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김유영의 생활연보 씨뿌린 사람들 / 이원식 Adiaŭ mia estinto suferplena! (고통 가득했던 나의 과거여 안녕!)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 Upload
    others

  • View
    6

  • Download
    0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Page 1: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씨뿌린 사람들 / 글 이원식】

Adiaŭ mia estinto suferplena!

(고통 가득했던 나의 과거여 안녕!)

Page 2: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 이원식 저

(백기만/이원식 공저)

Page 3: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영화예술가 김유영 감독의 생활 연보를 중심으로

한 문화사적인 여러 현상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사상적인 배경과 예술

운동 사상史上에 있어서 활동 및 그 위치를 참고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

1. 이원식 편저 ‘세계과학문화사연표’(1955년판) 및 영남연극연구회강

좌 ‘조선연극사’ 강의 노트

2. 김재철金在喆 저著 【조선연극사】 (조선문고판)

3. 김영식金榮植 (유영영제幽影令弟) 소장 스크랩북과 기타 회상담

4. 『영화순보映畵旬報』 (제 87호 조선영화특집호 1943년 동경판)

5. 『예술운동』 (1945년 12월 창간호)

6. 『캄프』 중에서 ‘예술운동’ 등

Page 4: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4 이원식 저

김유영 생활 연보

(자료노트)

1907년 9월 22일 경상북도 선산면 원호동에서 소지주 김현묵金賢默

장남으로 출생. 조국을 일본제국에 예속화 시킨 한일신조약 체결, 고

종황제 강제 퇴위 (광무光武 11년 7월), 순종황제 즉위 (융희隆熙 원년 7

월)

조선영화연혁 소사 (1)

조선에 처음으로 활동사진이 도래한 것은 1903년 (광무 7년 이며,

이것은 1896년 일본에 수입된지 약 6년 늦어서 도래한 것이다 (활동

사진은 1895년 프랑스 류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것이다). 당시 일본 활

동사진업 길택상회吉澤商會는 영사기와 필름을 제공하고 영미연초회사

는 권연초 선전을 위하여 경성에서 공개한 것이 조선에 있어서의 활

동사진 상영의 효시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 활동사진이라는 것을 일본 유학생과 한국 정부외교관원

들을 통하여 알려져 있기는 하였지만 마침내 그것이 한국인 자신의

손을 통하여 수입되지는 않았다. 결국 영리에 민첩한 외국상인들에 의

하여 상품 판매의 하나의 선전 수단으로서 이 세기의 발명품은 도래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미 연초회사의 ‘공상空

箱(빈 갑)’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무료 입장을 시켰던 것이다.

당시의 필름은 초기의 단척물短尺物로서 1899년경 길택상회가 수입

한 ‘기차’ ‘해수욕’ 등이었다. 기차가 스크린에서 정면으로 관객을 항하

여 돌진해 옴으로 일대 경동警動을 일으킨 넌센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상영이었으며 본격적으로 관람물로서 활동사진이

등장한 것은 1904년 (광무 8년) 국립극장이었던 원각사에서 프랑스

Page 5: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5

파리 사회의 단척필름을 상영한 것이 최초인 것이다.

원각사는 이조왕실이 구미 각국의 예에 본 떠서 설립한 신식극장

으로서 원형 객석을 가진 건물이며 처음에는 궁중 소속 기생의 가무

연악과 민간측 명창우名唱優의 창극을 상연하여 일반 공개를 하고 있

었다. 이 극장이 활동사진을 상영한 것은 진기한 것이기 때문에 수입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극장을 통공개였으며 당시의 광고 삐라

에 의하면 소입 5전, 대입 10전 귀빈석이 30전으로 되어 있고 관객 성

적은 좋았다는 것이다.

이 필름은 동경서 M·파듸 상회를 통하여 온 것이 물론이나 그후

민간극장인 연흥사, 장안사, 광무사가 기생의 가무와 창우唱優의 창극

조신파연극과 활동사진을 상영하게 됨에 이르러서 활동사진은 단시일

로서 일반화되고 마침내 신시대 민중오락의 용아龍兒로 되었던 것이

다. 이 극장 등에서 상영한 필름의 일부분은 파듸 계의 작품이었다.

당시 관람자의 증언기록에 의하면 활동사진이면 반드시 ‘닭’을 그린

마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메리카계의 ‘비아스타코프’가 들어온 것은 1907년 (광무 11년 융

희 원년) 미국이 ‘고울포 부란’ 등이 경영하고 있던 한성전기회사가

‘활동사진관람소’ 란 것을 설립한 것이다. 한성전기회사는 경성에 전등

과 와사瓦斯(전기)를 처음으로 개설하고 시가에 전차 시설권을 한국 정

부에서 매수한 회사이며 활동사진 관람소는 승객유도 유원지에 설립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대문 부근에 메리·고·라운드와 같이 활동사

진을 환등幻燈과 함께 상설 공개하였다. 이때까지 원각사나 연흥사는

활동사진을 상설 상영한 것이 아니고 가무와 극을 상연하면서 종종

상영한 것에 불과하였다. 한성전기회사의 ‘활동사진관람소’가 됨으로서

비로서 처음으로 활동사진의 상설공개가 시험된 것이다. 이 관람소는

단순히 상설공개의 효시일 뿐 아니라 또 이후 오랫동안 조선에 있어

Page 6: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6 이원식 저

서 외국영화 흥행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메리카 영화의 상설관

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8년 (2 세)

의병봉기. 창덕궁동원에 박물관 동물원 설치.

1909년 (3세)

이등박문伊藤博文 한국총감 사임, 사법권과 감옥사무 일본에게 이양,

안중근 만주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사살 (10월 26일), 사관학교 폐지

신소설 발아 –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의 【혼의 성】 【치악산】 【혈의

누】 등 발표, 이해조李海潮 【구마검驅魔劍】 발표, 최남선의 신시 최초작

품 ‘해에서 소년에게’ 발표 (소년 창간호 1월 1일)

(연극)

조선의 새로운 연극은 신소설 운동의 선구자인 이인직의 ‘원각사

극장’ 운동으로서 첫 출발. 이인직의 【설중매】 【은세계】(김옥균 사건)

신극작품 상연(조선신극의 제 1성) 갑오경장, 개화운동 (1894년 청일전

쟁 전후)은 신구시대의 대립적인 현상을 격화시키었으며 동시에 번역

과 국문 운동을 통하여 신문예 운동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지난날의 중국문화 대신 일본문화의 급속도의 이입과 구주歐洲문화

사조의 경향은 물결같이 들어온 시기이었고 문학운동과 동일하게 연

국운동의 조류도 자연주의운동의 새로운 형태를 형성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북한 청국은 조선에 있어서의 모든 우월권을 일본

에 이양하였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제국주의적 정책의 첫 시도로서

노대국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구축驅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 농

민전쟁으로서 동학반란의 시련을 겪은 것이며 또 당시의 세정을 반영

한 민요 파랑새가 유행하였던 것이다).

