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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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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영화에 대해(삼학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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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틀즈:그리고 영화 2

3

와 그들의 영화에 대해서

비틀즈

비틀즈:그리고 영화 4

A Hard Day’s Night 비틀즈의 또다른 모험, 영화 데뷔 08

1964? 17

HELP! 비틀즈의 두번째 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20

명곡 Yesterday 36

Yellow Submarine 상상력으로 만든 오디세이 이야기 58

현재까지 이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 70

감독 리차드 레스터 39

Magical Mystery Tour 비틀즈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42

폴 매카트니의 기행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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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ard Day’s Night 비틀즈의 또다른 모험, 영화 데뷔 08

1964? 17

HELP! 비틀즈의 두번째 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20

명곡 Yesterday 36

Yellow Submarine 상상력으로 만든 오디세이 이야기 58

현재까지 이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 70

감독 리차드 레스터 39

Magical Mystery Tour 비틀즈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42

폴 매카트니의 기행 54

비틀즈:그리고 영화 6

7

비틀즈의

새로운 모험 영화 데뷔

Hard Days Nhght

록큰롤과 영화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초기 록

큰롤은 영화를 통해 소개됐고 영화를 통해 전파됐고, 성

공한 아티스트들은 모두들 영화를 찍었다. 엘비스가 그

랬고 클리프 리차드도 그랬다. 이러한 영화들은 “록큰

롤 무비”라는 특정한 범주를 낳았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이 범주의 영화들은 ‘그저 그런 이야기, 해변, 예쁜 여배

우, 연기 못하는 남자주인공(=가수)’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영화와 같은 제목의 주제가를 빼면 오늘날에는

잊혀진(잊혀질 만한) 영화들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제

작자의 입장에서는 많은 제작비를 들일 필요도 없고 출연

한 가수가 인기가 있는 만큼 흥행도 보장된 것이니 만큼

앞뒤 가릴 것 없이 이런 영화들을 만들어 냈었다.

비틀즈가 인기를 얻자 당연히 그들 주변에는 비틀즈를

통해 한몫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무리 속에는

영화판의 관계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63년 매니저 브라

이언 엡스타인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의 영국지사

와 3편의 비틀즈 영화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UA가

A Hard Day’s Night(1964)

비틀즈:그리고 영화 8

◀왼쪽 영화 하드 데이즈의 속에서는 비틀즈가 비틀즈를 연기하였다.

비틀즈와 계약을 맺은 이유는 영화보다는 사운드트랙의

발매권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틀즈가 출연할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제작비를 조달할 의사도 없었다. UA는 자신

들의 돈을 아끼기 위해 미국출신의 저예산 영화제작자

월터 쉔슨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UA는 15년 후 영화판권

을 쉔슨에게 넘기는 조건에 동의했다. 비틀즈의 인기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첫 영화를 위해 확보된 예산은 고작 20만달

러였다. 64년초 비틀즈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촬영이 시

작되었다. 하지만 사정이 이러했고 비틀즈는 존 레논의

말처럼 영화제작이나 연기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

었다. 그저 그런 록큰롤 영화보다도 더 못한 영화가 만들

어질 참이었다.

A Hard Day’s Night(이하 하드 데이즈)은 흑백으로 제

작되었다. 60년대 초까지는 흑백영화가 여전히 많이 제

작되고 있었지만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록큰롤 영화들은

상품성을 고려해 컬러로 제작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

다. 이런 것을 보면 제작사가 비틀즈 영화에 얼마나 기대

를 안 했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하드 데이즈는 결코 싸구려 B급영화가 아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영화역

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화이다. 적은 예산과 부족한 준

비기간, 연기경험 없는 주연들이라는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드 데이즈가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데

는 3사람의 공이 컸다. (물론 ‘비틀즈의 첫번째 영화’

라는 이름값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Hard Days Nhght

우선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노력을 들 수 있다. 그

는 비틀즈가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때로는

과장된 결벽주의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틀즈의 수입을 어

느 정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브

라이언은 비틀즈가 모든 면에서 최고의 밴드가 되도록 노

력했다. 그도 영화에 관해서는 비틀즈보다 더 나을게 없

었겠지만 시나리오를 통제하고 비틀즈를 위한 독자적인

영화사(Subafilm)를 설립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의 노력을 했다.

