�이� 귀절� 앞뒤에�배치되어� � 있다.� � 뱅겔(Bengel)은,� 하나님�백성의�통일성을�위하여�아

름다운�목자도�한�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지적한다는�의미로�말하였다.

=====10:17,18�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 버

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 영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

도� 있다.� � �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 가리킨다.� 특히�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 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순연히�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 순종하신� � 것� 뿐이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

을�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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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21� �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

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10:22,23� �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서� � 다니시니� -� "수전절"은,� 유다의� 매코비가� 성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그것을� 기념하는� 절일을�정했는데,� 그것을� 말함이다(� � .매코비� 4:51,� � � .메코비� 10:5-8).� 이날은� 12월� 25일이다.� "솔로

몬� 행각"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시설한� 현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12월이� 우기

(雨期)이므로�예수님께서�그�때에� 솔로몬�행각에�다니신� � 듯하다.

=====10:24� � �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

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 주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直說)하심보다,� 흔히� 비유적으로� 하시고�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신� � 이유는,� 그� 때� 민중의�

메시야�관념이�그릇되어서�정치적�메시야를�기대하였기�때문이다.� � 그러므로�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더러�그의�메시야이신�여부를� "밝히� 말하시오"라고�한다.

=====10:2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

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 메시야격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1)� 그의� 말씀의� 증거는� 언제나� 흔들리지� � 않음.� 예수님의� 말씀

은,� 신자들이� 등한히� 해도� 언제나� 살아� 역사(役事)한다.� 그의� 말씀을� 오해하고� 선전하는� 자들이�많아도�그의� 말씀은�그대로�살아� 있다.� 그� 뿐� � 아니라,� � 그의� 말씀을�반대하는�자들이�많아도�그

의� 말씀은�계속� 살아� 있다.� 그것이�그렇게� 되는� � 이유는,� 그의� 말씀은�하나님의�말씀이기� 때문이

다.� 마� 24:35에는� "천지는� �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아니하리라"� 하였고,� 요� 8:51엔� "진

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

였다.� � 예수님의� � 말씀은� 이렇게� 권위� 있고� 진실하다.� (2)� 예수님의�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함.�

예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그의� 이적들을�가리킨다.� 현대인은,� 기독교에서�그� 이적� � 요

소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는� 이적으로� 된� 종교인데� 거기서�

이적을� 제외하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돌� 집에서� 돌을� 모두� 다� 뽑아� 버리고� 남은� 데서� 살아� 보

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 그리스도의� 이적은� 구원사적

(救援史的)인� 진실과� 구속적인� 사랑을� 그� 성립� 요소로�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께서� 이런� 권능을�행하시리라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사� � 29:18,� 35:5-6),� 그것이,� 과연� 예수님으로� 말미

암아�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사적� � 이적이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음은� 메시야를�

보고도�믿지� 않는�죄악이다.

=====10:26� � � 너희가�내� 양이�아니므로�믿지�아니하는도다� -� 우리가�하나님을�알기�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벧젠� 1:2).� 곧,� 그가�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게� 된� 것이다.� "양"이란� 말은� 택한� 백성을� 비유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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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들은� 많이� 나타났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완전하게� 나타났다.� 기독교는� 이

렇게� 가장� 믿을만하게� 된� 유일하고도� 진정한� 종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

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 말라� 죽는� 자들과� 같다.� 결

국� 그들은�영생의�복을� 받도록� � 택함이�되지� 못한�자들이다.

=====10:27� � � 이� 귀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 아니고,� 그리스도께서�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

다.

=====10:28,29�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 내� �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

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

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

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 원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 그들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

(딤후� � 1:21).� � 하나님의�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가득한�세상에�놓여� 있어도�근심할�것� 없

다.� 악한� � 것들도�하나님의�주권에�복속하지�않을� 수� 없다.� � �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

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귀절은,� � 그리스도께서� 그� � � 백성에게� � � 영생을� � � 주신다고� � � 하는� �

� 사상을� � � 재음미한다.� � � "주노니"라는� � � 말(*� � � � � � � � � � � � � � � �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 de� � Johanneische� � Geschriften,� p.111).� � � �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

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 "저희를� �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 � � � 문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 찬성하는� � 학자들도� � 있다.� � (Godet,� �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의미가�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 주신� 하나

님이�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뜻이겠다.� 그러나�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리� 한역의�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 크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 하며,� �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세계에서나�하나님의� � 은혜로운� � 역사의�대상이고�그리스도의�소유니만큼,� 만물보다�크다

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

긴� 자들이다.� 그들� 중� � 하나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 자가� � 없다"라고� � 하였다(Leven� � in� �

de� � Johanneische� Goschriften,� p.� 112).

====10: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

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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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

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 세상에� �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 곧바로� � 아버지의�행동과�완전히�일체(一體)였다.

====10:31,32� � 유대인들이�다시�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예수께서�대답하시되� 내가�아버지께로� �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 하느냐� -�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경건하다고� 하며,�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 말씀(신� 13:5)을� 실

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악행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답변하신다.� 그� 답변은,� 유

대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이니,� 곧,� 그들이� 너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몰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 어떻게� � 완전하고� 철저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보

여준다.� 곧,�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 "여러가지� 선한� 일",� "너희에게� 보였거늘"이란� 말씀들이다.�

(1)� "아버지께로� 말미암아"란� 말은,� 그의� 하신� 선(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실이� 증명될�것이다.� 그러나� �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불신앙은� 현저하다.� (2)� 그� � 뿐� �

아니라,� 그� 선한� 일이� 한� 가지만� 아니고� 여러가지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하였

다.� (3)� 또� 그� 뿐� 아니라,� 그런�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으되�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보

였거늘"이란� 말의� 헬라� 원어(*� � � � � � � � � � � � � )는,� 모든� 사람이� 볼� 수� � 있도록� 공중� 앞에서� 행한�

것을�가리킨다.� 이렇게�밝히� 보여주었으되,� 그들은�강팍하여� � 아직도�믿지� 않았다.

=====10:33�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

는� 저렇게� 두텁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 하는� 듯이� 자처한

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는� � 듯이,� � 예수님의� � 발표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

라"� 하신� 말씀을� 책잡아� 그것이� "참람"한� 말이라고� 한다.� �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진리와�

시실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 정죄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행동이다.

====10:34-3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하였노라� 하지� �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여기� "율법"이란� 말은� 시� 82:6을� 가리킨다.� 시편을� 왜� 율법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처음부분에� 있는� 것만큼,� 예수님� 당시

의�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책� 이름을� � "율법"이라고�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 12:34,� 15:25;� 롬�

3:19;� 고전� 14:21� 참조� � � 시� 82:6에는�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는데,� � 그것은,� �

재판장들이� � 신(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자신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함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신격(神格)이나� � 신자격(神子格)� 주장의� 정당성을� 이� 시구에� 두셨다.� 그것은� 얼른� 보아� 예수님도� 순� 인간으로서� 신의� 시키시는� 일을� 맡은� 의미의�하나님�아들이고,� � 영원� � 자존하신� � 하나님� � 아들(Ontological� Sonship)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구에� � 근거한� 예수님의� 논증의� 귀결은,� 추론의�

등위적� 이론(等位的理論=Analogical� �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 결론(a� 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들도� 신의� 시키심을� 받은� 자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神)이� 아니로되� 그들을� "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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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또는� � "자존자의� � 아들들"(시� 82:6)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

상에�보내신�영원하신�하나님�아들이야�말할�것이�무엇인가�하는�결론이다.

====10:37,38� � �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 내가� � 행

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여기� "내� 아버지의� 일"이란� 말은� 그가� 행하신� 이적

들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적� 행하신� 사실을� 저� 불신앙자들� 앞에� � 도전적으로� 내세우신다.� 그

것은,� 그� 이적들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천하가� 공인한� 사실을� 지적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떤� 한� 구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대중이� 주목하는� 공석에서� 되었으며,� 바

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강퍅한� 교권자들이� 끈질기게� 책잡으려는� 무서운� 눈초리� 앞에서� 성

립된� 일들이다.� � � "그� 일은� 믿으라."이것은,� 그의� 행하신� 이적들이� 초자연적이고,� 사람으로는� 할� �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아버지께서�예수님� 안에� 계신� 표적인�사실을� � 믿으라는� �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계시다� 함은,� � 하나님께서� � 땅에� � 있는� � 그의� � 기관(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부요(富嶢)를� 충만히� 전달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하나님)� 안에"� 계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 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부요에서� 모든� 것을� � 가져오심을� 가리킨다(Godet).� � � 예수님의� 이적은,�

저렇게�땅에� 계시면서�하늘에�계시는� (3:13)� � 오묘를� � 보여준다.� 그것은�내세(來世)의� 새� 하늘과�새� 땅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 바빙크(Bavinck)는� 말하기를,�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거기� 의(義)가� � 거한다.� � 그� 때에는� 이적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가� � 된다"라고� 하였다(Geref.� Dog.� Uitgave� van� J.H� Kok� Te�

Kampen� 1928,� Vol� I,� p.311).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아직도� � 때가�

이르지�않았기�때문에�하나님께서�허락하시지�않으므로�원수들이�그를�해하지� � 못하였다.

======10:40,41�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많은� �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

은� 다� 참이라� 하더라� -�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떠나� 요단강� 저편

으로� 가셨다.� 그곳은� 물론� 적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대중으로� 하여금� 그

를� 따르게� 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세례� � 요한의� 이적(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치�

않았음)을� 본� 까닭이� 아니고� 그의� � 증거한� � 말(그의� 메시야� 증거)이� 참된� 까닭이었다.� 말의� 진실

성은�이렇게�귀하다.� � � � � 요한복음�제� 11장

=====11:1� �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 나사

로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여기서� 화제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 이름의� 단축형이라

고�한다.

====11:2� � 이� 마리아는�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 그

의� 오라비러라� -� 12:1-8� 참조.�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 사람이� 아

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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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11:3� � �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 자

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그것은� 청

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

어� 주신다.� 특별히�그는� 그의�사랑하시는�자들의�기도를�들어�주시기�기뻐하신다.

=====11:4� �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 위함이

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

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

게� 됨으로�하나님�아버지께�영광이�돌아가게�될� � 것이라는�의미가�여기� 있다.

=====11:5� �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 나사로

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저� � 하심이었다(4� � 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다.� 그가� 그들을�사랑하시기�때문에�그들을�위하여�특수한�이적을� � 행하시게�되었다.

====11:6� � �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 주님께

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

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 순응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

히�오심은�사랑을�베푸시기�위한�지체이다.

=====11:7,8� �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다시� 가자� 하시니�제자들이� 말하되�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예수님께서� 천천히� 제자들

의� 신앙� 수준을� 올리셨으므로,� 인제는� 그들이� 거정� 없이� 위험� 지대인� 유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Bengel).�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겁을� 낸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유대인들이�예수님을�돌로�치려� 한� 사건은�유대에서� � 여러� 차례� 있었다.� 8:59,� 10:31� 참조

====11:9� � 예수께서�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 세상의� �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할� 때에�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신변을� 위험하게� 느꼈기� 때문이

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 남아� � 있으므로� 그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기회를� 식별할� � 수� �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그것을� 식별하셨다.� 그는� 헤롯의�

죽이려는�음모를� 아시고도�말씀하시기를,� "가서� 저� 여유에게�이르되�오늘과�내일� 내가� 귀신을�쫓

아내며� 병을� � 낫게� �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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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갈� 길을�가야� 하리니"라고�하셨다(눅� 13:32-33)

======11:10�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칼빈(Calvin)은,� � 윗

절(9� 절)의� "낮에� 다닌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혹은� 그의� 명령)대로� 다님을� � 가리킨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밤"은� 하나님께서� 주신�사명과� 말씀에� 관게� � 없는� � 환경과� 사정을�가리킨�

것이겠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없이� 인간� � 자신의� � 심사(心思)에� 따름을� 의미할�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인간은� 실족할� 수� 밖에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 안에는� 참다운� 빛

(진리)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 밖에서(하나님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된다(Grosheide).�

예수님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인� 만큼,� 밤에� 행하는� 것과� 같

은� 일은�전연� 없으셨다.

=====11:11� �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다시�살아나는�때가�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 "경건한� � 자의� 죽음은�하늘� 나라

의�방언으로는�잠듬이다"라고�하였다.

=====11:12,13� �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 죽음을� �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예수님

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제자들의� 오해는,� 결국� 모든� 죄인들의� 습

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준다(Grosheide).� "내가� 깨우러� � 가노라"고� �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

아서도,� 잠들었다는� 말이� 보통� 수면을� 의미하지� 않는� 사실을,� 그들은� 왜� 몰랐던가?� 보통� 수면이

면�다른�사람들도�깨울�수� 있지� 않았으랴?�하필� 예수님이�그것을�깨워야�될까?(Greijdanus).

======11:14� �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나사로의� 죽은� � 사실에� �

대하여,�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하셨다(11� 절).� 그러나� 이제는,� 그� 제자들이� � 깨닫지� 못

하는� 고로� 밝히� 해석하여� 주신다.� 처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 하여금� 신령한� 지혜를�

사용하여�보도록� 하셔서�그들을�연단시키시기�위함이었다.� 이제는�그들에게�명확히�그� 말씀의�뜻

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수확이�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주시기는� 하되,�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노력하게� 하시

는�것이�하나님의�방법이다.

=====11:15� �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신대�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그� 질병에거� 건지시지� 않았으므로� 그

가� 죽었으니,� 이제�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하는� � 광경이� 미구(未久)에�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부절히� 자라나

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난관은,� 신앙이� 새로이� 장성할� � 기회이다.� 신앙은� 되어가는� 것이고� 된것

이� 아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 � 되어있는� � 기독자는� � 기독자가� � 아니다"라고� � 하였다

(He� � who� � is� � Christian� � is� � not� � a� Christian).

======11:16�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 연단(鍊鍛)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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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力說)하셨는데(15절� 해석� 참조),� 그는� 그� � 말씀� 끝에� 말하기를,�"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곧,�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한� 유대� 땅(7-8절� 참조)으로�

같이�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

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 아니다.� 불신앙은� 디두모(쌍동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

마의� 근성이다.� 이때에� 도마가� 죽기로� 작정하는� 영웅주의는� 가졌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

인들의� 박해를� 당할� 줄� � 알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

이� 방금� 말씀하신대로(9� 절)�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 못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비록,� � 그의� � 태도

는� 용감스러웠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 � 그는� 주님의� 말씀(9,15)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저

렇게� 현실의� � 얕은� � 곳에서� 잘못� 움직였다.� 우리는� 생각하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

잊을까!� � 아버지가� 먼� 곳에� 갔을� 때� 그�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주님을� 잊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아버지를�못보는�대신� 우리는�그의� 말씀을�보는데,� 어찌� 그� 말씀을�잊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예사로이� 한다.� 분주하여� � 잊어버리고,� � 평안하여� 잊어버리고,�

곤난하여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이� 있을� � 때에만� �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

은�악한�일이다.�

=====11:17�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 말

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 지적하기� � 위하여� 역사

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 말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

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

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토만(Bultmann)의� 이� 학설은,� �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

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 복음� 저자가� �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

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1:18� � 베다니는�예루살렘에서�가깝기가�한� 오리쯤�되매� -� 이렇게�예루살렘에서� � 베다니

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 설명하려

는데�있다.

=====11:19� � 많은� 유대인이�마르다와�마리아에게�그�오라비의�일로�위문하러�왔더니� � -� � 그들

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권능을�보게� 하시려는�것이었다(Calvin).

=====11:20� �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앉아� 있었음은�예수님을�사모하지�않았던�까닭이�아니다.

=====11:21,22� �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

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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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제라도�주께서�무엇이든지�하나님께�구하시는�것을� � 하나님이� �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말

하고도(22� 절),� 다시�말하기를�나사로가� "마지막�날� 부활에는� � 다시� 살� 줄을�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 같이,� �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유감스러운� 일이�있

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 변동성을�가져왔다.� � � 마르다의�이� 태도는�확신을�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 있어야� �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

(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 파도가� 일어도�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한다.� 그것이�그렇

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 그는,우리를� 반

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

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

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

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 확신을�가지고� 건넜다고�한다.� 우리가�이� 세상을�건너� 가기가� 위태하

나,� 믿음으로�앞서� � 건너� 간� 성도들을�생각하고�용기와�확신을�가질�수�있다.

=====11:23,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 부

활에는�다시� 살� 줄을�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말씀은�이�세상� 끝날의�부활을� � 의미하지� � 않고,�

그� 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 알았다.� �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 사상일� �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

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그�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

재에도�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 몰랐던� �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 없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예수

님�때문에�성립될�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성립될�것이� 아니다.

=====11:25,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

릇� � 살아서�나를� 믿는� 자는�영원히�죽지�아니� 하리니�이것을�네가�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

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 주장이다.� 곧,� 이것은� "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이런�문투로�나온� 말씀을�가리켜�예수님의� "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

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 "Ich� � bin",� � die� �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 � "

부활"이란� � � 말과� � � "생명"이란� � � 말에� � � 각각� � � 관사가� � � 있어서� � � � (*� � � � � � � � � � � � � � �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 여기서� �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 �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 주시는� � 그의� �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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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Bedeutsamkeit)를� � 가리킨다고� �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

(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

한다.� 오직� �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 그에게� 만

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

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

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

생이� 하나님의� � 계약� �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

게� 믿음을� �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 사람� � 아브라함에게

서부터�인간�편의� 믿음을�요구하였다.� 신앙은�그리스도께서�인간에게�통해지도록�하는�심리적�통

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 구성요소로서� 필요한�것이다.� 기독자들은�믿음에�의하여�하나님의� 계약에�참여하므로�그리스도에게�붙은�자가� 되

어진다(고전� 15:23).� � �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 � � � � � � � � � � � � � � � � � � � � )는,� � "

그가� �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

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 뜻이다.� 이

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

einem� � Leben� � gesprochen,� � das� � der� � Glaubige� �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

니하리니,"� 여기� � 이른바,� � "살아서...믿는�자"란� 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 있

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 구원론적이

며(5:19� �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 "믿는� �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 � )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 성령으로� 거듭� 나

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 �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 같은� �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 자는� �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

(거듭나서)� 믿는� 자는�영원히�산다는�것이다.

=====11:27� �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 아들이신� �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

수님께서�해결하시지�못할�듯이� 말한다(39� 절).� � � "세상에�오시는�하나님의�아들"이란�말에� 대하

여는,� 고후� 8:9;� 빌� 2:7을� � 참조하여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 다� �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

같은� �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

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 �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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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 것이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

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우리가�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기�때문이다.� 무식은�거의� 죄악에�가까운�것이라고,� 지혜� 있는�사람들은�말한다.� 잠언을�보면,� 미

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 않기� � 때문에� 정죄되었다.� � �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체계� 정연하지�못한�원인은,� � 신앙� � 연단이�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 생활에는�연단이� 필

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 시련이�불로� 연단하여도�없어질�금보다�더� 귀하여�예수� 그리

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 보석이� �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 여기시는

고로�여러가지로�연단시키시기를�좋아하신다(신� 32:10-12).

====11:28-30� �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듣고� �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

께로�나아갔다고�한다.� 그것은,� 마리아가�예수님을�주님으로� � 경외(敬畏)한� 증표이다(Calvin).

====11:31� �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

고�따라�가더니� -� 유대인들이�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된� 것은� 하나님의�섭리였다.� 그들이� 그렇

게�하지�않았더라면,� 나사로를�다시�살리시는�이적을�보지�못할� 번� 하였다.

=====11:32�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11:33�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 통

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 학자들은,� � "통분히� � 여긴다"는� � 말의� � 헬라� � 원어(*� � � � �

� � � � � � � )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 � 우는� � 자들을� � 동정하시는� � 체휼(體恤)의� � 슬픔이었을� � 것이다(Calvin).� 이�말을�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

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셧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에게� 대하여� � 노하셨다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의� 신성이� 노하셧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가장� � 자연스럽다.

=====11:34-38� �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 내다보

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

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 마르다와� �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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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 그것이야말로� �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

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 불신앙의� � 예

루살렘을� � 보시고� � 우신� � 적도� � 있다(눅� 19:41).�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비애라는�것은�천정의�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수� 있을까?� 죽음에�대하

여�지나치게� � 슬퍼하는�것은� 옳지�않지만,� 죽음이�슬픈�것은� 사실이다.

=====11:39� � 예수께서�가라사대�돌을�옮겨� 놓으라�하시니� -� 예수님께서�나사로를� � 부활시키심

에�있어서,� 거기�모인� � 사람들더러�그들의�힘으로�할� 수� 있는�일은� � 하라고� � 하신다(44절�참조).�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

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 역사(異蹟役事)에� 수종들므로,� 그들은�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

�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

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날�정도로�부패한�시체를�부활시키셨다는� � 사실이,� 만대(萬代)에� 전파될�수� 밖에� 없다.� �

=====11:40�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 아니하

였느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 예수님

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 느낄� �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

사로의�부활한�사실을�보기는�보았으나,� 거기� � 나타난�하나님의� � 영광은� � 보지� � 못하였다.� � 하나

님의� � 영광은� � � 믿음으로만� � � 보며� � � 느낀다(Grosheide).

=====11:41,42�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 내� �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 믿게� 하려� 함이

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 계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자기의� �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 없는� 것임을� 지

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 사이에� 끊임� 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

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둘러� 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기도로� � 발표하신� �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그를�메시야로�알기를� 원하셔서�그� 어느� 기회

에라도� �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남들의�구원�문제에만�관심을�가지셨다.

=====11:43� � 이� 말씀을�하시고� 큰� 소리로�나사로야� 나오라�부르시니� -� 그는,� � 진리이시며� � 공

명� 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큰� �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롬� � 4:17;� � 요� 5:28� 참조.� � � 어

떤� 재미� 있는� 말이� 있다.� 곧,�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 "나사로"란� �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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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오라"고�하셨더라면,� 묘지에�묻혔던�모든� 시체들이�다� � 일어나�나왔을�것이라고�한다.

=====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 이것

은,� 그�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 �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그�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의� 진실성

을� 살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

을� 친히� 이루시고도�그� � 일과� 관련하여�사람들에게�일을�주신다.� 그는� 기적을�행하시지만,� 그� 기

적� 때문에� � 사람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

존귀한�덕이다.

=====11:45,46�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가지를� 말한다.� �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

는�것이다.

=====11:47,48� �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는� 내막이� 나타났다.�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 일이� 있지나� 않을

까�하는�것이� 대제사장들과�바리새인들의�염려였다.

=====11:49� �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에� 의하

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르는�것이다.� 그래서�여기서�이렇게� "그� 해"라고� � 밝힌� � 것이다(Jos.� Antiq.� 18,� 2,� 2).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 유

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

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 �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

난에�대하여� �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예언한�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만한� 것임을� 우리에게�알려�준다.� 이것이�마치,� 발람이�이스라엘� 백성의�장래에� 대하여� � 예

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 것과도� 같다(삼

상� 26:25)

=====11;51,52� �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

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 예언을� � 하였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 말미암아� 예언으로� 이용

된다는�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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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54�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 다시� �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 곳인� �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 구주님을� 죽

이려는� 그들의� 행동은� 괴이하다.� 그� 행동은,� 착한� 일일수록� 반대하는� 마귀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미를� 아시고� 깊은� 광야의� 한동네로� 피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때가� 이르기� 전에� 잡히는�

것을�면하시려는데�있었다.� 그는�이렇게�하나님의� � 뜻을� 정확하게�순종하셨다.

=====11:55�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갔더니� -� 이것은� 유월절� 전의� 결례(潔禮)를� 가리킨다.� � 그것은,�머리를� 깎거나� 옷을� 빠는� 정도의� 것이었다.� 창� 35:2;� 출� 19:10,11;� 수� 3:5;� � 대하� 30:17;� 행�

21:24,26� 참조.

=====11:56,57� �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었

던� �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 예수님에게� 대한� 민중의� 논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 예수님이�

잡힐�위기에�처한�줄�알고� 냉정한�태도로�논단한�것� 뿐이다.� � � � � 요한복음�제� 12장

====12:1� � � � �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

활시키신�이적은�너무도�크기� 때문에,� 여기서�그�사실을�다시�관설한다.

====12:2� �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마� 26:7;� 막� 14:3),� 그� 연

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 상상하기를,� �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

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

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 � �

"마르다는� 일을� 보고"� 곧,�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 가리킨다.� 눅10:40� 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 그보다도� 주님의� 진리

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 �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 자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

러낸다.� 그를�보는� 자마다�주님의�능력의�위대하심을�알게�되었다.=-

====12:3� � 마리아는�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

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 특별히� 술을� 향기� 있

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

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 수� �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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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 �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

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기름을�부었을�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않은�것� 뿐이고,� 그� 사실을�몰랐던� 것

은� 아닐� � 것이다.

=====12:4� �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

아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 사람들"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다� 지도적� 처지에

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 이름만� �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

는�관설하지�않았을�것이다.

=====12:5� �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하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는,� 가

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 세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

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 유다� �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 모르는� � 인물이었다.� 그는� 주

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 자이다.� � 곧,� 마� 22:37에� 예수님께

서�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다하고�목숨을� 다하고�뜻을� �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 할� �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 이상한� �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

는� 갓난� 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 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 후에� � 그� 선교사가�다시�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아이가�없어졌다.� 그래

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

로� 어두워져서�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 � (2)� 유다는�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마

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

이다.� 예수님은�천하의� 몇� 만배보다�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

하여� 천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 구실로�

삼아�트집을�잡았다.

=====12:6�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 맡고� � 거

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 14:4)은,� 부주

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마음� 속에� 자라나던�죄악(탐심)이� 결국�그로� 하여금�큰�일을� 저지르게�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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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

이� 말씀은�두�가지로�해석된다.� (1)� "그� 여자로�하여금�지금� 향유�붓고� 남은것을� � 보관시켜�후일

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 � "이를� 두게� 하라"란� 말(*� � � � � � � � � � � � � � � � � � � � � )은,�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 하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

위하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 뜻을� 지적

한다.� 곧,�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

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 기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한� 일은� 그� 한� 때

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 된� 후에는� 그런� 방식의� � 의식(儀式)� � 행위가� � 필요한� � 것은� �아니다"라고� �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 ,� 가가.� 13-14).

=====12:8� �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 의� 말씀과�같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

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 지시하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

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 따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 너

희들이라"고�하신� 셈이라고�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12:9-11� � �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

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 예수님의� �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 중에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온� 자들도� 있었다(11:46).� � 이렇게�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 베다니에� �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부활한� 나사

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많았다(11:45).�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의� 절정이다.�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이적의� 목격자들이�

많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시키신�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께

서는� 그� 놀라운� � 이적을� 어떤� 캄캄한� 모퉁이에� 감추시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

대중이� � 친히� 목격한� 사실이며,� 또� 그들이� 믿은� 진리이다.� � �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참으

로� 악독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 살리신�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여,� 그를� 다시� � 죽여� �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

신� 이적인� 반면에,� 그를� 다시� 죽이려고� 한� 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이� 들은� 서로� 정반대이다.� 대

제사장들의� 이� � 행동은� 시기심의� 극단이요,� 잔인성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강팍한� 행동이

며,� 대중� 인기를� 탐하여� 날뛰는� 괴악한� 명예주의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극악한� 원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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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한�이� 진리(예수�그리스도)는,� 진리의�극치(極致)이시다.

