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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 An Analysis of Papers used in Historical Manuscrips 손 계 영(Ke-Young Son)** 1) 1. 서 론 2. 발의 형태 2. 1 발초수 2. 2 발끈폭 3. 밀 도 4. 섬유종류 5. 결 론 <초 록>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를 분석하여 그 특징을 고찰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은 문중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1,504건으로, 그 종류는 17종 23항이다. 분석방법으로는 종이의 발형태(발초·발끈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분석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우선 발의 형태는 발초수와 발끈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는데, 3㎝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진다.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다. 10개 내외의 발초수를 갖춘 것은 1933년 Dard Hunter의 조사에 보이는 억새발인 것으로 파악된다. 발초수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중기부터 말기로 갈수록 발초가 더욱 촘촘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발끈폭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며, 이외에도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발끈과 발끈 사이에 짧은 발끈이 있는 경우,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경우,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발끈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1800년대 이후에 확연히 좁아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밀도를 살펴보면, 문서종류마다 나타나는 평균밀도가 度支準折 에 기록된 종이 종류와 무관하지 않다. 종이 종류의 항목이 같은 문서는 서로 유사한 평균밀도를 보이며 초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저주지의 순으로 밀도가 점점 낮아진다. 이외에도 같은 종류 문서의 밀도를 분석해 보면 당시에 문서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서지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 에서 구분한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한 결과,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서의 작성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다르게 사용하고, 시기에 따라서도 종이의 특징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본 연구를 통해서 冊紙와 文書紙의 비교를 할 수 있고, 중국의 고대 종이와 조선시대 종이의 비교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당시의 종이 종류와 문서종류별·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주제어: 종이, 문서지, 발초수, 발끈폭, 종이 밀도, 종이 섬유 ** 본 논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문서지 연구(2005)의 일부임을 밝힙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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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An Analysis of Papers used in Historical Manuscrips

    손 계 영(Ke-Young Son)**1)

    목 차

    1. 서 론

    2. 발의 형태

    2. 1 발초수

    2. 2 발끈폭

    3. 밀 도

    4. 섬유종류

    5. 결 론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를 분석하여 그 특징을 고찰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은

    문중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1,504건으로, 그 종류는 17종 23항이다. 분석방법으로는 종이의 발형태(발초·발끈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분석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우선 발의 형태는 발초수와 발끈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는데, 3㎝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진다.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다. 10개 내외의 발초수를 갖춘 것은 1933년 Dard Hunter의 조사에 보이는 억새발인 것으로 파악된다. 발초수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중기부터 말기로 갈수록 발초가 더욱 촘촘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발끈폭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며, 이외에도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발끈과 발끈 사이에 짧은 발끈이

    있는 경우,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경우,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발끈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1800년대 이후에 확연히 좁아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밀도를 살펴보면, 문서종류마다

    나타나는 평균밀도가 度支準折에 기록된 종이 종류와 무관하지 않다. 종이 종류의 항목이 같은 문서는 서로 유사한 평균밀도를 보이며 초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저주지의 순으로 밀도가 점점 낮아진다. 이외에도 같은 종류 문서의

    밀도를 분석해 보면 당시에 문서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서지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한 결과,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서의 작성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다르게 사용하고, 시기에 따라서도 종이의 특징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본 연구를 통해서 冊紙와 文書紙의 비교를 할 수 있고, 중국의 고대 종이와 조선시대 종이의 비교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당시의 종이 종류와 문서종류별·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주제어: 종이, 문서지, 발초수, 발끈폭, 종이 밀도, 종이 섬유

    ***본 논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문서지 연구」(2005)의 일부임을 밝힙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email protected])

  • 80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This study is that the name from Tagjijunjeol is compared with the actual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 have selected the families having had influencing power in Gyungi-Do(京畿道), Gyungsang-Do(慶尙道), Jeonra-Do(全羅道), Chungcheung-Do(忠淸道), and analyzed 1504 articles of historical documents owned by those families. I checked up each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n it's shape of screens, density, raw material. I cannot find the feature of it's region, but prominent feature according to the types and period of historical documents.At first, I have surveyed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in papers. The number of strips can be

    divided into two cases, around 10 and around 17. The case around 17 is similar to the number seen in the book paper of the early Joseon Dynasty, but the case around 10 is rare. Dard Hunter said in his book, published in 1933, that screens were made of Korean grass(Miscanthus sp.) at that time in Korea. I guess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of the case around 10 was made of Korean grass, Miscanthus sp.. The case around 10 and the case around 17 were not different in period, but the contemporary appearance. However, if we look into the change of strips' number, we can learn that it becomes more dense as time goes by.The intervals of hair stitch, contrary to book paper, have appeared irregularly and a short hair stitch

    was frequently found between long hair stitches. This was the result of fastening extra stitch to increase the firmness of strips, as the part of screens which was frequently touched by hands would wear out easily.Then, have look into the density. Each kinds of historical documents had a wide range of density.

    But the average have had relationship with the kinds of paper written in Tagjijunjeol. The historical documents having the same item of paper have kept similar densities. From the density variation of Gosingyoji(告身敎旨),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over 5 by king, based on time periods, we can see a great disparity between before and after Imjin-waeran war. Before Imjin-waeran war paper's quality was high, right after Imjin-waeran war went abruptly down, and went gradually up just from 1650's, but since 1700's quality has not risen more, kept the value. On the contrary, the density of Gyocheop(敎牒),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under 5 by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the Ministry of Military, have not had a great disparity according to time periods, but had a lower density than Gosingyoji. Joseon Dynasty has strictly divided Gosingyoji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over 5 from Gyocheop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under 5, it seems to distinguish the appointment by king from the appointment by Ijo(吏曹),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Byeongjo(兵曹), the Ministry of Military.

    Key words: paper, historical documents, shape of screens, density of paper, strips of paper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81

    1. 서 론

    조선시대에 있어 종이는 문서의 형식을 갖추

    는 주요소 중 하나였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문

    서작성의 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달리 하였

    고, 종이의 크기 역시 문서의 다양한 목적에 따

    라 구분하여 사용하였음을 현존하는 유물을 통

    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문서를 연구하

    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이다. 즉,

    어떤 종류의 종이를 썼느냐하는 것은 그것이

    禮의 適否 여부를 가늠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종이의 형태를 통해서 문서의 성격을

    규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 분석에 관한 선행연구로 국내의 경우에

    는 정선영과 박상진의 연구가 있으며, 국외의

    경우에는 일본의 赤尾榮慶의 연구가 있다.1)

    이들 선행연구는 중국의 5~10세기 사경과 고

    려․조선시대의 冊紙를 文書紙와 비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문서지에 관한 연구로는 손계영의 연

    구가 있다.2) 여기에서는 왕실 및 각 관청에서 사

    용되는 물자를 항목별로 분류․정리한 度支準

    折의 「紙地」 항목을 중심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던 종이 76항 93종을 정리하고, 고문서에 주로

    사용되었던 8종의 종이 특징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

    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시대적

    인 사건 또는 문서의 종류에 따라 조선시대의

    종이는 다양한 형태를 띠며 변모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모과정을 구체적

    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문서지를 시

    기별․문서종류별로 나누어 살피는 포괄적인

    연구와 함께,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문서지와

    현존하는 문서지를 비교․분석하는 세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현존

    하는 문서지를 문서종류별로 나누어 각 시기마

    다 어떠한 양상을 띠며 변모해 갔는지 살펴보

    고, 문헌상에 보이는 각종의 종이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문서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 문서지

    가 갖는 고유한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아

    울러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書冊에 사용된 冊

    紙가 문서지의 성격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각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

    1) 정선영의 冊紙에 관한 연구로는 조선 太祖~成宗년간에 간행한 古書 57종을 중심으로 발의 형태, 종이두께, 책의

    크기, 섬유종류를 조사하여 조선초기 冊紙의 특징을 고찰하였으며, 고문서에 관한 연구로는 16~19세기의 紅牌

    2건, 告身敎旨 4건의 원료, 두께, 백색도, 크기, 전충제, 무기검출 등을 조사하는 한편, 문헌에 나타나는 고문서의

    크기 및 종이 명칭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정선영, 「朝鮮初期 冊紙에 관한 硏究」, 서지학연구 창간호, 1986 ; 정선영, 「고문서의 紙質」, 고문서연구 제20집, 2002 참조.박상진은 11~19세기의 冊紙 33종의 섬유를 분석하였는데,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당시의 종이섬유의 종류는 닥

    섬유, 마섬유, 대나무, 벼, 갈대, 칡, 안피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상진, 「목판 및 종이(韓紙)의 재질 분석」,

    국학연구 제2집, 2003 참조.赤尾榮慶은 5~10세기 사이의 돈황출토사경 200점을 중심으로 그 재료와 서사의 형식을 연구하였는데, 200점

    각각마다 종이의 크기, 한 장당 행수, 발초의 수, 발끈폭의 간격을 조사하여 데이타를 작성하였다. 赤尾榮慶, 「敦

    煌写本の書法と料紙に関する調査研究(研究代表者:赤尾栄慶)」, 平成8․9․10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国際学術研究 学術調査】 研究成果報告書, 1999 참조.

