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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지도․지리지의 군사적 활용

    1)허 허 태 구*

    1. 머리말

    2. 임진왜란 이전 지도․지리지의 군사적 활

    용과 관리

    3. 임진왜란의 발발과 朝․明․日 삼국의 지

    도 활용

    4. 壬辰倭亂期 對明 관계와 新增東國輿地勝覽

    5. 맺음말

    1. 머리말

    풍부한 지리 정보와 인문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지도와 지리지는 고대 이래로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의 통치와 운영에 필수적인 圖書 가운데 하나였다. 人間 社

    會의 모든 일이 하늘 아래 땅 위에서 발생하고 소멸함을 감안한다면, 지도와 지리

    지는 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寶庫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지도․지리지에 관한 학술적 접근은 기초적인 분류와 정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작 기술의 파악과 변동, 수록 정보의 분류와 해석, 제작 배경 및 편찬 의도의 파

    악을 거쳐 텍스트 배후에 스며들어 있는 당대인의 인식과 심성을 究明하는 수준까

    지 이르고 있다.1)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1) 양보경, 1987,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지리학과 박사학위논문; 이찬, 1997, 韓國의 古地圖, 범우사; 배우성, 1998,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방동인, 2001, 韓國地圖의 歷史, 신구문화사; 서인원, 2002, 朝鮮初期 地理志 硏究-東國輿地勝覽을 중심으로-, 혜안; 오상학, 2011,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 창비; 이기봉, 2011, 조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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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국가의 통치 활동과 기능이 크게 행정과 국방으로 구분된다는 점을 감

    안한다면, 그동안의 관련 연구는 다소 행정과 연관된 부면에 더 치중된 느낌이 든

    다.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군사용 지도의 존재와

    지리지에 수록된 국방 관련 정보의 다양한 항목들은 전쟁 수행과 지리 정보의 태

    생적 친연성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關防 지도 등의 특수도 제작

    및 변경 인식,2) 지리지 중 국방 관련 정보의 분석3) 등에 대해서는 학계에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지만, 정작 지도와 지리지에 수록된 정보들이 군사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라는 주제는 종합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필자의 管見으로는,

    이와 관련해 이상태의 간략하지만 대표적인 연구4)가 존재할 뿐이다.

    본고는 선행 연구를 토대로 당대인들이 전투․전쟁 수행의 과정에서 어떻게 지

    도와 지리지를 인식하고 활용하였는지 새로운 사료를 보강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

    로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이란 동북아시아의 국제전 속에서 朝․明․日

    삼국의 행적을 군사지리 정보의 획득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고찰해보

    고자 한다.

    2. 임진왜란 이전 지도 ․ 지리지의 군사적 활용과 관리

    동서고금의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나 TV 사극에서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지도 천재들, 새문사 등2) 배우성, 1996, 고지도에 나타난 영토․영해 의식 , 역사비평 35; 양보경, 1997, 조선시대의 고지도와 북방인식 , 지리학연구 29; 정은주, 2011, 고지도에 반영된 조선후기 연안및 도서지역에 대한 인식 , 한국고지도연구 3-2; 남의현, 2012, 고지도를 통해서 본 15∼17세기의 변경지대 , 만주연구 14; 이명희, 2013, 명청시기 중국 동북 지역의 지도․지리지와 조선 관방지도의 관계 ,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동북아역사재단 등3) 유재춘, 1996, 朝鮮前期 城郭 硏究-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중심으로- , 軍史 33;조병로․김주홍 共著, 2003, 한국의 봉수-옛날 우리 조상들의 군사통신 네트워크-, 눈빛등

    4) 이상태, 1999, 앞의 책, 혜안, 19∼24쪽 및 69∼7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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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품을 손꼽으라고 하면 아마 지도가 그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엄숙한

    분위기의 軍幕, 탁자 위에 넓게 펼쳐져 있거나 벽면에 높이 걸린 대형 지도를 보

    면서 전략․전술을 고민하고 부대 이동을 협의하는 심각한 표정의 장군들, 지도

    위의 부대 배치를 상징하는 각종 도형이나 표식 등은 그리 낯설지 않은 장면들이

    다. 이처럼 전쟁 관련 영화나 TV 사극에 지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유는 전

    쟁의 수행과 지도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春秋時代의 유명한 병법가인 孫武는 손자병법의 地形 편에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가 위태롭지 않다. 하늘의 기후를 알고 땅의 지형을 알면 승리가 완

    전하다[知彼知己 勝乃不殆 知天知地 勝乃可全]”라고 하여, 아군과 적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戰場의 기후와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임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는 始計 , 行軍 , 九變 , 九地 등에서도 지형에 따른 적

    절한 전략․전술의 선택 및 부대 이동과 배치를 강조하였다.5) 따라서, 아래 사료

    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지형을 파악하고 지도를 관찰하여 地利를 획득한 뒤 用

    兵하는 것은 전체적인 戰況을 파악하고 전쟁을 지휘해야 하는 장수의 필수적인 자

    질로서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왔다.

    무릇 지형은 용병의 보조물이다. 적을 헤아려 승리를 제어하고 지형의 험난함과 위험,

    멀고 가까움을 계산하는 것은 上將의 도리이다. 이것을 잘 알아서 전쟁에 활용하는 자는

    반드시 이기고, 이것을 알지 못하면서 전쟁에 활용하는 자는 반드시 진다.6)

    병사를이끄는장수는반드시먼저지도를살펴알아야한다. 꼬불꼬불한험한산길, 전

    차를 뜨게 하는 물길[濫車之水], 이름난 산, 큰계곡, 고원, 구릉이 있는곳, 마른풀이나 나

    무․갈대가무성한곳, 길의멀고가까움, 성곽의크고작음, 이름난읍, 허물어진읍, 황무

    지와경작할수있는땅등도반드시모두알아야한다. 지형이들쑥날쑥서로겹치는것도

    마음에새겨야한다. 그런다음에야군대를움직여邑을습격할때들고그치는것의先後

    를 알아 지리의 이로운 점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지형 파악에서 항상 주의해야 할 일이

    5) 김기동, 1993, 중국 병법의 지혜, 서광사, 117∼122쪽 참조.6) 孫子兵法 地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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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7)

    지도에 포함된 지형, 산세, 물길, 지명, 도로, 城池, 鎭堡 등의 공간 정보는 유사

    시 그대로 긴요한 군사 정보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사 이래 전

    쟁의 수행과 지도의 제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8) 조선에서도 이상과

    같은 인식이 공유되었음이 쉽게 확인되는데, 金宗直은 合浦 원수부에서 제작한 慶尙道地圖를 보며 남긴 글에서 장수가 된 자는 반드시 지도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9)

    임진왜란 이전까지 대규모 전투는 드물었지만, 조선전기에도 지도의 군사적 활

    용은 적지 않았다. 조선전기부터 全國圖와 함께 많은 지방도가 제작되었는데, 특히

    4郡과 6鎭의 개척 전후 여진족의 준동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북방 邊界 지역

    의 지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10) 이렇게 제작된 지도는 흔히 ○○兩界圖 ,

    ○○沿邊圖 , ○○城子圖 , ○○防戍圖 , 形勢圖 등의 이름으로 실록에 기재되

    었다.