Page 7: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7

1910년 (4 세)

안중근 여순옥旅順獄에서 사형 (3월 26일), 이해조 【자유종】 【봉선

화】 【소양호】 간행, 국문연구소 설치 (7월 8일), 주시경周時經 저著 【국

어 문법】 간행, 이씨왕국 멸망 - 한일합방조약 (8월 22일 오후 5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되다. 일본한국합방 선언(8월 29일), 조선총

독부 관제 공고, 이왕 직관제 공고 – 총독정치 개시

1911년 (5 세)

압록강 가교架橋 공사 착공, 김희상金熙詳 【조선어전】 간행, 조선총

독부지방과 편찬 【조선사찰사료】 (상·하) 간행, 조선고서간행회판 【조

선고서목록】 간행, 동간행회판 【용비어천가】(전 1책) 간행

(연극)

임성구林聖九 【금강산】, 김소낭金小浪, 양성현梁聖賢, 임용구林容九 등

혁신단조직 – ‘법지법’, ‘육혈포 강도’, ‘의형제 살해’ 등을 단성사團成社에

서 흥행

1912년 (6 세)

법전조사국 편찬 【조선관습조사보고서】 간행

조선영화연혁 소사 (2)

1907년까지 활동사진은 아직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함과 같은 흥행

장으로서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원각사의 예와 같이 상영중 카본 취급

부조로 화재소동이 있었고 또 기차가 관객석으로 향하여 돌진하여 오

고 맹호가 뛰쳐나오는 것 같으므로 임부의 경동 사건이 발생하는 등

마음속으로 그것을 즐거워하기 까지에는 아직 활동사진이 일반적으로

Page 8: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8 이원식 저

이해된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활동사진의 본격적인 일반화가 시작되었다.

가설이지만은 고등연예관이라는 활동사진의 상설관이 설립되고 1912

년에는 황금연예관이 설립되었다. 모두 일본인 경영의 상설관으로서

1913년으로 넘어오면서 활동사진은 일반화 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황금관 옆에 대정관이 설립, 2, 3년간에 큰 상설관이 3관이

나 설립되어 광무대光武台 (이것만은 조선인 경영)와 함께 활동사진을

신시대의 민중오락으로 전도케 하였다.

이 시대에 있어서 단척물과 함께 장척물(4, 5권)이 상영되어 일본

택촌사랑澤村四郞의 ‘서역기’ 송지조松之助의 초기 작품 향도向島의 신파

영화가 파듸와 부류바드 희극과 함게 주요한 것이었다.

경기가 좋은 취주악吹奏樂과 유창한 활변으로서 활동사진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활동사진(구극舊劇)은 아직 조선인 관

중에게는 이해와 흥미를 주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아메리카 영화가 분

입奔入하던 이전의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파듸 단편에 부류바드 희극과 유니바살 장편으로 이행함에 있어서

활동사진을 보러가는 것은 우미관優美館으로 가는 것이며 명변사 서상

호徐相昊와 함께 우미관은 모든 흥행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

다. 고등연예관은 도퇴되었고 황금관은 제2대정관으로 되어 대정관과

함께 그것은 순차적으로 일본영화 중심의 상설관으로 변하였으며 양

화洋畵의 대도관은 우미관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신파연극과 무극가무를 상연하고 있던 단성사가 또 활동사

진 상설관으로 변하였다 (1917년경에 이르러 경성에 상설관은 5, 6 개

소, 지방부시에 7, 8 개소, 기타 비상설의 소실이 각처에 20여개소 있

었을 정도이다).

Page 9: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9

1913년 (7 세, 아우 영식 출생 11월 1일)

(연극)

일본에서 귀국한 윤백남尹白南, 조중식趙重植, 윤교중尹敎重 등 원각사

인수 – 문수성일좌 조직 ‘부여귀’ (덕부德富 원작), ‘장한가長恨歌’ (미기원

尾崎原 작), ‘나의 죄’ 등 상연.

이기세李基世 유일단 조직, 선미단, 계화단 흥행, 문수성일좌와 유일

단 합동 예성좌藝星座 조직 – ‘쌍옥루雙玉淚’, ‘복활復活’, ‘등대수燈臺守’ 등

상연 (공연후 해산), 이기세 문예단 조직, 금강산신극단 조직.

1914년 (8 세)

최찬식崔燦植 (해동초부海東樵夫) 경중화鏡中花 발표

1915년 (9세 4월 1일 선산군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

관야정關野貞 편 【조선고적도보】(전 16권) 간행

1916년 (10세)

낙랑유적 발굴

1917년 (11세)

백남규白南奎, 김억 중심으로 조선에스페란토협회 창립

(연극)

지금까지 혁신단에서 연극활동을 하여오던 김소낭金小浪은 혁신단

에서 분립하여 따로 취성좌聚星座를 조직하다.

1918년 (12세)

Page 10: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10 이원식 저

이능화李能和 저 【조선불교통사】(상․하) 간행, 【이왕직박물관소장사

진첩】(3책) 간행, 조선총독부 편찬 【고적조사보고】 【금강산식물조사보

고】 간행

1919년 (13세)

이태왕(전 고종황제) 훙거薨去, 민족자주독립해방운동의 봉화 – 3․1

항일투쟁, 조선독립선언 (3월 1일), 경성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 임시

정부 조직 (3월 2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 발표 (3월 13

일), 상해임시의정부 조직 (4월 2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창간 (4

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4월 2일), 『공제共濟』, 『서광曙光』, 『개

벽開闢』, 『폐허廢墟』 등 창간, 조선총독부 편찬 【조선어사전】 간행

1921년 (15 세)

4월 1일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제2학년으로 전교, 조선어연구회 창

립(12월 3일) –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개편

(연극)

임성구 사후 혁신단 해산, 일본동경유학생 극예술협회 조직 (홍해

성洪海星, 유엽柳葉 유춘섭柳春燮),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마해송馬海松, 막

간幕間음악 윤수선尹水仙) – 조명희 작, 김영일의 ‘사死 최후의 악수握手’

상연

조선영화연혁소사 (3)

활동사진은 양화가 천마공天馬空을 가듯 기세있게 융흥隆興하였으므

로 일본의 구극을 모방하고 안출案出하여 흥행하던 신파연극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영화의 수입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된 신파영화에 의하여 그것은 이중으로 위협 받고 있었

Page 11: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11

다.

일본에서 연쇄극連鎖劇이 대두擡頭하자 조선신파극단에서도 곧 그것

을 모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관객이 처음으로 연쇄극을 알게 된

것은 1913년 일본극단 ‘뇌호내해瀨戶內海’ 일행이 내연한 ‘불여귀’ ‘나의

죄’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이며 그 극단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후일에

연쇄극과 영화에 카메라맨으로써 활약한 이필우李弼雨와 명변사로 등

장한 김덕경金悳經은 기사 견습생으로서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군사극단 및 기타 단체가 역시 연쇄극을 내연하여서 더욱

조선신파 연극단의 연쇄극 열은 높아졌던 것이다. 단지 카메라와 기사

문제 만으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으나 1918년에 이르러 당

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신극좌 금강산 일행이 기사를 일본에서 데리

고 와서 ‘의리적 구토仇討’라고 하는 연쇄극을 촬영하였다. 이것이 조선

에 있어 필름 촬영의 효시인 것으로서 ‘의리적 구토’의 인기는 대단하

였다.

그리고 각 신파극단은 경쟁적으로 연쇄극을 촬영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전기 금강산과 함께 임성구 일행이 가장 인기가 높았으며

일시 연쇄극이 일세를 풍미하는 관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쇄극

을 아직 영화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다언多言을 필요치 않는다. 그

것은 어디까지나 연극의 일개 보조수단이었으며 연쇄극은 조선에 있

어서 영화 탄생의 태생시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독립완결한 활동사진 필름이 제작된 것은 1919년 총독부에서 제작

한 ‘조선사정소개’ 영화를 효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시 총독부정

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총독부관방내에 설치된 활동사진위원회를

모체로한 것이며 그 때문에 기사와 기계 등을 새로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일본 동경, 대판의 정계인물과 관업계 방면의 인사들을 상

대로 초대 공개하고 또 박람회조선관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Page 12: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12 이원식 저

정말 극영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1920년에 신파극단 금강산

일행이 경기도의 위촉을 받고 제작한 ‘호열자虎列刺예방선전영화’와

1921년 저축사상선전영화로서 조선총독부체신국 제작 조선초기 신연

극의 혁신적 지도자인 윤백남 연출로서 ‘월하의 맹세’ (태전동太田同 촬

영, 이월화李月華, 권일청權一晴 출연) 전 8권인 것이다.