    2) 손계영,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연구: 度支準折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제25집, 2004 ; 손계영, 「朝鮮時代 文書紙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 82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중은 서울․경기지역에서는 議政府 潘南朴

    氏 西溪宗宅, 경상지역에서는 慶州(良洞)

    慶州孫氏 書百堂宗宅, 충청지역에서는 扶餘

    咸陽朴氏 九堂宗宅, 전라지역에서는 求禮

    朔寧崔氏 大宗家이다.3) 네 문중에서 소장하

    고 있는 고문서의 총 건수는 반남박씨 384건,

    경주손씨 957건, 삭령최씨 1,184건, 함양박씨

    1,886건이다. 그 중 고문서의 종류나 형태에 있

    어 분석대상의 조건에 부적합한 일부 문서는 제

    외하여,4) 최종적으로 본 연구의 분석대상에 포

    함된 문서는 모두 1,504건이다.5)

    문서지를 과학적․기술적으로 분석하기 위

    해서는 다양한 분석기준이 있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종이의 强度, 白色度, 不透明度, 平滑

    性, 通氣性, 吸防濕性 등의 요소는 현대적 기

    술을 이용한 종이분석의 주요기준이 된다. 그러

    나 본 연구에서는 문서지를 3가지 방법에 의해

    분석하고자 한다. 즉 발의 형태와 섬유의 종

    류6), 그리고 도련한 정도를 기준으로 삼았으

    며,7) 각각의 측정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발형태의 분석이다. 종이에 비치는 발

    의 형태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8) 종이에

    비치는 발무늬는 2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 즉

    발초의 수와 발을 묶고 있는 실의 간격이다.9)

    따라서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3㎝ 내에 발

    3) 문중을 중심으로 고문서의 종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문중을

    선택할 경우, 각 문중이 세거하였던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종이의 출처와 관련되는 특징을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둘째,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에는 발급처가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발급처에 따른 다양한 종이를

    검토할 수 있다. 셋째, 문중의 인물․사건 등을 통해서 문서의 발․수급자 및 작성연대를 비교적 쉽게 추정할

    수 있고, 이는 종이의 생산지 및 생산시기와 관련되는 사항이므로 문서지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문중의 선정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할 수 있도록 경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각 지역의 문중을

    선택하되, 문서의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한 문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4) 분석대상에서 제외한 고문서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건수에 관계없이 네 문중 가운데 한 문중에서만 소장하고 있

    는 경우, 연대추정이 곤란한 경우, 발․수급자가 없는 置簿類, 詩文類의 경우이다. 또한 형태적인 이유로 분석대상

    에서 제외된 문서가 있다. 이를테면 종이가 아닌 문서, 부분적으로 심하게 떨어져나가는 등 극도의 손상이 있는

    문서, 成冊 문서, 문서의 유형이 다른 종이가 2건 이상 粘連되어 있는 문서, 배접된 문서 등은 분석대상에서 제외하

    였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는 발의 형태 및 섬유종류를 분석하기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부분적인 분석에는 포함시켰

    다. 이외에도 草稿 문서, 謄書한 문서, 갑오개혁(1894년) 이후에 작성된 문서는 분석대상에서 제외하였다.

    5) 문서종류는 敎書, 諭書, 有旨, 紅牌, 白牌, 追贈敎旨, 告身敎旨, 敎牒, 差定帖, 關, 傳令, 立案, 戶籍(準戶口․戶口單

    子), 所志類(所志․上書․單子), 分財記(和會․衿給․分給․別給), 明文, 婚書 등으로 총 17종 23항이다. 이 가운

    데 告身敎旨(627건), 敎牒(118건), 所志類(143건), 明文(387건)은 분석대상에 포함된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분

    포를 차지한다.

    6) 종이제조의 근본원리에 있어서 두 가지 기본요소는 섬유와 발[簾, 판틀]이다. 이들 두 요소는 기왕의 冊紙연구에

    따르면, 각 시기나 지역 또는 성책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성이 文書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의 여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7) 종이를 품질에 따라 구분할 때 적용되는 중요한 요소는 종이를 두드린 搗鍊 정도이다. 종이를 만든 후에는 이를

    두드려서 섬유들 사이의 공간을 최대한 줄여야 종이로서 上品의 가치를 갖게 된다. 문헌상에도 ‘搗鍊’이라는 용어

    를 써서 종이의 품질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도련 정도의 분석 역시 문서지의 분

    석방법에 따른 기준을 설정하는데 주요한 요소가 된다.

    8) 이는 발형태가 뚜렷한 경우에 해당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햇볕에 비추어 보거나, 라이트박스(light box 또는

    slide viewer) 위에 올려놓고 보아야 관찰할 수 있다.

    9) 종이뜨는 발은 가늘고 긴 대를 실로 엮어 평평한 발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가늘고 긴 대를 발초라 하고,

    발초를 묶는 실을 발끈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83

    초의 수가 몇 개인지를 측정하고, 후자를 관찰

    하기 위해서는 발끈과 발끈 사이의 길이를 측정

    하는 방법이 유용하다.

    둘째, 밀도 분석이다. 종이를 도련하게 되면,

    종이섬유들 사이의 공간이 좁아지게 되고, 서로

    밀착하게 된다. 따라서 도련한 종이는 도련하지

    않은 종이와 비교하였을 경우, 같은 부피 내 섬

    유의 양이 많아진다. 즉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

    다. 이러한 원리로 문서지의 도련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문서지 전체의 부피를 측정하여 문서

    지의 무게로 나누면 밀도를 알 수 있고, 이는 곧

    도련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수치가 된다.10) 그

    러므로 밀도의 측정에 필요한 요소는 종이의 가

    로․세로의 길이, 두께, 무게이다.11)

    마지막은 섬유종류의 분석이다. 고문서의 원

    본 뒷면의 일부에 붓으로 물을 가볍게 칠하여

    물이 마르기 전에 핀셋으로 섬유 몇 올을 채취

    하여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올려놓고 섬유가 뭉

    치지 않도록 핀셋으로 잘 풀어준다. 그 위에 염

    색액을 떨어뜨려 섬유를 염색한 다음 현미경으

    로 관찰하는 방법이다.12)

    본고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서지의

    분석방법을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로 크게

    나누고, 각각의 항목 속에서 특징이 두드러진

    문서종류를 중심으로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또

    한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 告身敎旨, 敎牒, 所志類, 明文

    의 경우는 각각의 시기적 경향성을 중심으로 논

    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발의 형태

    용액 속에서 분해된 식물 섬유를 한 겹의 얇

    은 막으로 변환한 것이 종이 발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물 속에서 분해되어 떠있는 섬유를 한

    겹으로 걸러내는 작업은 종이 제조 과정에서 매

    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섬유를 한

    겹으로 걸러내어 종이를 뜨는 도구를 ‘발’이라

    한다. 발의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3세기 이전까지

    천으로 만든 발을 사용하였다. 나무로 큰 사각

    틀을 만들고, 대나무 끈으로 천과 사각틀을 꿰

    매어 연결하였다(그림 1 참조).

    천으로 만든 발로 종이를 뜨게 되면, 종이가

    발에서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종이를 뜬 발

    을 통째로 말려 종이를 건조시켰다. 때문에 종

    이를 만드는 과정이 길고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4세기 이후부터는 얇은 대

    나무를 엮어 종이 뜨는 발을 만들었는데(그림 2

    참조), 대나무의 표면이 매끄럽고 발의 견고한

    구조로 인하여 발에 붙어 있는 젖은 종이를 손

    상 없이 합판으로 옮길 수 있었다.