    이들 지도는 유사시 부대 이동로를 찾기 위한 용도보다는 전체적인 방어 및 공

    격 전략의 구상에 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 1460년(세조 6) 두만강 밖의

    毛憐衛 여진족을 토벌하러 가게 된 신숙주는, 戰馬 등의 군수 물자와 함께 자신이

    이전에 제작하여 올린 五鎭地圖 를 내려주도록 세조에게 요청하였다.12) 당시 咸

    7) 管子 地圖8) 고대 중국의 현존하는 지형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히는 지도 두 개가 1973년 馬王

    堆 漢墓에서 출토되었다. 하나는 漢代 蕃國의 하나였던 長沙國(B.C. 202∼157)의 지형도였

    고, 다른 하나는 장사국의 남동부를 거의 두 배로 확대하여 제작한 부대 배치도였다. 후자

    는 장사국이 南越國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9) 金宗直, 佔畢齋集 佔畢齋文集 卷2 慶尙道地圖誌 “爲將者 不可不知輿圖也 平時則已 至於倉卒 其山川險易 道里遠近 苟不目慣心熟 則雖有方略 無所施矣”

    10) 이상태, 1999, 앞의 책, 7∼9쪽 참조.

    11) 이기봉, 2011, 앞의 책, 31∼32쪽

    12) 세조실록 권21, 세조 6년 7월 癸卯(29일) “申叔舟行至永平 以事目稟旨 …(中略)… 一臣所進五鎭地圖 請下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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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吉道都體察使의 신분으로 여진 정벌을 총 지휘한 그는, 이 지도를 참고하여 이동

    지역의 멀고 가까움, 지형의 험난함과 편안함, 여진 부락의 많고 적음을 적진으로

    들어가는 휘하 장수에게 숙지시켰다.13) 그러나 같은 날 실록 기사에 여진인 嚮導

    의 존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사례를 근거로 신숙주의 휘하 부대가 지도만을

    길잡이 삼아 행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존하는 조선 초기의 지도가 남아 있지 않아 확증할 수는 없으나, 군사 행동의

    개시 전후 향도의 투입이 강조되는 여러 사료14)를 볼 때 전장에서의 行軍은 대략

    의 정보만 기재되는 지도보다는 향도에게 의지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

    적일 것이다.15) 특히 敵陣에서의 기동에는 지역 사정과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있

    는 향도의 정찰과 길 안내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물론 이러한 일은 향도에게 사형

    수를 선발하여 딸려 보낼 정도로 큰 위험이 따랐고,16) 성공할 경우 從軍한 향도에

    게는 큰 포상이 주어지기도 하였다.17)

    중종 37년(1542)에는 타타르의 추장 俺答阿不孩와 吉囊이 명나라의 山西省에 침

    입하여 수도 北京의 안보가 불안해졌다. 承文院 提調 尹殷輔 등은 이 사태가 조선

    13) 세조실록 권21, 세조 6년 9월 甲申(11일) “會寧城底阿木河兀弄草及愁州以下野人 按堵如舊 或有從軍嚮導者叔舟以汀得楨益昌等失律 上書自劾曰 臣初慮汀等或有進却 各其所出道里

    遠近險夷 部落多少 臨地圖一一指授 三令五申 又各爲誓書 申令書授 不意汀首違節度 得楨益

    昌輕進失道 然此蹉跌 實由於臣 臣更巡五鎭 分授諸將 守禦方略 還京待罪”

    14)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壬辰(28일) “大司憲梁誠之上北方備禦事宜 …(中略)…一 用兵須按地圖 須用土人鄕導”; 성종실록 권242, 성종 21년 7월 戊辰(18일) “永安北道節度使尹末孫馳啓曰 阿陽阿等 與兀狄哈 構釁相報仇 若乘隙掠我邊鄙 則不得已應之 彼土山川

    向背 道路要害 不可不知 請領城底野人及六鎭軍士 深入彼境 審視而還 …(中略)… 御書曰 …

    (中略)… 今節度便請遣人審形勢 此乃兵法所謂 不知山林險阻沮澤之形者 不能行軍 不用鄕導

    者 不能得地利者也” 등

    15) 조선은 野人들을 정벌 할 때, 그들을 향도․척후․선봉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정다

    함, 2008. 朝鮮初期 野人과 對馬島에 대한 藩籬․藩屛 認識의 형성과 敬差官의 파견 , 東方學志 141, 241쪽 참조).16) 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 3월 戊申(24일) “傳旨平安道監司都節制使 前日上言 請以童山耶叱大爲導, 授狀勇死囚一二人 審視賊穴 童山耶叱大則今當下送 其道內狀勇死囚 磨勘以啓”

    17) 세종실록 권70, 세종 19년 12월 乙丑(8일) “以玹爲壽春君 璭益峴君 以向化童理童山爲副司正 理卽豆里不花 賜名理 二人皆征婆猪嚮導有勞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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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서북 지방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며 대책 마련을 건의하였는데, 중종의 이해

    를 돕기 위해 당시 타타르의 점령지였던 忻州, 적군의 예상 침공로인 薊州 寧武關,

    朶顔을 중국 지도에 付標하여 올리기도 하였다.18) 이 밖에도 조정에서는 지도를

    참고하여 지방 鎭堡의 증설이나 이동, 군현의 통폐합 등을 현지에 가지 않고 논의

    할 수 있었다.19) 문종은 유사시 군사들의 징발과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참고하기

    위하여 각도 郡․邑 간의 거리가 상세히 기재된 지도를 만들도록 지시하기도 하였

    다.20)

    한편 지도는 군사 정보와 아울러, 국가의 효율적 통치를 위한 행정 정보를 그림

    으로 나타낸 문서이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개편된 행정 구역의 지명이나 경

    계, 갱신된 지역 정보 등은 문서뿐만 아니라 각 도에서 제작된 지도와 함께 수합

    되어 수도 한양에 있는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이처럼 행정과 국방이라는 기본적이

    고 근본적인 국가 기능의 수행에 반드시 필요했던 지도는 토지 대장이나 戶籍과

    함께 국왕의 중앙 집권과 통치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 典籍이었다.21)

    지도 외에 조선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작된 서적 중의

    하나는 地理志였다. 세종 7년(1425) 慶尙道地理志를 필두로 약 60년간에 2개의地方志와 3개의 全國志가 편찬되었고, 그 대미는 성종 12년(1481)에 완성된 東國輿地勝覽(50권)이 장식하였다. 이 책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완결된 두 차례의 개정 작업을 걸쳐 분량이 55권으로 늘어났는데, 최종적으로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여 중종 25년(1530) 新增東國輿地勝覽(55권 22책)으로 완성되었다.

    18) 중종실록 권97, 중종 37년 1월 丙申(15일) “承文院提調尹殷輔等 以聖節使書狀官李世球千秋使書狀官李安忠等聞見事件 付標 …(中略)… 入啓曰 …(中略)… 又以地圖 付標忻州薊州

    寧武關朶顔等三衛入啓【欲其自 ■上 知此地之近於帝京也】 …(中略)… 答曰 當初聞見事件

    不偶然再三見之 地勢之如此 予何以知之 所啓地圖與聞見事件付標處 更詳見之 且聞所啓之言

    至爲寒心 幸無事則已 自古中原有如此之事 則我國西方 亦大受弊 啓意至當 然今不可以此別爲

    措置 而輕致騷動也”

    19) 이상태, 1999, 앞의 책, 22∼27쪽.