처음으로 조선사람으로 원시적 수공업적 수단을 가지고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작품에 있어서는 통속소설, 역사소설, 야담 등 원시종교적

선악관과 연애관의 비극 등을 가지고 전형적인 봉건주의적 인륜, 갈등

을 표현한 ‘월하의 맹세’ 등으로 출발한 것이다.

‘월하의 맹세’가 최초로 제작된 극영화인 것이다.

1922년 (16세)

3·1운동 지도자 손병희孫秉熙 서거 (5월 19일), 조선노동공제회 선언

발표 (8월 2일 『동아일보』 지상), 방정환 주간 『어린이』 창간 (아동문

학작가 여덕출, 목일신睦一信, 이정호李定鎬, 정홍교丁洪敎, 윤석중尹石重,

한막동韓瞐東, 윤극영尹克榮 등 기고), 『동명』 『조선지광』 『신천지』 『신

민』 『신청년』 『학생계』, 『르네쌍스』 『신생활』 등 창간, 문예지 『백조』

창간, 동인에 빙허 현진건, 홍로작洪露雀, 이상화, 나도향, 박월탄朴月灘,

박영희, 김기진, 안석규, 원우전元雨田

(연극)

금강산 사후 신극단 해산, 윤백남 민중극단 조직 (단원 안종화安鍾

和, 문수일, 이월화, 권승식權勝式, 나효진羅孝鎭, 안광익安光翊, 안세민安世

民 등) – ‘운명’ ‘영겁永劫의 처’ 상연

이기세예술협회 조직 (이채전李彩田, 김우연金雨燕 가담) – ‘희망의 눈

물’ 상연. 조선극장 낙성기념공연 (윤백남, 만파회萬波會 조직, ‘희무정噫

無情’, ‘루이 16세’ 상연, 공연후 해산)

Page 13: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13

토월회 조직 – 동경유학생 박승희, 김기진, 이서구李瑞求, 김을한 등

이 중심 – 제 2 공연후 안석주安碩柱, 이백수, 이소연李素然, 윤상열尹相

列, 원우전元雨田, 이승만李承萬, 연학연延鶴年, 이수창李壽昌, 이월화李月華,

이혜경李惠卿, 이정춘李貞春 등 가입, 무대장치부·음악부 박세면朴世冕,

최호영崔虎永, 홍재유洪載裕, 각본부 박승희朴勝喜, 김기진金基鎭, ‘부활復活’

‘칼멘’ ‘사랑과 죽음’ ‘춘식이’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무엇이라 말하였

나?’ 등 상연

토월회의 출현은 신극사상 중대한 것이다. 상업주의적 기성연극에

대하여 지식층의 반항으로서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경향이 아생

芽生 한 것이며, 토월회 운동은 신극운동에 새로운 성격과 세계를 전

개하였다. 신극운동에 있어서 처음으로 구주歐洲의 근대극을 소개하였

고 구주 근대극에서 우수한 기술과 새로운 연기를 배우려고 하였다.

조선영화연혁소사 (4)

명실名實 함께 완전한 극영화는 1922년 동아문화협회제작 조천송차

랑早川松次郞 연출 ‘춘향전’ (전9권, 김성초金盛草, 최영완崔永完 출연)이었

다. 동아문화협회란 것은 당시 황금연예관과 조선극장과 단성사를 경

영하고 있던 일인 조천송차랑 등이 조선영화 제작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그 제작영화 ‘춘향전’은 당시 인기가 높던 조선극장의 변사

김조성金肇盛이와 기생이 같이 출연하고 연출은 유치한 작품이었으나

흥행에는 큰 성공을 수획收獲 하였기 때문에 동아문화혁회는 계속적으

로 작품제작에 착수하여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영남의

백만장자의 외아들 장병천張炳天(대구)과 평양기생 강명화康明花의 정사

사건을 모델로 한 ‘비련의 곡’ (1924년 작) 또 고대소설 ‘흥부전’ (1925년

작)을 영화화 하였으며, 모두가 ‘춘향전’ 정도의 호성적은 없었으나 도

처에서 조선영화를 처음보는 호기심의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Page 14: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14 이원식 저

그러한 사건을 계기로하여 부산에서는 일본인 고좌관장高佐灌腸이라

는 동경제대 출신의 문학사가 중심이 되어 일본인측 실업가, 의사 등

의 출자로서 공칭公稱자본금 20만원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립하였

다. 이것은 초기 조선영화가 의외 호성적인 것과 또 일본의 영화사업

이 유망한 기업으로서의 전도前途가 있어 보이므로 솔선率先 조선에서

영화사업의 기업화를 기획한 것이다.

소규모로나마 처음으로 촬영소를 세우고 형식적이나마 기계설비를

정돈하여 당시 극계 인기스타 안종화安鍾和, 이월화李月華를 주연으로

한 ‘바다의 비곡’ (1923년 작), 윤백남 연출로서 ‘운영전雲英傳’ (1924년

작) 등 수본의 작품을 제작하여 조선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수

출을 하였다. 경성봉절京城封切과 일본배급으로 어느 정도의 수지를 맞

추었으나 당시의 시장 상황과 또 촬영소의 제작 능률 기타 조건으로

서 회사를 운영하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 모 회사와의 합동운동을 계획하기도 하고 혹은 공동 제작을

획책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어느 것도 불성공으로 끝이나고 영화사상

최초의 기업화 시도는 무참하게도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요컨대 당

시의 조선영화는 아직 대규모 기업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유치하

였으며 또 국내 시장은 물론 회수율이 적었으므로 그들이 희망을 가

지고 있었던 일본시장이 조선영화에 대하여 전혀 문호를 폐쇄하고 있

었다. 이 회사를 통하여 초창기 조선 영화계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주

석이 된 윤백남, 안종화安鍾和, 이경손李慶孫, 나운규, 남궁만南宮滿, 이월

화李月華, 이규설李圭卨 등의 인재를 배출시킨 것을 비롯하여 이 회사의

존재는 단기일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의미에 있어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 만은 사실이다.

1923년 (17 세)

Page 15: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15

일본 동경 대진재大震災 (9월 1일), 동경에서 조선인 대학살 (9월 4

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대회 개최 (4월 25일)

시집 【금성】 창간 동인에 양주동梁柱東, 백기만, 유엽柳葉, 손진태孫

晉泰, 이장희李章熙, 이상백李相佰, 김동환金東煥, 안서岸曙 김억金億 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오뇌懊惱의 무도】 간행, 주요한朱耀翰 시집 【아름

다운 새벽】 간행

(연극)

기미년 3·1 항쟁 이후 세계사조는 민족자결주의, 민족해방, 계급투

쟁 등의 사조思潮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현상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조류를 따라 염군사焰群社가 출현하였고 염

군사 연극부에서는 ‘먼동이 틀때’ ‘선술집’ 등을 가지고 반 일년이나 상

연 준비를 하였으나 경비 난으로 무대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신문학이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 등의 ‘하였도다’ 식

의 신소설로부터 발아發芽된 후 ‘춘원春園’, ‘빙허憑虛’ 등 자연주의적 문

학으로 발전하였다. 염군사는 다시 새로운 주장主張에서 다수의 신인

들이 창립한 것이다 (문예부, 영극부, 음악부 등). 그리고 기관지 『염

군焰群』 창간

1924년 (18 세)

『시대일보』 발간 (3월 28일),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4월 20일), 조

선청년총동맹 결성 (4월 23일)

(영화작품)