    발에 붙어 있는 종이를 건조하는 시간을 줄이고

    10) 밀도(g/㎤) = 질량(g)/부피(㎤) = 질량(g)/[세로(㎝)×가로(㎝)×두께(㎝)]

    11) 고문서의 가로․세로 길이는 일반적인 줄자를 사용하여 측정하였고, 두께와 무게의 측정에 사용된 장비는 Mitutoyo

    No.7301와 AND CB-1200이다.

    12) 본 연구에서는 섬유를 염색하는 용액은 C염색액을 사용하였고, 현미경은 Nikon YS100으로 관찰하였다. C염색

    액은 1990년 ISO로 지정되어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시약이며(ISO 9184-4, Paper, board and pulps-Fibre

    furnish analysis- Part 4 : Graff "C" staining test), 국내에서는 2002년에 한국산업규격으로 표준화되었다(KS

    M ISO 9284-4, 종이, 판지 및 펄프-섬유 지료 분석 -제4부: 그라프“C”염색 시험). C염색액은 종이의 제조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섬유의 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제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 84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천으로 만든 발의 형태

    대나무로 만든 발의 형태

    종이를 연속적으로 만들게 되었던 점은 종이의

    수요 증가로 인한 기술적 향상에서 기인한 것이

    다. 천으로 만든 발로 종이를 뜰 경우에는 종이

    에 발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고, 대나무로 만든

    발로 종이를 뜨면 종이에 얇은 대나무발의 자국

    이 선명하게 보인다(그림 4 참조). 종이의 제작

    과정이 간편하고, 다량의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으로, 3-4세기 사이에 천으로 만든 발에서

    대나무로 만든 발로 변화하였고, 그 시기 이후에

    제조된 종이에는 대나무발의 자국이 나타났다.

    조선시대 문서지에 나타나는 발의 자국을 관

    찰해보면,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적

    지 않게 나타난다(그림 3 참조). 그렇다면 이는

    천으로 만든 발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인가? 천으로 만든 발을 이용하면 종이가 발 위

    에서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종이 생산의 속도가 느려 종이 제작이 쉽지 않

    았을 것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1900

    년대 초 Dard Hunter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서는 천으로 만든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보고

    가 있다.13) 이로 추정하건데 발형태가 보이지

    않는 종이는 천으로 만든 발로 제작된 것이 아

    닌 것으로 보인다.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크게 3가지

    경우로 추정할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도련정

    도가 높고 두꺼운 종이의 경우이다. 즉 여러 겹

    으로 이루어져 두껍고, 도련을 잘 하여 밀도가

    높은 종이의 경우에는 발의 형태가 뭉그러져 눈

    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이것은 告身敎旨(주로

    임란이전), 諭書, 紅牌, 白牌, 婚書 등의 종이

    에서 확인할 수 있다.14) 두 번째는 종이 뜨는

    발 위에 망을 깔아 종이를 뜨는 경우이다. 발 위

    에 망을 깔게 되면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게 된

    다. 이러한 방법은 현재까지도 전통한지공장에

    13) 1933년 미국의 Dard Hunter는 중국, 한국, 일본, 인도 등 아시아지역의 종이와 종이 제조 과정을 관찰한 후 여러

    권의 단행본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Papermaking에서는 한국의 종이 및 제지과정을 설명하였다. Dard

    Hunter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천으로 만든 발(wove type of mould)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Hunter

    Dard, Papermaking, 2nd ed.,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73), p.94).

    14) 종이에 비치는 발의 형태를 관찰한 결과, 교서․유서․추증교지․홍패․백패의 경우에는 대부분 발형태를 관찰

    하기 어려웠고, 고신교지의 경우에도 임란이전의 것은 발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밀도와 관련되어 나타난

    다. 즉 밀도가 높은 문서의 경우 대부분 발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敎令類 중에서 발형태가 보이는 문서는 有旨,

    告身敎旨(임란이후), 差定帖 등이 있다.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85

    발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慶州孫氏, 土地明文68)

    발의 형태가 명확한 경우(慶州孫氏, 所志9)

    발끈폭의 길이(B)

    3㎝내

    발초의

    (A)

    발 형태의 도식

    서 사용하고 있다.15) 세 번째는 발초의 팽창에

    의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발초들은 발

    끈에 의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발초들 사이에

    는 미세한 공간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종이를

    뜨면 그 미세한 공간에 식물섬유가 들어가게 됨

    으로써 발초의 무늬가 종이에 보이게 된다. 그

    러나 발초가 오랫동안 물속에 담겨져 있으면 발

    초가 퉁퉁 불어나 서로 눌러 붙게 된다.16) 이러

    한 상태의 발로 종이를 뜨게 되면 발의 형태가

    희미하게 나타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종이에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가능성은 위의 3가지

    로 추측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종이는

    제외하고 발무늬가 드러나는 文書紙만을 그

    15) 원주한지공장 장응렬 선생과의 면담(2003. 4. 25), 신현세전통한지 신현세 선생과의 면담(2004. 7. 29)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6) “오전에 작업 시작하기 전에는 발이 건조하게 말라서 종이뜨기 괜찮지만, 오전 내내 발이 물 속에 담겨지면 오후

    에는 발이 퉁퉁 불어나요. 발이 오후에는 불어나기 때문에 종이가 잘 안 올라옵니다. 우리 아버님이 그것을 이야

    기해 주셨어요. 오전에는 4물질 하던 것을 오후에는 8물질, 9물질, 10물질을 해야한다고.…오전에 뜨면 발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오후에 뜨면 (발)초가 불어 서로 붙어버려서 발 무늬가 잘 안보여요” 장지방 장용훈 선생과

    의 면담내용(경기도 가평, 2004. 7. 29).

  • 86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대상으로 하여 발의 형태를 관찰하였다. 발의

    형태를 관찰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시도하

    였다. 일정한 간격 내에 있는 발초의 수(A)와

    발초를 묶고 있는 발끈의 간격(B)을 측정하는

    방법이다(그림 5 참조). 그러므로 전자를 관찰

    하기 위해서는 3㎝ 내에 발초의 수가 몇 개인

    지를 측정하였고, 후자의 경우에는 발끈과 발끈

    사이의 길이를 측정하여 관찰하였다.

    2. 1 발초수

    오늘날 제작되는 대나무 발의 3㎝ 내 발초수

    는 17~45개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17) 중

    국 唐代 종이의 사례를 살펴보면, 3㎝ 내 발초

    가 20~25개 이상으로 나타났으며,18) 조선초

    기 冊紙의 사례에서는 12~24개 정도 나타난

    다고 하였다.19)

    조선시대 文書紙에서는 중국과 다른 독특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즉 3㎝내의 발초수는 대부

    분 20개 이하였는데, 이들은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진다는 점이

    다(그림 6, 7 참조).

    17개 내외의 발 형태는 중국의 사례에서 보여

    지는 대나무발로 보이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어떠한 연구에도 나타나지 않는 발을 쓴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대나무가 아닌 다른 재료로 발

    을 제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1933년 한․중․

    일의 종이와 그 제조과정을 관찰한 Dard

    Hunter의 글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서 사용하

    였던 발은 대나무로 제작되거나 Korean grass

    (Miscanthus sp.)로 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20)

    이때의 Korean grass(Miscanthus sp.)는

    17) 현재 제작되는 대나무 발초의 굵기를 측정한 전철(韓紙, 원광대학교 출판국, 2003, 190쪽)의 연구에 따르면, 종이의 두께에 따라 발에 사용되는 대나무 발초의 굵기가 다르다고 하였다. 두꺼운 종이를 뜨려면 발초를 굵게

    하는 반면, 얇은 종이를 뜰 때에는 가느다란 발초로 그 간격을 촘촘하게 짠 것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종이의 종류

    에 따라 제작되는 대나무발의 3㎝ 내 발초수는 다음과 같다고 소개하였다.

    종류 3㎝ 당 발초수 적요

    薄紙40개 개량지, 화선지 등 薄紙

    45개 복사지 등의 極薄紙

    中薄紙30-32개 창호지, 楮紙 등

    25개 우산지

    厚紙 17-24개 장판지

    18) Hunter의 보고서에 의하면, 唐代 종이에서 1인치(2.54㎝)당 23개의 대나무조각 자국이 보였다고 한다(Tsueu-Hsuin

    Tsien, "Paper and Printing," Joseph Needham ed., in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68). 또한 일본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조사한 敦煌寫本의 경우에도 3.3㎝를 기준으로 발초수를 측정한

    결과 20~40개 사이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赤尾栄慶,「敦煌写本の書法と料紙に関する調査研究」, 平成8․9․10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国際学術研究 学術調査】 研究成果報告書, 1999, 1-29面 참조). 이들을 각각 3㎝로 환산하면, 20-25개 이상이 된다.