    20) 문종실록 권5, 문종 즉위년 12월 戊戌(28일)21) 와카바야시 미기오(若林幹夫) 著․정선태 譯, 2006, 지도의 상상력, 산처럼, 142∼145쪽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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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전의 官撰 지리지에 비해 인물, 詩文 등의 인문 정보가대폭 보강된 조선전기 최고의 종합 인문지리지였다. 이 책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戶口와 토지 結數 등의 항목이 빠져 있지만, 각 郡縣의 建置沿革․屬

    縣․鎭管․官員․郡名․院宇․土産․倉庫․城郭․關防․橋梁․烽燧․驛․姓氏․風俗․

    宮室․樓亭․題詠․學校․書院․佛宇․祠廟․陵墓․古跡․名宦․人物․流寓․孝子․烈

    女․仙釋․山川․形勝 등의 풍부한 인문지리 정보와 군사 지리 정보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특히 卷頭에 朝鮮全圖인 八道總圖가, 각 道가 시작되는 부분에는 道別圖가

    첨부되어 있었다. 地理志의 경우 단독으로는 군사적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상세한

    지도와 결합될 경우 특히 양자가 함께 적의 손에 들어갈 경우에는 많은 유용한 정

    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었다.

    민감한 행정․군사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와 지리지의 제작과 보관은 국가의

    독점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22) 세조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 지리지와

    지도 제작에 참여하였던 양성지는 성종 13년(1482)에 올린 상소에서 지리지 보관

    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지도의 민간 소장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23) 연산

    군대부터는 다른 官府 문서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민간 소지도 엄격히 금지시켰다.24) 아래 사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지도가 필사되어 지도 열람이

    훨씬 자유로웠던 조선후기에도 안정복은 지도의 민간 소장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

    장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보면, 상세하고 정확할수록 널리 유통․활용되

    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시 지도가 처한 역설적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25)

    22) 물론 실제로는 국방용으로 상세히 제작된 지도를 제외하면, 조선전기에도 후기와 마찬가

    지로 국가에서 제작된 상당수의 지도가 민간에 흘러 들어가 지방관의 통치 보조, 양반 지배

    신분의 완상용 등의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23) 성종실록 권138, 성종 13년 2월 壬子(13일) “南原君梁誠之上疏曰 …(中略)… 一 臣竊惟地圖 不可不藏於官府 又不可散在於民間也”

    24) 연산군일기 권58, 연산군 11년 7월 戊戌(15일) “傳曰 凡官府文書及輿地勝覽 可於公廨藏置 以備考閱 其私藏者一禁 陰陽卜筮之書 除所業人外 毋得私藏 違者治罪”

    25) 지금도 1961년 제정된 ‘측량 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측량법)’에 의해 국가 안보나

    그 밖에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국가 중요 시설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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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기에 그 편집을 마치고 나서 또 별도로 地圖를 만드셨다는데, 그것을 보고 와서 전하

    는 자의 말에 의하면, 국내 山川이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고, 關防과 道里가 한 눈에 훤해

    참으로 기특한 보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리석은 생각에는 그것이 물론 우리나라 사

    람들에게는기특한보물일것입니다. 그러나우리나라는변방단속이엄하지못해나라안

    의禁秘문서가다른나라로많이유출되고있는실정인데, 지금그지도역시간교한무리

    들이적에게아양떨고뇌물을받아먹는자료로이용할줄어떻게알겠습니까. 옛날신미

    년에 京城圖 를간행했는데, 三闕밖에여러아문과상점들, 그리고 각동네의세세한길

    까지모두손으로짚어가며볼수있기에, 당시그것을보고는나도모르게깜짝놀랐습니

    다. 王都를일러禁城이라고하고, 대궐안을禁內라고하니, 그렇다면그禁이라는글자는

    그곳은숨겨야할곳이지밖에드러내서는안되는곳임을뜻한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근래에청나라사람들이만든 盛京志를보았는데遼東지역의地理는아주상세하게나타내 놓고 막상寧古塔 일대는 전혀 수록하지 않아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니, 만일의 후환을 염려한 뜻이 깊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지도의 잘못된 곳은 당

    연히 바로 잡아수십本을베껴서 보관해둘 일이지만 이를 간행하여 유포해서는 안됩니

    다.26)

    당연히 지도․지리지의 외국 반출은 兵器나 군사 관련 기술의 유출 못지않게

    중대한 국가 반역죄로 인식되었다.27) 일본이나 여진 등의 적대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우호국인 명나라에도 상세한 지도․지리지는 반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28)

    중종 3년(1508)에는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副使가 八道地圖를 요청하자 전체 영역

    만 대충 그려주었으며,29) 중종 16년(1521)에는 명나라 上使가 지리지를 보여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적도 있었다.30) 반면 조선은 對明 使行 등의 경

    상세하게 기재된 대한민국 지도의 국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다.

    26) 安鼎福, 順菴集 권5, 書 與洪判書書 庚寅27) 지도․지리지의 禁秘策에 대해서는 방동인, 2001, 앞의 책, 112∼119쪽 참조.

    28) 그러나, 조선의 權益을 설명하는 데 유리할 경우에는 지도를 명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태

    종대에 동북면 변경의 여진 지역에 대한 관할을 승인받기 위하여 計稟使 金瞻을 명에 파견

    하였는데, 이 때 그는 奏本과 地形圖本을 소지하였다(태종실록 권7, 태종 4년 5월 己未(19일)).

    29) 중종실록 권6, 중종 3년 7월 甲寅(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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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를 통해 중국과 주변 지역이 그려진 天下圖나 명나라 지도, 특히 조선의 안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 지도를 은밀히 입수하려고 노력하였다.31) 申叔舟가 기록

    한 海東諸國記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잠재 敵國인 일본의 지도 수집에도 열과 성을 다하였다.32)

    3. 임진왜란의 발발과 朝․明․日 삼국의 지도 활용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부산, 동래, 상주, 충주

    에 이어 5월 3일에는 수도 한양까지 점령하고 개성을 거쳐 6월 15일에는 평양까지

    진격하였다. 8월경에는 평양 이북의 평안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의 주요 거점

    대부분에 일본군이 주둔하는 형편이었다. 일본 수군도 5월부터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반격을 받아 주춤하고 있었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해안에서 작

    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군은 이미 임진왜란의 발발 이전에 조

    선에 대한 지리 정보를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충분히 확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실전 경험이 없는 타국의 戰場에 대한 지리 정보의

    확보 없이 10만 이상의 전투 병력을 파병하는 전쟁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하다.33)

    30) 중종실록 권43, 중종 16년 12월 壬辰(14일)31) 방동인, 2001, 앞의 책, 118쪽 참조; 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6월 壬申(17일) “同知中樞府事崔世珍 以京城圖志女孝經各一冊及地圖一軸進上 仍啓曰 此京城圖志 乃南京宮闕都城山

    川之圖【官制防曲之名 亦附焉】 …(中略)… 地圖乃遼東地形 而中原人爲之 皆我國所無 意可

    御覽 故進上也”

    32) 이상태, 1999, 앞의 책, 14∼19쪽 참조.