‘바다의 비곡秘曲’ (8권)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제작, 고좌관장高

佐貫長 연출, 안종화安鍾和, 이월화 출연

‘장화홍련전’ (8권) 경성단성사 제작, 김영환 연출, 이필우 촬영, 최

병룡崔炳龍, 신금홍申錦紅 출연

Page 16: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16 이원식 저

‘비련의 곡’ (7권) 동경문화협회 제작, 조천송치랑早川松治郞 연출, 김

조성金肇盛, 문수일 출연

‘설영전’ (6권)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제작, 윤백남 연출, 궁하宮

下 촬영, 안종화, 김우연金雨燕 출연 (나운규 처음 출연)

‘신의 단장’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제작, 고좌관장 연출, 서천西

川 촬영, 김수담金守膽, 나운규, 이채전李彩田 출연

1924년 (19 세)

3월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소설 【꽃다운 청춘】 발표, 빙허

현진건 【첫날 밤】 간행, 파인巴人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 간행, 소월

素月 김정식金廷湜 시집 【진달래 꽃】 간행

(영화작품)

‘쌍옥루雙玉淚’ (8권) 고려영화제작소 제작, 이구영李龜永 연출, 이필우

촬영, 김소언金少彦, 조천경趙天景 출연 (일본 영화 ‘나의 죄’ 번안 작

품)

‘쌍옥루 후편’ (7권) 고려영화제작소 제작, 이구영李龜永 연출, 이필

우 촬영, 김소언金少彦, 조천경趙天景 출연

‘심청전’ (7권) 윤백남프로덕션 제작, 이경손李慶孫 연출, 서천 촬영,

나운규, 주인규朱仁奎 출연 –

‘멍텅구리’ 반도키네마 『조선일보』 연재중 인기 만화의 영화화

‘마을의 호걸’ (2권)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제작, 고좌관장 연출,

이주한李周漢 촬영, 유수담兪守膽 출연

‘홍부와 놀부전’ (5권) 동서문화협회 제작, 조천송치랑 연출, 김조성,

문수일 출연

‘개척자’ (6권) (춘원 원작) 윤백남프로덕션 제작, 이경손 연출, 서천

촬영, 김정숙金靜淑, 남궁운南宮雲 출연

Page 17: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17

‘흑과 백’ (7권) 김택윤영화사 제작, 김택윤 연출, 서천 촬영, 김택윤

金澤潤, 나운규 출연

‘장한몽’ (8권) 계림영화협회 제작, 이경손 연출, 서천 촬영, 이백수

李白水, 김정숙 출연 (일본인 미기홍엽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金色夜

叉】 번안 소설)

‘산채왕’ (5권) 계림영화협회 제작, 이경손 연출, 서천 촬영, 이백수

李白水, 김정숙 출연 (일본 ◯◯영화의 모방 작품)

조선영화연혁소사 (5)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해산후 윤백남을 중심으로 독립프로덕

션이 설립되어 제 1회 작품 ‘심청전’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 이르러

조선영화는 비교적 순수한 의미에 있어 예술영화로서의 도상途上에 오

른 것 같은 감을 주는 동시에 그 이후 오래 동안 조선영화 제작의 지

배적 기구로 된 소규모 제작단체 (소위 프로덕션)의 선구를 개척한 의

미에 있어서도 윤백남프로덕션은 의미가 있었다. 왜 프로덕션 기구가

그 이후 조선영화제작의 지배적 형태로 되었는가 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여러 원인이 있었다.

동서문화협회와 부산키네마주식회사 작품 이후 관중은 조선영화라

고 하면 무조건으로 보러오는 경향이 있었다. 서양영화에 비하여 비교

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향토의 풍

경과 인물과 풍속이 표현되는 것에도 관중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지만

또 영화 내용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고대 전설이거나 새로운 연애

였기 때문에 자연히 친화되기 쉬웠던 것이다. 아무리 졸렬한 작품이라

도 일주일 상영에 큰 결손缺損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3·1운동 이

후로 일반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영화계에 투신하는

Page 18: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18 이원식 저

청년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자본을 안심하고 투자하기까지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영화의 기술적 수준이 낮고 또 대자본의 출자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서는 기술, 자본 등을 자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름대와 카메라 차화借貨대 만이라도 있으면 촬영을

개시하였던바로 (촬영은 전부 로케이션으로 세트는 없는 것이 보통이

었다) 천원만 있더라도 프로덕션의 간판을 걸고 제작에 착수하는 현

상이 있었다. 생각하면 비참하기도 하고 일면 가소롭기도 한 것이었으

나 그러한 가운데서 조선영화는 성장하여 온 것이다. 한 작품을 제작

하고는 프로덕션이 해산되고 또 한 작품을 제작하려 할 때는 또 한

프로덕션을 조직하는 것이 영화 제작계의 상태였던 것이다.

전기 윤백남프로덕션은 제2회 작품으로 춘원 이광수의 소설 【개척

자】를 촬영한 후 해산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서는 ‘나의 죄’를 번역한

‘쌍옥루’와 『조선일보』 연재중의 인기만화 ‘멍텅구리’를 영화화 하고

또 윤백남프로덕션 해산후 그 구성원의 일부는 조일재趙一齎를 중심으

로 계림영화협회를 조직하여서 미기홍엽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金色夜

叉】의 번안 ‘장한몽’을 제작하였다.

‘장한몽’은 촬영 도중 주연 배우의 변동이 있었던 까닭으로 흥행

성적도 좋은편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검극영화를 모방한 ‘산채왕’은 흥

행 성적이 더욱 불량하였다. 이 협회가 다소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이후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한 단체

였다는 것과 명멸무쌍한 프로덕션 난립 시대에 출현하여 무능하면서

6, 7년간 존속하고 주식회사와 스튜디오 설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간접

적으로나마 노력한 것은 과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1923년 때부터 1926년 1927년경까지 여사한 상태가 계속하고 한편

아메리카영화 전성의 분류奔流중에서 조선영화는 평균 일 작품, 일 프

Page 19: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19

로덕션이라는 고심,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1926년 (20 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창설, 경성방송국 개설, 이조 최후의 왕인 순

종황제 이왕 장일葬日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대중항일투쟁 ‘6·10 만세’

봉기 (6월 10일 오전 10시), 안준식安俊植 주간 『별나라』 창간 (창간 이

후 기고 아동문학작가 홍구洪九, 이동규李東珪, 김우철金友哲, 이주홍李周

洪, 정청산鄭靑山, 박아지朴芽枝, 전병호全炳昊 등), 탄실彈實 김명순金明淳

【생명의 과실】 간향,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간행, 천재작가 나도향

羅稻香 (2월 5일) 사거, 백기만 편 【조선시인선집】(조선통신중학관) 간

행 - 신시운동의 햇불을 든 1919년 이래 시단을 창건한 28시인의 시

편을 수록한 최초의 시인 선집, 춘원 이광수, 안서岸曙 김억, 송아頌兒

주요한朱耀翰, 상아탑 황석우黃錫禹,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초몽草夢 남궁

벽南宮璧,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노최露崔 홍사용

洪思容, 춘성春城 노자영盧子泳,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무애無涯 양주동梁柱

東, 동원東園 이일李一,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천원天園 오천석吳天錫, 석

송石松 김형원金炯元,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파인

巴人 김동환金東煥, 탄실彈實 김명순金明淳,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팔봉八

峯 김기진金基鎭, 유엽柳葉 유춘섭柳春燮, 손진태孫晉泰, 노산鷺山 이은상李

殷相, 김여수金麗水, 박팔양朴八陽, 류도순劉道順

(영화작품)

‘농중조籠中鳥’ (5권) 조선키네마사 제작 이규설李圭卨 연출, 가등加藤

촬영, 나운규, 복혜숙 출연

‘아리랑’ (7권) 조선키네마사 제작, 나운규 연출, 가등 촬영, 나운규,

신일선申一仙 출연

‘풍운아’ (7권) 조선키네마사 제작, 나운규 연출, 가등 촬영, 나운규,

Page 20: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0 이원식 저

김정숙 출연

조선영화연혁소사 (6)