    19) 정선영의 연구에 의하면 책지에서 1㎝당 발초수는 太祖에서 太宗 연간(1332-1418)에 4~5개, 世宗연간(1419-

    1450)에 7~8개, 文宗-成宗 연간(1451-1494)에 5~6개로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을 3㎝로 환산해 보

    면 각각의 시대마다 12~15개, 21~24개, 15~18개로 계산된다(정선영, 「朝鮮初期 冊紙에 관한 硏究」, 서지학연구 창간호, 1986, 178-180쪽 참조).

    太祖~太宗年間 世宗年間 文宗~成宗年間1㎝당 발초수 4~5 7~8 5~6[3㎝당 발초수] [12~15] [21~24] [15~18]

    20) Hunter Dard, Papermaking, 2nd ed.,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73), p.96.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87

    3㎝내 발초수 10개 내외의 경우(慶州孫氏, 明文26)

    3㎝내 발초수 17개 내외의 경우

    (潘南朴氏, 告身180)

    억새인데, 文書紙의 발무늬에 나타나는 10개

    내외의 발이 억새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에 듬성듬성한 발초가 보이는 종이를 재

    현하기 위해 갈대로 발을 제작하여 종이를 뜨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21) 갈대발로 종이를

    뜨게 되면 10개 내외의 발형태가 보이는 종이

    를 뜰 수 있는 것이다(그림 8, 9 참조). 1933년

    Dard Hunter의 기록과 같이, 당시에 억새로 제

    작된 발이 있었다면, 조선시대부터 사용하였다

    고 볼 수 있고, 조선시대 종이에 비치는 10개

    내외의 발초 형태는 곧 억새발일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는 것이다.

    3㎝내의 발초수가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타나는 것은 시기적으로 차이

    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동시대에 두 가지의 발

    형태가 같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어떤 발형태가

    어느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

    렵다. 그러나 조선중기부터 발초가 이전에 비해

    더욱 촘촘해지고, 조선말기에는 3㎝내에 20개

    갈대로 제작된 발

    대나무로 제작된 발

    21)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는 갈대발을 제작하여 10개 내외의 발초가 있는 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 88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이상의 발초수가 나타나고 있다. 明文을 중심

    으로 발초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0 참조).

    다음 차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16세기에 비

    해 18․19세기에 발초수가 증가하는 현상이 있

    는데, 특히 1800년대부터 3cm내의 발초수가

    대부분 17개 내외로 나타나며 20개 이상의 발

    초수도 보이고 있다.

    2. 2 발끈폭

    文書紙의 발끈폭을 관찰한 결과 대부분이

    1~4㎝의 길이로 나타나는데, 발끈폭이 규칙적

    으로 배열되는 경우보다 불규칙적으로 나타나

    는 사례가 확연히 많았다.22) 한 장의 종이에서

    발끈의 폭이 1㎝에서 4㎝ 사이로 그 폭이 좁아

    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이 조선시대 문

    서지에 자주 나타났다(그림 12 참조).

    明文의 발무늬에서 측정한 3㎝내 발초수의 연도별 변화

    발끈폭의 길이가 규칙적인 경우

    (慶州孫氏, 書目3)

    발끈폭의 길이가

    불규칙적인 경우(慶州孫氏, 明文101)

    22) Hunter 또한 한국에서 16세기 이후의 종이를 수백장 관찰한 결과, 발끈폭이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

    다(Op.cit, p.96).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89

    중국 唐代의 종이나 조선초기 책지는 발끈

    폭이 대체로 규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3)

    그러나 조선시대 文書紙는 冊紙와는 달리 발

    끈폭의 간격이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그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그림 13~16 참

    조). 이와 같이 불규칙한 발끈폭이 나타나는 것

    은 발초를 묶는 발끈을 규칙적으로 매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문서지의 또 다른 특징은 발끈과 발끈 사이

    에 짧은 발끈이 있는 경우로 다음의 그림과 같

    다(그림 17~20 참조).

    발끈폭이 불규칙한 예1(慶州孫氏, 告身83, 1618年)

    발끈폭이 불규칙한 예2(慶州孫氏, 明文169, 1716年)

    발끈폭이 불규칙한 예3(慶州孫氏, 分財記34, 1721年)

    발끈폭이 불규칙한 예4

    (潘南朴氏, 告身45, 1675年)

    23) 唐代의 종이에 나타나는 발끈폭의 길이는 대략 17/16인치, 약 2.7㎝였다고 한다(Tsueu-Hsuin Tsien, "Paper

    and Printing," Joseph Needham ed., in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68). 조선초기 책지의 경우에는 이보다 짧게 발끈을 매어 1.7~2.3㎝로 나타났다(정선영, 「朝鮮初期 冊

    紙에 관한 硏究」, 서지학연구 창간호, 1986, 178-180쪽 참조).太祖~太宗年間 世宗年間 文宗~成宗年間

    발끈폭의 길이(㎝) 2.3 1.7 1.7~1.8

  • 90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짧은 발끈이 있는 예1(慶州孫氏, 土地明文122, 1599年)

    짧은 발끈이 있는 예2(慶州孫氏, 所志26, [1824年])

    짧은 발끈이 있는 예3(潘南朴氏, 告身105, 1727年)

    짧은 발끈이 있는 예4(朔寧崔氏, 告身5-4, 1661年)

    이러한 경우는 주로 문서 중앙 위치의 상하

    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종이 뜨는 발의 위치 중

    에서 紙匠의 손이 자주 닿는 부분으로, 종이를

    뜰 때마다 같은 부위를 잡아 쉽게 헐게 된다. 때

    문에 약해진 발초가 풀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하여 그 부위에 별도의 발끈을 덧대어 엮었던

    것이다.24) 이러한 짧은 발끈 자국이 文書紙에

    서는 자주 발견되고 있다.

    또 다른 현상으로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발끈폭이 1.5㎝ 이하로 좁게 나타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중의 발끈이 보이는 경우

    는 다음과 같다(그림 21~24 참조). 발끈이 이

    24) “발로 종이를 떠서 뜬 종이를 발과 분리시킬 때 오른손과 접촉되는 발의 일부, 즉 발의 아래쪽이 오른손에 의해서

    자주 꺾이면서 약해지지. 때문에 그 약해진 부분을 보강해 주기 위해서 발의 아래쪽 에 발끈을 짧게 덧대주는거

    죠. 처음 발이 만들어질 때는 없는 부분인데, 보강해서 오래 쓰려고 종이 뜨는 사람이 직접 꿰매는 것입니다. 요즘

    에는 발이 헐고 하면 비싸더라도 새발을 사다 쓰지만, 옛날에는 직접 바늘로 꿰맨 부분이 다시 떨어지면, 또 꿰매

    어 썼어요. 내가 17살에 일을 배울 때만 해도 그렇게 썼죠. 그 당시에는 실을 명주실로 썼기 때문에, 새발을 가지

    고 삼일만 떠도 앞뒤가 하루에 한 20코는 떨어져. 때문에 바늘․실과 칼은 윗옷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녀야 했어

    요. 한코가 떨어지면 견딜만 했는데, 두코 이상 떨어지면 (종이를) 못 떠요. 기워야지. … 떨어지면 다 뜯어내고

    다시 깁지.”(경기도 가평 장지방 장용훈 선생과의 면담, 2004. 7. 29).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91

    중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종이제작과정과 관련되

    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종이를 뜰 때에는 두 번

    을 각각 떠서 이를 겹쳐 1장의 종이로 제작한다.

    그 이유는 외발뜨기의 과정에서 발의 한쪽으로

    섬유가 집중되기 때문에 2번을 떠서 서로 거꾸

    로 겹치면 그 두께가 동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외발의 형태를 자세히 보면 발의 상하로 나

    뉘어 발끈이 지그재그로 매여 있는데, 종이를 2

    번 떠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겹치게 되면 발끈

    이 일직선으로 나타나게 된다(그림 25 참조).

    이처럼 이중으로 겹치는 과정에서 반대 방향으

    로 겹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같은 방향으로 겹

    쳤을 경우 위의 이중 발끈 현상이 생길 수 있다

    (그림 26 참조). 발끈폭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특정 시기와 관계없이 전시대에 걸쳐 나

    타났다.

    다음은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 발끈폭이 1.5~3.0㎝로 나타나

    지만, 1.5㎝ 이하의 발끈폭이 보이는 文書紙를

    볼 수 있다(그림 27~30 참조).