=====12:12�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 �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라,� 유

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온� 나그네들이었다.� 칼빈(Calvin)은� 이� 사실에서� 영적� 교훈을� 찾아� 본다.�

곧,�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관습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종교적�열심은� 식어졌고� 외식(外飾)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다른� 곳에서� 온�나그네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

는�예수님에게�대하여�열광적인�환영을�하게� 되었다.

=====12:13� � 종려� 나무� 가지를�가지고� 맞으러�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주의�이름으

로� 오시는� � 이� � 곧� � 이스라엘의� � 왕이시여� � 하더라� � -� � "호산나"란� � 것은� � 히브리� � � 말(*� � � � � �

� � � � )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가리킨� 것이

다.�

=====12:14,15�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

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 들어가

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 행동� � 설교이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바리새인들도� 무

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

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런� 무의식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

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 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

징적�행동들을�기록한� � 책이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 예수

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 �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징한� 것이로�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

(Grosheide).� 우리� � 본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9의� 말씀이다.�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 하나님의�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가지고� 오실� 터인즉�하나님의� � 백성은� � 두려

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야가� 장차� � 오실� � 소망)중

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 사람들은� �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할� 것인가?

=====12:16� �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 � 제자들

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 예수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9의� 성취하였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

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 우리가�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모르지만,� 세월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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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 동안에� 파란� � 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 깨닫지� 못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

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

는� 과정이� 단순치� � 않은�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고개를� 넘

은� 뒤에� 비로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시� 119:71에� �

말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

고�하였다.

=====12:17,18� �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 곧,� �

그들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다시�살려� 내신� 예수님의�권능에� 대하여� � 들은� � 까닭이었다.� 그�

사실에�대하여�그들에게�말한�자들은,� 나사로의�부활을�직접� 본� 자들이었다(17� 절).

=====12:19� � �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 때의�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 지적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 예언이� 되었다.� 그것

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 그들의� �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선교에�대하여�말씀하신다(20-32).

=====12:20� � 명절에�예배하러�올라온�사람� 중에� 헬라인�몇이� 있는데� -� 여기� 이른바� � "헬라인"

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 자들을� � 의미한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체�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할� 수� 있다.

=====12:21� �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 예

수를�뵈옵고자�하나이다�하니� -�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나아가지�않고� 빌립의�소개를� � 받고자�하

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 그런데,그들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 헬라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 혹은� �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

이�거주하는�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모른다.

=====12:23� � 예수께서�대답하여� 가라사대�인자의� 영광을�얻을� 때가� 왔도다� -� 이� � 말씀은,� � 그

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 찾아� 온� 마당에� 있

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

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

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

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 전하심으로만� � 된

다"라고� �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 ,� 1950,� PP.�

215-216).� � �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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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 영화롭게� 함

(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죽으심과�부활하실�사건을�보여�줌과� 관련되었다.

=====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 죽지� � 아니

하면�한�알�그대로�있고�죽으면�많은�열매를�및느니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 십자가에� �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 가리킨� � 비유인데,� � 사� 53:10의� 예언

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 영혼을� � 속건� �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그를�

따르는�자들(믿는�자들)이� 영생을�얻는다.

=====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 기록된� 희생의�원리는,� 일반� 사회에도�적용되는� �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지켜야� � 할� � 원리를� 보여주신다.� 곧,�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 � 따라가야� 하는� 신령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만큼(24� 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 따르지� � 말고(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그만� 따라가야� 된

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한� � 자기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에는,� 이어서� 그를� 믿

기(따르기)� 위한� 우리의� � 희생을� 권고하시곤� 하셨다(마� 16:21-26;� 눅� 9:20-26).� �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 자를� 가리킨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24� 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그에게� 맡기고� 그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듯이� 주님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이렇게�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용

이하게�그렇게�되는� � 길이� � 있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우리� 자신의�생명을�

미워함에�도달하는�방법은,� 그리스도의�말씀에�푹� 적시움이�있다"라고�하였다.

=====12:26�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 있으

리니�사람이�나를� 섬기면�내� 아버지께서�저를�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이어서�참

된� 신자� 되는� 원리를�더� 자세히�가르친�것이라고도�할� 수� 있다.� � 그것은� � 다음과�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 �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내세의�장소와�관련시키는�사상은,� 특별히�요한� 복음에�많다(14:2,� 17:24).� 8:21,� 33� 참

조.� 그러나� � 이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

의�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음도�

내세의� 장소에�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 주로� "천국"이란� 말

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 내세의� �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 경역)을� �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

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것이다.� � � � 여기�예수님과�및�그를� 섬기는�자들이�동일한�곳에� � 들어감에� � 대하여,� �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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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 노시스(露智派)�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들의� 연합

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

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통과하여� � 성립된�것이� 아니다.� 그것은�순전히�아버지의�뜻에�순종하신� 구원사적인� � 것이다.� �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하나님에게� � 순종하신�까닭에�하나님께서�그를�높이사�부활� 승천케�하신� 것을�가리킨다.

=====12:27�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가� 왔나이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 당하실� �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相)을� 맛�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 죄로� �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사망의� 비

참한�진상을�참으로�느끼지�못하고�죽는다.

=====12:28�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내가� 이미� 영광스럽게�하였고�또� 다시� 영광스럽게�하리라�하신대� -� 곧,� 과거에는�하

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 영화롭게� �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죽으심으로�그것을�영화롭게�하시겠다는�뜻이다.

=====12:29� � �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

말하였다고도� 하니� -� 그�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의� � 말씀(28� � 절)을� 깨닫지�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늘의� 소리가� 역시�

그�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그�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

었다고� 하였다(행9:7).� 그� 때의� 군중은� 저렇게�심령이� �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깨닫지� 못하였

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

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딴� 것으로� 오해한다(Calvin).�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 그것을� � 뜻� 있는� 말로는� 안� 셈이다.� 그것을� 보니,� 그�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

었으니�만큼,� 그것이�객관적�계시(客觀的啓示)인� 것이� 분명하다.

=====12:30� �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

위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곧,� "영광스럽게�하리라"는� 것(그리스도�죽으시리라는�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것"이란� 말씀은,� 그�

뜻�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 있다.� 그러나� 이� 귀절� 말씀이� 그런� 뜻을�가진다고�하기는�어렵다.�

=====12:31� � 이제� 이� 세상의�심판이� 이르렀으니�이� 세상� 임금이�쫓겨나리라� -� 이� 말씀은,� �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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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는�

처분되고(1:29),�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

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계� 21:5).� 곧,� � 예수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

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 포함함)을� 여기� 진술� 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

란�말은�사단을�의미한다.� 눅� 10:18� 참조.

=====12:32,33� � � 내가� 땅에서�들리면�모든� 사람을�내게로�이끌겠노라�하시니� -� 이것은,� �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3:14).�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음

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 자들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속

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죽으심으로� �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뿐� 아니

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 생명을� �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거듭�나게� 하시어�자기에게로�오게�하신다.� 6:44� 참조.

=====12:34� � �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 함을� � 들었

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나� -� "그리스도가� � 영원히� 계

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시� 110:4;� 사� 9:6;� 단� 7:14등에� 근거하여� � 생각하였을� 것

이다.� 그러나�그들이,� 메시야의�고난에�대한�예언(이사야서� 53장의� � 말씀)은� 몰랐던�것이다.

=====12: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 -� "아

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

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 알아야� 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그� 현재� 밖에� 없

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 미래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 못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

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

들은� 생각하기를,� �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

는� 공부나� 다� � 해� 가지고� 이�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해� � 보겠

다"고� �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 그� �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 때에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 다음에도� 잘못� 믿을� 것을� 약속함

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 허송하기� �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

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

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햐여� � 있다.� �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

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그�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 뮬러(George� �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

에� 비로소� � 복음� �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 � 이� 귀절과� 다

음� 귀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

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 수� �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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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 수� � 있다.� � 빛이� � 없는� � 세계에는� �

생명이� � 살� � 수� � 없다.� �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 Licht,� � womit� �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 ist.� � -� � Der� �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 하나님을� 보

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 보여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보여주신다.� 우리가�그리스도를�우리�심령� 속에� 모실� 때에는�하나님이�환하게�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

을� 해설하시는� 이가�아니다.� 그는� 빛으로� � 역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 그리스도는� �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

다� 참되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

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 중요

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행�

20:24에�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길과� 주� 예수께�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 은혜의�복음� 증거하는�

일을�마치려�함에는�나의� 생명을�조금도�귀한� 것으로�여기지�아니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이�이렇

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 수� � 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 주의로� � 살아야� �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

(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죽으셨던�분으로�내�영혼을�구원하게�하여라"고� 하였다.

=====12:36� � 너희에게�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빛을� 믿으라.� 그리하면�빛의� 아들이�되리라� � 예

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 빛이시다(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

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

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

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

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

울�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

번이나�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12:37� �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나� -� 요한�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1:5,� 10-11� 참조.� 예수님께서� �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

주시는� 표적(곧,� 증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 많음에도� �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

들� 자신에게�죄책이�돌아갈�것�밖에� 없다.

=====12:38� � 이는� 선지자� 아시아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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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니이까� 하였더라� -� 이� 말씀은,� 사� � 53:1의� � 인용이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팔"이란� 것은� 주

님의�능력(곧,� 사람의�마음�눈을� 열어�복음을�깨닫게�하시는� �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같이,�

예수님을�믿는�자들이�그� 때에�별로� 많지� 못하였다.

=====12:39� �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은혜가� �

많을술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 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 우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 이유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있기� 때문이다.

=====12:40� �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

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이사야서

에� 있는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사� 6:10).�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

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되는대로� 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 그런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

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 있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

용과�같이� 되는)� 죄책은�저희� � 자신들에게�있었다.

======12:41� �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 � 이

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

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 들었다.� �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말씀이�앞질러�인용된�내용이었다(사� 6:9-10).

=====12:42,43�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

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 영광보다� � 더�

사랑하였더라� -� 여기� "관원"들은,� 산헤드린공의회의�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킨다.� � 그들은� 세상� 영

광에� 사로잡혀�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신�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 "그러나"란� 말과� "에도"란� 말이� 이� 사실을� 역설

(力說)하며� 지적한다.� 그들이� 그� 믿은� 바를�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던� 원인이,� 진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고� 도덕력의� 부족이었다.� 곧,� �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까닭

이었다.� � � � 그들이�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않았으니,� 그것은� 더욱� 약해질�위험성이�있는�것이

다.� 신자가� 마땅히�강해야�할� 자리에서� 어떤�육적� 이유로�강하지� 못하면,� 그는� 강해질�방향을� 등

지고� 약해� 가는� 방향으로� 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계속하여� � 약해진다.� 그것은,� 사람이�

경사진� 어름판에서� 미끄러져� 내림과� 같다.� 그러면� 그� 때에� 믿는� 관원들이� 왜� 저렇게� 약하여졌던

가?�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욱� 사랑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니,� 곧� � 존재자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즉,� 본래� 없던� 자요� 이

제라도� 하나님께서� 없앨려면�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칭찬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찾아야� 된다(Hengstenberg).� 칼빈(Calvin)은� � 말하기를,� � "하나님

의� 판단보다도� 사람의� 박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짐승� 같은� �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 탐하면� � 명예의� � 종이� 됨.� 이런�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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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의(義)를� 행하다가도� 명예를� 위하여� 얼른� 중단한다.� 명예주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 중에서� 명예주의에� � 속한� � 자를� 사용하시지� 않고� 버리신다.� 무디

(Mody)가� 하나님께� 사용된� 이유도� 그가� 언제나� 자기를� 감추었으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데� 있

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인� 트레이(Torray)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 좋아

하였다고�한다.� 그는� 강단에도�될� 수� 있는대로�남들을�내세웠다고�한다.

=====12:44-46�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은� 그가� 바라�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의� 특징들� 가운

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 알게(영적으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

미에서�그는�세상의�빛이라고�하신�것이다.

=====12:47-50�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말씀과�권위가� 어떻게� 큰� 것을� 가리킨다.� (1)� 그� 말씀

은�하나님�아버지의�말씀인데�세상�끝날에�그� 말씀이�심판한다고�하시며(47-48),� (2)�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하시며(49절),� (3)� 그� 말씀이� 영생을�주는� � 것이니�만큼,� 그� 말씀을�

"영생"이라고�할�수�있다고�하신다(50� 절).� 요� 6:63� 참조� � � � � 요한복음�제� 13장

====13:1-3<마가의� � � 다락방>�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

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

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 하나님께로� 돌

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가지� 동기

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

다는�것은,� 인간으로서는� �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일이다.� 그런데,� 그가�계속하여�제자들

을� 극진히� � 사랑하심은� 하나님의�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일어난�곳에� 가장� 부

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 하나

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

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

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 �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 식사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

(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 복음은�그렇게�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13:4,5�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 시작하여� -� 유대

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 식사� 도중에� 그�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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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 � "겉옷"은� 저고

리를�말함이�아니고�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차림은�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 자리로� �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

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

의� 지극한� � 사랑은,� � 저렇게�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주님을� 사랑의�발� 씻는� 종으로�삼으셨다.� �

�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 �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

다(12-16).� 실행으로� 본을� �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 사랑

이면서�역시�지극한�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 주님께서�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

저으신�주님의�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이해될�수� 없다.� � 그것은�마치,� 그의� 못� 박히신�손에서�흐

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 그의� �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

고�하였다.� � �

=====13:6� �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

베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고기

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 떠나소서"라고� � 하였다(눅� 5:8).� 베드로

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 취급하면서� �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것이다.� 그가� 가이사랴�빌립보에서�예수님의�수난하실�일에�대하여�들었을�때에도�역시� "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 16:22).� �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 해석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 인간으로서� � 황송(惶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그것을� 감격하여� � 받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

지� � 않겠다는�것과� 같은�일이다.

=====13:7�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 이� � 후에

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 못하나,� � 후에는�하나님

의� 은혜로�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 속죄의� 고난으로� 신

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뜻을� 깨닫게�될� 것이었다.

=====13:8�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총을� 원

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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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 베드

로는�여기서� 새로운�깨달음을� 가지고�말한다.� 그러나�그는� 여기서도�또� � 실수함을� �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그들의�발을� 씻기심이,� 구속의�사랑에� 대하여는�상징하는�정도�뿐인� 사실을�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그는,� 그것이�죄를� 깨끗하게�하시는�일의� � 실제인�줄� 오해하고�욕심을�부렸다.

=====13:10� � 이미� 목욕하는�자는�발�밖에� 씻을� 필요가�없느니라�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

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간주된�때� 벌써� 온� 몸이� � 깨끗해진� �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

이다.

=====13:11� �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 하시

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 나타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깨끗지�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13:12-15�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

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

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 �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

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

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 자가� � 하나님� 앞에�

크게�간주될�것을�가리킨다(마� 18:4).

=====13:18� �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 곧,� � 구속

에� 관하여�말한다.� 예수님께서�구속�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참여할� � 자들은� �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

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 "복이� �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 이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 말씀하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

도께서�당하실� � 일의�예표였던�것이다.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 믿게� � 되며,� (2)� 그� 성취된� 사

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 활실성도� 믿어진다.� � � "내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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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줄"(*� � � � � � � � � � � � � � � � � � � � )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좆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

는� 뜻이다(Grosheide).

====13:20� � � 내가� 진실로�진실로�너희에게�이르노니�나의�보낸� 자를� 영접하는�자는�나를� 영접

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

하는�것과�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권위는�높은� 것이다.

======13:21�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 심령에� 민망

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 생각되는� � 것은,� (1)� 그의� 제자

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

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

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학자들의�공통된�의견이다.

=====13:22� �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 제자들이

(유다를�제외하고는)강퍅하지�않은�증표이다.

=====13:23� �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

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 식탁에� � 앉지� 않고� 왼� 팔에� 의

지하여�옆으로�누워서�먹었다고�한다(Westcott).

=====13:24,25� �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하

시는�자"는� 사도� 요한을�가리킨�것인데,� 이제� 베드로가�그더러�주님을�팔� 자가�누구인지�알려�달

라는�것이다.� 그것을�보면,� 사도� 요한은�누구보다도�예수님의�생각을� �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

던� 것이� 확실하다.� � �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 때에� �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 있었음

을�말한다.

=====13:26,27� � �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다

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 �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

유는,� � 그가� � 끝까지�회기하지�않기�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13:28,29� �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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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

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러라"

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 캄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앞길도�영원히�캄캄할�뿐이라는�것을�암시한다.

=====13:31� 지금� �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 여기서� � � � � � "인자"란� � � � � � 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

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 것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 고난이� 닥칠� 것을�

알게�한� 사건이다.� 그� 뿐� � 아니라,� � 다음� � 절에,� � "영광을� � 주시리니"(*� � � � � � � � � � � � � )라고� 미래

사(未來詞)로써�그리스도의�죽으신�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것을� � 보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얻었고"란� 과거사는�그리스도의�죽으실�고난을� � 가리킨다.� 예수님은�그의� 받으실�고난을�영

광으로� 보셨다.� � �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

안에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

신도�영광을�얻으신다.

=====13:32�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 인하여"란� � 말

(*� � � � � � � � � � � � � )은,� � 하나님� � 계신� � 곳을� � 가리킨다.� � 17:5에서는,� � 이� � 뜻이� � � "아버지와� � �

함께"(*� � � � � � � � � � � �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 부

활� �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 하심을� � 가리킨다(6:62,� � 17:5,� � 20:17;� �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 당분간� 나누

이게�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그� 뜻이다.

=====13:33� �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 너희

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 그� � 연락은� �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 그는� �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된다.� 그의� 제자들은�당분간�그와� 함께� 있을�수� � 없다는� � 것이다.� 36절� 참조.

=====13:34�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

서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 �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 천하만민을� �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

립시켰다.� 그러므로�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네� �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있다(레� � 19:18).� �

구약의� � 계명도� � 사랑� � 중심의� �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 � � � �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숯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

죄를� 믿는� �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 � �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 자들� 중

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 나누인다.� 그

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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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 �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 말하기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

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

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

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

다(10-11).� � 그는,� 희생의�정신으로�세상�사람들의�죄를�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

속의� �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 � � 내가� 계명을� 지

켜야만� 그리스도의�사랑� 속에� 나� 자신이�머물게� 됨을� � 모르기� �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 거하리라"고� � 하였다.� � � �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해� 보지� 않기� 때문임.� � 자식을� � 기르노라고�온갖�희생을�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

로� 시작해야� � 된다.� � � �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 것

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 주어야� � 된다.� � � �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닥.�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 있었다(1,3).� �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

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

들의�구명대(救命袋)� 없음을�보고� 자기들의�것을�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잘� 죽을� 수� 있다"라고� �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

� � �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

신다(약� 4:6)� � �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

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 같이� 설명된다.� 곧,�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

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

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

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 � �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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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 것은,� �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

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 � �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

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 지키는데� �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

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때문이다.

=====13:35� �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 아니고� � 주님을� 믿으며�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

은,� 두� 가지� 내용을�포함한�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 제자된�표가� 사랑이라는�말과�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13:36-38� � � 이� 부분의�말씀은,� 베드로의�결심과�예수님의�예언이다.� 예수님께서� � 말씀하

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가실� 것을� 가리킨� �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

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

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 그가� �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충성을�방해하기�때문이다.� � � � � 요한복음�제� 14장

=====14:1�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말씀(13:33)을� 들은� � 제자

들은�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들더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의� 이와� 같은� 권

면은,� 이� 아래� 여러가지� 이유를� 가진다.� �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이� 말씀의� 뜻은,� "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또� 예수님� 자

신을� 그� 만큼�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고� 믿으라는� 뜻이다.� 요

한� 복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며� 일체로� 본다(5:24,� 10:30,� 14:9,� 12:44).� 여기

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심은,� 그가� 일찌기� 그들에� 주신� 내세훈(來世訓)(12:26,� 13:36)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음� 절� 하반에,� 일찌기� 주셨던� 그의� 내세훈이� 다시� 관설된다.� 거기�있는� 해석을�참조하여라.

=====14:2�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 모나

이(*� � � � � � � � � � )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 의미하는� � 바,� � 하반절의� � "처소"(*� � � � � � � �� �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

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 수용할� �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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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 � 그렇지않으면� 너희에

게�일렀으리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번역은,� 원문의�문구를�괄호

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

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 것이라는� �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 � �

� � � )로� 시작되는� 문구와� �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쨔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 강조함이다.� �

� �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 우리가� 내세에� 들어

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

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 �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

의� 색체를� 가지지� �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 것이라고� �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 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사상에� 있는� 그것과는�다른�것이다.� 노시

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 유출설에� � 속한다.� � 한스� �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

(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 � � � � ).� 따라서� 노시스� �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

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 포이만드레스

(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 하늘은� 일이� 증

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 악한� �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 곳이요,� �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

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

든� 하늘들을� 지나서� � 여덟째� �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 들어간다.� �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 � �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

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 역사(役事)로� � 말미암는� � 구원론이다.� �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

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방법으로서�

하나님께� �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 사람의�

언사로�표현될�수�있다.� � �

=====14:4�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일찌기� 자기를�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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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말씀하셨다(8:19;� 10:1,� 7,9,37,38,� 12:26,� � 44,45,49,50;� 마�

11:27,� 28).� 다음� 귀절(6� 절)은� 그� 곳을� 명백히� 가리켜� 말하면서,� � 예수님� � 자신이� "그� 길"이라

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인고로� 그들은� 편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길� 되시는�

주님�자신은,� 그� 길이� 되시기�위하여�십자가를�지시는�큰� � 고생을�당하셨다.

=====14:5� �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

삽니이까.� 요한� 복음에는,� 특별히� 도마가� 충성스러우면서도� 둔한� 제자로� 나타났다.� 도마는� 아직

도� 예수님의� 말씀이� 천당을� 가리키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지각이� 둔한� 인물이다.�

그러나�그의� 질문�때문에�진리를�밝혀지곤�하였다(Barrett).

=====14:6� � � 예수께서�가라사대�내가�곧�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니�나로�말미암지�않고는� � 아버

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 � )를�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

(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 � �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

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 � � "나

로� 말미암지�않고는�아버지께로�올� 자가�없느니라."� 천당� 가는�길을� 알려는� � 도마의�질문에�대하

여,� 예수님은�천당� 가는�길보다�아버지께로�가는�길을� � 가리켜� � 주신다.� 그� 이유는�무엇인가?� 그

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

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행복이란�있을�수� 없다.

=====14:7�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 그를� � 알았

고� 또� 보았느니라� -�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런� 영적� 지식에� 부족하였었다.� 그러

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란� 말은,� 이제� 멀지� 않아�

곧� 실현될� 일,� 곧,� 그의�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과� � 성령의� 강림하심부터� 시작될� 완전한� 계시

(啓示)의� 시기를� 가리킨다.� � �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시기,� 곧,� 영적� 지식을� � 가지게� � 됨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장� 확신� 있는� 지식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보았느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의�

글에는� 이� 방면� 기록이� 적지� 않다.� 19:35에도� 말하기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고� 하였고,� 요일� 1:1-3에도� 말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

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에�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

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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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니"라고�하였다.

=====14:8� �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은�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타산적이다.� 그는,� 영(靈)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감각적으로� 보기� 원하였다.

=====14: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 나를� � 알

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 � 벴겔

(Bengel)은� 이� 귀절에�대하여�말하기를,� "우리가�영혼� 자체를�볼� 수� � 없으나,� � 그것이�몸을� 도구

로�하여� 행하는�바를� 보아서�알�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보는� � 자는� 동시에�하나님�아버

지를�보게�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관한� 일체의� � 생각에� � 있어서� 그리스도를� 거울로�삼을� 것이

다.� 그리스도는� � 보이지� � 않는� � 하나님의� � 형상이시다(골1:15)"라고� 하였다(Gnomon� 2,�

Edinburgh,� p.� 433).

=====14:10�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 하시는� 것

이라� -� 여기� 이른� 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

서� 그� 두� 분의� 도덕적� 연합(행위로써� 연합)도� 의미하였으니,� 고데이(Godet)의� 말한� 바와�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 '나는� 아버지� � 안에'란�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를� 겸허(謙虛)� 시킴이고,� '아버지는� 내� � 안에'란� 말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겸허에� 모든� 능력과� 지혜를� 전달하심이다"라고� � 하였다(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Zondervan,�

p.� 274).

=====14:11�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 그의� 말

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

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

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 일"이란� �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14: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을� 상대

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일반� 신자들을�염두에�두신� 것이� 아닐� �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이� 부분(14-17장)�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 임종유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이며(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 사도들에게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20).� � �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 주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

도와�구령(救靈)� 사업을�가리킨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행하신�일들은� 미래의�이� 큰� 일들을�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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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였다.� � � 신바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한다.� 그러나�그것은,� 땅� 위에서�행하신�예수님의�일과�승천하신�뒤에�그의� 하시

는� 일과으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은� 외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

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 "비유로� �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 계시라고� 할� 수� 있다(16:25-28).� 성령이� 오셔서� 사도

들을�통하여�만국에�복음을� � 전하시는�것은,� 저렇게�큰�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 아

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 예수님께서� �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 독립된� � 것인가?� 혹은� 그것의�

년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 즈안(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 취한

다.� � (2)� � 그러나� � 크로솨이데(Grosheide)와� � 버나드(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 간주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

또한"(*� � � � � � )이란� 헬라원어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 �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 의미하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 공로(功勞)에� � 의지하여� � 기도함이고,� (2)� 그의� 계명을�지키며,� 그의� 뜻대로�기도함이다.� � � �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 영광이� �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

다.

=====14:14�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이것은,� 윗절에� � 말씀하

신�약속을�거듭� 말씀하여�고조하는�것� 뿐이다.

======14:15� �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여기서� 예수님은,� 사도들더러� �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신자가� 그의� 계명을� 지킴이� 곧,� 그를� 사랑함이다.� 그런데� 문제되

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것이,� 16절� 이

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

각해� 보고저�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한다.� 그

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 렌스키(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

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

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 생각하고,� "계명"이란�것을� 기도하라는�부탁과�같이� 생각하여�윗말과� �

연락시타다다.� �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보혜사� 약속과�관련시킨다.� 곧,�

그는� � 생각하기를,� 신자가�계명을�지켜야�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약속된�성령의� �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 연락시키면서도� 위의� 버나

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 아랫� �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

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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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 운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약속�성취이다.� 이� 약속� � 성취는�인간의�주관적� 조건에�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는� 이� 약속� 성취를� �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 기다

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

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 관계를� 가진다고� 생

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

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 � "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

함에� 대해� 쓰는� �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

답은� 서로� �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

서� �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 기도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 � 불건전한� 신

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속하는� 란텔파(rANTERS)

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 않는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14: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 너

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 원어(*� � � � � � � � � � � � � )는,� 상

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혜

사"란� 말(*� � � � � � � � � � � � � � � � � � � � )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

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

를�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하여금�그리스도를� 모시고�있음과�마찬가지의�힘과�평안과�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 � 여기� 약속된� 보혜사

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 �

� � �

=====14:17�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

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에� 대한� 설명� 계

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 못하는� �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

만� 무엇을�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 이유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신�말씀이�의미한�바이다.

=====14:18,19� �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

면� �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 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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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라� -� 여기서�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것은,� � 위(16-17)의� �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

낌이�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하여,� 이� 귀절� 말씀은�재림을� � 취급한다고�하였다.� 그러

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

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일체이기�때문에�그가� 여기서� �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

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 것� �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

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

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 있으면"이

란�말(19절� 초두)과� 맞지�않기� 때문이다.� 여기�온다는�것은�미구에� � 오심을� � 의미한다.� 그� 뿐�아

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 (2)� �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

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

다(Smide).� (3)� 많은� �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

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

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

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

이다.� 그러므로� 이� �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

내가� �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

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주는� 원인

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것이다.� 요� 17:3� 참조.� � � 18절부터� 27절� 까지는�보혜사의�하실�일에� 대하여�말한다.� 곧,�

(1)� 신자들을� �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

를� 깨닫도록�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평안을�주심이다(27� 절).