조선영화가 소박하면서도 영화처럼 되고 제작상황이 어느 정도 개

선된 것은 나운규 시대로 부터인 것이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사의 연

구생 출신으로서 윤백남프로덕션의 ‘심청전’에서 연기자로서의 천품天

稟을 발휘하여 ‘아리랑’에 이르러서는 기획자로서 제작자로서 연출자로

서 또 배우로서 종합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아리랑’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 작품이며 이 프로덕션은

경성본정에서 모자상을 경영하고 있던 일인 정호장淀虎藏 출자에 의하

여 조직된 단체이다. ‘아리랑’의 성공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나운규의

원작, 감독, 주연을 겸행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아리랑’ 초初 봉절封切은

미증유의 호황으로 단성사 봉절만으로도 출자액이 회수된 호성적이었

고 이 영화는 오래도록 생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는 수기數奇하고 파란이 많은 나운규 자신의 풍부한 체험

이 생기生起 하였으며 예술가로서의 개성이 유감없이 나타날뿐만 아니

라 민족적인 감정, 사상, 생활환경이 적절하게 파악되어 있었기 때문

인 것으로 근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영화의 기본적 색조가 표현된 작품

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진정한 조선의 인물, 풍

습을 찾아 볼 수 있었으며 기술에 있어서도 종래의 수준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세의 인기 배우이며 천품있는 연출가인

나운규와 당대의 인기 여배우 신일선을 세상에 소개한 의미에 있어서

도 조선영화의 무성시대를 대표한 작품인 것이다.

이어서 ‘풍운아’ ‘야망’ ‘금붕어’ 등을 제작하고 ‘면면綿綿한 애수哀愁’

‘경쾌한 우슴’ ‘우울憂鬱한 니힐니즘’ ‘흉흉한 방랑성’ ‘약자에게의 동정’

‘의협심’ 등으로서 연상되는 ‘나운규의 멋’을 말할 수 있는 만치 그의

Page 21: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21

예술은 성장하고 그의 지위는 조선영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프로덕션

에 있어서 처음으로 일년중 계속하여 제작을 하였다.

1927년 (21 세)

민족주의운동통일전선조직체인 ‘신간회’ 창립 (2월 15일), 여성운동

의 선구 황우회 창립 (5월 27일), 조선소년총동맹창립 (10월 16일), 권

구현權九玄 시집 【흑방黑房의 눈물】 간행

(영화작품)

‘괴인怪人의 정체’ (7권) 극동키네마 제작, 궁천宮川 촬영, 김철산金哲

山, 신일선 출연

‘홍연비가紅戀悲歌’ (5권) 덕영프로덕션 제작, 이규설 연출, 태전太田

촬영, 이규설 출연

‘잘 있거라’ (7권) 나운규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이창용(李創

用) 촬영, 나운규, 전옥 출연

‘뿔없는 소’ (9권) 조선키네마 제작, 김태진金兌鎭 연출, 가등加藤 촬

영, 주인규朱仁奎, 안금홍安錦紅 출연

‘운명’ (7권) 조선영화제작소 제작, 김해운金海雲 연출, 이명우李明雨

촬영, 서월영徐月影, 김정숙金靜淑 출연

‘먼동이 틀 때’ (8권) 계림영화협회 제작, 심훈沈熏 원작 연출, 빈전

濱田 촬영, 강홍식姜弘植, 신일선 출연

‘낙화유수’ (8권) 금강키네마 제작, 김영환金永煥 연출, 이용李鎔, 복혜

숙卜蕙淑 출연

‘야서野鼠’ (8권)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가등 촬영,

나운규, 신일선 출연

‘불망곡不忘曲’ (5권) 덕영프로덕션 제작, 이규설 연출, 태전 촬영, 이

규설 출연

Page 22: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2 이원식 저

‘낙양의 길’ (5권) 조선권번券番 제작, 이필우 촬영

‘낙원을 찾는 무리’ (7권) 극동키네마 제작, 황운黃雲 연출, 이필우

촬영, 남궁운南宮雲, 전옥全玉 출연

‘금붕어’ (11권) 조선키네마 제작, 나운규 연출, 가등 촬영, 나운규,

신일선 출연

1928년 (22 세)

숙부 김승묵金承默 주간主幹 『여명黎明』 속간으로 『시대공론』 창간,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 포석 조명희 【낙동강】 간행, 오세창吳世昌 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간행, 천재시인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자살 (27

세)

(연극)

산유화회山有花會가 조직되어 조선극장에서 창립공연 ‘향토심’을 상

연한 후 해산되고 홍노작洪露雀 작 ‘향토심’은 조선에 있어서 다막물多

幕物 희곡戱曲 상연은 그것이 처음이다. 자연주의적 수법에다가 낭만주

의적 색채를 가미하여 농촌 현실을 그린 작품으로 향토애를 환기시키

었다. 연학년延鶴年 중심으로 고 학생과 각 학교의 연극에 뜻을 둔 학

생들을 모아 극단 종합예술협회를 조직 — 제 1회 공연을 천도교 강

당에서 ‘뺨 맞은 그 자식’ 상연하다가 3일째에 경찰에게 중지 당하고

단체마저 해산하였다. 그 후 무대예술협회가 조직되었고 또 이소연李

素然 중심으로 화조회가 조직되어 제 1회 공연후 해산되었다.

그리고 조선영화예술협회가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霽 중심으로 조

직되었다.

(영화작품)

‘유랑’ (7권) 조선영화예술협회 제작, 김유영 연출, 민우양閔又洋 촬

영, 조경희趙敬姬 출연

Page 23: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23

‘옥녀’ (8권) 나운규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이창용李創用 촬영,

나윤규, 전옥 출연

‘나의 동무’ (10권) 대륙키네마 제작, 천단川端 연출, 서천西川 촬영,

나웅羅雄, 서월영徐月影 출연

‘재활’ (6권) 고려영화제작소 제작, 홍개명洪開明 연출, 이필우 촬영,

안금향安錦香, 이소연李素然 출연

‘우자愚者’ (5권) 반도키네마 제작, 이필우 연출·촬영, 안세민安細民

출연

‘사랑을 찾아서’ (8권) 나운규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이창용

촬영, 나운규, 전옥 출연

‘지방가의 비밀’ (7권) 유장안柳長安 연출, 서천 촬영, 나웅, 전옥 출

‘춘희’ (8권) 평양키네마 제작, 이경손李慶孫 연출, 손용진孫勇進 촬영,

정기택鄭基澤, 김일송金一松 출연

‘세동무’ (11권) 단성사 금강키네마, 서광키네마 합동 제작, 김영환

연출, 이명우 촬영, 이원용李源鎔, 김연실金蓮實 출연

‘종소리’ (10권) 단성사 금강키네마 제작, 이평李平 연출, 이필우 촬

영, 이원용, 김연실 출연

‘사나이’ (8권) 나운규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손용진 촬영, 나

운규, 유신방柳新芳 출연

‘숙영낭전’ (7권) 이경손프로덕션 제작, 이경손 연출, 손용진 촬영,

박창혁朴昌赫, 조경희 출연

‘암로’ (7권) 남양키네마 제작, 강호姜湖 연출, 민우양 촬영, 강호 출

조선영화연혁소사 (7)

Page 24: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4 이원식 저

1927년부터 상설관 단성사는 영화제작에 진출하여 ‘낙화유수’, ‘종소

리’, ‘세동무’ 등의 작품을 제작하여 흥행적으로 성공하였으며 이경손은

평양키네마에서 ‘춘희’를 촬영하고 일본인 영화 기계상 덕영德永이 또

조선영화를 23본 제작하는 등 영화계는 소규모이나마 제작 할 기회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나운규는 ‘금붕어’ 이후에 조선키네마프로덕

션을 탈퇴하고 단성사 출자로서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잘있거

라’, ‘옥녀’, ‘사나이’, ‘벙어리 삼룡’, ‘저 강을 건너서’ 등을 제작하여서 발

전하였기 때문에 조선영화의 성장은 눈에 보이는 듯 하였다.