    1.5㎝이하의 발끈폭은 1800년 이전에는 드

    문 현상이고, 1800년 이후에 나타나는데, 특히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예1(潘南朴氏, 告身33, 1672年)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예2

    (潘南朴氏, 告身124, 1823年)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예3(朔寧崔氏, 告身3-13, 1624年)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예4

    (咸陽朴氏, 告身97, 1695年)

  • 92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

    ② ①①

    2겹을 반대 방향으로 겹칠 경우

    +

    ① ①①

    2겹을 같은 방향으로 겹칠 경우

    좁은 발끈폭(1.1-1.2㎝)(朔寧崔氏, 上書2-7, 1823年)

    좁은 발끈폭(0.9-1.3㎝)

    (潘南朴氏, 告身129, 1825年)

    좁은 발끈폭(1.4-1.5㎝)(潘南朴氏, 敎牒13, 1845年)

    좁은 발끈폭(1.1-1.2㎝)(朔寧崔氏 , 上書2-2-1, 1851年)

    1820년대 이후의 고문서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좁은 발끈폭 현상도 발끈이 이중으로 나

    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종이를 2번 겹침으

    로 인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좁은 발끈폭 현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93

    상은 종이를 겹칠 때 반대 방향으로 겹치든 같

    은 방향으로 겹치든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그러

    나 이와 같은 현상이 1800년대 이전에는 보이

    지 않다가 1800년대에 접어들어 발생하고 있어

    의문점이 생긴다.

    경주손씨 서백당종택, 반남박씨 서계종택, 삭

    령최씨 대종가, 함양박씨 구당종택의 고문서 중

    에서 明文에 나타나는 발끈폭의 길이를 시대별

    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그림 31 참조).

    은 발끈폭의 최소길이와 최대길이

    를 동시에 나타낸 차트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발초를 묶는 발끈의 간격이 좁아지는 현상이 있

    다. 이러한 사실은 1800년 이후의 문서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明文뿐만 아니라 戶籍

    類, 所志類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800년대 이

    후에는 최대 발끈폭 길이가 2.5㎝ 이하로 나타

    나고, 최소 발끈폭은 2㎝ 이하로 나타난다. 그

    러나 이는 전반적인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지,

    모든 문서지가 다 일률적인 결과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문서지의 발초수와 발끈폭을

    가지고 그 문서의 제작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다

    소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3. 밀 도

    밀도는 종이의 도련정도를 나타낸다. 우리나

    라는 예로부터 도련을 많이 한 종이를 상품의

    종이로 취급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밀

    도가 높게 나타나는 종이를 상품으로 보아도 무

    방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실 및 중앙관부에서 사용하는 물자를 호조

    에서 항목별로 분류․정리한 度支準折에 의하면, 敎書․諭書는 草注紙를, 有旨․官

    敎는 楮注紙를, 紅牌․追贈敎旨는 上品搗

    鍊紙를, 白牌는 下品搗鍊紙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네 문중에서 소장하는 문서 중 중앙관

    부에서 발급한 문서지의 밀도를 측정하여 그 평

    균값을 계산한 결과를 탁지준절에 나타나는 종이종류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표 1 참조).

    문서종류마다 밀도의 최대․최소 폭이 크게

    나타나지만 그 평균밀도를 보면 度支準折

    明文의 발무늬 중 발끈폭 길이의 연도별 변화

  • 94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度支準折에 나타나는 종이종류

    문서종류 건수분포시기

    (년)

    최소․최대밀도

    (g/㎤)

    평균밀도

    (g/㎤)

    度支準折에 기록된 紙價

    草注紙敎書 3 1691~1846 0.549~0.832 0.666

    2錢6分6里諭書 5 1691~1846 0.591~0.817 0.696

    上品搗鍊紙追贈敎旨 27 1526~1844 0.360~0.962 0.635

    6錢紅牌 9 1489~1845 0.400~0.747 0.613

    下品搗鍊紙 白牌 11 1576~1783 0.393~0.893 0.560 4錢6分6里

    楮注紙

    有旨 15 1624~1688 0.257~0.576 0.461

    6分6里官敎

    告身敎旨 627 1501~1894 0.167~0.8750.463

    (임란이전0.603)

    敎牒 118 1496~1847 0.181~0.654 0.350

    - 差定帖 17 1603~1869 0.292~0.491 0.392 -

    度支準折의 종이종류와 중앙관부 발급의 문서지 평균밀도 비교

    에 기록된 종이의 절가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초주지의 경우를 제외하면 탁지준절에 기록된 紙價와 중앙관부 발급 문서지의 평

    균밀도에 의한 지품이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문서지의 밀도가 지품을 결정하는 요소로 보아

    도 무방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탁지준절의 紙價를 기준으로 하여 종이의 품질정도를 上品에서 下品의 순으로 나열하면,

    上品搗鍊紙(6錢)-下品搗鍊紙(4錢6分6里)-

    草注紙(2錢6分6里)-楮注紙(6分6里)의 순이

    다. 그러나 실물 고문서의 평균밀도에서는 草注

    紙에 해당하는 敎書․諭書의 평균밀도가 상품

    도련지와 하품도련지에 해당하는 문서보다 높게

    측정되었다. 이는 종이의 가격과 품질이 도련 정

    도를 포함한 다른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네 문중에 소장된 문서에 있어 中央官府에

    서 발급한 것 중 건수가 가장 많은 문서종류는

    고신교지이다. 고신교지의 건수는 경주손씨 서

    백당종택 83건, 반남박씨 서계종택 237건, 함양

    박씨 구당종택 193건, 삭령최씨 대종가 114건

    으로 총 627건이다. 고신교지 627건의 밀도수

    치를 문중의 구별없이 연도별 밀도분포 경향을

    살펴보면 와 같다.

    임란 직후의 고신교지 종이는 밀도에서 임란

    이전의 종이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임진왜란

    직후를 기점으로 종이의 밀도가 현격히 떨어진

    것이다. 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告身敎旨

    627건 가운데, 임란 이후에 처음으로 보이는 고

    신교지는 1596년의 문서(咸朴, 告身5)이다.25)

    때문에 고신교지의 밀도가 떨어지기 시작한 정

    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26) 임란 직후의 한

    25) 분석대상인 네 문중 소장의 고신교지 가운데에는 1592년부터 1595년의 4년 사이의 고신교지가 남아 있지 않다.

    1591년 고신교지가 2건 남아 있고, 그 다음 시기로는 1596년의 문서 4건이 남아 있다.

    26)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은 아니지만, 盈德 務安朴氏 武毅公宗宅에 소장되어 있는 고신교지 가운데, 임란 이후에 처음

    으로 보이는 문서는 1593년의 것이다. 이 문서는 임란 직후에 발급된 문서이기는 하지만, 文書紙는 임란 이전의

    밀도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임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문서지의 품질이 즉각적으로 낮아진 것이 아니라

    임란 이후의 일정 기간동안은 임란 이전에 제작된 종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즉된다. 武毅公宗宅 소장 문서에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95

    연도별 고신교지의 밀도 현황

    시점을 종이 품질이 하락하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임란 이전의 고신교지 평균밀도는 0.603g/㎤

    로, 당시의 고신교지 종이는 紅牌․白牌에 뒤

    지지 않는 품질이었으나, 임란 이후에 급격히

    저하되었다가 1650년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품

    질이 상승되었다. 그러나 1700년대 이후로는

    더 이상 품질이 나아지지 않고 답보적인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후기의 고신교

    지 종이의 밀도는 임란 이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렀다.

    다음은 중앙관부에서 발급하는 문서로 吏

    曹․兵曹에서 발급하는 敎牒에 대해 살펴보

    았다. 고신교지 다음으로 건수가 많은 문서인

    敎牒은 총 118건이다. 교첩은 5품 이하의 관직

    을 임명하는 임명장이며, 吏曹 또는 兵曹에서

    발급하였다. 탁지준절에서는 官敎 작성시에 楮注紙를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官敎

    가 4품 이상의 告身敎旨와 5품 이하의 敎牒

    을 모두 포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27) 그러나

    실물을 비교해 보면, 고신교지와 교첩에 사용하

    는 종이는 현격히 다르게 나타난다(표 2 참조).