    33) 물론 일본군 역시 대강의 전략․전술은 지도를 통해 구상하였지만, 부대의 행군시에는

    현지 조선인 嚮導의 도움을 받았다(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6월 己丑(1일) “倭將淸正入關北 咸鏡監司柳永立被執 兵使李渾爲賊民所殺 初淸正行長等同渡臨津追上行 而慮車駕

    或轉北行 約分路進兵 淸正勇猛冠軍 所領兵尤精悍 二將拈鬮定所向 淸正得咸鏡道 擒我民二人

    爲向導 一人辭以不識其路 賊斬之 一人懼而從之”). 이 외에도 일본군의 향도로 앞장 서 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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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방증하듯, 임진왜란 직전 한양에 온 宗義智는 삼척이 한양에서 3천여 리나

    떨어져 있다는 조선 관원의 말을 반박하며 소지한 조선지도를 꺼낸 보인 적이 있

    으며,34), 小西行長도 임진년 沈惟敬과의 회담에서 조선지도를 내보이며 자신의 입

    장을 피력한 바 있다.35).

    조선에 대한 지리 정보의 1차적 출처는 倭館 등에 거주한 일본 상인,36) 임란

    직전 조선을 오간 일본 사신,37) 국내에서 죄를 짓고 일본으로 달아난 조선인 등이

    었을 것이다.38) 이들은 口述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나 일부를 그린 지도

    를 불법적으로 입수․유출함으로써 조선의 지리 정보를 일본에 전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더욱 상세한 지도를 입수한 뒤 배포하

    여 군사 작전에 활용하였을 가능성도 높다.39)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 중의

    을 괴롭힌 자들의 처벌을 논하는 기사를 당대 사료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34) 趙慶男, 亂中雜錄 권1, 辛卯 萬曆十九年 我宣廟二十四年 “玄蘇等至京城 …(中略)… 義智曰 欲由三陟 直渡東海 譯官曰 三陟去京三千餘里 未可猝至 義智張目 出示我國地圖曰 此國

    豈有千里之境”

    35) 趙慶男, 亂中雜錄 권2, 壬辰下 萬曆二十年 我宣廟二十五年 “惟敬自平壤賊中 出來順安…(中略)… 遊擊又謂孝男曰 我與倭將 講論多說 行長欲見國王 我以道理不可之義拒之 行長曰

    老爺之言有理 我曰 大丈夫不食言 五十日內送家丁 我亦繼來 不相負約 平壤城還我之事 何以

    爲乎 行長卽出地圖指示曰 朝鮮八道 平安亦居其一 何以平壤以西爲天朝地方乎”

    36) 비록 조선후기에 국한된 연구이지만, 왜관의 정보 수집 활동에 대해서는 허지은, 2012, 왜관의 조선어통사와 정보유통, 경인문화사를 참조할 수 있다.37)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일본 사신의 上京路를 따라 북진하였다.

    38) 선조실록 권24, 선조 23년 2월 庚子(28일) “珎島居沙乙火同 投入倭國 嚮導作賊 至是日本刷還 上御仁政殿 行獻俘之禮”

    39) 明史 권320, 朝鮮列傳 “(萬曆 25年) 五月 玠至遼 行長建樓 淸正布種 島倭窖水 索朝鮮地圖 玠遂決意用兵”;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일본군의 작전 지도로서 필자가 파악한 것으

    로는 島津軍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조선전도 가 있다. 島津氏의 家臣인 川上久國과 그의

    아버지 川上久辰이 제작한 이 지도는 외견상 정척이 제작한 동국지도 계열로 보인다. 현

    재 일본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http://www.pref.kagoshima.jp/ab23/reimeikan/josetsu/theme/chusei/korea/kgs02_s7_1.h

    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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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朝鮮方域之圖 의 소장 경로이다.40)

    155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 이 지도는 세조 9년(1463) 鄭陟과 梁誠之가 제

    작한 東國地圖 의 필사본이다. 조선전기 지도의 백미로 평가받는 동국지도 는

    정밀한 지도 그림뿐만 아니라 도로․부․군․현․兵營․水營 등의 풍부한 인문 정

    보도 담고 있어 군사적 활용도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동국지도

    의 필사본인 조선방역지도 가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유출되어 대마도에 보관

    중이다가, 조선사편수회의 사료 수집 정책의 일환으로 1930년대에 다시 국내로 돌

    아오게 된 것이다.

    선조 25년(1592) 5월 비변사가 입수한 일본군의 海路地圖에는 조선인 간첩의

    도움 없이는 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세한 내용이 담겨져 있어 문제가 되었

    다.41) 北道節度使로 함경도를 수비하다가 일본군에게 투항한 뒤 附逆한 죄로 참수

    된 韓克諴의 아들 韓格은 중국과 조선지도[中國及我國地圖]를 일본군에게 그려 주

    었다가 처벌되기도 하였는데,42) 미야 노리코는 이 때 유출된 지도를 일본 구마모

    토 소재 本妙寺43)에 소장된 大明國地圖 44)로 추리하기도 하였다.45)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가 귀국한 鄭希得의 月峯海上錄에도 조선에서반출된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天下輿地圖 를 본 작자의 절절한 소회가 기록되어

    있다.

    40) 조선방역지도 의 특징과 소장 경로에 대해서는 이상태, 1999, 앞의 책, 47∼57쪽 참조.

    41)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壬午(23일) “上引見大臣 …(中略)… 斗壽曰 昨見臨津所得地圖 江華喬桐等地水路遠近 歷歷書之 以給倭賊 人心如此 極爲痛憤”; 선조실록 권26,선조 25년 5월 甲申(25일) “備邊司啓曰 臣等得見倭人海路地圖 其於形勢 周議極備 此必我國

    奸細作 如許通謀而然也”

    42) 선조실록 권38, 선조 26년 5월 丁卯(14일) “臨海君珒順和君 自賊中致書有云 韓克誠降納二女於淸正 至畫謀議四十條 其子格 以中國及我國地圖 與”; 선조실록 권38, 선조 26년 5월 戊辰(15일)

    43)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菩提寺. 보리사는 先祖의 위패를 모신 절이다.

    44)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의 개정판

    45) 미야 노리코(宮紀子) 著․김유영 譯, 2010,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몽골 제국의 유산과동아시아-, 소와당, 324∼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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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政의집 벽위에있는 天下輿地圖 를 보았다. 임진년에서울들어갔을 때얻은 것이

    라 한다. 칠산바다와 三角峯을보자, 불현듯어머님을 잃은 슬픔과 임금님 그리워하는 마

    음이이날따라갑절이나더하였다. 한숨과눈물이한꺼번에튀어나와, 心腸이끊어지는듯

    했다. 이상하다! 이렇게넓은우주에어찌한사람의丈夫가없어, 이섬중의조그만오랑

    캐로 하여금 이웃을 치고 이처럼 중국을 엿보게 하였던가?46)

    한편, 게리 레드야드는 일본 내각문고 소장 朝鮮全圖 의 도별 채색 체계와 일

    본군의 도별 호칭 체계가 불일치함47)을 근거로 들어 일본군이 조선 측 지도에 의

    지하였을 가능성을 일축한 바 있다.48)

    임진왜란의 개전 이후 조선의 빗발치는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개입을

    주저하던 명나라는, 전쟁이 자국 안보에 미치는 영향과 원군 파병의 損益을 면밀

    히 검토한 후에야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였다.49) 선조 26년(1593) 12월 提督 李如

    松이 이끄는 43,000명의 明軍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조선의 경내로 진입하였다. 이

    로부터 조선은 선조 31년(1598) 11월 정유왜란의 종전까지 명군과의 연합 작전을

    펼침으로써 일본군 격퇴에 힘쓰게 된다. 조선을 침략하러 온 일본군과 달리 조선

    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한 명군이었지만, 조선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절실하

    46) 鄭希得, 海上錄 권1, 戊戌年 3월 13일47) 두 체계는 전라도를 붉은색으로 인지하는 것만 동일하였다.