====14:20�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리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는� 여

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

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복된� 사실에� � 있어서� � 그리스도와� � 연합한다(롬� � 6:3-11;� � 엡� 2:4-6;� 골3:3-4).� (3)� 신자가� 중

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 그리스도와� � 연합함(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

함(살전� 4:14,16).� � (6)� �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이�연합은�영원하며,� 죽음도�그것을�파괴� 시키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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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 "나의� � 계명."� 이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

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

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

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 모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 � 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

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

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 것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

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마� 22:37-40).� � �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육신에� � 나타나심보다�더욱�근거�깊이� 우리의�심령에�나타나심이다.

====14:22�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

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 그의� �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 제자들에게� �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

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이름을�나타내시지�않으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14: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 아버

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그의� 말씀을�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 지킨다�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 � � 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 하였으니,� �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 동시에� �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 이르러서� 더욱� 완

전히�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하나님이�우리에게� � 오셔서� �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우

리가�가서� 그와� 함께�거한다(Godet).

======14:24�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 아버지의� �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

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바로� 하나님의�말씀이기�때문이다.

======14:25� �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이것은,� 그가� �

이때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다음� 절

(26절)에� 나와� 있다.� 곧,� 그의� 별세� 후에� 보내실�성령님을�통하여�하실� 말씀은�더욱� 자세하고�많

다는�것을� 말씀하시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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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 �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 들은� 자들은� 사도들

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교훈을� 되살려�해설하시는�것이다.� 그러므로�그것은,� 예수님의�전날�

교훈을�사도들의�기억에�되살려�깨닫게�하시는�운동이다.

======14:27� � 이� 말씀이�윗절까지�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

있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희에게� 말한� 모

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

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 인사라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

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

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 � 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 그는� � 구속� 사업

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 그것과� 다른� 특성

은,� 그� 가장� 위험한�때에도�심령이�평안할�수�있는� 것이다(Barrett)

=====14:28�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엿더면� �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예수님께서� � 가신다는� 것

과� 오신다고� 하신� 것은� 그가� 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13:33-36,� 14:2,� 3,� 12,� 18-19,� 21,� 23�

참조.� 그런데� 그를� 사랑하신� 자라면� 그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 사건이기� � 때문이며(히� �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

아� 신자들의�구원이�완성되는�까닭이다.� � � "아버지는�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계신� 동안� 영광을� � 취하시지�않은� 고로� 아버지보다�낮음을�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계신� 것� 만큼,� 그� 역사에�있어서는�아버지에게�종속(從屬)하심을�말함이다.

=====14:29-31� � 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

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 �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

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예수님께서� 사단으

로� 말미암아� 해를� 받으시게� 되는� 목적이� 이러하니,� 곧,�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순종하시는� 마

음으로� 고난� 받으신다는� 것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수난은,� 사단의� 뜻을� 이

루어� 주려는� 것이� 아닐,� 하나님의� 계명(죽으라는� 것과� 부활하는� 것-10:17-18)을� 감심으로� 이루

시는�것� � 뿐이라는�것이다.� � � � � 요한복음�제�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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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 "참"이란� � 말의� �

헬라� �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 "실물"을� 가리

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저� 끝까지� � 점령한다"고� �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이런� 랍비� 문학에서�이� 비

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 참고할� 만한� 말이다.� � � �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

나무가� 아니며,� � 스스로� �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

하실� 열매를� 맺는� �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

붙임이� �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

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

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

하실� �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

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

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 �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말함이�아니니,� � 인격과�인격의�관계이면서�다만�신자� 편에서�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 .� � � � .� � � � � � ).� 이런� 그릇된�사상에서는�신자�자신과� 그리스도와의�구분을� 무시하

는� 경향이� 있다.� �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 �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

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

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 이� �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

이는� 내� 사랑하는�아듬이요�내� � 기뻐하는�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변화산에서는�말슴하

시기를,� "이는� 내� �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

(마� 17:5).� �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 다� � 거

짓되되�오직� 하나님은�참되시다(롬� 3:4).�

=====15:3� � �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 일러준� � 말"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 말씀을� 가

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 그렇게� 된는가?� 예수님

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

각해� 보려고� 한다.� � �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 되었다는� 것이,� 그것

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 헬만� �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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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

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

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능력을�가지시고�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말씀은�하나님�자신에게�분리되어�있

지� 않으며,� �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

하여� � 성령으로�말미암아�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섭취하여� 전파되는� �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 .� Kmpen,� J.� � H.� � Koke�

1911,� pp.� 502-503).� � �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

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 함(롬� �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 있고� � 영존하는� � 말씀이라고� �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 살리라는� �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

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 ,� � pp.� 501-504).� � �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 비유하기를,� �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

지고�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마술적으로�붙어�있다는� 의

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

시는� � 그리스도와� 연락하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능력이� 아니며,� 늘� � 말씀과� � 함

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 않으신다.� �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

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

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

,� Kampen� J.H� Kok� 1911,� p.� 503).

=====15:4-6� �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 � � � � � � � � � � � � )은� � "머물라"는� �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떠나지�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그를� 믿

으려고�자율적으로�찾아�가는� 자가� 아니고�벌써� 하나님으로�말미암아�그리스도안에�인도된�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 할� � 수� � 있는� � 일이� � 아니다(6:44).� 우리의�구원은�하나님께서�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것은,� 그리스도를�믿음과�그의�말씀을�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

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 된다고� �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완성하셨다(히� 5:8-9).

======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 원하는대로� � 구

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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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

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지키는�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유래는,� 영원하

신� 하나님의�구원�계약에� � 참여한� � 자로서�신종(信從)하므로�그리스도와�연합하게�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하나님의� � 영광만� 위하여�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 � "무

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 기도� �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

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 주님의� �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

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

다.� 곧,� � "그를� � 향하여�우리의�가진� 바� 담대한�것이� 이것이니�그의�뜻대로�무엇을�구하면� � 들으

심이라"고� � 한� 말씀이�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받는자들은�저렇게�내면적인�경건의�소

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 "여호와께서� � 대면하여� � 아시던� �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 왕하� � 20:5-6).� 그는� 기

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

대로,� "내가� 진실과�전심으로�주� 앞에� 행하며�주의� 보시기에�선하게� �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

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 �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

자들� �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

는� � 대제사장이�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있

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다시�기도한즉�하늘이�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큰� 죄인

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

에는�더욱� �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우러

러� �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

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

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

가� 그에게로�들어가�그로� 더불어�먹고� 그는� � 나로�더불어�먹으리라"고�하였다.

======15:8�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

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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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는�신자는� 나무와�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있는� 것이다.� � �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

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

하다고�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사람의�영혼이�귀하다고�하신�이유는,� 그들이�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

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여호와으�빛이�나타날�수� 있기� 때문이다.� � 잠� � 20:27에� � 말하기를,� "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 등불이� 되게� 하

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 99명보다� �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

하신다(눅� 15:17).

=====15:9�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

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 곧,� � 신자들은,� 하나

님과�그리스도께서�이루신�구속의�사랑을�받았기�때문에�서로� 사랑한다.� � � � "아버지께서�나를�사

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

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

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

가?�거기� � 거하는� � 방법은,� 예수님의�계명(신자들끼리�사랑하라는�계명)을�지킴이다.

=====15:10�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

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

타냄이다"라고� � 하였다(Jezus� � vraagt� � niet� een� mystick� zwelgen� � in� � liefdegenot,� � Maar� �

activiteit,� � liefd� � toonen.� � -�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 ,�

1950,� p.� 346).

=====15: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말은,� 윗절에서�가르친�내용을�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계명을�지키므로�그리스도와�사랑을�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받으면� 그들에게�기

쁨이� 넘친다.� � � �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

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 물론� �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된다.

=====15: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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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 �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

명이다(13:34;� � 요일� 2:7-8).� � 사랑은� � 이렇게� � 영원토록� � 변치� � 않는� � 진리이다(고전� � 13:13).� �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 �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 연합을�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 밖에,� � "몸과� � 지체"의� �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

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 자도� �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 �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 그는� 그리스

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

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

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

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

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

활을� � 위한� 것이다.� � �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정신이� 사랑하는�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 � � � � � � � � � � � � � ).�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 율례들이� � 이제부터�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하였다(요

일� 3:22,� 5:2).� � �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

러므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 형제파

(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 그렇게� � 잘못� � 움직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 마음에� 온다는� 영적� 감동

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

시� 받아서�하였다고�하면서�통과하려�하였다.

=====15: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 이것

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 그는,� 자

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 같이� �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

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 �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

심은,� � 다만� 우리의�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 죽기까

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 것이가?� � 이렇게� 신자

들은�예수님의�친구�되는� 큰� 축복을�받았다.� � 아브라함도� � 하나님의� � 친구였다(사�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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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 너희가�나의� 명하는대로�행하면�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 "나의� � 명하는대

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 형제를� 사랑하

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

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

가�그리스도의�친구�된� 자격,� 곧,� 그� 속죄의�사랑을�받은�자격을�발휘한다는�의미이다.

======15:15� �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

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

것은,� � 영원� � 전부터� � 하나님� � 아버지에게� � 깊이� � 감취었던� � 오묘한� � 진리였다(벧전� 1:10-11).

=====15:16�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 구하든지� 다�

받게�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사도로�세움�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 말미암아� � 된� 것인� 만큼,� 그들

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

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 응답된다.� �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

싶�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 �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신자가�연합하게� 되는� 것

(1절� 이하에�있는� 말씀)이� 전연�주님으로�말미암아서만�성립된다는�것을�알려준다.

=====15:17�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 � 위에� �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

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

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잇다.� � � � 18-27� -�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

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자게� � 대하여,� �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

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 일이니(18� �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

다(행� 5:41).� (2)� 그들이� �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

들이�선택을�받아�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핍박을�받으셨으니�종� 된� 자로서�그

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 행

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 신자를� 핍

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

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

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 하실� �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

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

희� � 위에� � 계심이라"고� 하였다.

=====15:18�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

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 대하여� 말씀

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 미움을� 받는다.� 그들

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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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그� 만큼� 그들과�예수님과의�관계는�밀접하다.

=====15:19� �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그들을� 사랑할�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근원이� 그냥� 세상에�속하

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

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

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15:20� �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피할�수� 없다는�것과,� 또한� (2)� 도덕적� � 처지에서도� � 그것을�받음이�당연하다는�

것이다.� � � 내� 말을� 지켰은즉�너희�말도� 지킬�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 트집� � 잡는다는�뜻

이다.

=====15:21,22� � �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엇다.� 그러나� 그� �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자게� 증거하셧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 예수님을� �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좋을�번�하였다.(Bengel).

=====15:23,24� �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 미

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

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 신앙과� � 동반하나� 증오는�불신앙과�동반한다"라고�

하였다.� �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 예수님의� � 행하신� � 이적들을� � 가리킨다.� 10:25의� 해

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

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

적�과오가�아니고�더덕적�반역이다.

=====15:25� � �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

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 인용이다.� 시

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초두의�부분�곧,� 율법으로써�구약�전체의�명칭을�삼앗던�것이다.

=====15:26,27� �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

을� �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 증거하게� �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 실상� �

일체이다.� � 성령은� � 사도들을� � 통하여� � 역사하시며� � 증거하실� � � 것이다(Wikenhau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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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latter).� � � 너희도�처음부터�나와�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예수님을�친히�목도한�사

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와� � 같은� 자격으

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

다.� 행� 1:8� � � � � 요한복음�제� 16장

=====16:1� � 이것을�너희에게�이름은� -� 혹자는� '이것'이�예수가�지상�사역을� � 통하여� � 말씀하신�

모든� 교훈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H.R.� Reynol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자들이� 세상으로

부터�미움을�받아� 핍박을�당하게�될� 것이라는� 15:20-25의� 말씀을� � 가리킨다고�주장한다(Meyer,�

Godet,� Barrett,� Lindars).� 그리고� 버나드(Bernard)는� 핍박� 외에� �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

이것'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

이것'은� '핍박'과� 직접적인�연관이�있다� � 하겠으며,� 그럼에도�불구하고� 15:26,� 27의� 보혜사�성령

에� 관한� 내용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은�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타우타'(*� � � � � � � � � )

를� 사용하였는데� 이� � 단어는� 복수로서� 두� 가지� 이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버나드(Bernard)의� 견

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15:11에도� 나오지만� 본� 구절에서는� 부정문이�

뒤이어� 진술된다.� 15:11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이� 강조되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

려� 함이라'고� 진술된� 반면� 본� 구절은� '핍박'이� 강조된�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 '실족지�않게� 하

려� 함이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 �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실족하다'에� �

해당되는� � 헬라어� � '스칸달리조'(*� � � � � � � � � � � � � � � � � � � )는� '넘어뜨리다'를� 의미하는데� 본서에서

는� 본절과� 6:21에만� 언급되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즉� '배교'(背敎)를� 의미한다(C.K.� �Barrett).� 그렇지만�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마태복음에서는� '배교'(마� 11:6;26:31)뿐� � 아

니라� '죄를� 범하는� 것'(마� 5:29)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 징계인� '출회

'(혹은� 출교)와� 사형을�염두에�두고� 계신(2절)것� 같다.� 예수는�자신이�십자가에�체포될�때� 제자들

이� 다�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들�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박해를� 견딜� 수� 없음을� 알고� � 계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그와� 같은�

박해를�만날� 때� 그의�말씀을�기억하여� � 실족하지�않도록�미리� 말씀하신�것이다.

=====16:2� �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

대인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보다� �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 하였

으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

는� 것을� 의미했다(9:22�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를� �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

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였다.� 즉�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시대의� �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사장� 정보등

으로부터도�분리되는�현실적인�고난이었다.� 실제로�유대� 지도자들은�급속히�성장하는�기독교� � 세

력을� �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

강행했으며� 주후� 90년경에는� 람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 II)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 정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도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

여� 새로운�기독교�공동체�문화를�형성하게�되었다.� '출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9:22� 주석을�

참조하라.� � � 때가� 이르면� -� '때'로� 번역된� '호라'(*� � � � � )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 � '호라'는�

본서에서� 관사와� 함께�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두� � 가지로� � 구분되어� � 언급되었다.� (1)� 아직� 이

르지� 아니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4;7:6,� 8,� 30;8:20)� (2)� 이미� 성취된� '때'의� 의미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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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되었다(12:23,� 27;13:1;16:32;17:1).� 두� 가지� 때의� 관계를�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이

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로�표현한�바� 있다.� 그러나�본절의� '때'는� 예수의�사역과는�관계가�없다.�

이� '때'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있게� 될� 제자들� 및� 성도들의� 순교의� '때',� 박해의� '때'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이� 관사를� 생략한� 것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때와� 구분함과� 동시에� 박

해가� 어느� � 시대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 � 이것이� 하나님

을� 섬기는� 예라� -�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 일들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으

로� (1)� 출회시키는� 일과� (2)�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

는� 열광적인�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

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 �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다(행� 26:9-12).� 그리고� 영국에서는� 성

경을� � 영어로� � 번역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그외에� 종교� 개혁� 지도자

들이� 로마� �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

음의�극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도�이�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편견과� � 독선에� � 사로잡힌� 맹

신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 예수가� 제자들에

게� 앞으로�있을� 핍박에�대해� 미리� 가르치신�이유도� 그들이�그� � 일을� �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않

도록�하기� 위해서였다.

=====16:3� �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본� 구절은� 5:21의� 반복으로� 예수는� � 2절에� � 기록

된� 광신적인� 핍박자들의� 열심이�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에게� 계시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고백

했다(갈� 1:13,� 14).� 이� 무지는� 이성적인� 지식의� 결핍으로� 인한� �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

으로� 만나지� 못한� 데서� 기인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아집� 및�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행� 3:17;고전� 2:8).� 어느� 시대에서든지� �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성경� 지

식만을� 소유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 지녔던� 것과� 같은� 종교적� 독선과� 편견으로� 인해� 형제를� 핍

박하는�무지에�빠질� 수� 있다.

=====16:4� � 이� 말을� 이른� 것은...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예수께서는� 종종� 미래에� 되어질� 일들

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이른�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2:22;13:19;16:1� ).� 특히�

13:19에서는� 이� 표현이�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지만� 본절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있

을� 제자들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은� 앞날에� 닥칠� � 자신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로

부터� 직접� 들은� 후�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의� � 말씀을� 기억하고� 큰� 위로와� 확신과� 기

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14:26)� 그들은� 핍박을� �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을�것이다.� � � 처음부터�이� 말을� 하지� 아니한�것은� -� '처음부터'(*� � � � � � � � � � � � � � � ,� 여스� � 아르

케스)란� 표현은� '아프� 아르케스'(*� � � � � � � � � � � � � � � )와� 같은� 의미로� 예수의� 공생애� � 시작� 또는�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시점을� 의미한다(H.� R.� Reynolds).� 그런데� 그때부터� � 함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미래에� 있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 두� �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그가� 행하시는� 일들뿐�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핍박을�목격했으므로(11:8)� 구태여�그러한� � 핍박에� 대해� 말씀하실�필요가�없었다.� (2)� 예수가�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핍박의�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으므로�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필요

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제자들이� 핍박의� 대상이� 될� 것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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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에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이해하지� � 못했을� 때가� 많았으며(14:8,� 9)�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조차� 제대로� 이

해하지� 못했다(14:5).� 처음부터�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더욱더� � 이해하지�

못했을�것이다.

=====16:5� � 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

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 예수는� '지금'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

신다.� � �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 � � � � � � � � � �

)는� 14: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 � � � � � � � � � � � � � � � )와� 거의� �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

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 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 그런데� �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

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2),� 본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

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땅에� 사명

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 동시에� � '간다'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

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 �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이� 말은�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

시나이까� ?'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 '에로테세'(*� � � � � � � � � � � � �

)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 되겠지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

의�교훈에�대한� 제자들의�즉각적인�반응이�없음을�지적하고�있을�뿐이다.

=====16:6� � 도리어...근심이�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마찬가지로�본절에서�예수는�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만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 예수는� 자신

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 공유하기를� 원했으나

(15:11),� 제자들이�기쁨이�충만하기는�커녕�오히려�근심이�가득찼다.� 그들이�예수가�떠나시는�목

적과�의도를�명백하게�이해했다면�슬픔에�잠기지�않았을�것이다(14:18).

=====16:7� � 실상을...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 � � � � � � � � � � � � � � � � ,� 해� 알레데이아)이란� 말

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 자체만을� � 언급하는� � 것처럼� � 보인다(롬� 9:1).� 그

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 너희가� 믿지� 아니하

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 같은� � 용어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구

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도� 약화�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

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

에게� 준다.� 여기서� � '유익하다'(*� � � � � � � � � � � � � � � ,� 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 되는� �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이� �

두� �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 �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 근거이며� � '너희'는�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 사역

을� �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 위해� � 오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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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16:8�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부터� � 예수는� � 성령의� � 사역에� � 대해� � 설명하신

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 본절부터는� 세상

을� 책망하시는�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26의� 대상은�제자들이지만� � 본절에서의� 대상

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

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 � � � � � � � � � � � � )는� '엘렝코'(*� � � � � � � � � � � )의� 미래형

이다.� '엘렝코'는� '훈계하다',� '죄를� � 깨닫게� �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행� 2:36,� 37에

서� 베드로의� � 설교를� �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

'(convict)을� 의미한다.�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

의� �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또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

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 있어서� �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

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

의� 판단은�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 단호함이�곧� 세상에�대한� 심판을�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

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

를� 폭로함으로� � 그리스도의� 죄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그리스도를�거부함으로써�이미�심판에�처해졌음을�드러내신다.

=====16:9� � 죄에...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죄'(*� � � � � � � � � � � � � � ,� � 하마르티아)는� � '빗나감',� '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갖고� 있지만�원래는�화살이�과녁에서�빗나간�것을�가리킬�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다.�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구체적인� 내용은�다음� 두� 가지이다.� (1)� 당시� 유대인들이�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

척한� 것이다.� 이는� 15: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백히� 선포되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

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야로�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했다(1:11).�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15:25)�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러

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 상통한

다.�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세계� 각처에�전파되는

데� 성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 예수는� 자

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1:12)�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 못하리라(3:18)고� � 말씀하셨다.� 8:24에서는� '너희

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

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

하도록�도우신다.� 이것이�죄를� 책망하시는�성령의�궁극적인�목적이다.

=====16:10� � 의에� 대하여라�함은� -� '의'(*� � � � � � � � � � � � � � � � � � � ,� 디카이오쉬네)는� 본서에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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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본문에서� 그� 개념은� '죄'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C.K.�

Barrett),�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의'는�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 관계에� 의하여� 나

온� 말로� 예수의�무죄를�의미한다.� (2)� 세상의�의가�잘못된� � 것이라는�것을� 지적하는�의미로�사용

되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되신� 하나님의� � 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

수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의'로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

는� '공의'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

라(롬� 10:3)� 오히려�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행� 7:2).� 이처럼� 세사은� 하나님께

서� 보내신� �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의� 심판

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 더� � 확증된

다.� 특히� 죄와� 의가� 재판의� 상황에서� 셈어의� 동의어로� 해석된다면� '죄책'과� � '무죄함'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B.� Lindars).� 한편� 예수께서� 보좌� 우편으로� � 올라가신� � 것은� '하나님의� 의'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 의'(Perfect� Righteousness)라

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 스스로� 세워놓은� 의의� 규범이� 불완전함을� 세상에� 드러내

심으로�사람들이�완전한�의를� 따라� 살도록�책망하신다.

=====16:11� �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

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죄와� 의에� 대한� � 성령의� 책

망이� 그리스도의� '무죄'와,�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 것이라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세상의�임금이�심판을�받았다는�것을�증거한다.� 세상� 임금은�사

단의� 세력을� 의미한다(12:31;14:30).�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

중� 권세� 잡은� 자'(엡� 2:2),� '어두움의� � 세상� � 주관자'(엡� 6:12)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단

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마� 8:29;막� 1:24;3:11;눅�

4:41;행� 19:15)�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

은� 자들을� 심판하셨다(히� 2:14).�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

한� 자신의� � 승리를� 확인하셨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한편� '심판을�

받았다'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

될� 수� 있다.� (1)�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이미�심판이� 시작되었다.� � 예수에� �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

나는�것은� 그들에�대한� 심판이�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예수는�심판하는�권세를�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5:27).�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이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될� 승리를� 내다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

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 않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5:24)� 승리가� 확

정되어�있으므로�심판도� � 확정된�것으로�말씀하신�것이다.

=====16:12� �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 � � � � � � � � � � � � ,� 바스타조)는� 문자

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 옳긴다'는� 의

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 것에� 적용되기도� 했

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 지는� �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행� 15;10;갈�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

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

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

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 것이다.� � 그들의� � 연약함은� � 성경의� � 여러� � 곳에� �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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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 있다(마� � 16:6-12,� 21-23;17:17;막� 16:14).� 그리고�이런� 이해력의�부족으로�인해�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떤� 것이다(18:15-27;막�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 보아� �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

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 그동안� �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

로�이해하게�되며�그뿐� 아니라�그� 말씀이�그들� � 속에� � 살아� 움직이며�그들의�삶이히� 4:12)� 변화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

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

가�될� 것이다(행� 1:8).

=====16:13� � 진리의�성령� -� 혹자는�이�표현에�대해�성령이�진리를�가져와서�세상�사람들의�양

심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도� 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이에� � 대해� � 자세한� � 것은� 14:17� 주석을� 참

조하라.� �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사본에� 따라� 두� � 가지

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1)� '엔� 테� 알레데아'(*�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내산� 사본(*�

)과� 베자� 사본(*� )을� 비롯한� 몇몇� 대문자� 사본(L,� W,� *� )과� 소문자� �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구절을� '진리의� 전� � 영역� 안에서의� 인도하심'으로� 해석

하거나(C.K.� 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 교훈하심'으로� 해석한다(Farrar,� Fenton).� (2)� '에이스�

텐� 알레데미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몇몇� 대문자� 사본� (L,� W,� *� )과� 많은� 소문

자� 사본이� 이� 독법을� � 따른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바실(Basil)� 그리고� � 크리소스톰

(Chrysostom)과� � 같은� 교부들도� 이� 독법을� 지지한다.�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는� � 헬라� � 고전� �

문학에서처럼� '에이스'가� 항상�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 구절을� '성령의� 활동하에서� �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잘�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 주장한다

(Dela� Potterie).� 그리고� 모리스(L.� Morris)도� 이� 독법을� 지지하면서� '시간이� � 경과함에� 따라� 성

령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고� 본� 구절을� 해석한다.�

여기서� 어떤� 독법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 관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

실이다.� 포치(Porch)의� 진술대로� 예수는� � 이� �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

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

다.� 이런� 의미에서� � 진리의� �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15:26).�

성령은� � 세상을� �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

편� '인도하다'(*� � � � � � � � � � � ,� 호데게오)는� 70인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

이� �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 아니라� � 궁극적인� � 구원을� � 갈구하는데� � 사용되었다

(시� 5:8;27:11;107:14;143:10).�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출� 13:17;수� 24:3).� 이처럼� '호데게오'는� '인도하다'는� 의미와� '가르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Kittel)� 본절에서도� '가르치다'란� 의미를� 취할� 수� 있으나� 이� 단어�

뒤에� 이어지는�전치사� '에이스'와� 잘� 조화가� 되지� � 않으므로� '인도하다'가� 적당하다.� � � 자의로� 말

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8:26;12:49;14:10)� .�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슴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 말씀한다.� �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할� 모든� 말씀은� 다� � 드러내셨다(4:25).�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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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 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 성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 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 � 장래� 일

을...알리시리라� -� '장래일'(*� � � � � � � � � � � � � � � � � � � � � ,� 타� 에르코메나)은� 문자적으로� '다가오는�일

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

에서� 본다면� '장래일'은� 곧� 닥칠�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

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보면� '장래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 받앙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 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 것들이� � 아니기� 때문

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눅� 7:1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

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

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 수� �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

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 기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

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 주어진� �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

들에� 대하여� 다� 알고� � 계시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16:14� �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8절),�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13절)� � 소개되었거니와� � 여기서는� � 예수의� �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 앞에� �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

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의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

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

심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 곳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

다(눅� 9:58).�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 길� �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 예수의� 부활

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의� 의미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 � � � )로� 연결되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뒷받침된다(15절� 주석� 참조).� 즉� 이러한� 부활에� � 대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

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

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드러내셨고�또� 앞으로도�드러내실�것이다.� 요컨대�성령이�증거하는�예수의�복음은�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 6).� �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임을� 나타낸다.�

즉� �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 어버지의� � 영광을� 드

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 기초하며� 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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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역의�결실을�맺는� 일에�초점을�맞춘다는�것이다.

=====16:15� �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 것이

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3:35;5:20).� 삼위�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 사역을� � 계획하셨고(엡� 1:3-5;벧전� 1:2)� (2)� 성

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엡� � 1:7)�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

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엡�

1:8,� 9;벧전� 1:12).� 그렇기� � 때문에� �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

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 한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

역을� � 의미한다.� �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바탕으로한� '장래� 일'(13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일'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

가� � 계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 때문이다.� � 바울이� � '그리스도의� � 풍성'(엡�

3:8)이라고�표현한�것도� 바로� 이� 말씀을�근거한�데서� 비롯되었을�것이다.