    조선시대에는 4품 이상의 품계를 임명하는

    告身敎旨와 그 이하 품계를 임명하는 敎牒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이조․병조에서의 임명과

    왕의 임명에 차별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

    신교지와 교첩에 사용된 종이의 품질은 임란이

    전에 큰 차이가 있었으나, 임란직후에는 고신교

    서 1593년 이후의 고신교지로는 바로 이어 1595년의 고신교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지부터 이후의 것은 밀도가

    현격히 떨어지고 있다(손계영,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연구: 度支準折을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제25집, 2004 참조).

    27) 경국대전 이전까지 ‘官敎’라는 용어는 4품 이상의 고관 임용방식으로 대간의 서경을 거치지 않고 왕명으로 임용

    하는 고신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官敎’라는 용어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5품 이하의 고신의 경우에도 사

    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정구복, 「古文書용어풀이:告身」, 古文書硏究 제22집, 2003, 298쪽).

  • 96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문서종류 평균밀도

    告身敎旨

    임란이전 0.603

    0.463임란직후(1596~1651) 0.346

    1650년대 이후 0.476

    敎牒 0.350

    告身敎旨와 敎牒의 평균밀도 비교

    지와 교첩의 밀도 수치가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는 임란직후에 이들의 종이를 구분하지 않고

    교첩을 작성하던 종이를 고신교지에도 사용하

    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650년대 이후에

    는 다시 고신교지와 교첩의 밀도가 차이를 보이

    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고신교지의 종이가 시대에 따라

    그 품질이 변화하였던 것과 달리, 교첩의 경우

    는 그 변화가 큰 폭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敎牒의 발급처가 吏曹인지 兵曹인지에 따라

    밀도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차

    이를 관찰할 수 없었다. 이는 戶曹에서 보관되

    었던 종이가 이조․병조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지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방관부에서 발급하는 문서 중 傳令과 關

    에 쓰인 종이는 중앙에서 발급하는 文書紙와

    는 성격이 달랐다. 즉 두께가 얇고 찢어지기 쉬

    운 下品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분석결과 전령

    과 관에 쓰인 종이는 0.2~0.3g/㎤의 낮은 밀

    도를 보였다. 지방관부에서 종이를 어떻게 공급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成宗21年(1490) 당시

    에는 소송의 판결에 대한 수수료를 종이로 받았

    는데, 이때의 종이는 관아의 업무에 사용되었다

    고 한다.

    소송이 있을 때는 그 판결에 대한 수수료로

    瓦家 한칸에 白紙 2권, 초가 한칸에 백지 1권,

    田畓 10負에 백지 2권, 노비 1口에 백지 3권

    을 받았고,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관에서 발급받을 때에는 와가 한칸에 백지 1권,

    초가 한칸에 백지 10장, 전답 10부에 백지1권,

    노비 1구에 백지 1권을 받았다. 이것을 질지[作

    紙]라고 하였는데, 받은 질지의 양이 총 20권

    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28) 이때 수수료로

    받은 질지는 牒呈, 關, 行移 등 관아의 업무행

    정에 사용되었고, 당시의 첩정․관․전령 등은

    질지로 받은 白紙에 작성되었던 것이다.

    관청에서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주는

    準戶口는 종이의 품질이 다른 관문서와 달리

    이례적으로 그 밀도가 높았다. 개인이 자기 戶

    의 구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는 戶口單子

    28) “傳于承政院曰 凡決訟衙門 如奴婢田地 家舍決折後公事紙收納 毋過一卷 如不足於用 以諸司外貢收納時公事紙 推

    利給與 以補之何如 非決訟衙門 亦於收外貢時 幷收公事紙 用之何處 此必官吏濫用也 如此事豈可乎 承旨等啓曰 諸

    司收貢公事紙 果有濫用之弊 然諸司亦皆有應行公事 如牒呈關字行移 皆用紙 且諸司員請臺日外 無點心 實用公事紙

    資之 傳曰 決訟衙門 如奴婢四口決折 必收二十卷 雖多至百口 亦不過二十卷 無奈未便乎 以決折多少差等收納節目

    承政院議啓 承政院啓曰 家舍相訟決得 則瓦家一間 收白紙二卷 草家一間一卷 斜出則瓦家一間一卷 草家一間十張

    田畓相訟決得 則十負二卷 斜出則十負一卷 奴婢相訟決得 則一口三卷 斜出則一口一卷 並毋過二十卷 命示領敦寧以

    上 沈澮等議 當依政院所定施行 傳曰 其以此諭京外官吏” 成宗實錄 卷242, 成宗21年 7月 13日 癸亥條.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97

    와 비교하기 위해서 準戶口와 戶口單子의 작

    성연도가 비슷한 사례를 조사해 보니 慶州孫

    氏 門中에서 세 가지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사례와 밀도는 다음과 같다(표 3 참조).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종류의 문서

    는 유사한 품질의 종이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방관청에서 발급하

    는 關과 傳令의 경우에는 종이의 밀도가 0.2~

    0.3g/㎤인 낮은 품질의 것을 사용한 반면, 동일

    하게 지방관청에서 발급하는 準戶口의 경우에

    는 私家에서 사용하는 문서지와 유사한 밀도로

    나타난 사실이 주목된다. 이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관아에서 소유했던 종이에 준호구

    를 작성하였던 것이 아니라, 준호구의 발급을

    신청한 개인이 종이를 준비하여 발급받았던 것

    으로 추측된다.

    호구단자는 준호구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경

    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上品의 종이에 작성되었

    다. 이는 호구단자를 관에 올리더라도 다시 작

    성자에게 돌아오게 되고, 이것을 문중에서 보관

    하게 되므로, 보다 상품의 종이를 선택하여 영

    구보관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上書, 所志, 單子 등 請願․陳情의 성격

    을 가진 所志類의 종이 중 특별히 上書에 쓰

    인 종이가 두껍고 윤이 나는 특징이 있다. 소지

    와 상서의 구분은 문서를 올리는 자의 신분 및

    문서내용에 따라 달라지므로 문서에 사용하는

    용어, 글씨체, 종이의 크기와 품질 등 형태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처럼 같은 성격의 문

    서라 하더라도 문서의 중요성이 높을수록 형식

    과 예식을 갖추었고, 이에 따라 지품의 수준도

    역시 동반상승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私人․門中 간에 작성하는 문서

    의 밀도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分財記의 경

    우 여러 형제․자녀에게 분재하는 내용을 한

    문서에 모두 기록하는 和會文記와 衿給文記

    가 있고, 分財의 내용을 개별적으로 기록하는

    分給文記 및 別給文記가 있다.29) 두 경우를

    분석한 결과 밀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부분 0.4g/㎤ 이상의 밀

    도를 보였고, 후자의 경우에는 0.3g/㎤ 이하의

    밀도를 보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형

    제․자녀의 分財가 동시에 작성되는 화회․깃

    급문기는 후일의 증빙 가치가 분급․별급문기

    에 비해 높기 때문에 보다 상품의 종이를 사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례1 사례2 사례3

    準戶口

    (관→개인)연도 1666年(戶籍3) 1669年(戶籍6) 1681年(戶籍9)

    밀도 0.577 0.566 0.336

    戶口單子

    (개인→관)연도 1666年(戶籍2) 1669年(戶籍5) 1678年(戶籍8)

    밀도 0.491 0.522 0.365

    準戶口와 戶口單子의 작성연도가 비슷한 사례의 밀도비교

    29) 노비․토지 등의 재산은 財主 生前에 재주의 의사에 의하여 자녀에게 분재되는 경우에 衿給文記를 작성한다. 재

    주 생전에 분재의 지정이 없었던 경우에는 死後 母와 子女들의 和會에 의해서, 또는 父母 俱沒後에 형제자매의

    화회에 의하여 재산을 분집하는 문서가 和會文記이다.

  • 98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공적인 문서가 아닌 사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호구단자․분재기․상서 등은 중앙에서 사용

    하는 종이에 뒤지지 않는 품질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문서의 보관가치가 높고, 문서의 내용

    및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성한

    문서가 본인에게 돌아와 보관하게 될 것이고,

    또한 후일에 증빙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보다 오랫동안 보관하여야 하기 때문에 좋은 품

    질의 종이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

    로 보인다.

    이에 반해 賣買明文의 문서지 품질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분석대상에서 賣買明文의 총수

    는 387건이었으나 이들의 밀도는 대부분 0.3g/

    ㎤ 이하로 측정되었다. 때문에 종이가 얇고 힘

    이 없어 쉽게 손상되고, 발무늬가 선명하게 드

    러났다. 이는 토지․노비 등을 파는 이가 종이

    를 준비하여 명문을 작성하면, 그 작성된 문서

    는 매매 과정에서 토지․노비를 사는 이에게

    넘겨지기 때문에 문서발급자가 上品의 종이를

    사용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분석대상

    으로 삼은 明文에 쓰인 종이가 다른 私文書

    종이보다 지품이 낮은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

    일 것으로 생각된다.