    48)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著․장상훈 譯, 2011, 한국 고지도의 역사, 소나무, 192쪽; 게리 레드야드는 앞서 설명한 川上久辰․川上久國 부자가 제작한 조선지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9)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31∼42쪽 참조; 당시 명은 임진왜란의발발이 서북쪽에 치우친 수도 北京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였는데, 평안도-요동-북경으로

    연결되는 육로의 방어 못지 않게 전라도-山東半島-天津의 해상 경로로 일본군이 직접 타격

    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전라도를 산동 반도의 대안으로 본 지리적 인식의 오류가 명

    참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은 이미 선행 연구에서도 수차례 강조된 바 있다(최소

    자, 1977, 壬辰倭亂時 明의 派兵에 대한 論考-派兵의 배경과 軍事活動에 대한 評價- (一),

    東洋史學硏究 11, 67∼72쪽; 허선도, 1980, 壬辰倭亂에 있어서의 李忠武公의 勝捷-그 戰略的 戰術的 意義를 中心으로- , 韓國學論叢 3,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08∼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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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필요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명은 자국군을 수행할 향도를 조선에 미리 요청

    하고,50) 이동로의 도로가 상세히 기재된 지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51)

    자국 병사의 생명과 국익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조․명 간의 군사 동맹은 긴밀

    한 군사 정보의 교환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다. 일본군을 단독으로 상대하기 버거

    웠던 조선은 평소와 달리 민감한 군사 정보를 담은 조선 지도를 명나라에 제공하

    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52) 구체적 戰況의 공유나 공동 전략의 수립은 문서 교환

    또는 양국 수뇌부의 잦은 회동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지도는 아래 사료들에

    서 보이는 것처럼 그림 자료가 갖는 뛰어난 전달 능력 때문에 자주 애용되었다.

    명의 군사가 안주에 도착하였을 때에 내가 청천강 가에 나가 맞이하였다. 군사가 세 곳

    에병영을마련하여주둔하니, 그깃발과무기및장비가정숙한것이神兵과같았다. 날이

    저물어내가제독이여송을보고軍務에대하여의논하기를요청하니, 제독이동헌으로나

    와앉기를권하였다. 내가평양지도를꺼내탁자위에펴놓고형세와군대가따라들어갈

    수있는길을가리키며아주자세하게설명하였더니, 제독이침착하게듣고서빨간글씨로

    그곳을 표시해 놓더니 또, “왜군은 조총만 가지고 있는데, 아군의 대포는 모두 5, 6리를 나

    가니, 왜적들이 어떻게 당해 내겠는가?”라고 말하였다.53)

    영의정 유성룡이 地圖 1건을 가지고 아뢰기를, “삼가 李德馨의 書啓를 보건대, 이번에

    巡撫가 보낸 委官에게 답서를 보내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回咨에

    50) 선조실록 권33, 선조 25년 12월 戊戌(12일) “行禮曹判書尹根壽 兵曹判書李恒福 工曹判書韓應寅戶曹判書李誠中 戶曹參判尹又新啓曰 昨日 張都司請見兵部戶部官 臣等入見行禮 都

    司問曰 …(中略)… 爾軍備諳山川道路 當嚮導齊進 進則生退則死 須速開數以報 臣等答曰

    當依命”

    51) 선조실록 권41, 선조 26년 8월 壬午(1일) “都體察使柳成龍馳啓曰 臣於本月初九日 聞劉總兵在陜川 卽馳到 總兵許與相見 …(中略)… 總兵曰 …(中略)… 然若實知湖南被兵 則當隨

    爾等所言 而赴救須討 一地圖詳載道路由經之路以來 …(中略)… 臣退 畫地圖一件 又爲稟帖以

    呈”

    52) 동일한 맥락에서, 임진왜란 이전 금수물자였던 화약․염초․유황도 명의 허가로 조선에

    지원․반입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허태구, 2002, 17세기 朝鮮의 焰硝貿易과 火藥

    製造法 발달 ,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석사학위논문 참조.

    53) 柳成龍, 西厓集 권16 雜著 記壬辰以後請兵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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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賊勢를 갖추어 아뢴다고 하여도 지도로 그린 것만큼 분명하지는 못하겠기에 지도 1건을

    가지고 와서 감히 여쭙니다. 보신 뒤에 적세를 적은 文字와 동봉하여 보내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필자: 임금이) 답하기를, “이렇게하는것이 매우 좋겠다. 그러

    나 이런 중대한 일에 관계된 것을 夜不收54)가 가지고 간다면 허술할 염려가 있지 않겠는

    가?…”라고 하였다.55)

    특히 명군의 참전으로 평양과 한양이 잇달아 수복되고 일본군의 주력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로 후퇴한 이후에는, 부산과 경상도 일대의 지리 정보가

    명군의 중요 관심사가 되었다.56) 1593년(선조 26) 6월 명군이 부산 지역의 형세를

    요구하자 함경도에서 보낸 慶尙道沿海地圖 를 經略 宋應昌에게 보내주었으며,57)

    같은 해 12월에는 명에 전황을 보고하는 회답 咨文에 일본군의 주둔 현황을 묘사

    한 지도가 첨부되기도 하였다.58) 자연스레 명군의 陣中에는 조선이 제공한 지도가

    모사․배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59) 선조 29년(1596) 8월에는 講和 협상을 추진

    하는 과정에서 朝鮮地圖를 명이 일본에 제공하자, 이러한 처사를 조선이 강력하게

    항의하여 조․명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었다.60)

    정유재란 발발 후인 선조 30년(1597) 3월에는 經略 楊鎬의 부하 寗國胤이 조선

    54) 偵探, 間諜 등의 임무를 담당한 병사. 주로 야간에 활동하였다. 遼東에 주둔한 明軍의 職

    制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인다(http://baike.baidu.com/view/2732806.htm).

    55) 선조실록 권46, 선조 26년 12월 丙子(27일)56) 柳成龍, 西厓集 권9 書 答吳遊擊 惟忠 書 癸巳八月 “凡兵家以得形勢爲重 形勢旣得則雖少可以敵衆 釜山四面接連要害去處 鄙生未嘗身親踏勘 道里迂直 山川阻奧 難可遽悉 除已

    行文左右道巡察使及元帥等官 令急遣詳知地里慣於經歷者 分投査勘 明白畵圖 逐一帖書來到

    擬更加査驗無誤 呈稟麾下”

    57) 선조실록 권39, 선조 26년 6월 乙未(12일)58) 위의 각주 55) 참조.