=====16:16� � 조금� 있으면� -� 16절과� 19절� 사이에서만�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가� 일곱� 번이나� �

반복� 사용되었다.� '조금'은� 본장에서는� 시간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1)� 일차적으로� 이� 단어는�

매우� 짧은� 시간을�의미한다.� (2)� 상징적으로는� 긴� 시간의� � 개념으로도� � 이해될�수� 있다.� 예를� 들

면� 예수는� 자기의� 공생애� 기간이� 약� 3년정도였지만� 자신이� � 이� � 땅에� 있는� 기간을� '잠시'라고�

말씀하셨다(12:35).� 이에� 따라� 후반절에� 나오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의� 말씀으로� � 이해될� � 수� 있으나� 상징적으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수

도� 있다.� 예수는� 사역� 초기에�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7:6,� 8,� 30;8:20)라고� 말씀

하시면서� 작정된� � '때'가� � 아직� 남았음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시기� 바로� 전후에는� 여러번� '때가� 왔다'(12:23;13:1;16:32;17:1)라고� 말씀하심으

로써� � '때'의� 임박성을� 드러내셨다.� 따라서� 잡히시는� 그�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

씀하신� 것은�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부활� 사건의� � 임박성을� � 강조하신� 말씀이

다.� 사실� 7:33에서도� '조금'이라는� 말이� 언급되었지만� '에티'(*� � � � � )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보다�

덜� 긴박한�의미로�사용되었다.� � � 나를� 보지� 못하겠고� -� '못하겠고'에� 해당하는�헬라어의� 부정어� '

우케티'(*� � � � � � � � � � � � )는� '더� 이상은...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제자들이� � 앞

으로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시� 보게� 된다는� � 하반절

과� 모순을� 일으키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 자신이�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심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예수는� 여러번� 이� 세상을� � 떠나심을� 시사했다

(8:21,� 22;13:3,� 33,� 36;14:4,� 5,� 28;16:5,� 10).� 그리고� 지금이� � 바로� 그� 시점이므로� 제자달이�

예수�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 나를� 보리라� -� '보리라'의� 헬라어� '와세스

데'(*� � � � � � � � � � � )는� � 본서에서� �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것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1:51).� 그러

나� 이�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 가시적인� 것을� 본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L.� Morris).� 그런데� 본절

에서� 다시� 보게� � 되는� 것이� '영적인� 실재'를� 의미하는지� 가시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적

인� 실재로서� 제자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성령은� 만나게� 됨을� 가리키지만� 가시적

으로� 보는� 것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됨을� 가리킨다.� 예수는� 앞부분까지� � 성령� � 강림및� 그

의�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치셨으므로� 본절이� 성령과� 전혀� 관계� 없는� 설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다시� 본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오심� 두� 가지� 모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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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사건은� 앞으로� �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제자들이� 눈

으로� 목도하고� 체험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는� 내용에서� 어느� 하

나도�제외될�수� 없다.

=====16:17� �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무슨� 말씀이뇨� -� 예수가� 7:33에서� 자기를� 이� 땅에� � 보

내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의� � 뜻을� �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의문을� 가진� 바� 있다(7:35).� 아직� 영적�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제자들이� 예수가� 세상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 영적� �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아버니께로� 가신다는� 예수의� 말씀� � 자체가� 난해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난

해함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적� 메시야관� 곧� 메시야가� 오시면� 영원히� 그들� 곁을� 떠나지� 않

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 예수가� 떠나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실지라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 제자들은� 난해한� 문제� 앞에서� 스승이신� 예수에게� 묻지� 못하고� 서로에게�

물음으로써�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인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든지�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스승에

게� 드러내지� 않으려� 했든지,� 그들의� 행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소

경과�같은� 상태에�있으므로�서로�의논한다고�이해할�수� 있는� 것이�아니었기�때문이다.

=====16:18� � 본절과� 17절의� 의문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17절은� 16절에서� 언급된� �

예수의� 말씀� 전부와� 연관이� 있지만� 본절은� 그� 내용중�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에� � 국한되어� 있

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말은� 16절에서�두� 번� 반복된�것을� 가리키는데�제자들은�결코�이

해할� 수� 없었다.� 자세한� 것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 � 알지� 못하노라� -� '알다'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다'(*� � � � � � � )는� 경험적� 지식을� � 의미하는� '기노스코'(*� � � � � � � � � � � � � )와는� 달리� 직관적인�

지식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두� 동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

였으므로�본절에서�그� 의미를�구분할�필요가�없다.

=====16:19� � � 그� 묻고자�함을� 아시고� -� 요한은�제자들이� � 서로� 말하는�것을� 예수가� � � '들으셨

다'(*� � � � � � � � � ,� 아쿠오)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셨다'고� 표현하여� 예수의� 신적인� � 통찰력을� 강조

했다.� 한편� 18절과는� 달리� '알다'라는� 동사가� � '기노스코'(*� � � � � � � � � � � � � � )로� 언급되었다.� 여기

서도� 요한은� 그� 동사가� 지닌� 독특한� 의미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17절에� 사용된� '오이다'와� 반복

을�피하기�위해� '기노스코'를� 사용했다.

=====16:20� � 진실로�진실로� -� 이에� 대해서는� 6:47� 주석을�참조하라.� � � 곡하고�애통하겠으나� -�

'애통하다'(*� � � � � � � � � � � ,� 드레네오)라는� 동사는� � 본서에서�본절에만� 사용되었으나�공관복음서에

서는� 몇� 번� 사용되었다(마� 11:17;눅� 7:32).� 이� 말은� 또는� '애곡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울다

'(*� � � � � � � � � ,� � 크라이오)와� � 비슷하게� 사용된다.� 여기서는� '울다'와� 함께� 사용되어� 예수의� 죽음

이�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 �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를� 따랐

던� 두� 사람이� �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와� 나눈� 대화를� 기술했던� 누가는� 그� 두� 사람이� �

슬픈� � 빛을� 띠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눅� 24:17).� 이� 슬픈� 빛은� 그� 두�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

니라� 모든�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슬픔에� 잠겨�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죽음�

후� 제자들이� 크게� 슬퍼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각자� 본래의� 곳으로� 흩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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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신� 후� 그의�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그들에게�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예수는� � '슬픔'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 � 근심이� 도

리어� 기쁨이� 되리라� -� 예수의� 말씀은�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

여� 기쁨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 제자들에게는� � 처음에� 슬픔의� 원인이� 되나� 나중에는�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L.� Morris).�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에게는� 수치와� 멸시와� 조롱의� 대

상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예수와� 일시적인� 이별로� 인한� 슬픔을� 주지

만� 결국에는� 기쁨으로� 변하여� 영광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Calvin)은� 십자가를� 복음의�

결실을� � 위하여� � 저희들이�감수해야�할� 슬픔이라고�설명하였다.

=====16:21� � 여자가�해산하게�되면� -� 예수는�십자가와�부활� 사건을�해산(解産)하는� 여인에�비유하셨다.� 해산하는� 여인이� 주는� 일반적인� 의미는� 출산의� 고통� 뒤에는� 아기가� 태어난� 것으로� 인

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본� 구절은� 다음에�이어지는� '아이를� 낳으면'이란� 구절과� 같이� '호탄'(*� �

� � � � � ,� whenever)과� 연결된� 부정의� 시상절(indefinite� � temporal� clause)로서� '해산할� 때마다'

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고통� 후에� 따르는� 기쁨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구약

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가� 지닌� 의미를� � 살펴본다면� 본절에서� 예수가� 이� 비유를� 사용하신� 근

본적인� 목적을� 좀더� 깊이� 파악할� �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종종� 슬픔과� 위험에� 처

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에� 비유하였다(사� 26:17-19;66:7-14;렘�

4:31;6:24;호� 13:13-15).�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의� 날이� �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사� 13:6)� 후기� 유대교는� 이� 수난기를� 메시야� 시대의� � 도

래를� � 위한� 해산의� 고통이라고� 교리화시켰다(C.K.� Barrett).� 에수는�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자신

의� 죽음과� 부활에� 적용하여�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하심으로써� 아직� � 이루어지지� � 아니한� 부활

의� 사건을� 미리� 바라보고� 있었다.� � � 아이� -� 본문이� 구약의� 메시야적� 종말론� 사상을� 전제하고� 있

지만� � 태어난� � '아이'를� 사� � 9:6에� � 나오는� � '한� � 아기'와� � 직접적으로� � 연결시키는� � 것은� � 무리

가� � 있다(C.K.� Barrett).� 오히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 제

자들의�고통과�함께� 탄생할�새로운�이스라엘(L.� Morris)� 곧� 교회를�의미한다.

=====16:22� �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 이는� 16절과� 19절에서� 사용된� '나를� 보리라'에� � 암

시된� 부활의� 사상과(16절� 주석� 참조)� 관계되어� 있다.� 즉� 16절과� 19절에서는� 제자들이� � 보는� 것

에� 예수의� 부활뿐�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이중적� 의미로� 암시되어� 있으며� 본절에서는� 예수� 자신

이� 직접� 제자들을�보신다는�것에�초점이�맞추어져�있다.� 따라서� � 이는� �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

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나타내실� 것을� 미리� 알리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 속에� 있다� � 할지라도� � 저들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 �

마음이� 기쁠� 것이요� -� 성도가� 얻는� 마음의� 기쁨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하나

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한� 후:다윗은� 숱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

뻐하며�즐거워했던�구약의�대표적인�인물이다(시� 16:8-11;21:1,� 6;33:21;35:9).� 그리고� � 선지자

들도� � 하나님의� � 구원하심을� � 바라보고� � 기뻐했으며(합� 3:18),�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기버할�

것을� 권했다(사� 66:10,� 14).� (2)�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

령이� 임했을� 때� 그들의� � 삶에� � 있어서� 두드러진� 점은� 기쁨이� 충만했다는� 사실이다(행� 2:46).� 바

울은�성령의�열매� 중� � 사랑다음으로� '희락'� 곧� '기쁨'을� 언급했다(갈� 5:22).� 이� 기쁨은� 모진� 박해

와� 고난�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원한� 기쁨이다.� 본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기쁨은� �

두� � 가지� 종류의� 기쁨� 모두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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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고� 기쁨을� 얻게� 되었으며(눅� 24:52),�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 돌아가신� 후에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들의� 기쁨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 �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

라� -� 이� 말은� 제자들이�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잠시� 체험하는� 일시적인� 기쁨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

리고�이말은� 제자들이� 십자가의�의미를� 이해한� � 후� � 더욱� � 심화된� � 기쁨에� � 사로잡히게� � 된다는� �

의미이기도� � 하다(L.� Morris).� 한편� '빼앗다'란� 동사가� 사본에� 따라� 세� 가지로� 각거� 달리� 기록되

었다.� � (1)� '아페레이'(*� � � � � � � � � � � ):이� 표현은� 유일하게� W사본에서만� 언급되었다.� 이� 말은� � '

없애버리다'란� 의미로�본� 구절의� 의미를�매우� 강화시킨다.� 그러나�이� 말은� 필사자가� '들어올리다'�

또는� '제거하다'를� 의미하는� '아이레이'(*� � � � � � � � � )를� 거의� 비슷한�의미를� 지닌� '아페레이'로� 잘

못� 보고� 필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아레이'(*� � � � � � � ):이� 말은� '아이로'(*� � � � � � � )의� 미래형

으로� 몇몇� 사본(B,� D)의� 지지를� 받는다.� 본절이� � 시제상� 미래를� 나타내므로� 그런면으로� 보면� 이�

단어가� 적합하다는� 주장이� 많다.� (3)� '아이레이'(*� � � � � � � � � ):현재형으로� 가장� 많은� 사본의� 지지

를� 얻고� 있다.� 본절이� � 미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형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생생하게� � 묘사하거나� 미래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겠다(마� 26:18;27:63;막�

9:31;눅� 3:9).� 따라서�본절에서는� (3)의� 동사가�가장� 적합하다.

=====16:23� � 그� 날에는� -� 헬라어�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마지막� 날',� '시대의� 종말'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엇다(막�

13:17,� 19).� 그러나� 본절에서� 이� 구절은� 부활� 이후의� 시간을� � 가리킨다고� � 봄이� 바람직하다(L.�

Morris).� '그날'은� 19절의� '조금� 있으면'이라는�단어와�같이� 유동적�의미를�지녔다고�볼� 때� '성령

이� 오시면'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다.� � �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헬라어�

'에로타오'(*� � � � � � � � � � � )라는� 동사는� 16절과� 30절에서� (1)� '질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

나� 이� 단어는� 후기� � 헬라어에� 있어서� (2)� '복� 주시길� 구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

서에서는� � '무엇을� 요청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4:31,� 40,� 47;14:16).� 만약� � (2)의� � 뜻

으로� 해석한다면� 본절의� 의미는� 후반부와� 연결되어� '내게� 구하지� � 아니하리라...아버지께서� 구하

는� 것을� 주시리라'의� 의미로� 변하게� 된다(C.K.� Barrett).� 이렇게� 되면� 본절은� � 27절과� 연결되어�

구절� 전체가� 간구에� 관한�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들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26절)�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에게� 간구한다(27절)는� 것을� 설명하심으로써� 예수는� 제

자들이� 자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고� � 자신의이름을� 가지고� 성부께� 직접� 기도할� 것을� 강조하신

다.� 그러나� (1)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 '구하다'(*� � � � � � � � � ,� 아이테오)라는� 동사를� 수반하는�

후반부와� 별개의� 문장으로� � 해석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고별� 설교� 가운데서� 계속� � 의문을� �

가졌다(13:6,� � 25;14:5,� 22;16:17,� 18).� 모리스(L.� Morris)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본� 구절� 다음에� 오는� '진실로� 진실로'란� 용어가� 주제의� 전환을� 암시하므로� 하반절의� 기도에� 관한�

내용과� 본� 구절은�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따르면� 본� 구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 된다.� 그러나� 이

하의� 근거로� (2)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1)� 요한은�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야� 할� 경우에�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여� 중복을� 피하는� 경향이� � 있다.� � (2)� � 하반절의� '아버지께� 구하는'이란� 표현은� 제

자들이� 직접� 기도해야� 할� 대상을� 밝혀주는� 의미를� 지닌다.� (3)� '진실로� 진실로'란� 예수의� 언어�

습관은� 반드시� 주제가� 바뀌어질� 때� �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강조하며� 확증하실� 때�

더욱�많이� 사용되었다.� (4)� '그날'은� 미래적인�날로서�성령이�오셔서�활동하시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에� � 제자들이� 예수께� 직접� 질문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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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이� 사실을�밝히실�필요가�없었다.� � � 아버지께�구하는�것을� 내� 이름으로�주시리라� -� 본� 구

절은� '내� 이름으로�구하는� � 것을� 주시리라'(26절� ;� 15:16)는� 표현과�동일한�의미를�지닌다.� 왜냐

하면� 헬라어� 본문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로� 해석될� 수� 있기� � 때문이다.� �

15:16도� 본� 구절과� 같은� 어순을� 지니고� 있지만� 개역� 성경은� 각기� � 어순을� � 바꾸어서� � 번역하여�

'내� 이름'이란� 용어가� '구하는� 것'과� '주시는� 것'� 모두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 보여준다.� 즉� 성도

들은�예수의�이름으로�하나님께�기도하며�또한�그의이름으로�기도� � 응답을�받는다.

=====16:24� �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 � � � � �

� � � )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지니고�있는� '에로타오'(*� � � � � � � � � � � )와는� 달리� '요구하다

'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

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

없고� 오직� 예수의이름으로� � 이루어� �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

본절에서� � 아직은�선명하게�드러나지는�않았다.� 아직� 십자가�상에서�피흘림이� 이루어지지�않았으

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이름으로�구하는�모든� 것을� 얻게�되는� 것이다.

=====16:25� � 이것을� 비사로..일렀거니와� -� '비사'(比辭)로� 번역된� '파로이미아'(*� � � � � � � � � � � � �

� � � )는�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본서에서� '비유'으� � 뜻으로� �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로

이미아'는�확연히�드러나지�않거나�난해한�말,� 또는� 상징적인�말의� � 형태를�가리킨다.� 한편� '이것

'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1)� 21절에� 언급된� 해산하는� 여인에� 관한�

비유.� (2)� 14:1에서� 본장� 24절까지� 말씀하신� � 것으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사들.� (3)� 지

금까지� 예수가�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모든� 것.� 혹자는� '이것'을� 세� � 가지� � 모두� �

포함하는� � 것으로� � 이해한다(C.K.� Barrett).� 그러나�세번째의�추정은�타당하지�않다.� 왜냐하면�이�

말씀하시는� 시점과� 장소가� 12:36을� 기점으로� 구분되므로� '이것'이� 12:36이전에� 말씀하신� 것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추정은� '이것'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복수이므로� 타당

하지� 않다.� 따라서� 두번째의� 추정이� 가장� 적당하다.� � � 때가� 이르면...밝히� 이르리라� -� '밝힌다'는�

동사는� 10:24에서� � 유대인들이� � 예수를� 향하여� 예수�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던� 곳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서� 예수는� 숨기는� 것과� 밝히는� 것을� 그� 이유를� 깨닫는� 집단과그것을� 깨닫지� 못

한� 집단을� � 대조시켜� 설명하시지� 않고� '때'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하신다.� 본절에서는� 비유의�

깊은� 뜻에� 대한� 이해의� 유무가� 마가의� 기록처럼(막� 4:11)� 제자이냐� 아니면� 막연한� 집단이냐에�

따라�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그� 계시를� 밝히시는� 때에� 의하여�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 따라�

구분된다.� 즉�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모든� 무리들(제자들� � 포함)과� 부활을� 경험한�

무리들�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비밀을� 밝히� 알리시는� '때'는� 직접적으로� 부활� 이

후� 곧� 성령의� 오시는� 때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지상� � 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

령이�오시는�때에�가서야�성부에�관한� 것을� � 포함한�모든� 비밀을�알게� 될� 것이다.

=====16:26� � 너희를� 위하여..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성령을� 통해서� 비밀을� 밝히� 알게� �

되면�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능력이� 생길� 것이다(23절).� 그러나� � 그것�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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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 아니다.� 실제로� 표면적으

로� 드러난� 의미로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14:16이나� 17:9의� �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

다.� 메이어(Meyer)는� 이� � 문제를� � 해결하기� � 위하여� � 14:16과� 17:9에서� 예수가� 언급하신� 기도

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의� 기도를� � 의미하므로� 본절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신� 이후에는� 제자들의� 기도� 능력이� 성숙하여져서� 중보� 기도가� 필요� 없

다는� 주장은� 오히려� 더� 큰� 모순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도� 예수

가� 성부� 앞에서� 대언자로� 성도를� 위해� 활동하신다(요일� 2:1)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8:34과� 히� 9:24-26�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 성령의� 오심� 이전이나� 이후나� 계속되고� 있음을�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모리스

(Morris)는� 예수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후� 문맥에서� 이미� 강

조한� 기도의� 기본� 원칙에� 근거하여�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성되었으므로� 그� 희생의� 공로는� � 지속적이다.� � 무릎을� 굻고� 아뢰지� 아

니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무에� � 의해� 성도들의� 기도는� 보좌�

앞에� 상달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중보� 기도는�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된다.� 그러나� 세상에� 게

신� 동안에는� 보좌를� 향해� 예수가� 친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17장).� 따라서� 본절은�

성령이� 오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여러� � 가지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에� 의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때문이� � � � 다.� 그리고� 27절은�그� 이유를�한�걸음� 더� 나가서�설명해�준다.

=====16:27� � 아버지께서�친히...사랑하심이니라� -� 본� 구절에서� '친히'(*� � � � � � � � � ,� 아우토스)라

는� 말이� 보통의� 경우와� 같이�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 의미는� '자의적

인'� 또는�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C.K.� Barrett,� Field).� � 본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인� 것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아버지의� � 사랑을� 보장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설득에� 의하여�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랑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자의(自意)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다(요일� 4:19).�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했다.� '없는� � 자들을� 부르셔서� 있는� 자들로� 만드시고,� 딱딱한�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는�

것이� � 하나님의�사랑이다.

=====16:28� 아버지께로...왔고...아버지께로� 가노라� -� 요한은� 본서를� 시작할� 때� �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의� 신성과�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비밀과(1:1-14)� 아들을� 통한� 구속사역을� 설명했

다.� 이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매우� � 인상적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오신� �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처럼� 본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오고� 가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밝

히셨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 곧� 세상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그러한�

메시야로� 삼으려는� 자들의� 의도가� 전혀� 소용없음도�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을� 떠

나심은�성령의�오심에�대한�확실한�조건이요�신호이다.

=====16:29� � 제자들이� 말하되...아니하시니� -�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비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10:6)� 예수� 역시� 비사로� 말쓰마신� 후에� 그날에� 가셔야� 제자들이� 밝히� 알�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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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23,� 25절)� 말씀하셨음에도�불구하고�제자들이�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 것은� 매우� 예외적이

며� 특히� 25절과�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을� � 위한� 학자들의�견해를� 소개하

면� 다음과� 같다.� (1)� 밝히� 드러날�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은� 예수에�대한� 사랑과�올바른� � 신앙� � 고백을(27,� 28절)� 가지고� 있었기�때문에�예수가�말씀하시

는� 비사의�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 대답했다(C.K.� Barrett).� (2)� 제자들은� 의혹의� 안개가� 다� 걷혀�

명확히�이해하고� 있는�것� � 같지만�사실은�이해하지�못하고�있다(Bernard,� Lindars).� 단지� 그들이�

이렇게�말하는�것은� 예수께서�비사로�말씀하지�않았으며�또한�쉽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

이� � 어렵게� 생각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표현(비유� 또는� 비사)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 일들� 자

체에� 대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 우리들과는� 달리� 그리

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는� 아직� 경험하지� �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L.� Morris).� (3)�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를� 다� �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단지� 어떠한� 느

낌에� 의하여�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에� 대한� 아주� 미비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Calvin).� (4)� 25절

에서� 약속한� '그때'가� 제자들에게는� 성취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

계시되었으므로� � 이� 당시� 제자들은� 모든� 의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H.R.� Reynolds).� 그

러나� �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이후에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마� � 28:17)� � 25절에

서� 약속한�것들이�이� 시점에서� 성취되었다고�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않다.� (5)� 제자들은�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있어서� 예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세심하게� 들으면서� 예기치� 못했

던� 걔달음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자발적이면서도� 만장� 일치적인� � 고백이� 그들의� 입술에서� 튀어�

나왔다(Godet).� 그런데� 31,� 33절� 말씀은� 제자들이� � 예수의� 가르침을� 밝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들이�예수의�가르침을�완전히� � 이해했다면�체포되던�스승을� 버려두고�도망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 이상의� � 모든�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하

여� 감추어진� 비밀에� 대하여� � 조금�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약간의� 과

장이� 포함된� 것� 같다.� �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것을�믿었으므로�이와�같은�고백을�할� 수� 있었다.

=====16:30� � 지금에야...아나이다� -�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 예수이시

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를� 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제자들뿐만� �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신다(2:24,� 25).� 그래서� � 예수는� �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19절)�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제자들은� 이같은�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

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

큼의� 믿음은� 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본절과� 29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마� 26:33).� 이

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마�

26:41).� 그들은� 스승� � 앞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

해는�아직� 불완전하다.� 그렇지�않았다면� 32절의�말씀은�예수가�굳이�할�필요가�없었을�것이다.

=====16:31� � 이제는�너희가�믿느냐� -� 예수는�제자들의�믿는다는�고백을�단순히� � 반복하고� � 있

는� 것� 같지만�이� 구절은�앞뒤� 문맥에�따라서�조심스럽게�상고(詳考)되어야�한다.� � 왜냐하면�그들이� 믿는다는� 고백(30절)과�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32절)� 사이에� 본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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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학자들은�본절에� 대하여�크게� 두� 가지의�견해를� � 제시한다.� � (1)� 혹자는� 의문문이� 아니라�서

술문으로�이해하여� '이제는�너희가�믿는도다'로�재번역한다(Bernard,� Godet,� Meyer).� 이러한�해

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

되었다(McClymont)는� 것으로� 지금까지� 무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이� 정도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 여겨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

(反語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즉� 본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거냐� ?'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

있는�것이다.� 우리는�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본절을�이와� 유사한� 13:38과� � 비교해� � 볼� 필요가�

있다.� 13: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 죽을� �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만큼� 완전한� �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

수를�믿는다고�고백했으나�그들의�믿음은�지극히�불완전한�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

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강림� 때까지�온전한�믿음을�갖기� 위해�기다리라는�권고적인�의미가�내포되어�있다.

=====16:32� 너희가...흩어지고� -� '흩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르피스데테'(*� � � � � � � � � � � �

� � � � � � � � � )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

할� 때�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헤치느니라'로� 번역함).� 본절에서� � 예수는� 슥� 13:7에� 언급된� 예

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 그� � 흩어짐은� �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 예언대로� �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 길로� � 도망해� � 버렸다(마� 26:56).�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 연약함을� 보였다(마� 26:33,� 34).�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

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

해� 교회가� 출발되었다.� 무엇보다�그토록�연약했던� 제자들에�의하여�교회가� � 출발하였다는�사실은�

그� 출발의�궁극적인�기원이�제자들의�용기와�지혜에�있지� 않음을�증거한다.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과�관련된�내용은�각기� 조금씩�차이가�있다.� (1)� 예수의�말씀하신�것들이� � 이루어질�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13:19;14:29).�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 하기� 위함(15:11).�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14:4).� (4)� �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

리고� '이것'이� 지칭하는�바를�고별� 설교(13-16장)로� �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자세

한� 것은� 25절과� 16:1� 주석을� 참조하라.� � �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다들이� �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신다.� 예수가� 주

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이다(14:27).�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22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갈�

5:22)�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다.� � � 담대하라� -� 제자들이� 담대

(膽大)해야� 할�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 되는� � 환난이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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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이다(마� 5:12).� � �

내가� 세상을�이기었노라� -� 여기서�세상은�바로� 앞에서�언급된�세상과�약간� � 구별되어야�한다.� 앞

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 인간들이� �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 사단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

(12:31;14:30).�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 전자의� �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

면� 예수가�이� 세상에�오신� 목적은� 정치적�왕국을� 건설하기�위한�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한편� '이

기었노라'(*� � � � � � � � � � ,� � 니카오)란�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 서신서에서도� � 영적� � 승리를� � 나

타내는데� � 사용되었다(요일� 2:13,� 14;4:4;5:4,� 5).� 예수는�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묘사함에� 있어

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이�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는� �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왕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슬이를� 거두셨으며(롬� 5:12,� 14;딤후�

1:10)�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

라"(롬� 8:37)고�고백할�수� 있었다.� � � � � 요한복음�제� 17장

=====17:1� 이� 말씀을� 하시고� -�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告別)�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이� 말씀'(*� � � � � � � � � ,� 타우타)은� � 13-16장�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지시하며� 보다� 가깝게는� 16:33에� 나타난�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

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 한편� 혹자는� 본장� 기도가� 13:30,� 31� �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

하지만(R.� Bultmann),� 고별� 설교� 뒤에� 그의� 제자들과� �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을� 구태

여�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친구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전혀� � 부자연스럽지� 않다(C.K.� Barrett).� � � 눈을� 들어� -�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

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 드릴� � 때�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시� 121:1;겔�

33:25;단� 4:34)였으며�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 자세였다(L.� Morris).� 예수는� 11: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이는� 공간적인� � 개념에서의� '위쪽'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

다는�의미에서의� 위쪽을� � 가리키며�결국� 아버지와의�영적인�교제를�상징한다.� � � 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 � � � � � � � � )는� 막� 14:36에서와� 같이� 아람어� '아바'(*� � � � � )를� 전제로�

한� 말이다(G.� Dalman).� 이� 아람어는� � 자녀가� �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

빠'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장에서� 예수는�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데(5,� 11,� 21,�

24,� 25절)�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 � 때가� 이르렀사오니� '때'

란�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 가리킨다(막� � 14:41).�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7:30;8:20).� �

�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

니다(8:50).�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 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 보다는� �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

다(L.� Morris).� 한편� '영광'(*� � � � � � � � � � � ,� � 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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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7:39;12:16,� 23;13:31,� 32� 등).�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

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 � 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명

을� 완벽하게� � 이루셨다는� �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

부의�영광에� � 고정(固定)되어� 있다(12:28).