더구나 1925년 이후 중단 상태에 있던 계림영화협회가 시인 심훈沈

熏의 원작 및 연출인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아리랑’

과 함께 훌륭한 작품이다.

1929년 (23세)

소설가 최정희崔貞姬와 친숙親熟, 일본 동경 경부각촬영소 방문, 기

술연구 특히 전판구융田坂具隆 감독과 교유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한 학생중심의 항일투쟁인 광주학생사건 발생 (2월 3일), 『예술운

동』 창간, 조선어학회, 조선어편집위원회 조직 (10월 31일), 독견獨鵑

최상덕崔象德 【승방비곡((僧房)悲曲)】 간행, 『조선시단』 창간

(연극)

홍해성洪海星 ‘신흥극장’ 조직 ‘연극부 홍해성, 문예부 홍노작, 최승

일崔承一, 박희수朴熙秀, 무대장치부 원우전, 연예부 이백수, 이화백李花

白, 이소연, 염유일廉幽逸, 심영沈影, 박제행朴齊行, 강석연姜石燕, 강석봉姜

石峰, 김연실, 석금성石金星, 이호영李鎬榮, 나운규, 이영철李榮哲, 박진朴珍,

김용하金鏞河, 이갑득李甲得, 엄시중嚴時中, 박창혁, 김소군金小君’ – 마나도

좌座에서 메르덴 원작 김자양문金子洋文 각색, 탄광부炭鑛夫 업톤 싱크레

어 원작 ‘2층 위의 사나이’ 상연

Page 25: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25

11월 1일 토월회는 조선극장과 계약 – 영화막간 이용 공연 – 연출

부 박승희, 문예부 박진, 이운영李雲英, 무대장치부 원우전, 무용부 조

택원, 출연부 이백수, 이소연, 박제행, 서일성徐一星, 윤정변尹正變, 석금

성, 강석연, 강석봉, 박익남朴益男, 김영순金英淳, 김연실, 김마리아, 김경

자金慶子, 김도영金桃英 등.

권금성權金城은 가극단 ‘금성오페라단’ 조직 – 천국결혼 3중주 공연

후 삼성가극단으로 개편, 취성좌聚星座는 그 단원을 중심으로 조선연극

사 (취성자는 12월에 해산)를 조직, 단원은 김소랑, 마호정馬豪政, 이경

환李敬煥, 문수일, 나효진, 강홍식,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김경

희金景希, 김호도시金湖都是, 이경설李景雪, 나품심羅品心 등이다.

(영화작품)

‘벙어리 삼룡’ (8권) 나운규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 손용진 촬

영, 나운규, 유신방 출연

‘약혼’ (9권) 중앙키네마 제작, 김영환 연출, 이창용 촬영, 나웅 출연

‘젊은이의 노래’ (10권) 조선극장영화부 제작, 김영환 연출, 손용진

촬영, 나웅, 김정숙 출연

1930년 (24세)

일본에서 귀국하여 3월 5일 최정희와 정식 결혼, 조선어문학회 창

립 회원 조윤제, 이희승, 김태준, 김재철金在喆, 이재욱李在郁, 손진태孫晉

泰 저 【조선신가유편】(향토연구사 판) 간행, 청구학회 창립 『청구학총

靑丘學叢』 창간

(영화작품)

‘아리랑’ 후편 (12권) 원방각사圓方角社 제작, 나운규 연출, 이명우 촬

영, 나운규, 유신방 출연

‘꽃장사’ (7권) 조선영화사 제작, 안종화 연출, 이명우 촬영, 최남주

Page 26: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6 이원식 저

崔南周, 김명순 출연

‘회심곡’ (8권) 아성키네마 제작, 나운규 연출, 이필우 촬영, 나운규,

김연실 출연

‘철인도’ (8권) 원방각사 제작, 나운규 연출, 이필우 촬영, 나운규,

김연실 출연

‘정의는 승리한다’ (7권) 동아영화사 제작, 윤백남 연출

‘박문수 전’ (9권) 이금용李錦龍 연출, 이진권李進權 촬영, 이금용, 현

극玄極 출연

‘노래하는 시절’ (9권) ○키네마 제작, 안종화安鍾和 연출, 태전 촬영,

윤봉춘尹逢春, 이후연李厚蓮 출연

‘봉황鳳凰의 면류관’ (6권) 정기택프로덕션 제작, 이경손 연출, 정기

택, 신일선 출연

‘젓는 이순이李順伊’ (7권) 태양키네마 제작, 김태진金兌鎭 연출, 가등

촬영, 이삼손李三孫, 김정숙 출연

‘도적놈’ (9권) 대중영화사 제작, 윤봉춘 연출, 이진권李進權 촬영, 나

운규, 주인규 출연

1931년 (25세)

서울키노 제2회 작품, 김유영 원작 연출 ‘화륜’ (10권) 민우양 촬영,

김연실, 백하로白河路 출연, 『집단』 『비판』 『신동아』 『동광』 등 창간,

집단사 판 【카프 7인집】 【카프 시인집】 간행, 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

한정 영인본 해인사대장경 판 【일절경음의一切經音義】 (100권 25책) 간

행, 신간회 전국대회 개최 (5월 14일 ~ 15일) 동 해산선언 (5월 15일),

현준혁 중심 대구사범학교연구회(사회과학) 사건 (이원식은 교육노동

자동맹)

(연극)

Page 27: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27

문수일 주재主宰 ‘연극시장’ 조직, ‘속세를 떠나서’ ‘태양의 거리’ 등

공연, 극예술연구회 창립, 회원 홍해성, 서항석, 이하윤, 성대훈成大勳,

김진변金晉變, 조희순曺喜淳, 이헌구李軒求, 정인변鄭寅變, 윤백남, 김광변金

珖變, 유치진, 최정우崔挺宇, 박용철, 장기제張起梯, 9월 성출成出 등 중심

으로 신무대조직 단성사에 ‘아리랑 반대’ 제 1회 공연, 11월 이상춘, 이

갑기 중심으로 극단 ‘대구가두극장’ 조직, 12월 이소연, 김영팔金永八 등

방송극협회 조직

(영화작품)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9권) 대구녹성키네마 제작, 양철梁哲 연출,

손용진 촬영, 나웅, 김연실 출연

‘금강한’ (11권) 원산만遠山滿프로덕션 제작, 춘사春史 연출, 이창용 촬

영, 원산만 출연

‘남편은 경비로’ (7권) 원산만프로덕션 제작, 도전장島田章 연출, 남

택南澤 촬영, 원산만 출연

‘큰 무덤’ (9권) ○키네마 제작, 임윤수林潤洙 연출, 태전 촬영, 윤봉

춘, 하소양河小揚 출연

‘수일과 순애’ (8권) 대경영화양행 제작, 이구영李龜永 연출, 이명우

촬영, 심영沈影, 김연실 출연

‘룸펜은 어디로’ 92권) 원산만프로덕션 제작, 도전장 연출, 원산만

출연

‘방아타령’ (6권) 신흥프로덕션 제작, 김상용 연출, 이명우 촬영, 심

영, 김소연 출연

조선영화연혁소사 (8)

영화계에도 새로운 사회사조의 침투로 경향영화운동이 전개되었으

며 문인과 영화인이 조선영화에술협회를 조직하고 또 1925년 이래로

Page 28: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28 이원식 저

진보적인 영화인으로 하여금 과거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무정견성에

반하여 목표가 있는 경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론과 기술에 있어서도

과학적인 탐구를 보여주어서 자못 문예 비평가와 전문영화 비평가들

이 활약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전기 서울키노 작품 김유영 연출 ‘유랑’

‘혼가’ ‘화륜’과 청복키노 ‘지하촌’ 등의 영화는 민족투쟁의식을 고무하

였으나, 결국은 일제의 전면적인 탄압과 경제적 참상으로 인하여 발전

하지 못하였다.