    59) 선조실록 권97, 선조 31년 2월 乙酉(30일) “接伴使李德馨啓辭 …(中略)… 經理曰 …(中略)… 又出地圖示臣曰”; 許穆, 眉叟記言 別集 권18 丘墓文 吉昌府院君權公墓誌銘“丁酉 果益兵臨我 人心大懼 …(中略)… 公受命 卽行三十日 薄京師 旣上奏 日愬兵部軍門 以

    國弱賊強 危迫存亡之急 言輒泣下 軍門索地圖 仍回我城池器械兵甲積儲 與賊兵屯據要害 公誦

    地誌 作輿地圖 具列賊路與我殘破狀 開示纖悉 擧無遺策 軍門大悅”

    60) 선조실록 권78, 선조 29년 8월 丙申(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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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상세한 지도를 선조에게 청하여 얻어갔다.61) 같은 해 4월에는 이전에 조선이

    제공한 지도가 상세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다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62) 이

    때 그는 水路를 이용할 경우의 운항 시간, 적이 모르게 배를 숨길 만한 장소 등을

    조선 측에 문의하기도 하였다. 1597년 말부터 명나라 수군도 정유재란에 참전하기

    시작하여 1598년 7월부터는 조선 수군과 연합 함대를 구성한 후 11월 노량해전까

    지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영국윤의 문의도 명 수군의 파병과 관련하여 제

    기된 것으로 생각된다.63) 따라서 이 시기에 명에 제공된 지도 중에는 海圖類가 상

    당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해도는 모두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뿐인데, 이를 통해 유추하면

    당시 명 측에 전달된 해도에는 海路, 水營 주변의 浦口와 烽燧, 선박운행 정보 등

    이 기재되었을 것이다.64) 물론, 육지와 마찬가지로 강이나 바다에서도 海圖만으로

    兵船을 기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도에 기재되지 않지만 항해에 필수적인 정보

    는 연해민의 傳聞과 유능한 뱃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었다.65) 선조

    61) 선조실록 권86, 선조 30년 3월 甲辰(14일)62) 선조실록 권87, 선조 30년 4월 己巳(9일) “未時 上具冠袍 出御門內幕次 候寗都司國胤…(中略)… 都司曰 布政以爲前來地圖 不甚詳備 更要仔細畫來 且水路自釜山至鴨綠江 當幾日

    可達 而行船之處 有可藏舟 使賊不知之地乎”

    63) 정유재란 이전에도 명의 군량 수송 등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 양국의 水路 정보는 서로

    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선조실록 권46, 선조 26년 12월 庚戌(1일) “備邊司啓曰自上下敎 張都司言 中國舟楫 不能海運 此一款 更爲議啓矣 前者聞都司之言 上國海船 木料不

    壯 不便駕使洋中 令爾國船隻 到金州衛載運 則我當給銀 雇人月輸云 其意誠非偶然 但自義州

    至于金州 其水路險易 本國捎工 不曾諳熟 今宜成送一咨于都司前云 本國之人 冒險輸糧 實所

    難便 而大人爲小邦 如是丁寧分付 誠爲感幸 玆以起送伶俐捎手 使之探審水路而來 願大人更爲

    商量指敎 仍令平安監司 另選沙工二三名 通事一員押領 優給資糧 入送于遼東張都司處 齎呈咨

    文 聽其分付 兼探水路以來 何如 答曰 此事急急爲之 往復之間 恐致稽緩失時”; 선조실록권52, 선조 27년 6월 丁巳(10일) “上御便殿 接見胡參將澤 張把總鴻儒 上曰 大人幹何事往何

    地方乎 把總曰 受山東撫按之命 驗水路難易 且探倭情 上曰 大人之行 係小邦存亡 小邦君臣

    只望大人而已”).

    64) 정은주 2011, 앞의 논문, 56∼60쪽 참조

    65) 이기봉, 2011, 앞의 책, 19∼22쪽 참조; 成大中, 靑城雜記 권5 “李忠武公舜臣 始除湖南左水使 倭警方急 禦之在水 而海防險阨 莫之悉也 公乃日聚浦氓男女於庭 夕入晨出 捆屨績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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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년(1598) 9월에는 조선의 주요 격전지와 지형을 문의하는 명의 給事 徐觀瀾에게

    당시의 전황과 형세를 그린 지도가 제공되기도 하였다.66) 이처럼 지도는 임진왜란

    당시 조․명 간 군사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으로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4. 壬辰倭亂期 對明 관계와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은 增補가 완료된 중종 26년(1531)부터 활자본으로 인쇄되어 전국 각지의 史庫와 官衙에 분송되어 비치되기 시작하였다.67) 이 책은 조선왕

    조의 중앙 집권과 통치에 필요한 정치․경제․군사․인문 정보가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 및 민간으로의 유출이 엄격히 금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선조 25년

    (1592) 4월 임진왜란의 발발로 수도 한양을 비롯 전국의 관아에 보관되고 있었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상당수가 유출․소실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인해성주․충주․한양의 사고가 모두 불타 버리고, 전주사고의 실록과 기타 서적만이

    지역 儒生인 安義와 孫弘祿의 활약으로 극적으로 보존되었다. 선조 26년(1593) 7

    월에는 정읍 내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을 해주로 옮겨 오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도 高麗史, 東國通鑑, 東文選 등의 서적과 함께 이송되었다.68)

    恣其所爲 而夜輒犒以酒餐 公便衣狎嬉 誘使之言 浦氓始甚畏懾 久益馴習 相與笑謔 所語皆漁

    採所踐歷也 曰某港水洄 入必船覆 某灘石匿 冒必舟碎 公一一記之 翌朝躬出視之 遠則褊裨往

    察其地 果然 及與倭戰 輒引舟回避 誘納之險 倭船無不立碎 不勞戰而勝也 宋左相嘗以此語其

    客曰 非惟將帥然也 爲相亦當如是 然忠武之習於水 不獨聽於浦民也 魚泳潭屢爲海鎭將 熟於水

    阨 贊佐公爲多 見乃梁鳴梁之戰 專用地利勝”).

    해도 역시 陸戰의 지도처럼 전체적인 전략을 구상하는 데에 종종 이용되었다(선조실록권90, 선조 30년 7월 辛亥(22일) “上搜海圖 指示恒福曰 退來之時 未及見乃梁 而遇賊於固城

    之地 而有此敗耶 由彼則可以易退於閑山 而由此而致敗耶 恒福曰 是 成龍曰 若失閑山 則南海

    是要衝之地 今必爲賊所據”).

    66) 선조실록 권104, 선조 31년 9월 丙申(14일)67) 이상태, 1999, 앞의 책, 41쪽

    68) 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 7월 壬戌(10일) “春秋館啓曰 實錄載來聖敎允當 …(中略)…上曰 依啓 高麗史 東國通鑑 輿地勝覽 東文選 須竝載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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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발발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지리 정보의 수요를 증대시켰다. 지

    도 못지않게 지리지의 효용도 당연히 증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출병 목적은 궁극적으로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에 있었으므로, 점령지 정책

    도 단순한 왜구의 일회성 약탈과 성격을 달리 하였다. 당시 일본은 명 정복의 전

    진 기지로서 조선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의 점령지를 효율적이고 안정적

    으로 지배하여 대륙 침략에 필요한 인력, 물자, 군량, 병력 등을 조달하고자 하였

    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군을 피해 달아난 조선 백성들을 원래의 근거

    지로 안착시키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유도하는 점령 정책이 필요하였는데,69) 이

    과정에서 그들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습득하였다면 상당히 유용한 정보를 확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70)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의 지휘관이나 사신 등도 異國에서의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서 조선에 대한 예비지식이 필요하였다. 이들은 인편 외에도 조

    선의 지도, 역사서, 지리지 등을 통해 이와 같은 지식을 습득하려고 애썼다.71) 선

    조 26년(1593) 6월 명의 員外郞 劉黃裳이 선조를 접견한 자리에서 자신이 미리 읽

    어 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의 釜山 지리를 언급한 기록이 있으며,72) 제독 이여송에

    69) 일본군의 對民宣撫工作에 대해서는 이장희, 1999, 壬辰倭亂史硏究, 아세아문화사, 57~60쪽 참조.