=====17:2� �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 할� � 뿐

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 예수의�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

(15:1-10)�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 설명된다는� � 것이다.� �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 � � � � )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 의미하는� �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를� 의미한다는� 견해(Barnard).� '판'(*� � � � � )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

는� 것이�아니라� '그의� 뜻대로�부르심을� � 입은� 자'(롬� 8:28)� 곧� 그리스도와�연합하는� 모든�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 본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

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

립적�관계에�있는�자들이다.� 그들은� '만민'(*� � � � � � � � � � � � � � � � � � � � � � � ,� 파세스�사르코스)과도�구

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6:35,� 37,� 44,� � 45,� � 65).� 만

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 기도하신� 점을� 배

제할� 수는� 없다.� � �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 � � � � � � � � � � � � � � � � � � � � � � ,� 파

세스� 사르코스)�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 이들을� 다

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

(L.� Morris).�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

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3:35,� 36).� 예수는�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5:27)� �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마� 28:18-20).� �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것은� � 이미� � 십자가의�죽음의�승리와�영광을�바라보고�있음을�시사한다.

=====17:3� �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

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예레미야는� '자랑하는�자는�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공

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 깨닫는� �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 � � � � � � � � � � � � � ,�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

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

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

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

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 자신을� 가리켜�'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

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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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

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 표현으로� �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 표현은� �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대한� 자신의� � 견해를�밝힌� 표현이라고�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

께� � 대한� �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

그러나�요한이�본서를�기록하면서�그날밤의�기억들을�잊어버렸다고�구태여�가정할�필요는� � 없다.

=====17:4� � 아버지께서...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 예수는� 아직� 그의� 사역이� 끝나지� �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하였노라고� 고백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 이미� 승리를�

보증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 말씀은� 타당하다.� 이는� 시간적인� 성취의� � 의미보다는�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는� 차원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일'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가� 행하

신� 모든� 교훈과� 사역이며� 그것은� � 인간을� � '심판하는� � 일'과� '생명을� 주는� 일'로� 요약된다(H.R.�

Reynolds).� 한편�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 대하여� � 말씀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 '보내신� � 자'� � 또

는� � '일을� � 맡겨� � 주신� � 자'로� � 등장한다(3:35;4:34;5:36� 등).�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상의�

질서를� 나타냄과�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10:30)을� 동시에� 강조한다(L.� Morris).� 한편� '이루어

'(*� � � � � � � � � � � � � � � � � ,� 텔레이오사스)는� 뒤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19:30)라는�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에� 단� 한번도� 주저하는� 일이� 없으신� 예수는� 그

의� � 삶�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 하나님을� � 영광스럽게� � 하셨다(C.K.�

Barrett).�

=====17:5� � � 창세� 전에...영화롭게� 하옵소서� -� 본서의� 기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예수께서� � 하

나님과� 함께� 계셨음을(1:2)� 기록했으며� 또한�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누누이� 강조

해� 왔다.� 본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두� � 차례� �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금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첫번째� '함께'라는� 말은� 성육신� 이전� 상태로서의� 하늘�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며

(Lenski)� 두번째� '함께'는�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 얻게� 될� 영광을� 지시한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

기� 이전에� 계셨던(1:1;8:58;16:28)� 아들의� 신성과� 영광은� 성육신을� 통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

로� 스스로� � 비하(卑下)되었다.� � 그는�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서� 완전한� 인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17:6� �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12:28)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버지의� 일(4절)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인물� 전체를� � 대변하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께서� 나타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품성,� 인격,� � 능력,� 구속� 사역,� 은혜,� 사랑�

등�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세상� 앞에� 현현(Manifestation)되

어졌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신적� 존재의� � 영원하고� 본질적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

(R.� Bultmann).� � �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 견해로� �

갈린다.� (1)� 이미� 그들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Beza,� Calvin).� (2)�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들은� 옛� 언약의� 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 백성으로� 살

아가고� 있었음을� 갈리킨다고� 보는� 견해.� 이� 중� 하나를� 확증적으로� � 지지하기는� 어려우나� 문맥상�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 �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는�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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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지키는� � 것으로써� 유지된다.� 사실� 본서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 표

현이� � 나오지�않는다.�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 지켰으며(8:55),� � 제자들은� � 예수의� � '말

씀'(8:51;14:23)� 또는� '계명들'(*� � � � � � � � � � � � � ,� 엔톨라스,� 14:15,� 21;15:10)을� 지키도록� 명령

받았다.� 한편� 예수는� 자신의� 말이�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말을� � 지키는� 자를� 아버

지께서� 사랑하리라고� 하셨다(14:23,� 24).�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율법

(*� � � � � � � � � ,� 노모스)이나� 구약의�계명들(*� � � � � � � � � � � � ,� � 엔톨레)을� 준수했다는�의미보다� 본서

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말씀'(*� � � � � � � � � ,� � 로고스)이신� 예수(1장�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

경과�그�의미'� 참조)를� � 영접했다는� � 의미로� � � � � � � � � � � � � � � � � 이해될�수� 있다.

=====17:7� � 지금� 저희는...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 예수는� 자신의� 구체적인� � 선

교� 사역이� 아버지에게� 의존(依存)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을� � 앞절과� � 연결시켜� 이해하면,�본절은�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말씀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제공한다.� '아버지께서�내게�주신� 것'이란�단지� 예수의�말씀'(*� � � � � � � � � � � ,� 레마타,� 8절)

이나� '이적'등� 사역에� 필요한�요소들�뿐만� 아니라� � 예수� 안에� 포함된�모든� 것들을�강조하여�표현

한� 말이다(Lenski).� 반면에� 제자들이� '알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다알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하시는� �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L.� Morris).� 한

편� '지금'(*� � � � � ,� � 뉜)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예수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드디어�예수의�모든� 것이� 하나님과�연유되어�있다는�사실을�알게� 되었다는�의미를�강조한다.

=====17:8� � 내게� 주신� 말씀들을...받고...아오며...믿었사옵나이다� -� 헬라어� 원문에서� � 본절은� '

왜냐하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여기서� '말씀'은� 입술로써� 이야기

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개개의� 말씀들을� 지칭한다(3:34).� 이는� 말로써� � 전달한� 사상을� 뜻하고� '

로고스'(6,� 14절)와� 구분된다.� 본서에서� '로고스'는� 말이라는� 의미� 보다는� '예수의� 인격'과� 관계

되어� 더� 많이� 사용되었다(6절� 주석� 참조).� 한편� � 본절� 속에는� 다섯�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나온

다.� 먼저,� 두� 개는� 예수께� 관한� 것이며� � 나머지� 세� 개는�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1)� '나오다'와� '

보내다'는� 예수께서�하나님으로부터�보내심을�받은� 역사적인� 사실을�나타내는�부정과거로� 사용되

었다(Lenski).� � 반면에� (2)� 나머지� 세� 개� 즉� '받았다',� '믿었다'� 등은� 제자들의�영적�상태의� � 변화

를� � 암시한다.� 제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고서�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그

들은� 예수께� 대한� 이해와� 지식으로� 성장해� 갔으며� 그� 앎(16:30)으로부터� 믿음이� � 생겨났다.� 물

론�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시간적�순서를� 엄격히�규정(規程)하기란�쉽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이�두� 표현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보다� �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순서에� 관계�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 있다는� � 사실이다(6:69).� 본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말씀

을�받음으로�그들은�믿음을�가지게�되었다는� � 것이다(1:12).

=====17:9� �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 본절에서� 예수께서� 위하여� 간구

하는�대상을�제자들에게만�제한시키셨다고�해서�세상을�위하여�구하지�않으신다는� � 것은� 아니다.�

단지�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L.� Morris).�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은� 밀접한�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Lenski),� 예수는� 중보자로서� �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유지시키신다.�

특히� '비옵나니'의� 헬라어� '에로탄'(*� � � � � � � � � � � � )은� 종속� 관계에서� 사용하는� '아이테인'(*� � � � � �

� � � � � )과는� 달리� 대개� 동등한�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신

적� 신분을� 시사한다.� 한편� �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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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며(요� 3:16)� 궁극적으로�세상�역시�하나님께로�돌아와야�할� 대상이다.� 본장� 속에서도�예수

는� � 세상이� '믿을� 것'(21절)과� 세상이� '알게� 될� 것'(23절)을� 위해�기도하신다.� � 예수는� � 제자들의�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셨다'(1:29).� 그는� 세상의� � 어리석음과�그들의� 죄

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눅� 23:34).� 세상은� 제자들과� 달리� 하나님과� 대립적(對立的)인�위치에�있다.� 따라서�그� 기도의�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필연적이며,� 세상을�위한� 기도는�더� 이상�

세상이� '세상적'이지� 않기를�구하는�것이고�더� 나아가�회개에�이르기를�구하는�것이다(L.� Morris,�

C.K.� Barrett).� 예수는� 세상에서� 그의� � 말씀을� 듣고� 회개를� 외쳐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먼저� 기

도한다.

=====17:10� �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내� 것이온데� -� 모든� 피조물은� 모두� 이와� 같이� � 고

백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는� � 말씀은� � 피조물� 중에� 누

구도� 따라할� 수� 없다(Luther).�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증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의� 말씀'(7,� 8절)� � '만민을� � 다스리는� 권세'(2절),� '그에게� 속한� 제

자들'(6,� 9절)� 뿐만� 아니라� 창세� 전부터� � 아버지와� � 함께� 지녔던� 신적인� 존재와� 영광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Lenski,� Luther).�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신성도�

예수의� 것이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무이한� 부자� 관계로

서� 예수의� � 계속적인� � 중보(中保)� 사역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롬� 8:34).� � � 내가� 저희로...영광을� 받았나이다� -�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여� �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

수는�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 기록한다.� 이러한� 완료형은� 제자들의� 복종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 이미� � 영광을� 받으셨음을� 시사함과� 아울러(6,� 8절)� 장차� 제자들

의� 신앙� 고백과� 복음� 사역을� 통해� 영광받으시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외관상� 제자들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달리� 특출한� � 신앙을� 보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말씀하심

은� 제자들의� 장래에� 대한� 예수의� 신뢰와�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 완료형� 시제의� 사

용을� 저자가� 보다�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하나(C.K.� Barrett)� 그다지� � 합당하다고

는�보기�힘들다.

=====17:11�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자연히� 예수의� 관심은� 황량한�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게� 닥

칠� 위험에� 집중되었다.� 본절의� 기도� 내용은� 특별히�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 승천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할� 수� 있다.� 예수는� 부활� 승천� 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 계속� 보호� 인도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죽음에서�승천에�이르기까지의� � 막간(幕間)에는� 예수께서는�오직�하나님�아버지께만�제자들을� 맡기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Godet).� � � 거룩하신� 아버지여� -� 세상의� 죄악과� 대조를� 이루는�

'거룩하다'라는� 단어가� � 아버지의� 칭호에� 붙여졌다.� '거룩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본질적

인� 의미에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본질은� 모든� 죄와� 분리되어� 있고� � 대립

되어� � 있기� 때문에� 거룩한� 아버지에게� 죄악� 가운데� 남겨두는� 제자들의� 보전을� 간구하는� 것은� 조

화를� 이룬다(Lenski).� 또한�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 거룩할지어다'

(레� 11:45)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성별을� 요구하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서�

세상과� 성별되기를� 바라는� 예수의� 간구를� 담고� 있다.� � � 아버지의� 이름으로...보전하사� -� 헬라어� '

테레오'(*� � � � � � � � � )는� '조심스럽게� 돌보다',� '굳게� 붙들다',� '보호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본장

에서는� '제자들이� �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6절)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제자들을� 보전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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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은� 세상의� 악이며� 그� 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 특히� 그리스도의� 계

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과� 뜻을� 가리킨다.� 이후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 복음�사역의� 능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행� 4:10-12).� � � 우리과� 같이...하

나가� 되게� -� 아버지의� 이름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저희를� 성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희로� 하

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가� 되는�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다.� 예수는� 고별� 설교� 속에서도� �

연합과� � 하나됨을� � 계속� � 강조하셨으며(13:34,� 35;15:13).� 본장� 기도� 속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21,� 22,� 23절).� '하나가� � 되게'라는� 표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자.� (1)� '하나가� 되게'

가� 아니라� '하나로� 계속� � 있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L.� Morris,� Lenski).� 제자들은� 이미� 아

버지가� � '예수에게� 주신� 이름에� 의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계속� 하나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

록� 지켜� 달라는�의미라는� 것이다.� (2)� 제자들은� 독립된�여러� 개개인들로서가� 아니라�연합된�하나

(as� a� unity)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Barrett).� � (3)� 제자들이� 예

수�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성별

되고� 보호받아야� 함을� 뜻한다는� 견해.� 이중� 세번째가� 가장� �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나머지� 두�

견해도�보완적으로�받아들여질�수�있겠다.

=====17:12� �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 지상에� 계셨을� '때'를� �

언급하신� 것은� 그의� 사역이� 완성� 단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사역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되어� 있었음을� 고백하며� 이를� 이후에도� � 아버지께서� 보전해� 주시기

를� 간구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H.R.� Reynolds).� 한편� 본절에서� � '보전하다'(*� � � � � � � � � � � � � ,� 에

테룬)와� '지키었나이다'(*� � � � � � � � � � � � � ,� 에퓌랖사)가� � 나란히�언급되었다.� 전자는� 6,� 11절� 등에

서� 두루� 사용되었으나� 후자는� 본절과� 12:25에서만� 나온다.� 후자는� 외부로부터의�공격에� 대한� 방

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러나� 두� 단어는� '보전'과� '보호'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동의적

으로� 반복되었으므로� 서로의� 위치가� 바뀐다� 해도� 별다른� 의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 �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 이� 말은� 명백히� 가룟� 유다를� 지칭한다.� '멸망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

라어� '아폴뤼오'(*� � � � � � � � � � � � � )는� 일반적으로� � 종말론적인� � 완전한� 파멸� 또는� 저주를� 의미한

다(3:16;롬� 2:12;고전� 8:11).� 살후� 2:3에서� 이� � 단어는� � 예수� 재림� 전에� 일어나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을� 칭할� 때� 사용되었다.�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종국적� 운명

이� 멸망에� 처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의� 인격� 자체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다는� � 의미에� � 가깝다(L.� Morris).� 유다는� 엄연히�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따라� 멸망의�

길을� � 걸어갔을� � 뿐이다.� 따라서� 유다의� 반역은� 예언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 유

다의� �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Calvin).� � � 성경을� 응

하게� 함� -�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 의사에� 따라� � 행동했지만� � 결과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

켰다.� 이� 예언된�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바� 있는(13:18)� 시� 41:9을� 가리킨다.� 혹자는�

시� 55:12-15� 등의� 말씀을� 추가하기도� 한다(Lenski,� � C.K.� Barrett� 등).� 또한� 사� 57:12과� 같은�

적그리스도에�대한�예언을�유다에게�적용한다� � 할지라도�큰�무리는�없을�것이다.

=====17:13� � 지금...내가� 세상에서� -�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남겨� 놓는� 시점에� 있다(Lenski).�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11절에� 이어� 예수는�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 강조하고자�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렇게�함으로써�자연스럽게�지상의�사역� 가운데서� � 제자들을�보호하셨던�

때(12절� 상반절)와� 떠나가시는� 때� 사이의�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셨다.� � � 이� 말을�

하옵는� 것은� -� 바렛(Barrett)에� 의하면� '이� 말'은� 14:1-16:33의� 고별� 설교도� 포함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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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석의� 근거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의� 헬라어가� 사용된� 15:11로서,� 그곳에서는� 그동안� 예수

가� 말씀하셨던� 것들을� 포함하여� '이� 말'이란� 표현이� �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옵는� 것'이

란� 표현이� 미완료� 과거형이라면� 고별� 설교도� 포함될� 수� 있으나� 현재형이므로� '이� 말'은� 단순히�

1-12절까지의�기도�내용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 내� 기쁨을�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

게� -� 이� 표현은� 고별� 설교(15:11;16:22,� � 24)에서도� 언급되었다.� 그� 설교에서� '기쁨'은� 하나님

의� 보호에� 따른� 기쁨이다.� � 예수가� � 잠시� 제자들과� 이별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하며,� 성령

의� 강림으로� 제자들은� � 영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므로� 그�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를� 확실히�체험하게� � 된다.� 이것이�고별� 설교에� 있어서�기쁨의� 근거다.� 본절에서도�역시�같은� 차

원의� � 기쁨을�이야기하고�있다.� 자세한�것은� 15:11;16:22,� 24� 주석을�참조하라.

=====17:14�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메시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 Morris).� 이� '말씀'은� 예수가� 성부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가� 여러번� 자신을� 성부로부터� 보냄을� � 받은� � 자로� 표현할� 때� 이미�

암시되었다.� 한편� '주었다'(*� � � � � � � � � � � ,� 데도카)는� '위임하다',� '위탁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

기도� 하였으므로(마� 25:15;막� 12:9)� 제자들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17절)을� 위임받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 본절에서� '데도카'는� 완료형으로서� 제자들이� 이미�

받은� 말씀과� 연관된다.� 따라서� 본� � 구절은� 제자들에게� 그동안� 예수가� 가르치신� 내용들에� 대한�

것이다.� � � 세상이�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 제자들이�미움을� 받을� � 것을� � 대화식(對話式)으로� 말씀하실(15:18,� 19)� 때와는�달리� 기도� 가운데서�제자들의� 고난을�위해� 기도하심은�자기에게�소간�

자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 �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 본� 구절을� 혹자

는� '(내가� 세상적이지� 않음같이)� 저희도� 세상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했다(Berkley).� 그런데� 본�

구절을� 헬라어� � 본문대로� 번역한다면� '(내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듯이)� 저희도� 세상에� 기원

을� 두지� 않습니다'로� 해석된다.� 이� 말은� 출신이나�소속과�밀접한� 연관이�있으므로� � 개역� � 성경처

럼�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도� 자신과� 동일한� 출신과� 소속을� 지니고� � 있음을� 가

르치신다.� 제자들이� 이러한� 신분을� 소유하게� 된� 근거는�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1:13)� 또한� � 영으로� � 거듭났다는데(3:3-8)� 있다(C.K.� Barrett).� 이

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에� 의하여�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15:19)� 예수에게� 접붙임을�

받은�자들로서�그리스도와�연합한�자들이다.

=====17:15� � 세상에서�데려가시기를�위함이�아니요� -� 예수� 자신이�세상에� 속하지�않았으나�자

신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는� 세상에� 머물러� 계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

지만� 자기들에게� 위임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여전히� 세상� 안에(in� the� world)� 있어야� 한다(11

절).�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나� 예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다.� 혹자는�

예수의� 이와� 같은� 표현이� 당시의� 종말론적� 기대� 즉� 예수� 재림시에� 있게� 될� 휴거(repture)에� 대

한(살전� 4:17)� 사상을� 수정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 것으로� 추정한다(Bultmann,� Barrett).� 그러나�

이�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 본절에서� 강조된� 것은� 종말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바렛(Barrett)은� 본� 구절의� 표현이� 성

도와� � 세상의� � 분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본서를� 당시의� �

이단(異端)인� 영지주의자들에�대해�복음을�변증하기�위해�기록했으며�또한�본절이�세상과�엄격한�분리를� 반대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 있다.� 아무

튼� 고전� 5: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세상과� 도무지� 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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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성도들이� 그렇게� 하려면� 세상� �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 � 악

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 -� 이� 말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간구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구속이� 있을� 것에�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Bernard)� '악에'의� 헬라어� '에크� 투� 포네루'(*�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서� '포네루'가� 남성도� 되고� 중성도� 되므로� 본�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

능하다.� (1)� 남성:이렇게� 해석하는� � 자들은� � 악한� 자에게� 넘어간� 가룟� 유다의� 사례와(요� 13:27;

눅� 22:3)� 예수의�고별� 설교� 가운데� � 언급된�이� 세상� 통치자들에�대한�기사(12:31;14:30;16:11)�

같은� 부분을� 근거� 구절로� � 삼는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의� 서신서에� 언급된� '포네론'(*� � � � � � � � � � �

� � )� 또는� � '포네루'(*� � � � � � � � � � � � � ),� (요일� 2:13,� 14;3:12)가� 의미상� '악한� 자'를� 뜻한다고� 보

아� 본� � 구절도� '남성'으로� � 해석되어야� � 한다고� � 주장한다(Meyer,� � Lenski,� � Barrett,� � Morris,�

Macgregor,� Davey).� 공동� 번역이� 이� 견해를� 취한다.� (2)� 중성: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세상에�

실제로� 악이� 있다는� 것과� 또한� 세상� 자체가� 악하는� 것(요일� 5:19)을� 들어� 악의� 세력(power)을�

의미하는� 것으로�해석한다(Luther,� Calvin,� Hengstenberg,� Godet).� � 개역� 성경도�이� 견해를�취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혹자는� 악이� � 이세상에� 존재하는� 무신론적� 경향성이라

고� 주장한다(Reynolds).� 그러나� 본� 구절이� � '남성'이나� '중성'� 어느� 것으로� 해석될지라도� 의미상�

큰� 차이가� 없다.� 한편�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레세스'(*� � � � � � � � � � � � �

)로� '지키다',� �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 전체를� 헬라어� 본문에� 따라� 번역하면� '악

(한� 자)에게서� � 보호하시기� 위함'이� 된다.� 개역� 성경은� 헬라어� 본문에� 없는� '빠지지� 않게'라는� 말

을� � 첨가시켜� '보전하다'라는� 말을� 강조시키고� 있으나� 본� 구절에� 사용된� 전치사� '에크'가� '~에서�

벗어나(밖으로)'를� 의미하므로�정확한�번역은�아니다.

=====17:16� � 14절에� 언급된� 말씀이� 어순만� 바뀌어서� 반복되고� 있다.� 즉� 두� 절에서� '우크� 에� �

이신'(*� � � � � � � � � � � � � � � � � )와� '여� 투� 코스무'(*� � � � � � � � � � � � � � � � � � � � � � � � � )의� 순서가�뒤바뀌어

졌다(개역� 성경은� 변화가� 없음).� 14절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로� 서술되었지만� 본절은� 악

으로부터�보전되어야�하는�이유를�설명하기�위해�언급되었다는� � 점에서�약간의�차이가�있다.

=====17:17� �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성별'(consecration)에� � 대

한� 것으로� 세상과� 분리(分離)된� 삶을� 의미한다.� '거룩하게� 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 '하기아조'(*� �� � � � � � � � � )는� '깨끗하게�하다'를� 뜻을� 가진� '카다리조'(*� � � � � � � � � � � � � � � )와� 다른� 측면에서�사용

된다(Reynolds,� Bernard)�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 깨끗함(purification)을� 받았다

(15:3).� 물론� 그들이� 깨끗함을� 받은� 것이� 거룩하게� �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세상에� 속해� 있

으나� 세상과� 분리된� 삶을� � 의미하는� � '성별'과는� 다르다.� 이미� 깨끗하게� 된� 제자들은� 진리안에서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엔� � 테� 알레데이아)� 깨끗게� 된� 그� 신분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

야� 한다.� 예수는� 지금� � 제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성부께� 간구하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예수는� �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16절)� 그� 자신과� 같은� 거룩함이� 은혜

로� 그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한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를�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

사용되었으며(렘� 1:5)�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

을� 맡겼다'(출� 28:41).�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세상에� 보냄을� 받으심�

같이(10:36)�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파송하실� 때에�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기를� 간구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리'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 하는� 매개체이며(요� 8:32)� 거룩하게� 하는� �

실행자는� � '진리의� � 영'이신� � 성령(16:13)이시다(Bernard).� 이� 진리는� 하나님의�말씀으로� 예수가�

지상� 사역동안� 선포하셨던� 것이며� 성령은� 그� 선포된�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신다.� � � 아버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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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은� 진리니이다� -� 본절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시만이� 성별을� 가능케� 한다(L.� Morris).�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생각하시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동질(同質)의� 진리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에� 의하여� 선포되어� 현실� 가운데서� � '진리'로� � 나타나신다(Reynolds).� 한편� 본절에서�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앞의� '진리'와� 구별시키기� 위함이다.� 즉� 상반절의� '진리'와� 구별시키

기� 위함이다.� 즉� 상반절의� '진리'는� '하나님의�말씀'이지만� 여기서는�그� 말씀이� '참되심'을� 의미한

다.