    4. 섬유종류

    조선시대 문서지는 어떤 종류의 식물 섬유를

    사용하였는지 현미경 관찰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에 앞서 기존 冊紙의 연구에서도 섬

    유종류에 대한 선행연구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상진의 연구에 의하면 11세기부터 19세기

    사이의 책지가 대부분 닥섬유와 마섬유로 이루어

    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중 15세기 이전에는 닥

    과 마에 칡․대나무․고정(벼․갈대)․안피 등

    을 혼합하는 비율이 높아졌다가, 16세기 이후에

    는 다시 닥섬유와 마섬유가 많아지는 경향을 보

    였다고 하였다.30)

    정선영의 조선초기 책지 연구에서는 보다 다

    양한 섬유종류가 나타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뽕나무, 면, 모시, 벼, 대나무, 대

    마, 인초, 안피 등 다양한 식물섬유가 책지에 사

    용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조선초기 책지에

    쓰인 108종의 섬유를 분석한 결과 닥나무만을

    사용한 종이는 거의 없고, 다른 원료와 혼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른 원료와 혼합된 경우에

    도 닥의 비율이 상당히 낮은 편으로 나타났는

    데, 책지는 비교적 낮은 품질의 종이로도 제작

    이 가능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31)

    위의 선행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冊紙에는

    닥나무 이외에 다양한 섬유가 사용되었다. 그렇

    다면 文書紙에는 주로 어떤 식물섬유를 종이

    의 원료로 사용하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종이제조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식물섬유

    의 형태와 색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

    다. 왜냐하면 본 연구의 분석대상인 1,504건의

    문서지는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식물섬유가 쓰

    였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를 섬유의 형태와

    색상에 따라 분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을

    먼저 설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32)

    이를 위해 본 분석에서는 닥나무, 삼지닥, 안

    30) 박상진, 「목판 및 종이(韓紙)의 재질 분석」, 국학연구 제2집, 2003, 323쪽.31) 정선영, 「조선초기 冊紙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34쪽.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99

    피, 대나무, 볏짚으로 만든 종이샘플의 섬유를

    채취해 C염색액으로 염색하여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였다.33)

    닥나무 섬유는 C염색액에 의해 밝은 적자색

    또는 짙은 적갈색으로 나타나고, 섬유의 가장자

    리에 또는 섬유에서 분리된 곳에 독립적으로 푸

    른색의 얇은 막이 관찰되었다. 삼지닥과 안피의

    섬유는 밝은 올리브색 또는 푸른 회색빛을 띠었

    으며, 볏짚과 대나무의 섬유는 탁한 적보라색

    또는 청회색으로 나타났다. 볏짚과 대나무의 경

    우에는 그 섬유의 염색된 색깔이 비슷하지만 형

    태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용이한 반

    면, 삼지닥과 안피의 경우는 색상뿐만 아니라

    형태까지 유사하여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이제 종이제조에 가장 많이 쓰이는 섬유의 형

    태와 색상의 기준이 설정되었으므로, 각종 문서

    지의 섬유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종류는 수십 종에 이르는데, 본 연구의 분석대상 1,504건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문서는 紅牌, 白牌, 諭書, 有

    旨, 敎書, 官敎, 追贈敎旨 등 7종류이다. 이

    를 탁지준절에 제시된 종이의 명칭에 따라 분류하면, 紅牌와 追贈敎旨는 上品搗鍊紙

    에 해당하고, 白牌는 下品搗鍊紙에 해당하고,

    敎書와 諭書는 草注紙에 해당하고, 有旨와

    官敎는 楮注紙에 해당한다.

    위의 종이 가운데 草注紙와 楮注紙는 명칭

    안에 ‘草’와 ‘楮’가 들어가기 때문에 초주지는

    풀 섬유로 만들고 저주지는 닥 섬유로 만들어졌

    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항간에 있어왔다.

    또한 풀로 만든 초주지보다 닥으로 만든 저주지

    가 지품이 더 높을 것이라는 추측이 뒤따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탁지준절에서 초주지와 저주지의 1장당 가격을 비교해 보면, 초주지(2

    錢6分6里)는 저주지(6分6里)와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고급종이였음을 알 수 있다.34)

    이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홍패, 백패,

    유서, 유지, 추증교지의 문서지를 통해 度支準折에서 이들 문서에 사용되었던 종이 종류인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의

    섬유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관찰 결과, 5종류의 문서는 모두 동일한 섬

    32) 製紙 관련 학문분야에서 섬유의 형태와 색상에 관해서는 국외의 연구논저가 있어 참고 된다. 潘吉星은 섬유의

    평균길이와 평균폭에 대해 조사하였고(반지씽저, 조병묵역, 중국제지기술사, 광일문화사, 2002, 13쪽), C염색에 의한 섬유의 색상에 관해서는 KS규격(KS M ISO 9184-4)으로도 표준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高知縣立紙

    産業技術センタ- 등의 연구소에서 자세히 연구되고 있다. 위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종이제조에 가장

    많이 쓰이는 식물섬유를 선택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Kinds of raw materials 섬유 평균길이 섬유 평균폭 ColorStraw 藁精 1.14-1.71 0.006-0.019

    Dim blue to grayish reddish purpleBamboo 竹 1.33-2.09 0.009-0.019

    Gampi(Wikstroemia sikokiana) 雁皮 - -Bright olive to bright blueish gray

    Mitsumata(Edgeworthia chrysantha) 三椏 3.1-4.5 0.015-0.019

    Kozo(Broussonetia kazinoki) 楮 6.0-9.0 0.024-0.28 Dim red to light purpleFlax 亞麻 - - Dim red to grayish reddish purpleRamie 苧麻 120.0-180.3 0.024-0.047 Light reddish brown

    Manila hemp 大麻 15.0-25.5 0.015-0.025Yellowish gray to light blueish

    & grayish purpleCotton rag 棉 - - Grayish red

    33) 염색에 사용된 종이샘플은 Kochi Prefectural Paper Technology Center에서 제공한 견본이다.

    34) 손계영,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연구」, 古文書硏究, 제25집, 2004.

  • 100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유형태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표4 참조). 볏

    짚이나 대나무는 섬유의 길이가 짧거나 보푸라

    기가 뭉쳐진 듯한 섬유형태를 보이고, 삼지닥이

    나 안피의 경우에는 섬유의 조직이 닥에 비해

    가느다란 특징이 있는데, 여기에서 관찰한 5종

    문서의 섬유형태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전혀 드

    러나지 않는다. 섬유의 길이가 길고 폭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색상에서 밝은 적자색이 주조를 이

    루는 가운데 짙은 적갈색이 섞여있고, 섬유의 가

    장자리에 푸른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4종의 종이가 모두 닥을 원료

    로 하여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草注紙와 楮注紙를 사용한 문서의 섬유형

    태도 닥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이며, 색상 역시

    옅은 보랏빛과 짙은 적갈색을 띠어 닥섬유의 색

    상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각종의 문서에

    사용된 종이가 동일한 섬유형태를 보였다는 것

    은 초주지, 저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가

    그 종이제조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섬유원료

    가 아닌 가공방법 등에 의해 紙種과 紙品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비단 홍패, 백패, 유서, 유

    지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1,504건의 문

    서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지의 명칭은 크게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로 구분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문서지 분석은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지의 명칭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문서종류에 따라

    유서, 교서, 추증교지, 홍패, 백패, 유지, 고신교

    지, 교첩을 그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을 도

    련한 정도를 나타내는 밀도, 종이의 두께, 섬유

    의 종류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섬유의 종

    류는 모두 닥으로 나타난 반면, 밀도는 문서지

    의 명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교서․유서 등에 사용된 초주지(0.666~0.696g/

    ㎤)와 추증교지․홍패 등에 사용된 상품도련

    지(0.613~0.635g/㎤)는 모두 0.6g/㎤ 이상의

    평균밀도를 보여 매우 높은 도련정도를 나타냈

    고, 백패에 사용된 하품도련지는 0.5g/㎤ 이상

    의 평균밀도를 보였다. 유지(0.461g/㎤)․고신

    교지(0.463g/㎤)․교첩(0.35g/㎤)에 사용된 저

    주지는 0.3~0.5g/㎤으로 다소 낮은 밀도분포를

    보였다.