1932년 (26세 장남 익조 출생)

상해에서 윤봉길 일본 천장절 축하식장 폭탄 사건, 백천白川대장

등 사상 (4월 29일), 이상춘 중심 극단 ‘신건설’ 창립 기관지 『연극운

동』 창간

(영화작품)

‘개화당 이문’ (7권) 조선키네마 제작, 나운규 연출, 손용진 촬영, 나

운규, 윤봉춘 출연

‘딱한 사람들’ (7권) 키랑튼영화사 제작, 황운 연출, 손용진 촬영, 주

인규, 이병일 출연

‘임자 없는 나룻배’ (7권) 유신키네마 제작, 이규환 연출, 이명우 촬

영, 나운규, 문예봉文藝峯 출연

1933년 (27세)

11월 ‘비밀결사 사건’으로 전주형무소 수감, 김재철 저 【조선연극

사】 간행, 김소운 편 【언문조선구전민요집】 (일본 제일서방 판) 간행,

현준혁 【청년조선】 간행,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편 【조선사】(전 37

책) 간행, 【이왕식박물관소장사진첩회화부신판】 간행, 김태준 저 【조

선소설사】 【조선한문학사】 간행, 조선사편수회 판 【조선사료총간】 (전

Page 29: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29

22집) 간행, 극예술연구회 조직, 채만식, 유진오, 이무영 등 – 토막 ‘버

드나무 선동리의 풍경’ ‘빈민굴 소자매’ 등 공연

(영화 작품)

‘도라오는 영혼’ (8권) 조선키네마 제작, 이순李舜 연출, 이창근李昌

根 촬영, 나황羅皇, 이화봉李花峰 출연

‘종로’ (7권) 대구영화사 제작, 양철 연출, 이신웅李信雄 촬영, 나운규,

김연실 출연

1934년 (28세)

전주형무소 예심중, 【정다산여유당전집】 (491권 76책) 신조선사판

간행, 『동양의학』 창간, 이광수 저 【흙】 간행, 조선어학회언문잡지

『한글』 복간, 김태준 저 【조선가요집성】 (고가편 제1집 고려가사) 간

(영화작품)

‘7번통 사건’ (7권) 조선영화사 제작, 나운규 연출, 손용진 촬영, 나

운규, 손일평孫一平 출연

‘청춘의 십자로’ (10권) 금강키네마 제작, 안종화 연출, 이명우 촬영,

박연朴淵, 신일선 출연

‘아름다운 희생’ (8권) 김광○ 연출, 이신웅李信雄 촬영, 이경손, 김선

영 출연

‘전과자’ (7권) 경성촬영소 제작, 김소봉金蘇峰 출연, 이명우 촬영, 이

경손, 김연실 출연

1935년 (29세)

1년 6개월만에 전주형무소에서 출감 (3년 집유) 10월 대구 본가에

서 정양靜養, 『조광朝光』 창간, 김동인 단편집 【감자】 간행, 코레아영화

Page 30: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30 이원식 저

제작소 창립 (이원식, 박민천, 김해생, 기술자문 김유영)

(영화작품)

‘황혼’ (『동아일보』 신춘 시나리오 부문 1등 당선, 박민천 작) 코레

아영화제작소 제작, 박민천 연출, 김유영의 총 지휘하에 촬영을 진

행하고 있던 중 11월 28일 이원식, 박민천 (1936년 5월 23일 석방)

이 구금되고 김유영도 피신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제작은 중지되고

말았다.

‘바다여 말하라’ (9권) 청도영화사 제작, 이규환 연출, 이명우 촬영,

심영, 현순영玄舜英 출연

‘대도전’ (8권) 경성촬영소 제작, 김소봉 연출, 이명우 촬영, 심영,

현순영玄舜英 출연

‘홍길동전’ (10권) 경성촬영소 제작, 이석우 연출, 이필우 촬영, 김연

우金蓮雨, 이소연 출연

‘무화과無花果’ (9권) 조선키네마 제작, 나운규 연출, 이신웅 촬영, 나

운규, 현방난玄芳蘭 출연

‘은하에 흐르는 정열’ (10권) 금강키네마 제작, 안종화 연출, 이명우

촬영, 이원용, 신일선 출연

‘강 건너 마을’ (9권) 한양영화사 제작, 나운규 연출, 손용진 촬영,

전택이, 현순영玄舜英 출연

‘그림자’ (9권) 조선키네마 제작, 나운규 연출, 이신웅 촬영, 나운규,

현방난 출연

‘춘풍’ (10권) 영화시대사 제작, 박기채 연출, 양칠웅梁七雄 촬영, 문

봉건文峯健, 김일해金一海 연출

‘그 후의 이도령’ (7권) 오양영화사 제작, 이규환 연출, 소우蘇于 촬

영, 이진원李晉源, 독은린獨銀麟 출연

‘무지개’ (9권) 영남영화사 제작, 이규환 연출, 선우학鮮于學 촬영, 김

Page 31: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31

동영金東英, 현소봉玄蘇峯 출연

‘죄를 지은 여자’ (7권) 서선키네마 제작, 이창근 연출, 촬영

(발성영화)

‘춘향전’ (9권, 최초의 토키 영화) 경성촬영소 제작, 이석우 연출, 이

명우 촬영, 문예봉, 김일해 출연

‘아리랑 제3편’ (8권) 한양촬영소 제작, 나운규 연출, 이신웅 촬영,

나운규, 신일선 출연

‘아리랑 고개’ (9권) 경성촬영소 제작, 홍개명 연출, 이명우 촬영, 문

예봉, 최운봉 출연

1936년 (30세)

조선에스페란토협회 창립

(영화작품)

‘순정해래純情海崍’ (7권) 청구영화사 제작, 신경균申敬均 연출, 양세웅

梁世雄 촬영, 김일해 출연

‘인생항로’ (11권) 금강한양키네마 합작, 안종화 연출, 이신웅 촬영,

윤봉춘, 노신재盧信哉 출연

‘역습’ (10권) 고려영화키네마 제작, 안종화 연출, 손용진 촬영, 이금

룡, 복혜숙 출연

‘도회의 비가’ (9권) 서양키네마 제작, 임유林唯 연출, 이창근 촬영

(발성영화)

‘미몽’ (7권) 경성촬영소 제작, 양주남梁柱南 연출, 황운조黃雲祚 촬영,

나운규, 문예봉 출연

‘오몽녀’ (7권) 경성촬영소 제작, 나웅 연출, 이명우 촬영, 윤봉춘,

Page 32: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32 이원식 저

노재신盧載信 출연

‘노래의 조선’ (5권) OK영화제작소 제작, 이명우 연출, 최운봉 촬영,

이금룡, 나웅 출연

1937년 (31세)

부 사망, 월간잡지 『연극과 영화』 창간, 김윤경 저 【조선문자 및

언어사】 간행, 최현배崔鉉培 저 【우리말본】 간행, 홍형의 『코레아 에스

페란티스토』 창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金海卿) 사거 (33세)

(영화작품)

‘장화홍련전’ (7권) 경성촬영소 제작, 홍개명 연출, 이명우 촬영, 문

예봉, 문수일 출연

‘여로旅路 (나그네)’ 성봉영화사, 일본신흥키네마 합동 제작, 이규환

연출, 태구보太久保 촬영, 문예봉, 왕평 출연

‘심청’ (10권) 기신양행 제작, 안석영安夕影 연출, 이명우 촬영, 김소

영金素英, 김소희金素姬 출연

1938년 (32세)