=====17:18� 아버지께서� 나를�세상에� 보내신�것� 같이� 나도...보내었고� -� 제자들의�사역은� � 그리

스도의�사역에� � 근거한다.� � 강조법으로� � 사용된� � '나를'(*� � � � � � ,� � 에메)과� � '나도'(*� � � � � � � ,� 카

고)가� '보내심'의� 상관� 관계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즉� 예수가� 성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아� 세

상에� 오심같이� 자신도� 역시� 제자들에게� 서명을� 주어� 세상에� � 보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성부에게서� 받은� 사명을� 제자들도� 수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 제자들� 스스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을� 때에야� 제자들은�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특히� � 혹자는� 본� 구절� 가운데서� '보내신� 것같이'가� 방법에� 있

어서�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이� � 아니라� 인격의� 유사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두번� � 반복된� � '보내다'의� 헬라어� '아포스텔로'(*� � � � � � � � � � � � � � � � � )는� '펨포'(*� � � � � � � � � )와는�

달리� 어떤� � 사명을� 부여해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내신� 것같이'는� 사명을� 주는� � 방

법에서� 뿐� 아니라� 보내시는� 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 두번� 언급된� � '보내

다'는� 헬라어� 본문에서� 둘� 다�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 하나의� 문제가� 발생

한다.� 즉�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아� 보냄을� 받아� 활동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미� 이전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것처럼�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순된�

진술을�하고� 계시는� 것처럼�보인다.� 그러나�예수는�공생애� 초기에�제자들에게�사도적(使徒的)� 임무를�부여하셨다(마� 10:5;막� 3:14).� 그렇지만�이� 임무는� 지속적인�것이�아니었다.� 그래서�예수는�

20:21에서� 부활하신�후� � 제자들에게�다시�현재형을�사용하시어�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과거에�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도적� 임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더� 나아가서� 제자들이�

이� � 후에� 그� 사명에� 따른� 삶을� 살게� 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한� 예로� 다윗은� 왕으로서� 인정되

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실제로� 왕으로서의� 임무를� 시작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9삼

상� 16:13;삼하� 2:7).� � � 세상에� -� 예수는�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은� 사역의� 장소

를� � 지칭하여�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하셨다.�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의� � 나라와� � 대립

(對立)된� 영역을� 뜻하며(8:23;18:36)� 어떤� 때에는�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 인격체로� 묘사되기도� 한다(14:27).� 이처럼� 요한은� '세상'을� 주로� 그리스도와� 대립된� � 것으로� 설명한다(1:29;

요일� 4:4;5:4,� 5,�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다

(3:16).� 이런� 점에서� 예수는� 이�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자기� 제자

들에게도� 동일한� 계명을� 주셔서� � 세상에� �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 한다고� 명령하시고(13:34;15:12,� 13),� 기도에서도� 제자들과� 그

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를� �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자기에게� 속

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이지만(13:1)� 제자들이�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사명도� 함께�

강조되고� 있다.� 이� 사명에� 따라� 세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룩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 초대되

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파송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 그리스도에게로� 초

대하는�동일한�사명을�갖게�하는� 의미를�지닌다(Reynolds,� C.K.� Barrett,� 케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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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 �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 예수는� 10:36에서�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심을� 언급하셨으나� 본� 구절에서는� 자기�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 표현을� � 사용하신다.� 그렇

지만� 여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70인역(LXX)에서� '거룩하게� � 하다'에� 해당하는� 헬

라어� '하기아조'(*� � � � � � � � � � � )는� 다음� 두� 경우에�사용되었다.� � (1)� � 제사� 임무를�수행하는�제사

장들을� 성별하는� 경우에� 사용하였으며(출� 28:41;29,� 1,� 21)� � (2)� 또� 하나는� 희생� 제물에� 대한�

성별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 28:38;민� 18:9).� 본절에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두� 개의� 의

미를� 모두� 가졌는데,� 인류의� � 죄를� �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그� 예식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되신다는�뜻이다.� � 따라서�예수의�거룩하게�하심은�갈보리의�언덕을�바라보는�것이며�

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혹자는� 예수께서� '내가� 내� 자신을� 아버지께� 거룩

하게� � 하여� � 드린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구약의� 희생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다(Lenski).� 그러나� 그는� 자의적인� 죽음과� 속죄적� 죽음으로서의� 거룩하게� � 하심을� 부

인하지는� 않는다.� 또� 바렛(Barrett)은� '위하여'(*� � � � � � � ,� 휘페르)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막� 14:24)�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 대속물'(막� 1:45)� 등과� 같은� 성만찬

적인� 용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예수의� � 거룩하게� � 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

랑과� 같은(15:13)� 자의적인� 대속적� 죽음이다.� � 혹자는� 이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자아� 성화'(自我聖化)의� 비밀이라고� 설명했� � 다(Luthi,� L.� Morris).� � �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얻게�하려� 함� -� 예수의� 죽음은�제자들의� 죄를�씻는� 일차적인�목적에� 머물지�않고� '히나'(*� � � � � )

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거룩은�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성결은� 아버지의� � 은사에(17절)�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 예수는� � 제자들이� � 하나님의� � 영광

을� � 드러내며(살후� 1:12)�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거룩하

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한편� 본� 구절에서� � '진리'는� � 17절� � 상반절

의� '진리'와는� 달리� 관사(冠詞)가� 없다.� 이를� 전치사� '엔'(*� � � )과� 함께� 부사적� 용법으로� 해석한다면� 그� 뜻은� '진실로'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의� � 의미가� 상반절과� 잘� 어

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 �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관

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제자들은� � 예수가� �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

법,� 즉� 예수에�의해�선포된�아버지의�말씀으로�거룩하게�되는�것이다.

=====17:20� � 이� 사람들만� -� 이� 말은� 단순히�예수를�믿는� 사람들과�분명하게�구분되는� � 사람들

로서� 예수의� 열� 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바렛(Barrett)은� 이�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 만찬에� 참석

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룟� 유다는� 제외시켰다.� 그런데� 본장의� 기도가� 만찬에서� 행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18:1을� 볼� 때� 만찬에서� 행해진� 것으로� � 추정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는� 예수가� 만찬� 후� 곧바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 저희� 말

을� 인하여� -� '말'(*� � � � � � � � � ,� 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메

시지� 전체를� 드러내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Bernard).�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에� 의하여�

전달된� 메시지�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 본질적으로� '진리'이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원문상� 진리� '안에서'(19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성도들의� 믿음은�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이루어질� �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에서� 기인하듯이� 그들의� 보내심을� 받음(18절)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새로

운� 신자들이� � 생겨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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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지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미�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 믿으리요�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진술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基礎)는� 말씀이며,� 이� 말씀이� 전파될� 때� 교회는� 형성된다.� � � 믿는� 사람들� -� '믿는� 사람들'은� 현재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미래

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Turner,� Bernard).� 미래적� 의미를� 현재� �

분사로� 나타내는� 용법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어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이� 말은� � '믿게� 될�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많은� � 영역� � 성경들은�미래형으로�번역

했다(KJV,� Scoffield� Bible,� Jerusalem� Bible,� MLB,� NIV,� LB).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 본절에는� � '히나'(*� � � � � � )가�

이끄는� 세� 가지의� 목적절이� 나온다.� 이� 세� 목적절은� 모두� 20절의� '내가� 비옵는� � 것은'에� 연결된

다.� 본문은� 그중� 첫번째� '히나'절로서� 성도� 공동체의� 연합을� 성부와� � 성자의� 일체성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어� � 그의� � 일을� � 하시며(14:10)� 또� 아들은� 아버지�안

에� 있으므로� 두분은� 하나로� � 존재하고� � 일하신다(10:30).�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

하셨듯이(11절)� 저들의� 증거를� 통해� 얻게� 될� 사람들,� 즉� 교회� 역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다

(C.K.� Barrett).� 그러나� 하나됨이� � 의미가�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

다.� 더구나�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

는다.� � 아버지와� � 아들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체

를� 이루듯이� � 교회내의� 각� 지체들도� 나름대로의� 다양한� 특성을� 지니는� 가운데� 통일성(統一性)을� �띠는� 것이다(15:1-8;고전� 12:12,� 13).�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는� 질적� 측면에서� 엄연히� 구분된다.� � �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는� 두번째� '히나

'(*� � � � � )가� 이끄는�목적절이다.� �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하나라는�사실을� 전제하고서�어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 � 안에'(*� � � � � � � � � � � � � ,� 엔� 헤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역으로� 아버

지와� 아들도� � 우리들� 안에와서�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점을� 시사한다(14:23).� � � 세상으

로...믿게� 하옵소서� -� '히나'(*� � � � � )가� 이끄는� 세번째� 목적절은� 앞의� 두� 목적절의� 결과로� 등장한

다.�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는� � 세상� � 전체가�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는� 없다(15:20,� 22,� 24).� 다만�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비록� 불신� 가운데� 있지만� 장차� 믿음

과� 구원에� 이르게� 될� � 자들도� �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의� 하나됨은�

성도들의� 배후에서�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모든�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 성도들은�예수와�하나님�안에� 거하는�풍성한� 은혜와�연합(聯合)한� 증거들을� � 드러냄으로써�세상을�믿음으로�인도하는�사역을�감당해야�한다.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 예수의� 영광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광(5절)과� �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들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예수는� 마

지막� 설교(16:14� 주석� 참조)와�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십자가와� 영광을� � 분명하게� 연결시키셨

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이� 행하는� 모든� � 사역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십자가를�통해�그� 영광의�역설적�의미가�선명하게�드러난다.� � � 저희에게�주었사오니� -� 제자들�역

시� 아들의� 영광을� 소유한다.� � 그들에게� � 주어지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 영광이요� � 영원히� 사랑� 가운데� 거하는� 축복이다(딤후� 2:12;계� 20:4).� 아

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 속에서� 나타났듯이� 제자들의� 영광도�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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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동참하는� 가운데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믿음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순종과� � 겸손과� � 수

난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도들의� 십자가이다.� 믿는� 자들에게� � 있어서� � 십자가는� 형

벌이� � 아니라� � 제자됨의� � 사명과� � 하나님의� � 자녀됨의� � 존귀함을� � 드러내는� � 것이다(Barclay).�

따라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획득한� � 영광을� �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때에� 아버지와�아들이�있는� 그곳에서�영원한�영광을�보게� 될� 것이다(24절).

=====17:23� � 21절의� 문장� 구조와�매우� 유사하다.� 21절에서는�아버지와�아들이�서로� 내주하는�

것속에� 제자들도� 함께� 거한다는� 논조(論調)로� 전개되지만,� 본절은� 보다� 수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과� 아버지의� 상호� 연합을� 위한�

중보적�매개체로서의�아들을�설명하면서(Lagrange)� � 세상� � 가운데서�사랑을�나타내야�할� 제자들

의� 온전한�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L.� Morris).� 다시� � 말해서�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 또한� � 아버지�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자는� � 아무도� 없다(14:6).� � �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 이�

구절은�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2절)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자들이�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온전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온전함'(*� � � � � � � � � � � � � � � � � � � � � � � � � ,�

테텔레이오메노이)은� � '수행하다',� '완성하다'(4:34;5:36;17:4)� 등의� 의미이며� 성경� 말씀의� '성취'

를� � 나타낼� � 때도� 사용되었다(19:28).� 제자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일체(一體)의� �수중에로�지향되어�가야�한다.� 그리고�온전함을�이루라는�것은�하나가�되기까지�온전히�장성하라

는� 뜻이며� 또한�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종적인� 연합과� 완성은� 마지

막� 때에� 성취될� 것이지만� 교회는� 그�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어

서는� 안� 된다(C.K.� Barrett).� � �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 -� 여기서� '알게'는� 21절의� '믿게'와� 동의

어가� 아님이� � 분명하다.� '알게'라는� 말은� 믿음에� 이르는� 것�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인정까지� 포

함한다.�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을� 보면,� 설령�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감탄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

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 꿇게'� � 하시려는� � 계획과� � 연결된다(빌� 2:10).� 한편,�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을� 보내심이�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과� 같이� �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 역시�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성도들이� � 세상� 가운데서�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은� 철저

하게�하나님의�사랑에�기초(基礎)할� � 때에만�가능하다.

=====17:24� �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나� 있는� 곳'이란� 이� 세상의� 어느� 곳이� 아니라� �

영원한� 천국이다.� 예수는� 앞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13:33)고� �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후에는� 따라� 오리라'(13:36)고� 말씀하셨다.� � 이러한� � 말씀은�결국� � 미래의� � 시

점을� � 염두에� � 둔� � 것이며,� � 종말론적인� � 소망에� � 관한� � 것이다(C.K.� Barrett).� 예수께서� 세상에�

더�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고(11절)� � 말씀하심으로� � 임박한� 십자가의� 수난과� 영광을� 예고하신� 바�

있다.� 이제� 제자들을� 당신이� 계신� � 곳에� �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뒤

를� 좇아�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 뒤에� 있을� 영광에�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미� 영광에� 참예하였으나(22절)�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보좌에� � 앉으신(계� 3:21)�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 � 창세� 전부터...내게� 주신�

나의� 영광� -� 22절에서� '영광'은�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과� 주로� 연관된� 것임에� 반해(22

절� 주석� 참조)� 본절은�미래에�회복될� 영광에�강조점을�둔다.� 이� 영광은�그가� 창세� 전부터�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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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의미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을�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성도들은� 지금은�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보고� � 있으나�그때에는�얼굴을�맞대고�보는� 것과�같이� 보게� 될� 것이다(계� 22:4).

=====17:25� � � 의로우신� 아버지여� -� 요한은� 형용사� '의로운'(*� � � � � � � � � � � � � ,� 디카이오스)을�

하나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다(C.K.� Barrett).� 이� 칭호는�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와� � 같이� 하나

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신구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 사항이다(렘� 12:1;시�

116:5;119:137;롬� 3:36;요일� 1:9;계� 16:5).� 이�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성질을� 가지

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는� 칭호이며,� 주님은� 아버지의� 의로우심을� 선포하심으로�

아버지에� 대하여� 무지한� 가운데� 있는� 불의한� 세상을� 단호히� 정죄(情罪)하고� 있다.� � � 세상이...알지� 못하여도� -� 세상의� 무지는� 두� 가지로� 지적되는데� � 하나는� � 아버지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

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 예수는�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낸�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 또한� 세상의� 믿음을� 위하여� 제자들이� 하나님

의� 사랑� 안에서� � 하나되기를� � 기도하셨다(23절).� 본문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키

는�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 부각되어� 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

나� 세상은� 아들을� � 거부함으로� 여전히�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제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

식은� � 그리스도에�의하여�중재된�지식이다.

=====17:26�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아버지의� 이름은� � 아버지

의�본성을�의미하며�아들의�지상� 사역� 가운데서�가장�확연히�나타났다(6절� � 주석� � 참조).� 아들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

알게� 하리니'는� 장래의� 사건을� 암시하는데� 혹자는� 바로� 이후에� � 있을�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

하며(L.� Morris)� 또는� 예수께서�승천하신�이후에�성경이� � 증거할� 사역에�대한� 것이라고�주장한다

(Reynolds,� C.K.� Barrett).� 우리는�본문이�이� � 두� 가지� 모두를�암시하는�것으로�받아들여도�무방

하겠다.� � �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 -� 본절� 마지막� '히나'(*� � � � � )가� 이끄는� 목적절은� 예수� 그리

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마무리하는� 내용이다.� 이는� '내가� 세상을� � 이기었노라'(16:33)고�

말씀하신� 마지막� 설교의� 끝� 부분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 또한� � 제자들이� 장래에� 알게� 될(상반절�

주석� 참조)� 사실과�밀접하게�관련되어�있다.� 예수는�사역을� 완성하심으로�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마� 28:20).� � � � � 요한복음�제� 18장

=====18: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

예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인간적�고뇌와�갈등을�노출시키지�않고대신� 17장의� � 기도문에� � 나타난�예수의�위엄을�강

조하려고�의도했던�것으로�여겨진다.� � � 기드론�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기도를�마치고�이동한�장

소의� � 방향으로 언급되는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 � 말한다. '시내'로� � � � � 번역된� � � �

� '케이마르로스'(*)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

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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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

이기도� 하다(삼하� 15:23).� � �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

는� 언급하고� � 있는데� '동산'(*� � � � � � � � � � ,�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

는�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 14:32;눅

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 '들'을� � 의미하는� � '코리온'(*)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 � � � � � � � � � � � � � � � )라는� � 말로� � 보아서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

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 '제한된�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 바와� � 같이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롯� 유

다도� 잘� 알고� 있었을� � 것이다.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한다.� � �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 제

자를강조하고�구별한�것과� 대조된다.

=====18:2� �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

이전에�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늘� 하시

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즉� 유다가� � 예수의� �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8:3�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사람

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 '무리'(*� � � � � � � � � � ,� 오클로스)라고만밝히고� 있으나� 요

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 언급된� '군대'(*� � � � � � � �

� � � ,�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 보병� � 중대를� � 가리키는� � 말이기도� � 하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 그러나� 12절에서� 지휘

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 그들은� 예수

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

� 대제사장들과�바리새인들에게서...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역시� 예수를죽게한�주동자

로�대제사장�계급과�바리새파�계급을�언급하고�있다.� 여기서�언급된� � 하속(下屬)들(*� � � � ,�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

을� 시사해� 준다.� � �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 언급하는데(마� �

26:47;막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와

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 유월절(니산월14일)� 전날이

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정황으로�보아�거의� 만월의�상태였을� � 것이다.� 따라서�불이� 필요치�않을�수�있으나�당시�상황이�구름으로�인해�흐린 날씨였거나�아니면�예수의� 체포� 시간이�한

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 것으로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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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 관련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

보다는�전자의�추정이� � 본절에� � 더적합한�것� 같다.

=====18:4� �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 부여하기� � 위해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

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이

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

하고� 있는� �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

(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

다.� �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스'(*� � � � � � � � � � � )� 대신� '이돈'(*� � � � � � � � ,�

'깨닫다')을� 사용해야�한다고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

지와� 관련된� 용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

했다는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 � � � � � � ,� '알다')와� 구별이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판타� 타� 에르코메

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

요가�없다.� � � 나아가� -� 예수는�동산에서�나가셔서�잡으로� 온� 무리들과�정면으로�맞서게� 된다.� 이

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있는� 예

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 예수의� � 죽음이적대자들에� 의한� 단

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 섭리이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강조한다.� � �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 '누

구를� � 찾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

라마로�이해하게�된다.

=====18:5� � 나사렛�예수� -� 예수의�질문에�대한� 대답으로�언급된�본문은�나사렛(*� � � � � , 나 조

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

서(19:19),� � 그리고� � 빌립이�나다나엘에게�예수를�전할�때(1:45,� � �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

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 지명을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예수'가�자신임을�아주�짧은� 말로�밝힌다.� '내가...이다'(*

� � � ,�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 3:14)� � 간결하면서도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 이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

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 달리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 �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

와�마주하고�있는�유다는�배신자로서의�모습을�극명하게� �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 예수를� � 체포케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

의�신분을�밝힘으로써� � 예수의� � 권위와위엄에�손상이�가지� 않도록�묘사한다는�점이다.

=====18:6� �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 말하자� 나

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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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말인� '나는� 스스로� � 있는자'(*� � � � � � � � � � � � � � � � � � � � � ,� 에고� 에이미� 호온)라는� 출� 3:14의� 70

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예수의�신적�권위가�강조됨은� � 물론� � 예수의�승리자의모습으로�죽으셨음이�확인된다.

=====18:7� �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

고있다.� 이것은� 예수의� �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거듭� 확

인해� 주고� 있으며� � 동시에� �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

하는�요한의�습관에�따른� 것이다.

=====18:8� � �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적들이�찾고� 있는� 예수가�자신임을�거듭�확인시키

고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자신을�

내어� 놓고� �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 이것은� �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막� 14:50에서� 언

급되는�제자들의� 도주와�대조되고�있다.� 이것은�요한이�공관복음서�저자와�달리� 제자들이�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

다.� 또한� 예수의�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자발적으로� 제자들

을�보호하기�위해�나아간다는�사실을�밝히는�것이다.

=====18:9�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 예언의� 성취를�나타내는�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

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킨다.� 특

히� 17:12에서� �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악의� 세력에� 넘어

갔음을� 의미한다.� �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

하고�있는�것이다.

=====18:10� � 시몬� 베드로 -�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바요나�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아들� 시몬'(1:42;21:15)으로� � 언급되지만� � 주로'시

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사용하여� 적들

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

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

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

에�이름을�밝혀도�본인에게�아무런�영형을�주지� 않을�뿐�아니라�당시의�역사적�상황을 적 나

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 �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

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

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 휴대할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

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

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 �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

급하지� � 않지만� � 누가와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

당시의� � 정황을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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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 그� � 밤의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

센'(*� � � � � � � � � � � � � � � � )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 � � � � � � � � � � � � � )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요한이�공관복음서에서�그의�사용되지�않는�독특한�용어를�종종� 언급하는�

데서�발생한�것이므로� 의미상의� � 차이는� � 없다.아무튼�눅� 22:49에서는�한� 제자가�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 �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 여겨진다.

=====18:11� �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표현대

신� � 누가는� �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 채강하고� �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

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 �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

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특히� 본서

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 기도가� 본절에서� 함축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

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 발생된� � 것이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

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

리스도의�운명이� 하나님의�예정에�따른� 것임을�암시하고�있다.� � � 내가� 마시지�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 함축한� �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 모습이다.� 그러므로�베드로가�칼을�사용한�것은� 하나님의�섭리�속에� 있는그 리 스 도 의� �

길을막는�것임을�간접적으로�시사해�준다(마� 16:21-23).

=====18:12� �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 점은� �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사실이

다.� �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 해당하는�본절의�헬라어� '킬리아르코스'(* � � � )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

관을�나타내는�전문�용어라고�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지휘관인지에�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 견해와� 같이� � 단순히� 'Captain'이라

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두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

로� 알고� 있었으므로�그곳에�온� 자가� '천부장'인지� � 직급이� 그보다�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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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을�것이다.� (2)� 민란의�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시켰으므로� '천부

장'이� 나섰을�것이다.� � � 잡아� 결박하여� -� '잡아'(*� � � � � � � � � � � � � � � � � � � ,�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

란� 말로�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 � � � � � � � � � � ,�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 '묶는다'

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 것은� 단호하게�

법을�집행하는�체포�현장을�묘사함과�동시에� 11절에서�보여준�예수의� � 단호한�모습과�함께� 예수

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 성취를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

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18:13� �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나� 요한

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당시� 안나스는� 대

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 안나스는� � A.D.� 6-15년� 사이에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장을� 맡았었다며�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대제사장이었다.� � 본래� 대제사장은� � 종신적이었으나�로마의� � 지매가� 시작된후�대제사장

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 추종자들에게� � 주어짐으로써� 자

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

수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

문에� 언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대

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 사람으로� 짐작된

다.� � � 그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 있는데� � '그해'라는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 역사적인� 해를� 가리

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C.K.� Barett).

=====18:14� �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

장으로�활동하던� �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예수를�

믿고�따르는�일들이�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것이다(11:51,� 52).

=====18:15� �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19:38)이나� �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하면� 저

자의� 동생인� �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않고� 있다는� 점

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 요한� � 자신일� �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Lenski,�

Robertson)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

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자인� �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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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 연상하면서� 그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

타당하다.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

자들에게�알려주어�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암시해

준다.� � �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 여종에

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 여기서� '아는'에� 해

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 � � � � � � � � � � � )는� 어느� � 정도의� � 친밀성을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

다.� 그런데�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 '형제'를뜻할�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

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친밀한�관계에�있는� � 사람으로서� 제사장�출신이거나�아니면�대제사장과�관련된�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 단

정한다.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이

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 �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 � � � � � � � � � ,� 아울렌)이� 울타리� � 안의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장소� 안을� 가리

키는지� 분명치� � 않다.� � 여기서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

작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

가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 뜰'이라고�

진술된�점으로�미루어�보아�전자의�견해가�더� 타당하다.

=====18:16� �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

왔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

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

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

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로를� 데리

고�들어가지�않은�사실을�언급한�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추정할�수� 있다.(1)� 베드로가�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자세히�보여주기�위함이다.� (2)� 내부의�사정을�그가� 미리� 알아보기�위함이

다.� (3)� 들어가기�힘든� 그곳에�베드로도�확실히� � 들어갔음을�밝히기�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과정으로�보아�여기서는�첫번째추정이�개연성(蓋然性)이� 높다.

=====18:17� �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는� 비슷한� 표현

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

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

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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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

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 사람이� 여종이라는�점이다.� 하찮고도�연약한�여종� 앞에서조차�베드로는 담대함을� � 가지지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 그가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

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 것이었던가를잘� 보여준다(13:37).� � � 너도...하나

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 있다.(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이�사람의� � 제자가� � 아니냐"는의미로�여종의�질문을�해석하는�학자

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 많은� � 사람의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

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 후자의견해가�타당하다.

=====18:18� �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

씨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 대제사장의� �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했다.� 그

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 �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 � � � � � �

� � � � � � � � � � � )은� 매우� 오래된� � 말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 이상� � 없는데이� 때문

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 등장시킨� 인물이라고� 보

는�견해가�제기되는�듯하다(15절�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

들에�대한�언급도�없는데�아마�이들은�자기들의�숙소로�돌아갔을�것이다.

=====18:19� � 대� 제사장� -� 예수께서�체포당하신�해의�공식적�대제사장은�가야바였으며(13절)예

수가� 붙잡혀� 온� 곳은� �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가

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는� 본문의� 대제사

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라고� 한다(Godet,�

Westcott).� � 이러한� 해석은� �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앞에서의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안나스에�의한�예비심문을�전해주는�것이고�다른� 복음서들은�가야바에�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

제사장이라고� � 했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 있는

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 보기는� � 어렵다.� 그렇다

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 전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

르게�나타난다.� 즉� 가야바의�심문은�예수의 인격� � 곧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 안나스의�심문은�예수의�의도들에�초점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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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 초점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

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 제자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

다.� 그리고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

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 규합하여� � 무력혁명을� 일

으키려� 하지� 않는가에�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 주석� 참조).� (2)� 예수

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

인�사상을�찾아내�정죄하려는�의도가�있다고�볼� 수� 있다.

=====18:20� � 드러내어�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질문� 가운데�예수는� 제자에�관한것은�대답하시

지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 예수는� �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알고� 있

었으며� �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

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안나스의� 의도를� 좌절� 시킨다.� � � 세

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

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 공개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

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갈릴리에�대하여� 말씀하셨다.� � � 회당과�성전� -� 예수께서�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 성

전에서의가르침은7:14;8:20에� 언급된다.� � �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

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회원뿐� � 아니라�이스라엘의�모든�사람들이�그의�교훈에�대해� 들어�알고� 있었다.

=====18:21� � 어찌하여�내게� 묻느냐� -� 예수는�안나스가�질문을�통하여�포착하고자�의도한�어떤

내용도�말씀하지�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스는� 예

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들은� 예수

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

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재판� �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구체적인� � 물증의� 객관성과� �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있었다.� 이것을�알고있는�예수는�안나스의�교활한�음모에�일침을�가하면서� 증인들을�요

구하고�있다.� � � 들은� 자들에게�물어�보라� -� 예수의�이�요구는�잔꾀를�부리지�말고� 적법한�방식으

로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수를� 심

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있음을�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18:22� �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 �

(* )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

현으로�보아�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안나

스를� �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

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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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가리킨다고�하는데�이는� 헬라어� '라피스마'(* � � � � � � )의� �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

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때리는� 행위를�가리켰다.� � 그러나�점차� 후기로� 갈수록�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

로� 뺨을� 맞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

이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야� 한다.�

이것과�晥쳬臼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

'(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

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랍비적인� �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예수의� 뺨을� 친것은� �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

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

간의� 존엄성을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

께서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할수�있다.

=====18:23� �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그러므로�

대제사장의� � 심판이� �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그것은� � 안나스의� 침묵에서� � 더욱�

확연히�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보여준�예수의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그러나� �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정당한�발언을�한것일�뿐이었다.

=====18:24� �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

고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

내었다.� 요한은�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 않았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를� 강조했다.� � 아마� 요한은�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

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

분하다고�생각했을것이다.

=====18:25<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 울었다는� 곳에� 세워진� 통곡교회>� 사람들이� 묻되...아

니라�하니 -�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

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 기록되

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두번째� 질문자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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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있다(눅� 22:54-62).� 이에� 비해� 요한은� �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

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관해

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가� � 예수를� 모른다고� �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 전하는� 바에� 의

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 까지� 했다(마� 26:72).� 모든� 인류를� �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

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

지(마� 26:33,� 35)� 저버리는�베드로의�나약하고�추한�모습이�극명하게�대비되고�있다.

=====18:26� �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따라� 그가� � 갈릴리� 사람임

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자� 자신이� 말고의� �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

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

를�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압박해�왔다.� 이제� 베드로는�순순히�자기가�예수의� 제자임을�고백하던

가�아니면�더� 강하게부정해야�하는� � 선택의� � 순간을�맞게� 된� 것이다.

=====18:27�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 설명없이� � 사실만

을�간결하게�증언하고�있다.� 마태복음에�의하면�베드로는�마지막�질문에�직면하여�예수를�저주하

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 26:74).� 이러한� 베드로

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

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 �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

의� 맹세와� "닭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관복

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 통곡했다고� 전한다

(마� 26:75;막� 14:72;눅� 22:62).