    탁지준절에 기록된 절가에 따라 문서지의 품등을 매기자면 상품도련지와 하품도련지가

    초주지보다 상품이지만, 밀도에 있어서는 오히

    려 초주지가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紙種과 紙品이 도련과정을 포함한 여타의 가

    공방법에 의해 결정되어졌던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서지를 분석한 결과에 대해 살펴

    보았다. 끝으로 책지에 대한 연구 결과와 본 연

    구의 대상이었던 문서지에 대한 결과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책지와 문서지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요소

    는 종이제작에 사용된 섬유원료의 차이다. 앞서

    책지에 대한 선행연구를 소개하면서 언급했듯

    이 책지의 섬유원료는 닥을 포함하여 마․고

    정․면․대나무 등 여러 종류의 혼합섬유로 구

    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서지는 이와는 달리

    혼합섬유의 사용이 보이지 않고, 단지 닥 섬유

    만이 관찰되었다. 책지와 문서지를 분석한 결과

    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표 5 참조).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101

    종이종류 문서종류 사례1 사례2

    上品搗鍊紙

    紅牌

    慶孫, 紅牌1, 1489年 朔崔, 紅牌3, 1681年

    追贈敎旨

    慶孫, 追贈敎旨1, 1526年 潘朴, 追贈敎旨6, 1700年

    下品搗鍊紙 白牌

    朔崔, 白牌1, 1576年 潘朴, 白牌1, 1660年

    草注紙 諭書

    咸朴, 諭書1, 1691年 潘朴, 諭書1, 1732年

    楮注紙 有旨

    朔崔, 有旨1, 1624年 潘朴, 有旨1, 1681年

    紅牌․追贈敎旨․白牌․諭書․有旨의 섬유형태

  • 102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冊紙 연구 文書紙 연구

    박상진의 연구 정선영의 연구 본 연구

    연구범위

    시기 11세기~19세기 14세기~15세기 15세기~19세기

    종류 冊紙 冊紙 文書紙

    분석방법

    섬유닥나무, 마, 칡, 대나무, 고정(벼․갈대), 안피

    닥나무, 뽕나무, 면, 모시, 벼, 대나무, 대마, 인초, 안피

    닥나무

    3㎝내발초수

    (연구없음)太祖~太宗:12~15개世宗:21~24개文宗~成宗:15~18개

    시기와 관계없이 7~24개 다양(후기로 갈수록 촘촘해지는 경향이 있음)

    발끈폭 (연구없음)太祖~太宗:2.3㎝世宗:1.7㎝文宗~成宗:1.7~1.8㎝

    0.7~4.6㎝로 시기와 관계없이 다양함1800년대부터 1.0~2.5㎝로 좁아짐

    선행연구의 冊紙와 본연구의 文書紙 비교

    선행연구와 본 연구를 비교하기에는 분석대

    상의 범위 및 분석방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35) 각각의 연구결과는 시기나 분석방

    법에 있어 서로 비교 가능한 상호 보완적인 요

    소가 있다.

    우선 발의 형태에서는 조선 초기 책지에서

    나타난 현상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즉 문서지

    의 발초수와 발끈폭이 책지에 비해 더 넓은 범

    위로 나타났다. 또한 책지와 달리 시기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은 없었고, 후기로 갈수록 발초는

    촘촘해지고 발끈폭은 넓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섬유종류 역시 책지에는 다양한 혼합섬유가 사

    용된 반면 문서지에는 닥나무 이외의 섬유는 관

    찰되지 않았다.

    주로 서책의 인출에 사용되었던 책지는 일정

    한 시간동안 다량의 종이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한정된 양의 닥섬유로는 종이제조가 불가능하

    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 대체가 가능한 섬유를

    혼합하여 제조하는 비율이 높아져 닥섬유 이외

    의 다양한 재료가 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반

    면 문서는 다량으로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

    부분 낱장으로 작성하는 기록물이기 때문에 필

    요할 때마다 비축된 종이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 수요처에서는 닥섬유로

    제작된 종이를 항시 비축해 두거나, 그렇지 않

    을 경우 주위에서 마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가 언제든 있었으므로 다른 섬유를 혼합할 특별

    한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 문서지 제작에 쓰인 식물섬유를 연구

    한 결과 닥섬유 이외의 재료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 것은 이러한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라 판단

    된다.

    35) 정선영의 책지 연구에서 분석대상으로 잡은 시기는 14~15세기이고, 본 연구의 분석대상은 15~19세기의 자료이

    다, 또한 박상진의 연구는 섬유를 분석하는 방법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본 연구는 섬유종류 외에 발의 형태

    및 밀도를 분석방법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시기나 분석방법에 있어 연구결과를 비교하는 것이 다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103

    5. 결 론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세거하

    였던 문중을 선정하여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

    문서 1,504건을 분석대상으로 삼았고, 각각의

    文書紙는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조사하

    였다. 지역에 따른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고, 문

    서종류와 시기에 따라 두드러진 특징을 볼 수

    있었다.

    우선 종이에 비치는 발형태를 발초수와 발끈

    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다. 3㎝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지는데,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였으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었다. 10개 내외

    의 발형태를 갖춘 것은 1933년 Dard Hunter의

    조사에 보이는 억새발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10

    개 내외인 경우와 17개 내외인 경우로 드러나

    는 것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병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발초수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중기부

    터 말기로 갈수록 발초가 더욱 촘촘해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발끈폭은 冊紙와 달리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났고, 발끈과 발끈 사이에 짧은 발끈이 있

    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종이를 뜨는 발의 위

    치 중 紙匠의 손이 자주 닿는 부분이 쉽게 헐

    게 되므로, 발초의 견고성을 더하기 위해 그 부

    위에 별도의 발끈을 엮은 데서 비롯된 결과이

    다. 또 다른 현상으로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

    는 경우와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종이를 떠 두 겹으로 겹치는 과

    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또한 발끈

    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을 보였

    는데, 특히 1800년대 이후에 확연히 좁아짐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밀도를 살펴보았다. 문서종류마다

    밀도의 최대․최소 폭이 크게 나타나지만, 평

    균밀도는 度支準折에 기록된 종이 종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종이 종류의 항목이 같은 문

    서는 서로 유사한 평균밀도를 보였으며, 초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저주지의 순으로 밀도

    가 점점 낮아짐을 보인 것이다.

    중앙에서 발급하는 문서 가운데 告身敎旨

    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밀도에 있어 현격한 차

    이를 보였다. 임란 이전의 고신교지에 사용된

    종이는 紅牌, 白牌, 追贈敎旨에 뒤지지 않는

    품질이었으나, 임란 직후에 급격히 저하되었다

    가 1650년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품질이 상승되

    었고, 1700년대 이후로는 더 이상 상승하지 않

    고 그 수치를 유지하였다. 반면 敎牒의 밀도는

    시기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으나, 고신교지보다

    낮은 밀도로 나타났다. 조선시대에는 4품 이상

    의 품계를 임명하는 고신교지와 5품 이하를 임

    명하는 교첩의 종이를 확실히 구분하였는데, 이

    는 왕의 임명과 이조․병조에서의 임명에 차별

    성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지방관부에서 발급하는 傳令과 關의 종이는

    중앙에서 발급하는 문서지와는 확연히 구분되

    었다. 이들 종이의 밀도는 매우 낮아 얇고 찢어

    지기 쉬운 下品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반면 지

    방관부에서 발급하는 準戶口와 개인이 자신의

    戶 구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는 戶口單子

    는 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사문서

    중 所志類의 上書와 分財記에 쓰인 종이는

    중앙에서 사용하는 종이에 뒤지지 않는 품질이

  • 104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5권 제1호 2005

    었던 것에 반해 賣買明文의 경우는 대부분 낮

    은 밀도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식물섬유

    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 上品搗鍊紙, 下品搗鍊紙, 草注紙, 楮注紙

    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하였는데,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

    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문서지를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로 나누어 분석해 보

    았다. 본 연구는 탁지준절을 준거로 삼아 문서지의 종류와 사용 사례를 밝히고, 현존하는 문

    서지를 분석하였으나, 탁지준절의 내용과 일치하는 문서지가 본 연구를 충족시켜줄 만큼 다

    량으로 남아있지 않아 연구가 다소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시대적 또는 지역적

    조건을 만족시켜줄 만한 다양한 문서지의 발굴

    과 이의 연구를 통해 보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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