극연좌영화부 제1회 작품 전 발성 ‘애련송愛戀頌’ (7권) 연출 제작,

서항석徐恒錫 원작 최금동崔琴桐 (『동아일보』 제1등 당선 장편소설) 각

색, 이효석 촬영, 양세웅 녹음, 조영朝映, 동보東寶시스템 연출, 문예봉,

치근治根, 이웅李雄, 김일해, 이백수, 송관섭宋寬燮, 강정애姜貞愛, 김복진

(영화작품)

‘청춘부대’ (8권) 조선키네마 제작, 홍개명 연출, 이신웅 촬영, 윤봉

춘, 현순영 출연

Page 33: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33

(발성영화)

‘한강’ (7권) 반도영화사 제작, 방한준方漢駿 연출, 양세웅梁世雄 촬영,

이석용, 현순영 출연

‘군용열차’ (8권) 성봉영화, 동보합작 서광제 연출, 양세웅 촬영, 문

예봉, 왕평 출연

‘도생상’ (8권) 천일영화사 제작, 윤봉춘 연출, 이신웅 촬영, 최운봉,

김신재金信哉 출연

‘어화’ (8권) 극광영화제작소 제작, 안철영安哲永 연출, 이병목李丙穆

촬영, 전웅, 박학 출연

1939년 (33세)

조선영화주식회사 의정부촬영소 작품, 전 발성 ‘수선화’ (8권)를 김

유영은 병중에서 연출, 황운조 촬영, 문예봉, 김일해 출연, 11월 25일

‘신장염’으로 사거. 12월 1일 ‘조선영화에술단체장葬’ 거행, 유가족 미망

인 최정희, 복자 익작, 제 영식, 영덕 등이 장례에 참가하다.

(영화작품)

‘귀착지’ (8권) 한양영화사 제작, 이영춘李英椿 연출, 이신웅 촬영

‘무정’ (8권)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박기채朴基采 연출, 정상井上 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2권) 고려영화사 제작, 이석우 연출, 최순

흥崔順興 촬영

‘바다의 벗’ (4권) 고려영화사 제작, 이석우 연출, 최순흥 촬영

‘국기 밑에서 나는 죽으리’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 산중山中 연출,

강야岡野 촬영

‘성황당’ (7권) 반도영화제작소 제작, 방한준 연출, 금정金井 촬영

Page 34: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34 이원식 저

‘새로운 토제土祭’ (10권)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이규환 연출, 양세

웅 촬영

‘산촌의 여명’ (6권)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 산중유山中裕 연출

조선영화연혁소사 (9)

1931년경부터 약 3년간 1934년경까지 조선영화는 또 하나의 곤란한

시련기에 들어 갔던 것이다. 제작본 수 라던지 작품의 질에 있어서든

지 모두가 부진 상태에 있었다. 이 상태는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영화

의 예술적 스완프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나 그것에도 또 외부의 객관

적 조건도 가하여지고 있었다. 먼저 표면화한 것은 흥행상의 불성공인

것이다. 1934년, 1935년경이라고 하면 서양영화는 토-키화 되어 있었으

며, 연대적 고찰에 의하면 일본영화도 거의 토-키화 하였던 시대이다.

이러할 때에 조선의 무성영화는 시대적으로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나운규 등의 전성시대에 비하여 세계 무성영화의 기술도 월등히 높아

졌던 것이다 우리 무성 영화계는 외국의 발전에 보조를 따르는 진경進

境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에 토-키와 사이렌트의 모순은 재차 심각

하게 되었다. 동일한 상설관에서 구미 각 국과 일본 영화는 토-키인데

조선 영화만이 의연하게 변사가 따른 사이렌트였다는 것은 낙후성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 조선영화의 당면과제는 토-키로 전환함에 있었던

것이다. 1935년 경성촬영소에서 이필우, 이명우 형제가 제작한 ‘춘향전’

이 최초의 조선 토-키로서 스크린에 자태를 나타내었다. 이 영화는 관

객의 환영을 받았고 흥행상 성적도 양호하였다. 이 스튜디오는 1931년

에 원산만遠山滿이 조선에 와서 분도주차랑分島周次郞의 출자로서 건립

한 것이다.

‘춘향전’ 이후 ‘아리랑 고개’,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등을 계속 토-

Page 35: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김유영의 생활연보 35

키로서 제작하여 조선영화의 토-키화가 개시될 때 이규환은 대구성봉

영화사에서 영목중길鈴木重吉의 조력을 얻어 ‘여로旅路 나그네’를 발표하

였다. 이 영화는 일본신흥키네마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조선의

제작단체와 일본의 회사가 협동 제작한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며 겨우

탄생한 조선 토-키에 천편의 중량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에도 사이렌트는 자태를 감추지 않았고 그 후 3, 4년

동안 사이렌트와 토-키의 혼효混淆시대를 이루었던 것이나, 1941년에

이르러 사이렌트는 자취를 감춘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1927년경

에 보여주던 영화로서의 정열과 신흥 기분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신흥키네마와 공동 제작한 ‘방로’로서 성공한 성봉영화원에서

는 재차 일본 동보와 제휴하여 서광제 연출 ‘군용열차’를 제작하고 영

화배급회사 ‘기신양행’은 안석영 연출 ‘심청’을 제작하였으며 한편에는

한양영화사, 천일영화사, 고려영화사 등이 설립되어 영화계는 미증유

의 활기를 띄웠다.

그리고 광산업 최남주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설립되고

박기채朴基采 연출로서 이광수의 ‘무정’을 영화화 하였다.

한양영화사에서는 독일로부터 돌아온 안철영 연출의 ‘어화’를 극예

술협회 영화부에서는 김유영 연출의 ‘애련송’을 방한준方漢駿 ‘성황당’

‘한강’을 최인규는 천일영화사에서 ‘국경’을 제작하여 질량으로 조선영

화는 토-키화와 더불어 약진의 태세를 보여주었다.

조선영화는 광휘光輝 있는 내일의 역사를 창조하려고 내적으로 외

적으로 미증유의 정열하에 직면하면서 자체의 전진을 위하여 노력하

였다. 이것을 누가 경시할 것인가 그러한 가열苛烈한 현실 속에서도

일생을 바친 인재가 있다.

김유영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리어카에 실리어도 숨이 끝맺는 순

간까지 연출을 담당하고 ‘수선화’를 완성하였다. 참으로 ‘수선화’는 그

Page 36: 김유영의 생활연보 - cjint.krmongje.cjint.kr/download/wonsik/culture05_downfile.pdf김유영의 생활연보 3 김유영의 생활 연보 (글 이원식) 이 자료 노트는

36 이원식 저

의 격렬한 예술가로서의 정열과 열렬한 정신의 촬영으로서 이루어진

유작인 것이다.

그러나 일제 정책은 싹트는 민족의식을 말살시킴에 따라 경제적

궁핍을 이용하여 소위 영화정책을 꾀하고 있을 때 반도영화 ‘한강’, 성

봉영화 ‘여로 나그네’, 조선영화 ‘무정’ ‘새출발’ ‘수선화’ 등 애욕과 생활

을 그려 탄압을 회피하고 기술 중점주의 경향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여사한 과정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의정부에 처음으로 대규모의

스튜디오를 건설 영화제작 기구도 정비하고, 고려영화사는 이창용을

중심으로 비약적 발전을 하여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서 남대문에 신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복지만리’ ‘수업과’ 등을 제작하여 조선 토-키의

수준을 높이었다.

1940년

‘경성보총京城寶塚’ 주최로서 ‘고 김유영 감독 추모 수선화 유료 시사

회’를 개최 (7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