=====18:28� �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 수� � 있는� � 신성모독� � 죄를� � 뒤집어� 쓴다(마� 26:57-66;막� � 14:53-64;눅

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

� � � � � � � � � � � � � � � � � � ,�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

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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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행� 23:33).그러나�유월절과�같은� � 대축제일에�총독은�식민지�백성의�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 안토니아의� � 성이었다고� 보는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 �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 � � � � � � � )는� 로마의� 시간법으

로� 제� � 4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여기

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 것과� 같은� 중요한� 사

건에�대해서�밤에� 심문하는�것은�불법이었다.� (2)� 심문이�있는� 당일에�유죄� 판결을�내린� 것은� 불

법이었다.� 전자는�중요한�사건의�심문을� � 낮에 시행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

는�심문한�당일에는�유죄�판결을�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

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 것이고� � 후자는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 구절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

다고� � 해석하기도� � 하는데(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

어로�영적인�해석이�요구되지�않으므로�그의� 견해는�타당하지�않다.� � � 더럽힘을�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관정으로� 끌고간�유대인들은�예수만�넘겨주고�자기들은�관정에�들어가려�하지� 않는다.� 이

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 법함으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

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

이� 아니라� 랍비들이� � 정한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행� 10:28).� � �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 때까

지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이미�유월절�식사는�끝났고�대축제 일이� � 첫날이� � 시작되었다(마� � 26:17-30;막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서로�엇갈리고�있는�데� 혹자는� � 이 차이들을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 잔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

일� 동안� � 계속� � 먹는� � '식사'인� � '차기가흐'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다(Lenski,� Morris,� � Robertson).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

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

(Robertson)은� 이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 � � � � � � � � ,� '뜻')라는� 단어에� 대

한� � 요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뜻하

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 19:14에서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

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 있으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

월절로� � 표현했는가?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

월절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

대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 유대인들이� 모

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법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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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 � 빌라도가�밖으로�저희에게�나가서� � - 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

장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맏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

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 특히� �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

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

법을�인정하고�밖으로�나온�것은(28절)� 다소�뜻밖의�일이라고�할� 수� 있다.� 그러나지금은� 유대인

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

어야�할� 새벽임에도불구하고�밖으로�나와� 심문을�시작했다.� � � 무슨� 일로� 이� 사람을�고소하느냐� -�

빌라도는�로마의�재판절차를�좇아�먼저� � 고발자에게�피고의�혐의� 사실이�무엇인지를�묻는다.

=====18:30� �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는�사본에�따라� 약간씩�다르게�나타난다. 대 부

분의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 '카코포이오스'(*� � � � � � � � � � � � � � � � � � )를,� 나머지� � 대문자� 사

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 � � � � � � � � � � � � � � � � � � � � ),'코코포이온'(*� �

� � � � � � � � � � � � � � � � � � � � � � )등으로�다양하게�기록했다.� � 어느� 독법이�정확한지�결정지을�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 � � � � � � ,� '이다')의� 미완료�과거형이사용되었으므로�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

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

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처함이� 마땅하다고결정한

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로마� 법

정은�식민지�국민의�종교적인�사안에�대해서는�재판권을�행사하지않았다.� 이것을�알고� 있는� 유대

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

만� 그것이�전혀� 구체성이�없는� � '행악자'라는죄목이었다.� 혹자는�유대인들이�예수를� 가리켜� '행악

자'라고� � 고발하는� � 이� � 장면에서'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

를� 반대하고� 거부한다.'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다.� � 그러나세상은�끝내�계시를� �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 없고� � 계시를� � 눌러 이길� � 수도� �

없다(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속적으

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강조하기�위해� '에이미'의� 미완료�과거형� '엔'(*� � � � )을� 사용했다.� 이표

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 꾀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

는�듯하다.

=====18:31� � �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

으로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유대인들이�이미�예수를�죽이려� 하고있음을� 알았고�따라서� � 자기에게�재판

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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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

으로�유대인들의�무력함을� 스스로�고백하게� 하려는�계산된�정치적� 발언을�하였을�것이다.� (4)� 때

가� � 유대인의� 명절이니만큼� �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

과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

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유대인들이�제기하는�소송이�로마� 법정에서�재판받을� 성질의�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 수� 없다는� � 의사� �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

된�정치적�발언을�하였을�것이다.� (4)� 때가� � 유대인의� � 명절이니맡큼�그들에게�넘겨�주고자�했을�

것이다.� 빌라도는�당시� 유대� 지도자들과�사이가�좋지� 않았으므로�그들에게�호의를�베품으로써�좋

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타당하다.

=====18:32� �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

마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행을� 선

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이것이�좀더� 구체적으로�나타난다(마� 20:19).

=====18:33� � 다시� 관정에�들어가� -� 유대인들이�자기들의�종교적인�규범을� 준수하기�위해�관정

에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갔다� 하며(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

하기까지의� � 과정에는� � 이런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 공관복음서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

들은� � 예수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 행동을� � 한

다.(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 유대인의� 왕

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 황제에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

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 저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

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

하는� 자라고� 고발하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

번째� 고소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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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왔던�영적� 왕에� 대한�의미를�생각조차�할� 수� 없었을�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질문

의�요지는�예수가�무력으로�유대를�로마로�부터� 해방시킬�왕이냐는�것이다.

=====18:34�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

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치적인� 의

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 진

실한�일부� 유대인들의�경우처럼�이� 말이�대망의�메시야를가리키는�종교적�의미로 빌 라 도 에 게� �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것이다.� �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 따라서� 본절은� 예수

께서�빌라도에게� '네� 스스로판단하여�행동하라'는� 정도의� � 의미로�하신� 말씀이라하겠다.

=====18:35� �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

은자신의�개인적�호기심에�의한�심문이�아님을�분명히�한다. 오직� � 빌라도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엇이었는가� 하

는�점이다.� 빌라도는�총독으로서� � 유대인�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

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 모습

에서도� �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 그리하여� 빌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 �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확인

되어야�할� 사실이�있다.� 그것은�이� 재판이�이방인�총독에�의해 제기된 것이라는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대제사장이�주도적�역할을�했음도�강조되어야�한다.� 이것은예수의�죽음에�대한� 궁극

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 떠밀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

적으로� 재판을�이끌어간�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대

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

한� 실질적인�책임을�져야� 할� � 것이다.

=====18:36�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

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그

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라의� 정체를� 설명

하는� 것이� �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

내용에�대해서도�빌라도에게�설명할�필요를�느끼지�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 하더라도� 빌

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

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

고�있다.� � � 내� 종들이�싸워� -� 예수께서는�자기의�나라가�세상에�속하니�않는�것임을 설 명

하는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 아니라

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움에� 의해� 지

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

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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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 나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

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 �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

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

는데�유대인들이�핵심적인�역할을�했다고�인식하고�있었음을�말해준다.

=====18:37� �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

도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운데� � '

내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 예수가� 왕

이라는�것을�암시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본문에�나오는�빌라도의질문은�긍정의� 대답을�기대

하는�것으로�보아야�하며� 그럴경우� �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것이�의미상�더� 타당할�것이다.� 혹자는�이� 빌라도의�질문이� '그래도�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주장하지만(Morris)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

은� � '네말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 출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 하나님의� � 아들이다(롬1:4).� 그래서� 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 48편).� � 그리고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

엘� 곧� 택함을� � 받은� � 백성의� � '왕'이라고� � 고백했다(삿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 되신다(고전� 15:25).� � �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

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

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 아니라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

있지� � 않음을말해준다.� 예수는�자신의�기원이�하나님이심을�분명하게� � 말씀하셨다(16:28).� � 이것

은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 하나님이신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 � � 진리에� � 대하여� � 증거하려� � -� � 본� � 구절� � 바로� � 앞에� � 진술된� � '

이를� � � 위하여'(*,�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 그� �

자신이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

인� 목적은�사람들을�생명에로�인도하는� 것이었다(14:6).� � �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 이해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

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

은� 잘� 조화된다.� � 따라서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

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있으므로�만일�빌라도가�진리에�속한� 사람이라면�예수의�말씀을�이해했겠지만�그는�결코� '

진리에�속한� 자'가� 아니었기에�예수의�말씀을�이해할�수� 없었다.

=====18:38� � 진리가� � 무엇이냐� �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

가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 본� 구

절은�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회의주의(Scep-ticism)에서� 비롯된� �

질문이다(Godet).� � 그들은�이상주의적이고�사변적인�문제에�대해일반적으로�무관심하다. 그 리

고�빌라도가�예수에게�질문을�던진� 후� 예수의�대답을�듣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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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해석이�어느� 정도� 타당성을�갖는다.� 빌라도는�예수에�대하여� � 어떤� 적대� 의식을�갖고� 있지� 않

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 � 아무� 죄도� 찾지� 못하

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 나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받을� 아무런�혐의가�없었다는�사실이다.� 빌라도는�나름대로�공정한�재판장의� 모습을�보이

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 말에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

만한� 행위를� 하지� � 않았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

실대로�유대인들에게�전했다.

=====18:39� �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

장으로서의�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빌라도는� � 그렇게�

하지못하고�유대인들의� 동의를�얻고자함으로써�우유�부단한�그의� 성격을�노출시켰다.� 아마� �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

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8).� �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

을�맞추었으므로�유대인들의�요청에�대해서는�기록하지�않았을�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

나를� 석방시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

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확실

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 유대인의� 왕을...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유대인의�왕이라고 표현하고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

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

유대인의� �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

볼수도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 같지는� � 않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을� 단순히� 반복

한�것� 같다.

=====18:40� � 바라바라�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헬라어� '레스테스'(*� � � � � � � � � � � � )

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적� 혁명� 운

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

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 다만� 예

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 � � � 요한복음�제� 19장

====19:1� �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 빌라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채찍질

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하게�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 만족케� � 하여� 보려고�

꾀한�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의� 나약하고� 야비한� 수단이다.� 이� 채찍질은� � 로마� 형법에� 의한� 것인

데,� 외국인들이나� 종들에게�주는�형벌이다.� 이런� 형벌을� � 할� � 때에는�죄수를�벌거벗겨서�기둥�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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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데� 매고� 채찍으로� 마구� 때린� 것이다.� 이렇게� 매� 맞는� �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는� 일도� 있었다

고� 한다.� 사� 53:5에�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입었도다"라고� 하였다.� 그

가� 이렇게� 매를� 맞으신� 것은� 아무런� � 법적� 정죄� 없이� 당하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불법� 취급을�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우리에게�하늘의�의(義)를� 입혀� 주신� 것이다.

====19:2� �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 (1)� 가시는,� 인류의� � 범죄의�

결과나(창� 3:18),� 그가� 가시� 면류관을� 쓰시게� 된� 것은,� 그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 받으신다는�

표이다.� 그가� 이러한� 고통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신� 이유는,� � 인류가� � 사상적(思想的)으로� 많은�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2)� 군병들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왕이심을� 조롱함이니,� 참된� 왕을� 부인

하는� 악행의� 극단이다.� (3)� 빌라도가� 군병들의� 이� � 행동을� 허락해� 둔�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을� 얻도록� � 하려는� �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 이것은� � 그의� 불의한� 수단이요,� 나약하고� 비루한� 타협이다.� 진리는� 진

리로만� 세워지고,� 불의한� 수단이나� 나약한� 타협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 � 자색� 옷을� 입히고�

-� "자색(紫色)옷"은� 왕이� 입은� 옷인데,� 이런� 옷을� 예수님께� 입히는� 것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조롱하는� 악행이다.� 마태� 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 손에� 갈대를� 들리었다고� 한다(마� 27:29).� 그

것은,�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게� 하여� 그를� 조롱함이다.� 그리고� 다시� 마태� 복음에는� 이� 점에� 대

하여� 더욱� 자세한� 기록이� � 있으니,� 곧,�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

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 그에게� 침� 밸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에� 치더라"고� 하였다(마�

27:29-30).� 그들이� � 예수님에게� "평안할지어다"하고� 거짓되이� 인사한� 끝에� 때렸으니,� 이것은� 극

악한� � 조롱이다.� 거짓된�인사도�큰� 조롱인데,� 그런�인사를�하면서�때린� 것은�말로� 다� 할� � 수� � 없

는� 악행이다.

====19:3� �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다.� � 그

런데� 그가,� 군병들로� 말미암아� 왕권에� 대한� 조롱을� 당하셨다.� 그것은,� 참되신� 왕이� 도리어� 가짜�

왕� 취급을�당하심이다.� 그것은,� 가장� 가슴� 아픈�멸시와�천대였던�것이다.

=====19:4,5� � � 빌라도는,� 매� 맞아� 비참한� 모양을� 이루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 거리로�

보여� 주었다.� 4� 절에� "보라"는� 말(*� � � � � � )이� 있고,� 5� 절에도� "보라"고� 한� 말이� 있다.� 예수님을�

때린� 것도� 그에게� 대한� 극단의� 모욕인데,� 그렇게� 모욕� 당하신� 그의� 모습을� � 구경� 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극단적� 모욕의� 이중인� 것이다.� 빌라도가,� 매� 맞아� 상처� � 입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시킨� 목적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동정을� 얻어서� 진리를� 세우려는� 모순이요,� 이� 세상의�

도움을�구하여�하나님�나라를�전파하려는�모순이다.� 이렇게�빌라도는�나약한�타협을� 문제� 해결의�

최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

신� 것이다.� � 그는� �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

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이� 말씀은�빌라도의�그릇된�사상을�책망하심이다.

====19:6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

가에� 못� 박게� 하소서� -�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한� � 것은,� 예수님

에게� 대한� 그들의� 지독한� 미움을� 표시한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므로�

문제� 해결을� 보려던� 빌라도의� 악한� 타협주의는,� 이렇게� 그�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다.� 진리를� 위한다는� 자가� 비진리와� 타협하면,� 언제나�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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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린다.� � �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 이� 말도� 빌라도가� 결단의� � 취지로� �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말로써� 한� 번� 더� 나약의� 태도를� 나타낸� 것� 뿐이다.� � 그것은,� 다음� 귀절

에�유대인들의�태도가�빌라도의�약점을�알고� 굳세어짐을�보아서�알� 수� 있다.

====19:7� �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빌라도에게� 대한� 그들의� 협

박이다.� 그들은� 이제� 빌라도의� 나약함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법이� 있다"� 함은,�

하나님을� 훼방한� 자나� 거짓� 선지자를� 죽일� 수� 있는� 종교적� 법이었다(레� � 24:16;� 신� 18:20).� 그

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이렇게� 악한� 죄인으로� � 여겼다.� � 이� 때에�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히� 컸을�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그� 때에� �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사�

1:12-14� 참조.

====19:8� �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 이� 말씀은,� 빌라도가� 이� 재판에� � 있어서�

무리를�두려워하는�나약한�마음으로�인하여�의리대로�결단하지�못하는�약한� 태도를�지적한다.� 빌

라도는� 이� 재판에� 있어서� 줄곧,�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려워"하

였다고,� 이� 귀절은� 말한다.� 그가� 더욱� 두려워한� � 이유는� � 무엇인가?� 그것은,� (1)� 유대인들의� 태

도가�강경하여�재판건에�그를�의뢰하지�않을� 듯한� 기세를�보인� 까닭이며(7절� 상반),� 또� (2)� 빌라

도는,� 예수님이�자신을�가리켜� 하나님의� � 아들이라고� 하신다는�유대인들의�말(7절� 하반)� 뜻을� 완

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 그러나� 그가,� 그의� 그릇된� 종교적� 관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이� 어떤� 신(神)에� � 대한� 칭호인� 줄로� 짐작은�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죽이도록�내어주는�일도�그에게는� �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판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 다시� � 예수님

에게�가서�심문한�것이다.

====19:9� � 너는� 어디로서냐� -�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내력을� 물음이다.� 곧,�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말("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예수님

이� 누구이심을� 알아� 보려는� 질문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 진실한� 질문은� 아니었

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벌써� 빌라도에게� � 분명히� � 증거하신� 바� 있는데(18:33-37),� 또� 다

시� 질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 불신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시지� 않았

다.� � � � 10-11� -� 이� 두� 귀절은,� 최고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 빌라도의� � 인본주의와,�

모든�권세의�근원이�하나님에게�있다는�예수님의�신본주의를�대조시킨다.

====19:10� �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빌라도는� �

이� 말로써� 자기의� 무식과� 교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간인� 자기가� 최후� 단안을� � 내릴� 수� 있

는� 권세의� 소유자라고� 자처한다.� 그것은,� 모든� 권세의� 주재(主宰)이신� �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다.� 이런� 무식은� 그에게� 교만을� 낳아� 주었다.� 언제나� 교만은� 무식의� � 아들이다.� 진리를� 아는� 자

는� 겸손해지는�법이다.

====19:1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 없었으리니� �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

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빌라도는� 사람만� 보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보시고� 진리대로�판단하신다.� 정치적�권세도�하나님이� � 주시지�아니하시면� 아무도�받을�

수� 없다.� � �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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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있다.� (1)빌라도의�정권은�하나님이�주신�것인데도� 불구하고�대제사장들이� � 그것을�하나님� 아

들� 예수님을� 죽이는데� � 사용했으니,� � 그� � 죄가� � 더욱� � 크다는� � 뜻이라고� � 함(Calvin).� (2)� 슐라

텔(Schlatter)은� 말하기를,� "빌라도가�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 잘못� 사용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

나� 그� 죄는,� 받은� 권세� 없이,� 또는� 예수님을� 잡도록� 강요된� 일도� 없이� 행동한� 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보다는� 가벼운� � 것이다"라고� 하였다(Pilatus� Missbraucht� die� ihm� gegebene�

Macht� und� das� ist� � Schuld;� � sie� � ist� geringer� als� did� Schuld� dessen,� der� � ohne� � *� � � � �

� � � � � � � � � � � handelte,� � den� � also� nichts� notigte,� sich� an� Jesus� Zu� vergreifen.-� Der�

Evangelist� Johannes,� p.� � 345).�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 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들은� 정권을� 가진� �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은� 더� 크다.� 이� 해석이� 더� 유력하다.� 이� 말씀을� �

보면,� � 부패한� 시대에� 옳지� 않은� 교역자들이� 정권에� 붙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함이,� �

무엇보다�큰� 죄악임을�알� 수� 있다.

====19:12� � �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

는,� 공포심에� 끌려서� 그를� 넣으려고� 다시� 애쓴� 것이다.� 빌라도는,� 한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듯

한�태도를�가진� 것이다.

====19:13� � 빌라도가...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 "박석"은� "돌로� 깔은� 곳"이란� 의

미를� 가진다.� 그� 때� 유대인들이� 쓰던� 말로는� 가바다(*� � � � � � � � � � )라고� 하는데� � 언덕을� 의미한

다.� 이곳은�아마도�돌을� 깔아�놓은� 높은� 장소를�가리킨�듯하다.

====19:14� �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 여기� 이른바� "유월절의� � 예비일"

이란� 말은,� 얼른� 보면� 모순된� 듯하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벌써� 유월절� 만찬을� 잡수

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문제될� 듯하다.� 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참� 유월절"의� 준비일� 곧,� "참� 유월절"� 양이신� �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 되는� 날이

라는� 뜻이라� 하고(Grosheide),� (2)�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곧,� 금요일을� 의미한� 것이라

고� 한다(Lenski).� 이� 둘째� 해석이� 옳다(마� � 27:62;� 막� 15:42;� 눅� 23:54).� � � "때는� 제� 육시라."�

이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시각이다.� 막� � 14:25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

히신� 시간을� "제� 삼시"라고� 하였는데,� � 여기서� �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 받으신� 시간을� "제� 육시"

라고�하였다.� 여기� 이� 두사건에�있어서� 시간상�선후가�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이� 문제는�다음

과� 같이� 해결된다.� 곧,� 요한은� � 로마의� 시간� 계산법대로� 말한� 것이다.� 로마의� 시간� 계산법(오늘

날� 우리의� � 시간� � 계산법과� 같음)대로� 오전� 6시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요�

19:14-16)(마� � 27:1-2� 참조),� 골고다까지� 끌려� 가시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눅� �

23:26-31).� � 그� 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오전� 9시� 였다.� 오전� 9시는� 유대의� 시간�

계산법대로� "제� 삼시"이다(막� 14:25).�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최후� � 판결을� � 받으신� 시

간을� 말하였고,�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게에� 못� 박히신� 시간을� 말하였으니,� 그� 두� 기록이� 시간� 문

제에�있어서�서로�다를� 수� 밖에� 없다.<예수께서�십자가를�지고�올라가신�길>

====19:15� 저희가�소리� 지르되�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빌라

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 외에는� 우리에

게� 왕이� 없나이다� -� "저희"란� 말은� 일반� 유대인들,� 곧,� 군중을� 가리킨� � 것이다(12절).� 군중은� 저

렇게� 대제사장들이나� 기타� 종교� 지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다.� 군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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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한� 일들을� 본� 적도� 있었으련만,� 그들은� �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렇게� 부화� 뇌

동하여� 대제사장들의� 시키는대로� 악하게� 움직인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

제사장들은� 간교하게도� 저렇게� �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사랑하여�

저런�말을� 한� 것은� � 아니다.� 그들은� 가이사를�미워한� 것이다.� 그러나�그들이�예수님을�가장�미워

하는� 것� 만큼,� � 다른� 미운� 사람들은� 모두� 다� 저희에게� 한편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도의(道義)나� 양심이� 없는� 세계에서�되어지는�것이다.� 그런� 사람들은�자기�개인의� � 이해� 관계만�생각하고�행동한다.� 그들에게는�진리나�도덕의�일정한표준이�없다.

====19:16� � �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 빌라도는,� 자기로서� 책

임� 지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 그에게�

책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 � 17-37� -�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

가에�못� 박히신� 사건을�말한다.� � � � (1)�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루살렘의�여자들이�십자가에�못�

박히시려고�나아가시는� 예수님을�뒤따르면서�운� 것은,� 예수님의�괴로움을�위로하는�효과를� 못� 냈

다.� � 그들은� 예수님을� 불행한� 자로� 알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행한� 자가� �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른� 나무(자기� 죄로� 인하여� 망할� 수� 밖에� 없는� 악인)가� 아니었고� "푸는� � 나무"였다.�

그는,� 생명� 나무� 곧,� 의로우신� 중보자(中保者)� 되시는� 주님이시다(눅� 23:28,� 31).� � � (2)� "해골이라�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두드러진� 언덕이었으며,� 큰� 길가에� 있어서� 행인들이�

익히� 보며� 지나던� 곳이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다.� 예수님

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높은� 데서� 전파되어야� 하

겠고,� 큰� 길� 가에서� �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은밀히� 감추일�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

러내어� � 선포될� 일이었다.� � � (3)� 또� 다시�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이� 두� 강도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것도�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악한� 죄인처럼�

취급� 받으신� 사건이다(눅� 23:33).� � � (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그의� 옷을� 벗기었다

(23-24).� 그것은� 그에게� 큰� 수치를� 끼침이었다.� 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

들은� � 의(義)의� 옷을� 입게� 하신다.� � � (5)� 예수님께서�십자가에�못� 박히실�때에�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 않게� 하시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맛보시고� 마

시지� 않으셨다(막� 27:34).� 그가� 그것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가장� 중요한� 속죄� 제물을�

드리는� 그� 시간에� 최후까지� 깨어� 있고자� 하신� 까닭이었다.� 그� 시간은� 중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때니� 만큼,� 마취제로� 취함이� 되어서는� 안될� 때였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당하시려

고�하지�않으시고�그것을�다� 받으시려고�깨어�계시기�원하셨다.� � � (6)� 예수님이�십자가에�죽으심

은�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 그의� � 죽으심이�높이� 들리시어�모든�사람들이�바라볼�수� 있

게� 됨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의� �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저주의� 죽으심을� 의미한다.� 구약에�

말한대로� 나무에� 달려� 죽음은� � 저주의� 죽음이었다(신� 21:23).� 그가� 우리를� 대신하셔서� 저주를�

받으신고로� 우리는� �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된다.� � � (7)� 마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에� 못� 박히신� 동안이� 여섯� � 시간이었는데(막� 15:25,� 34,� 37).�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다(막� 15:33;� 마� 27:45).� 그것은� 인류의� 대표�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내리신� 하

나님의� 진노의� � 표시였다.� 빛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선물로� 주신� 것이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다.� 그런데,� 이제� 빛이� 없는� 세계는� 하나

님의� 진노로� 충만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 당하셨으므로� 우리

가�마땅히�당할� 수� 밖에�없었던�영원한�진노는�없어졌다.� � � � � 요한복음�제�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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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예수님께서� 잠시� 누우셨던� � � � � � � � 무덤을� 기념한� 교회>� �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

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 않고� 있었던유� 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방식이었다. '안식� � 후� 첫날'은,� � 하루의� �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

까지튤�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 방식에따른다면� 토요일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

느시점을가리킨다.� 한편� 본문의'첫날'(*� � � � � � ,미아)은'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 �

� � � � � � � � � � ,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 이것이� �

셈어� (Sem�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 않지만� � 히브리어나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 아직� 어두을때� -� 마태

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다소� � 이른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

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 떠날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

에�도착한� � 때는� 여명이�밝아올 때였다고본다(Lenski).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멈올�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

를� 탄압한� � 자들의� � 눈을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

내는� 것일� � 수도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

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 시점이다.그것

은�기독교� 역사상�최초로�주일이�시작되는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창조를� � 기념하는� 안식일이�완

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 �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 예수께� � 고침을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 갈릴리에서� � 예루살렘까지� � 예수를� �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19:25).� 혹� 독자들� � 중예는� � 이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

혼동할� � 수도� � 있으나양자는� 전혀별개의� � 인물이다(11장).� �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 가리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한편� �

본문에서는� 무덤을� �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 있으나,공관

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 동행하였다(마� � 28: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

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

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듸� 가운데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

올� 맞추어�서술하였을�것이다.� � � 돌이...옮겨간�것을� 보고� -� 막달라�마리아� 일행이�무덤을�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 향유를� 바르는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듸은� 시신이� 썩기� � 전까

지는� 고인(故人)의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사흘동안�시신을� 돌보았던것이다.� 한편� 여인들이�무덤을� 채아왔을�때� 무덤입구를�막았던�돌문이�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올� 합해야� 겨우� 옮길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흠에�고정되어�있었기�때문에�여인� � 몇몇이�옮기기에는�사실상� 불가능하였기�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 여는� � 것에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막� 16:3).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 공관복음서에서와는� �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 비교적� � 간략히� � 다룬다(마� � 28:2-7;� � 막� � 16:5-7;� � 눅� 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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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

졌다고�확신했고� 그것올�급히� 제자들에게�알리기�위하여�달려갔다.� 요한은�베드로와� 사랑하는�제

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

과� 콴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 그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

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

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 것이다.� � �

한편� 본문에서� �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 특징적인� � 표현으로

(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블� 때� 이� 인물은�본서의� � 저자인� � 사도� � 요한� 자신임

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블� 수� 있다.� � � �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

는� 표현은� � 무덤을� �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누군가� 예수의�시신을�가져갔다고�단정적으로� 말하고�있다.� � � '가

져갔다'에� �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 � � � � � � � � )은� 비인칭� 동사로서� � 예수의� 시신을� 흠쳐갔으리

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 아마� 무덤� �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마리아의� 보고� 내용은�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

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

다는�해석은�전혀�타당하지�않음을�보여준다.� �

=====20:3� � 베드로와...무덤으로�같새� -� � 베드로와�그�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 리

아의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 생각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횹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9절).� 여기서� '

갈새'(*� � � � � � � � � � � � � � ,�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

여준다.� 제자들이�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의�시신이�없어진� 것이�제자들에게는�전혀�금시�초문의�뚱밖의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

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 몰랐을리가� 없고� 그들이� �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은� �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서� � 가운데� �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 때문에

(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멈으로� 함께� � 갔을가능성이� �

많은�것이다. 4절에서�요한이 먼저�무덤에�당도한�것도�이러한�맥락에서이해�될� 수� 있다.