    70) 그러나 임진왜란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영조 3년(1727) 왜관을 통해 유출된 사실만 확인되다(김경숙, 2008, 조선후기

    韓․日 서적 교류 고찰-18세기 통신사 사행록을 중심으로- , 한중인문학연구 23, 233∼234쪽 참조).

    71) 使行時 해당 나라의 지도와 지리지 등의 관련 서적을 지참하거나 미리 상고하는 것은 당

    대의 상식이자 관례였던 것으로 보인다(崔漢綺, 氣測體義 推測錄 권6 推物測事․地志學“奉使絶域者 覽此而傳達重譯 豫探險阨 山梯海航 貢賦之朝宗 陸關水國 商旅之趨利 是皆隣國

    遠邦之圖志 所以講究也”; 金昌業, 燕行日記 권1, 燕行日記 往來總錄 “壬辰六月二十三日政 伯氏爲冬至兼謝恩使 時伯氏大病新瘳 子弟一人宜隨往 且吾兄弟 皆欲一見中國 於是叔氏欲

    行 已而止 余乃代之以打角 啓下 一時譏謗譁然 親舊多勸止 余詼諧曰 孔子微服過宋 爲今世通

    行之義 吾何獨不可乎 聞者皆笑 及治行 圃陰以沿路名山大川古蹟錄一冊 月沙角山閭山千山遊

    記錄一冊並輿地圖一張 置橐中”).

    72) 선조실록 권39, 선조 26년 6월 戊子(5일) “上幸百祥褸 接見劉員外 …(中略)… 上曰 倭

  • - 18 -

    게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3)선조 28년(1595) 5월에는 일본 국왕 책봉사로 한양에 도착한 上使 李宗誠과 副

    使 楊方亨도 역사책인 東國兵鑑과 지리지인 東國誌를 조선에 요구하였다.74)조선은 고민 끝에 두 책을 제공하였으나, 명 사신은 東國地誌보다 훨씬 더 상세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공을 요청하였다.75) 이와같은 사정을 반영하듯이, 선조 31년(1598) 10월 丁巳日의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攷事撮要가 중국에 많이 유출되었다[輿地勝覽及攷事撮要, 流入中國甚多]”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이 명과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데에 활용되기도하였다. 선조 26년(1593) 4월 수도 한양이 수복된 이후, 후퇴한 일본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에 축성하고 장기간의 점거에 들어가자 전쟁의 종결 방식

    을 놓고 조․명 양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쟁에 지친 명군 지휘부

    가 일본과의 講和 협상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는

    선에서 전쟁을 적당히 마무리하려는 반면에, 조선은 전투의 재개와 부산을 점령

    중인 일본군의 완전 축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측은 북경에 있는 명 조정과 神

    賊尙留釜山 奸謀叵測 至以割與釜山 樹立界牌爲言 員外曰 觀貴國輿地勝覽 釜山實貴國南邊要

    鎭 對馬島賊 勢不得越海而居住 豈有是理 俺亦不信 …(中略)… 上曰 釜山鳥嶺 相距無幾 賊

    若更肆 恐失已復之地矣 仍出示東國通鑑曰 觀此前史 釜山鳥嶺 相距甚邇 然此賊幾盡退遁 必

    不敢復肆矣”

    73) 선조실록 권72, 선조 29년 2월 壬子(15일) “上曰 因胡遊擊 得見中朝通報則 釜山原留倭戶 隨便安揷 此乃石尙書之題本也 予謂遊擊曰 釜山舊有倭戶 去庚午歲 擧兵勦滅 曾無一倭

    留住 而今見石老爺之題本 寡人悶之 胡遊擊答曰 俺亦知之云矣 根壽啓曰 李提督到開城府 以

    輿地勝覽出示之 發此原留倭戶之說 臣極陳其不然 又(票)〔稟〕帖於宋侍郞 侍郞亦以爲然矣”

    74) 선조실록 권63, 선조 28년 5월 癸酉(1일) “接待都監啓曰 昨夜兩使 會于上使房對酌 至四更而罷 今朝上使招南好正 分付曰 欲見東國兵鑑及東國誌 宋經略李提督等 皆已取去 云云

    所謂誌 似是東國地誌 此則天使時例給之物 書給無妨 兵鑑贈給 何以爲之 …(中略)… 上曰 兵

    鑑自爲覓去則可矣 其中有未安之語 不可給也 地誌前日弘文館謄書 擬欲給之矣”

    75) 선조실록 권63, 선조 28년 5월 丙子(4일) “接待都監啓曰 臣等令南好正 進呈地誌 則副使適與同坐覽訖 謂曰 此非吾所謂地誌 此則只抄名勝及風俗耳 此外又有輿地勝覽 卷秩甚多 要

    一覽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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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 황제에게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명 측에서 제기된 倭戶의 부산 거주설76)은 강화를 완강

    하게 반대하고 있던 조선과 선조의 외교적 입지를 상당히 불리하게 만들었다.77)

    조선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東萊縣-關防-釜山浦鎭의 新增條78)에 중종 5년(1510)三浦倭亂으로 倭館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철폐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증거

    로 제시하면서 명 조정의 오해를 풀고 조선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상이 南別宮으로 행행하여 遊擊 周弘謨를 접견하였다. …(中略)… 임금이 “어제 榜文

    을 보니 부산포에 주거하는 倭戶가 있다고 하였는데 옛날에는 과연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지 이미 80여 년이오. 사실과 다르게 말을 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오. 대인

    이 만일 알고 싶다면 우리나라의 地誌를 살펴보시오”라고 말하니, 유격이 말하기를,“지지에 그러한 말이 있으므로 방문에 언급한 것이니 만일 지지가 있다면 즉시 보고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지지를 가져오라고 하여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것이오”라고 하였다. 유격이 지지를 살펴보고 “顧爺(필자: 經略 顧養謙)는 단지 항상 주거하였다는 당초의 기록만 보고 新增한 내용은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말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큰 일은 封爵과 朝貢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니

    76) 선조실록에는 ‘倭戶說’로 종종 표기되어 있다. 이 설은 일본인이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직전까지 부산에 거주하며 조선과 교류하였고, 이 사실을 조선이 명에 숨기고 있었으며, 癸

    巳年(1593) 이후 부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바로 이들이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

    어 있었다.

    禮記 郊特牲 조에 나오는 ‘人臣無外交’의 원칙에 따라, 명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藩國간의 私的인 外交 접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事大라는 관점에서 보면 明의 승인이 없

    는 한 交隣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으로서, 명분상의 약점이 조선 측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

    었다. 왜호설은 일본과의 講和를 통해 전쟁을 서둘러 종결지으려고만 했던 石星, 송응창 등

    의 명군 지휘부가 신증동국여지승람 釜山浦鎭條의 일부 내용만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유포시킨 이야기로서, 강화에 반대하는 조선을 압박하기 위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77) 명․일 강화 협상의 추진과 이에 대한 조․명 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한명기, 1999, 앞의

    책, 49∼57쪽 참조.