=====20:4� �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 있고� � 누군

가� �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예�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

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

상태로�침착하게�걸어간다는�것은� 오히려�어색� 할� 것이다.� � �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 먼저� 무덤에� � 도착한� �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본다(Lenski,� � Tenney).� 그리고�앞에서� � 언급한�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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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 따라서� � 먼저� 무덤에� 도착

한� 것이� 곧� �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올�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5� � 구푸려� -�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 � � � � � � � � � � � � � � � � � � )를� 번역한� 말로서� 자

세히�관찰하기�위하여�허리를�굽히고�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베드로처럼�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

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것은� 수의가� 무덤� � 안에� � 있는� 것으로� 미루

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

절).� � � 세아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 가리킨다

(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 앙장(仰帳)(출� 26:1),�귀족의�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 만드는� � 데� 사용되었다.

=====20:6� �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

덤안으로�들어가는�양태로�나타난다.� 앞절과�본절에서는� 무덤�안에� 세마포가�있었다는�것이�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갈은� 확인은� 세마포의�존재가�시체� 도적설을� �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 근거가�되기�때문에�거듭�언급되고�있는�듯하다(7절� 주석� 참조)� � � � � �

=====20:7� �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엔테튈리

그메논'(*�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은'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 식탁보가� 접혀

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 전의� �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

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

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

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

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

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 없

기� �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

현에서� '딴'(*� � � � � � � � ,�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점을�고려한다면�전자일� � 가능성은�더�

희박해진다.� �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

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

(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벗겨내어� 잘� 정돈해�놓았을�

가눙성은�회박하기�때문이다� � � � �

=====20:8� � 들어가� 보고� 믿더라� -�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 나자� � 요한

도� 힘올�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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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 고데(Godet)� 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

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 2-7절에서는� 두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둥사를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자신만의� 특별한�체험을�부각시키기�위한�의도를�보여주며,� 따라서�사도� 요한이�여러제자

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향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

이� � 있지만� � 요한이� �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있는� 막달라� �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

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

며(9절),� 보지� 않고� 믿는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는,� 본문의� '믿

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Broomfield).� 학자들의�일반적인�견해는�전자에�가깝다.� � � � � � �

=====20:9� � 저희는�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 의

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 베드로도)� � 무덤� � 안을� 살

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

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말씀

이�구체적으로�무엇을�가리키는지�분명치않으나�학자들은�일반적으로�시� 16:10을�가리킨다고�본

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 성� 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눅� 24:44-47� � 에� 잘� 묘사된�바와� 같이� 부활하신�예수께서는�당신의�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 있음을� 말씀하셨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0� � 집으로�돌아가니라� -� 요한과�베드로는�각각�자기의�집으로�간� 것이�아니라� � 공동

의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븜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기

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

아갔을�것이다(눅� 24:12).�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1� �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 시신

이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 돌아왔는지� � 혹은� 두� 제

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

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 � � � � � � � � � �

)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

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 예수께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 않고� �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하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2� �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 사복음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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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

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 묘사하고(막� � 16:5),� 누가는� "찬란한�옷을� 입

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 같은� � 천사에� � 대한� 묘사를� 비교해� � 보면� 천사

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

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 전제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둥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주위의� 사실에� 대한� �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무덤에서�무언가�초자연적인�사건이�일어났음을�강하게�암시하고�있다.

=====20:13� �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

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더해졌기�때문이었다.� 장례와�장사를�매우� 중하게�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 중오하였던� � 육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

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

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 있는지를� �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

는� 어찌하여� � 그리스도의� � 부활을�모르고� 슬퍼하느냐'의� � 뜻이었을�것이다(눅� 24:5,� 6).� 한편� 본

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

다른�복음서들에서는�천사가�주님의부활�사실을�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제자들을� � 만나게�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 �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

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

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4� �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

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

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

사들이�질문올�하면서�손가락으로�뒤에�계신� 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라고�보는� 것이다.� 어느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

야톨�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

있다(고전� 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 막

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 해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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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

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

을�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5� �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 있었다면� 두번

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

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

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 믿음이� �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 할� �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 � 동산

지기.�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동산지기라고�착각했다.� 그토록�이른� 시간에�동산� 주위에� � 서성이는�사람으로서�동산지기

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 � �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 � � � � � � � �

� ,�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 � � � � � � � � � � � ,�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

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

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어느� 정도는�덮어주고�있다.

=====20:16� 아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 마

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

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

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 극적� �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

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 27말씀을� 연상시킨다.� � � 돌이켜...랍

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 볼� �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 보기도한다.� �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 � � � � � � � � � � � � � � � � �

라는�표현이�완전히�돌아선�것을� � 뜻한다는�사실에�의해� 거부되며�후자는� 15절과의�문맥상�마리

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 가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

다는� 점에서� �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

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 것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뚱하는� 헬라어� � '디다

스칼레'(*� � � � � � � � � � � � � � � � � � )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 대해

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 뜻� � 이상의� � 의미가� � 있다고� � 보는� � 견해와(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

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

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

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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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

에�넘쳐�주님을�향해�달려들었다(17절)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 � � � � )와� 함께� 쓰인� 현재� � 명

령법� 으로� 되어있는데,� �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의� 행동

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 본문의� 금지령이� 이

미� � 행동화된� � 상태에서� � 이제� � 그만하라고� � 하는� � 것으로� �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 자신의� � 발을� � 붙잡고� � 경배하는� 것을� � 허락한� � 마

태의� � 기록(마� � 28:9)을� � 고려해서� � 이다.� � 그러나� � 불트만(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

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

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 이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말라'는� 표현� 보다

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얘서� 여러

가지� 해석상의� �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

문의� '메� 아프트'(*� � � � � � � � � � � � � � ,�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 � � � � � � � � � � � � ,� '두려워� 말

라')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되는� 경우에만� 의

의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최동화된� 이후이건� 흑행동화� 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물어야� 할� 핵심적인�문제는�왜� 주님께서�마리아의�행동을�제지하셨는가�하는�문제이다.� �

�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는�여러가지�견해가�있다.� (1)� 예수께서�아직� 승천하지� � 아니하였고�또� 즉시� 승천할�것이�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

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

지한것은� � 그녀가� �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

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생전의�랍비로서가� 아니라�죽고� 부활하신�주님으로서� 예수와�관계

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 �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

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 아버지의� �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기자는� � 그리스도를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부르시

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 �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

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 제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

의� � 관계로� � 발전된다는�의미까지� 내포한다는�사실이다.� 이것은�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

희� � 아버지'라는� 표현으로�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 관계가� �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

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 하나님의� �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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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 어거스틴(Augustine)은� � 이� 것을� '본성으로는�나의�하나님이며은혜로는�너희의�하나님

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전통적인� 기독교의�교리상�전자의�견해가�우세하다고�본다.� � � 올라간다�하라� -� 혹자는�본

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기

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으�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

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

다.

=====20:18� �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 � � � � � � � � � � � � � � � � ,앙겔루사)는� 현재� � 능

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 외치는� �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 들은� �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

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

리아는�주께서�분부한�메시지를�충실하게�전달하였다.� 요한은�여기서�이야기를�맺고� 장면을�바꾸

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

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더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

임재를� �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 제자들은� � 믿으려하지� � 않았다고� � 기록하고� � 있다(눅� 24:8-11).� 이런� 사실들

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9� �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 � �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 그러나� 초

대교부들의�문헌에� 의하면�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특정한� � 날에� � 예배와� 친교를�가졌

다는�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 나오는� � 계�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 다른� �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

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 안식일이� �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

니라는�사상이�보편화되고�있었다(골� 2:16).� 그들은�안식일의� � 기본� 정신은�폐기하기�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

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화�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

로�굳어진�듯하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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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듸은�위험한�선동자의�추종자로� � 혐의를�받고� 있었으므로�비밀스러운

곳에�은신하고�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군사들이� 체포�하러� 들이닥칠지�모르는�불안한�상황이었

으므로�문을�굳게� 닫고� 있었던�것이다.� � �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서서� -� 요한이�누가와는� 달리

(눅� 24:38-36)� � 문이� �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륵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

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올�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

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 있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자연� 상

태인�육체와는� 엄연히�구분되어진다.� � �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

'(*� � � � � � � � � � � � � )는� '평화',� '화평','븍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 헤어질때(삼상� � 1:17;

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 그러나� 본

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 범주에서(14:27)� � 이해된다.� 아마� 이� 평강은� 사

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

련이�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 � � � � � � � � � � � � � � �

=====20:20� �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 않으나� � 누가

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 생각하여� 무

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 그제서야� �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

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 가지고� �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 단서가� �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 오리라'

는� �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

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

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횬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다시� �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이다.� 한편� 십

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 생략하고� � 있다.� 다만� 눅� 24:39,� 40을통해� 우리

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1�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두려움에� � 떨

고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

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 아버지

께서...나도� 너희를�보내노라� -� 복음서들에�있어서�중요한�주제� 가운데�하나는�아버지께서�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 아버지로부터� � � 보내심을� � � 받았다는것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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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 � 주제로� � � 다루어지고� � � 있다(3:34;� � � 5:36,� 38;6:57;7:29;8:42;11:42;17:3,� 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

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

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 권위가� �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 한다.� � 혹자는� 13:20이

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

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

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

도적�사명과�권위는�교회에�의해� � 승계(承繼)된다.

=====20:22� �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 묘

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 사망을� 당한� 자에

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 하나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

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

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 있다는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

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

된� 사도들은� 영적� � 세계에� �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

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

는� � 헬라어� '라베테'(*� � � � � � � � � � � � )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 인간� �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

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렇게� 제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 모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3� �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 권세

는오직�하나님과�그의�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있다(막� 2:6,� 10).� 본절의�의미를문자적으

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

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

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 이끌려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

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고다.� 즉� 사도

들에게는� 븍음� 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듸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

아들이고�회개의� 열매를맺는�사람에게는�죄를�용서받는�결과가�생긴다.� 그러나�복음을� � 거부하는� �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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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 제자들에게� 엄

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 그리하여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 태만에� �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

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

게�복음을� 전해야한다.� 사도들이�받은�사명은�고귀한�권세이자�엄청난�책임을� 수반하는�것이기도�

하다.

=====20:24� �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뚱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고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

적인'의뜻인� 것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

인� 모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현했

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

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짐작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5� �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

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 �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 것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

고� 증거를� 요구한다.� � 도마가� �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

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

스러운� � 모습(예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

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 마찬

가지였다는�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것은� � 공� 평하지�못하

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

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보고� 그분이� 바로� 십

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

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

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 처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

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 혤라어� � '튀폰(*� � � � � � � � � � � )은� � '혼적','

표'(print,� � 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위치'를� 뜻하는� '토폰

'(*� � � � � � � � � � � � � � � � � � � )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역시� 추측일� 뿐이다.� �

=====20:26� � 여드레를�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시간적�간격이�길지� � 않았다면� � '여드레

'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 제자들을� 만

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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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

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

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지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

수는�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

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 잠깐이었

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

대하게�붙들어�줄�것이기�때문이다(22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7� �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 것처

럼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 전제� 조건

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 � � � �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

믿음� 없는� 자'예� 해당하는� � 헬라어� � '아피스토스'(*� � � � � � � � � � � � � )는� 고전� 6:6;14:22과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

에서� 도마에게� � 그� �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

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 그렇

게� �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 대한� 책망이� �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 원하

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 주님의� �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 내었다(28절).� �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 � � � � � � � )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진� 15:58;골� � 3:15;� �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 믿음을� �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 참됨을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8� �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

(傷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 모른다.� 본절의� 고

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하나

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 정차하다고� � 할� � 수� �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

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 '나의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것이� 아

니라16,17절� 주석� � 참조)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

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부분에�기록된� 이� 결정적인�고백은,� � 처음� � 예수의� � 본원적

(本源的)� � 정체가� � 하나님이심을�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병행되면서(1:1),� 예수� �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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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 아버지� � 곧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

광으로�다시�영화롭게되신�분이다(17:5).�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9�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

단은�도마의� 믿음이�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본� 것에� 근거해�있다.� 주님이�바라는� 바

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

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 어뗘한� �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

론� 도마를� 비룻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욘�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

에게만� �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

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 증거하고� 또한� 성

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영광스러운�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 � � � � � � � � �

=====20:30� �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 본서

의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

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 밝히고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

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 것들만� �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

지는� 분명치� 않다.� � 아마� � 부활까지� � 포함하여� � �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

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

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

별하여� � 기륵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

사하고� � 있는� 것이다(행� 4:30).

=====20:31�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

로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 목적이� 독

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 성도의� �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 예수를� � 소개할� � 때(1:34),� � 나다나엘이� � 예수를� � 향

하여(1:49),� � 그리고� � � 예수� � � 자신이(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

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

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

호가� �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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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 만큼� � 예수가� 이� 칭호

률� 사용할�경우� 자신을�정치적� 혁명가로�오해할� 수� 있었기�때문에� � 이� � 칭호를� � � 사용하지� 않았

다는�것이다.� � 예수의�나라는�헌재의�정치적�왕국과는�전혀�다른� 나라였다(18:36).� � � 믿고...생명

을� 얻게� -� 예수가�하나님의�아들이심을�믿는다는�것은�곧� 구원을� �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

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 표현된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

이� �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

다는�점이다.� � � � � 요한복음�제� 21장

=====21:1�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 표현

법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 학자들은�

20:26-29의� 현현� � 이후� � 그리� � 시간이� � 많이� � 지나지� � 않은� � 시점이라고� � 본다(Tenney).� <디

베랴바다>� � �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

나�본문은�이를�간접적으로�발해주고�있다.� '디베랴�바다'는� '갈릴리�바다'(6:1),� '긴네렛�바다'(민�

34:11),�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눅� 5:1)� 등의� �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 � � 나타내

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 하면� �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

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20:16,� 17),� � 두번째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20:19-23)�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20:26-29),� 그리고� 지금

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

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 여기에� � 나오는�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 소재가� � 물고기라는� � 점에서� � 눅� 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Harnack,� Bernard)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

기글� 잡지� 못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 되어� � 있

는데�비해� 여기에서는�제자들이�계속�바다에�있었던�것으로�묘사되고�있다.� 둘째,� 눅� 5장에는�고

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 있는데� � 비해� �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

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 보도된다.� �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

애�시작�부분에서�발생한�것이나�여기에�오는� � 이야기는� � 지상을�떠나기�직전에�있었던�일이다.�

=====21:2� � 함께� 잇더니� -� 함께�있던� 제자들은�모두� 7명이었다.� 이중� � '세베대의� �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 밝혀지지� 않은� 두제자는� 빌립

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J.� Haubleiter).� � 또한� �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대해서� 저자는�언급하지� 않고� 있으나�다음과�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십자

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 그것을� �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20:19� 주석� 참조).� (2)예수

께서� 십자가에� � 처형을� �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

아갔을� 것이다.� � (3)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 그리하

였을� � 것이다(마28:10,� 16주석참조).�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 보며� �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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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급되지�않은�점과� 제자들이�예수를�알아� 보지� 못한�점�등능� � 이해하기�어려운�부분이다.

=====21:3�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

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가� 물고기

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고� 이� 이야기가� � 복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穩全)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Sanders).� 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

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며� 예수께

서� 직접� 관여하여�성공을� 거둔것과(6절)� 좋은� 대조를�이룬다.� 사도적�사명은� 온전히�주님의�지시

를� � 따를� �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하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

장� � 좋은� 시간이�밤이었음을�감안할�때� 더욱� 잘� 이해되는�부분이다(Barrett).

=====21:4� �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 � � � � � � � � � � � )인데,�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 가리킨다

고� 보는� 견해와(Barrett).�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 사용된� � '프로이'(*� � � � � � � � )의� 용법

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 시간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

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

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 자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

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예수께서�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

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릎�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않는다.� 아니면�눅� 24:16의� 상황처럼�제자들의�눈이� 가리

워져�예수를�알아보지�못했을�수도� 있다.� � � � 바닷가에�서셨으나� -� 여기에는�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 자리에� �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같은� 차원에서�이해되어야�할� 것이다.�

=====21:5� � 애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 � � � � � � � � � )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

스'(*� � � � � � � � )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 무엇인지에� � 대해서

는� � 여러� � 견해로� � 갈린다.� � 혹자는� � '어!� � 여보게들!'의� � 뜻으로� � � 보며(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Lenski).� � 현대� �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

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 애정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9절).� � � 고기가� 있느냐...없

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

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

고기'에� 해당하는� � 헬라어� � '프로스라기온'(*� � � � � � � � � � � � � � � � � � � � � )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 � � � � � )와� '....와� 함께'를� � 뜻하는� � '프로스'(*� � � � � � � )가� 결합된� 것으로'떡과� 함께� 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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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 하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 � � � )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니까� 본문의� '고

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 하지� �

않은데서�오는�필연적인�결과였다.�

=====21:6�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

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

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 그러한� � 추측은� 본절에� 접근

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

하는�결과가�발생했다는� �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 � � � � � � � � � � � � ,� 뎌시오스)이라는�단어의�

이차적인� � 의미가� � '행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 사

건을� �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 제

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결과로� 얼마나�많은� 고기가�잡혔는지�그물을�들어올릴�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 � � � � � � � � � � � � ,여퀴에인)는� 말이� �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 오

는� � 것을� � 나타내는� � 데도� � 사용되었음을� � 감안한다면(6:44;12: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

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

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응�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

를� 만들수� � 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있으며� 그들의� �

능력의�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대한� 절대적�복종에�있었다.

=====21:7� � 예수의�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

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 그랬거니와� �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 알아보았고� �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

다.� � � �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

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

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 활동을� �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

게� 걸쳐져� 있던� �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 열정(熱情)을� 간직하고�있었다는�사실이다(15절� 주석참조).

=====21:8� � � � � 오십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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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 � �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6

절)�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

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 '플로이아리온'(*� � � � � � � � � � � � � � � � � � �

)은� '플로이온'(*� � � � � � � � � � � � � )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에� 밑

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 수도� �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6: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Robertson).

=====21:9� �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

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 위하여� 식사

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따뜻한�식사를�준비해�주시는� 세심한� � 배려(配廬)를� � 보여주신다.� 예수께서�어떤�경로를�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

는� 친밀한�교체의�시간이며(15절� � 주석�참조),� 소명을�부여하는�시간이기도�했다(151-19절).�

=====21:10� � 지금� 잡은�생선을�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제자들에게�그들이�잡은�생선을� � 가져

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 않았기� � 때문에� � 지금� � 그물에� � 걸린� � 생선을� � 가져오라� � 하셨다(L.� Morris).� (2)예수

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

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

기� 어려운�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바(6:1-13),� 예수께서는�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

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

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 자신감을� � 가질� 수�있도록�해주고자�하셨다는�것이다.�

=====21:11� �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 셈하

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사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 한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 본문에서� � '고기'에� � 해당하는� � 헬라어� � '잎뒤스'(*� � � � � � � � � � )는,� 묘하게도� '하

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

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곳에서�물고기�그림이�발견되는�것은�이런� 맥락에서�이해된다.� 한편� 요한은�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 (1)어거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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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

(1+2+3+4+5...+17)� �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

여서� 이� 153이라는� � 숫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

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 해석을� 제

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 동물학자들은�생선을� 153종

으로�분류했는데�본문의� 이� 숫자는�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 상징� 한다고� 본다(Hieron).�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 가리킨다고� � 본다(Barrett).�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

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 � �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눅� 5:6).� 그럼에도� �

그물이� �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 찢어지지� � 아니하

였다고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1:12� � � 조반을...묻는� � 자가� � 없더라� � -� � '조반'으로� � 번역된� � 헬라어� � '아리스테사테'(*� �

� � � � � � � � � � � � � � � � � � � � � � )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

의� � 식사를�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 � � � � � � � � � � � � � � � )이� 바로� 그� 첫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 먹기도� 했다고� 한

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 � � � � � � � � � � � � � � � )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

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

을�알고� 있었다.� 153마리의�생선이�분명한� � 현실이듯�지금� 제자들과�함께�식사하려�하신�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 꿈이나� �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

께�선뜻�말을� 건네지�못한� 듯이� 보인다(Godet).

=====21:13�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 가셔서'라는� � 표현� � 가운

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머뭇

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

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릉�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

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 � � � � � � � �

� � � � � � )과� 동일하다는� 점� � 그리고� 11절의� '큰� 고기'(*� � � � � � � � � � ,�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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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 위함

이었다고�볼� 수� 있는�가능성은�더�희박해진다.

=====21:14� � 세번째로�나타나신�것이라� -� 요한은�막달라�마리아에게�나타난�것을� � 계산에� � 넣

지� 않고� 있다(20:15-17;19,20;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 것은� 그녀

가� 제자가(*� � � � � � � � � � � � � � ,� 메데테스)아니었기� 때문이라고�본다(Barrett).� � 그런데� 요한이� 언급

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신약성경이� 보도

하고�있는�바� 부활하신�예수의�현현에�관한�기사들을�도표로�정리해�보면� 다음과�같다.�

=====21:15�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

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

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

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

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

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 � � 이� 사람들� 보

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사람들'은� � 개역성경의� � 난하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 these로� � 되어� �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 있던� �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

들(배와� 기타� � 기잡는� �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다� 가능하며�타당성을� 갖

는다고� � 보여진다.� 그러나�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해석은�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 예

수를�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 있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 �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

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 � � � � � � � � � )였는데� 베드로는� '필로'(*� � � �

� � � � � )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

랑,� 완전히� �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 같

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 해서� �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 인간적인� �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 표현하고� �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

고� 대답함으로써� �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

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 주석� 참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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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명령이� 연

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 목초지로� �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같은� 의미의�반복으로�보는�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

현은�베드로에게�부여된� � 소명은�힘이� 들고�많은� 사랑을�요하는�것이다.�

=====21:16� �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 않고� � 다

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 질문은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

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

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 차원이� �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

하느냐�하는� 일대일�차원의�관계에� � 있었다.� � 베드로의�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베드

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주절로,� '내가�주를� 사랑한다'는�말이� 종속절의�형식으로�진술되고�있다는�점이다.

=====21:17� �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 � � � � � � � � �

)로� 표현하고�있는데� 이것읕�베드로가�계속해서�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 진실성과� 주

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

"요한의� � 아들� � 시몬아,� � 너는� � 진정� � 나의� �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 � � 근심하여� 가로되� � -� 베

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

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모은�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볼� 수도� 있다.� 즉�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

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 혹자는� �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

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 � � � � � � � � � )의� �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 � � � � � � � � � � � � � )의� 번역으로서� 이� � 말은� � '오

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

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 그러나� 교반하지� 않게� 표

현하고�있는�셈이다.� � � � 내� 양을�먹이라� -� 예수는�베드로의�사랑을�세번� 확인하였고�그에게�동일

한� �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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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 보여주는� � 의미가� � 있다(Bultmann).� 특

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 있다.� �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

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21:18� �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베드로의� � 순교(殉敎)가� 예고되고�있다.� 혹자는�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이었으나�성인이�되면� 마

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

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 순교� �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

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

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

음절(19절)과� 관련시켜� �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 된다는� �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 관련되는� � 것

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 노인의� � 절망을� 묘사

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 � � � � � � � � � � � � � � � � � ,존뉘나이)는� '묶다'는� � 뜻이� 아니라고� 보아

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 본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

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 있다고� �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 사65:2는� �

바나바� � 서신12:4,� � 저스틴(� � � .,� I� 35),� 이레니우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9)� 그리고� 키푸리안(� � � � � � �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 � � � � � � � � � � � � � � � �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

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

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 옳다고� �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

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 자기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

(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

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

절)� 죽음의�길을� � 자발적으로�걸어가게�될�것이다.

=====21:19� �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 베드로는� 이런� 죽음

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 하나님을� 영광되게�한� 것과� 같다.� 그

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

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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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 12: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 맺는다(행15:1-11).� �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 보존되어� �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 서

신(클레멘트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 로마에서� � 순교당한� � 것으로� � 기록되어� � 있다.� � 터

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 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 라는� 말씀이� 성취

되었다고� 보았다(� � � � � � �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두는� 형태로�십자가에�달려� � 처형되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

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

(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 들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

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그분는� "네가� 십자가를�지지�않으려�하니� 내가� 다

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

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 후� �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

다는� 것이다.� � � � 나를� 따르라� -� 본문은� 13: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 함을� � 시사한� 것

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 있다.� 그것은� 베드

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12:25,� 26;막8:34,�

35)

=====21:20� � 베드로가� 돌이켜...따르는� 것을� 보니� -�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

서�베드로에�버금가는�중요한�인물로�서술되고�있다(7절;20:2-8).� 이� 제자가�예수에게�사랑을�받

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 있다.� 한편� 본문의� 의미

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 보고� �

베드로에� � 대한� � 요한의� � 우월성이� � 암시된� � 것이라고� � 한다(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

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 더� � 자연스럽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 유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 주의� �사랑하는�제자가�따르기�전에� 베드로가�이미�행동을�나타낸�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 복수(them)임을� �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

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절은� �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

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

는�듯하다.

=====21:21� 이� 사람은� 어떻게...되겠삽나이까� -�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

학자들은� 요한에� 대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 베드로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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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도� 당연히� 순교

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

에�대한�안타까움과�동정심에서�이런�질문을�했을�수도� � 있다(Godet).

=====21:22� 내가� 올� 때까지...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베드로의�질문에�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 요한도� 자신

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마음을� 읽

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

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

조적�명령문에�의해�분명하게�드러난다.� � 여기서� � '너'(*� � � � ,� � 쉬)가� � � 강조적인� � � 위치에� � � 있

음을� � � 주목해야� � � 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절에서

는� 두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

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

고�있다는�것� 따라서�그들의� � 종국(終局)에� 의해� 그들의�비중이�결정될�수� 없다는�것이다.

=====21:23� 형제들에게...죽지�아니하겠다� -� 본절은� � 베드로의� � 물음에� � 대한� � 예수의� � 대답이

(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된� 이야기

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 '형제들'이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 때문이다(행1:15,� 16).� 예수의� 말씀

은� 요한이� 당신의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

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 오해되었다는� � 것이다.�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

요를� 느낄만큼�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 있었던�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

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

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16:27,� 28;행� 1:11;고전� 115:51;살전4:15;계2:16;3:11).� 렌스

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 살아있다는� 전설

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영향을�미쳤는가를�능히�짐작케�한다.�

=====21:24� � 이� 사람이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자로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였던� 제

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거하

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있음을� 시사한다.� � � 우리는...참인줄� 아노라� -�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 신뢰할� �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

고� 있다.� � 그런데� �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

다.� 일찍이�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 책임을� � 졌었다고�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 것일뿐� � 어떤� 증거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 '에베소의� 장로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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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거를�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

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응� 공동체� 의식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

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 경우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중요하다.�

=====21:25� � 예수의�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부족할�줄� 아노라� -� 요한은� 20:30에� � 이

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그� 하신� � 일들을� �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채우고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번역)는� 표현은� 확실히�모

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

고도�수많은�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 저자인�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것,(2)그리스도의�삶을�

통해� 계시된� � 복음은� �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

(Lenski)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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