    7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慶尙道 東萊縣 關防 “釜山浦鎭 在縣南二十一里 有左道水軍僉節制使營 所管豆毛浦海雲浦鹽浦甘浦包伊浦漆浦烏浦丑山浦多大浦西生浦 石城周一千六百八

    十九尺 高十三尺 有恒居倭戶 ○ 僉節制使一人【新增】舊有恒居倭戶 正德庚午僉使李友曾 欲

    以威制 濫加鞭撻 倭奴積憤 與薺浦居倭 謀作亂 乘夜陷城 朝廷遣將討平 遂不許居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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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이 사실과 다른 것이 별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79)

    왜호설은 정유재란 당시 경략 楊鎬를 비방하고 조선을 誣告한 丁應泰의 誣奏에

    도 그대로 인용․확대80)되어 조․명 관계를 큰 파란으로 몰고 가는 데 일조하였

    다.81) 당시 조선은 辨誣奏文을 올려 정응태의 誣告가 대부분 사실이 아님을 주장

    하였는데, 이 때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新增條를 원용하면서 왜호설을 반박하였다.82) 이같은 조선의 변무를 신종이 받아들이면서 무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밖에 선조 30년(1597) 6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환인․환웅․단군

    을 모신 사당)에 致祭를 올리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상고된 기록이있다.83) 종전 후인 선조 32년(1599) 4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사당을 건

    립하는 과정에서, 사당 건립의 발의 주체를 민간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관청으로

    할 것인지 참조하기 위하여 비슷한 사례가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열람이 건의되기도 하였다.84)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희귀해지자, 광해군은 1611년 중종

    79) 선조실록 권49, 선조 27년 3월 癸巳(15일)80) 李廷龜, 月沙集 권21, 戊戌辨誣錄 ○奏 贊畫丁應泰奏本 “贊畫主事丁應泰謹奏 爲屬藩奸 有據賊黨朋謀已彰事 而臣八月初九日發遼 十三日渡江 沿途傳聞 楊鎬死黨及朝鮮君臣黨結

    楊鎬 欺抗皇上 具本保留 而朝鮮數年奸欺的據 行次夾江中洲 臣見豆黍豐美 詢之遼人在道者

    曰先年朝鮮與遼民爭訟之 都司屢經斷案 鮮人不平 萬曆二十年 遂令彼國世居倭戶 往招諸島倭

    奴起兵 同犯天朝 奪取遼河以東 恢復高麗舊土等語”

    81) 정응태 무고 사건이 조․명 관계에 미친 영향은 허지은, 2004, 丁應泰의 ‘朝鮮誣告事件’

    을 통해 본 조․명 관계 史學硏究 76 참조.82) 李廷龜, 月沙集 권21, 戊戌辨誣錄 ○奏 丁主事 應泰 參論本國辨誣奏 戊戌冬 “朝鮮國王臣姓諱謹奏 …(中略)… 且對馬島倭 初請來寓於薺浦釜山浦鹽浦等地 以爲互市釣魚之所 小

    邦遂許其來居 使之探報賊倭聲息 此所以有三浦倭戶之說也 然其居止及通行 皆有定處 不得違

    越 夤緣結幕者 商販潛接者 事畢後故留者 一皆痛禁 此則海東記已盡載錄 卽小邦鈐束之意 亦

    可以見 而其後漸成繁滋 至正德庚午 三浦之倭作亂 殺薺浦僉使李友曾 小邦遂遣將勦滅 自後絶

    不許居 三浦之無倭戶 今已八十九年 今乃謂小邦於萬曆二十年 令世居倭戶往招諸倭起兵同犯

    言之不近 乃至於此 是誰欺者 非欺天乎”

    83) 선조실록 권89, 선조 30년 6월 庚午(11일)84) 선조실록 권111, 선조 32년 4월 癸亥(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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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의 신증본을 그대로 復刊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이후 인조 말년 경에도 重刊이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0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전과 달리 조선의 지식인이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리지가 되었다.

    이렇게 민간에 유통된 방대한 규모의 인문 지리 정보는 17․18세기를 거치면서 폭

    발적으로 증가한 고을 지리지, 즉 邑誌의 편찬에 큰 자극을 주었다.85)

    5. 맺음말

    이상에서 본고는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조․명․일 삼국이 지도․지리지에 수

    록된 군사지리 정보를 어떻게 입수․활용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하

    본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록 정보의 특성상 조선전기까지 엄격하게 관리되는 것이 원칙이었던 지도․

    지리지의 군사정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대전란이 발발하면서 군사․외교적인

    측면에서 그 수요가 급증하였다. 조선은 국토방어 전략과 명과의 연합작전을 구

    상․조율하면서 지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지도는 그림 자료라는 특성상,

    조․명 양국 간의 군사적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언어의 불통이란 장벽을 허무

    는 데 漢文․譯官과 함께 큰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국의 전장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였던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지리 정보는 반

    드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倭館 등에 거주한 일본 상인, 임란 직전

    조선을 오간 일본 사신, 국내에서 죄를 짓고 일본으로 달아난 조선인 등을 통해

    조선의 지리 정보를 입수하였을 것이다. 관련 사료의 검토 결과, 임진왜란 발발 이

    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더욱 상세한 지도를 입수하여 군사 작전에 활용하였을 가능

    성 역시 매우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85) 이기봉, 2011, 앞의 책, 53∼5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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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 대한 지리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침략자 일본군뿐만 아니라 지

    원자 명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파견된 명의 문․무관 등은 사전 배경 지식의

    습득, 부대의 기동 등을 위해 조선 측에 지도․지리지를 빈번하게 요청하였다. 정

    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명의 수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명은 조선의 沿海의 水

    路 정보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임진왜란 講和 협상을 둘러싼 조․명 간의 갈등과 해결에 활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본고의 한계와 향후의 과제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임진왜란

    기 지도․지리지의 군사적 활용이란 주제를 좀 더 파고들기 위해서는 실제 전투와

    연관된 구체적인 활용 사례를 연대기 외의 자료에서 채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소수이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임진왜란기 군사용 地圖86)에 대한 양식과 특징

    등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나, 본 연구에서는 거의 수행되지 못하였다. 셋

    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등에는 당시 참전한 명군 지휘관들의 조선 지리에 대한 발언이 상당히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의 정리․분석이 이루어

    진다면, 현재 수행되고 있는 중국인의 시기별 조선 지리 인식에 대한 연구87)와도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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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본문에서 언급한 朝鮮方域地圖 , 川上久辰․川上久國 부자가 제작한 朝鮮全圖 , 일본

    내각문고 소장 朝鮮全圖 외에도 宋應昌의 經略復國要編에 첨부된 朝鮮圖 ․ 四鎭圖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南原城圖 등이 있다. 남원성도 에 대해서는 민덕식,

    1993, 丁酉再亂時 川上久國이 그린 南原城圖에 대하여 , 宋甲鎬敎授停年退任紀念論文集참조.

    87) 이명희, 2012, 12-13세기 중국고지도에 표현된 한반도 , 한국고지도연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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