비틀즈의 첫번째 영화가 만난 두번째 행운은 작가 앨런

오웬이다. 비틀즈와 같은 리버풀 출신인 앨런 오웬은 작

가와 배우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던 사람으로 연

극에 관심이 있던 폴 매카트니의 추천으로 영화의 각본을

맡게 되었다. 그가 리버풀 출신이라는 사실은 비틀즈에게

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비틀즈의 언어나 유머,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의 각본에 이를 반영하였다. 무엇보

다도 그는 비틀즈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비틀즈는 물론이

고, 그들의 일상, 주변사람들, 팬들을 관찰하여 빠짐없이

자신의 각본에 집어넣었다.

결과는 마치 제목처럼 고단한 비틀즈의 나날 중 어느 하

루를 떼어 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인 시나리오였다.

이는 비틀즈에게 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는데 왜냐

하면 그건 당시 그들이 매일매일 겪는 일이므로 딱히 연

기를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시 말해 존, 폴, 죠지, 링고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을 시켰

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들이 맡은 배역은 다름아니라 ‘

비틀즈’였다. 세상에 이 네명보다 더 비틀즈를 잘 연기

9

◀왼쪽 영화 하드 데이즈의 속에서는 비틀즈가 비틀즈를 연기하였다.

비틀즈와 계약을 맺은 이유는 영화보다는 사운드트랙의

발매권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틀즈가 출연할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제작비를 조달할 의사도 없었다. UA는 자신

들의 돈을 아끼기 위해 미국출신의 저예산 영화제작자

월터 쉔슨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UA는 15년 후 영화판권

을 쉔슨에게 넘기는 조건에 동의했다. 비틀즈의 인기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첫 영화를 위해 확보된 예산은 고작 20만달

러였다. 64년초 비틀즈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촬영이 시

작되었다. 하지만 사정이 이러했고 비틀즈는 존 레논의

말처럼 영화제작이나 연기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

었다. 그저 그런 록큰롤 영화보다도 더 못한 영화가 만들

어질 참이었다.

A Hard Day’s Night(이하 하드 데이즈)은 흑백으로 제

작되었다. 60년대 초까지는 흑백영화가 여전히 많이 제

작되고 있었지만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록큰롤 영화들은

상품성을 고려해 컬러로 제작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

다. 이런 것을 보면 제작사가 비틀즈 영화에 얼마나 기대

를 안 했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하드 데이즈는 결코 싸구려 B급영화가 아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영화역

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화이다. 적은 예산과 부족한 준

비기간, 연기경험 없는 주연들이라는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드 데이즈가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데

는 3사람의 공이 컸다. (물론 ‘비틀즈의 첫번째 영화’

라는 이름값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Hard Days Nhght

우선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노력을 들 수 있다. 그

는 비틀즈가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때로는

과장된 결벽주의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틀즈의 수입을 어

느 정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브

라이언은 비틀즈가 모든 면에서 최고의 밴드가 되도록 노

력했다. 그도 영화에 관해서는 비틀즈보다 더 나을게 없

었겠지만 시나리오를 통제하고 비틀즈를 위한 독자적인

영화사(Subafilm)를 설립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의 노력을 했다.

비틀즈의 첫번째 영화가 만난 두번째 행운은 작가 앨런

오웬이다. 비틀즈와 같은 리버풀 출신인 앨런 오웬은 작

가와 배우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던 사람으로 연

극에 관심이 있던 폴 매카트니의 추천으로 영화의 각본을

맡게 되었다. 그가 리버풀 출신이라는 사실은 비틀즈에게

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비틀즈의 언어나 유머,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의 각본에 이를 반영하였다. 무엇보

다도 그는 비틀즈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비틀즈는 물론이

고, 그들의 일상, 주변사람들, 팬들을 관찰하여 빠짐없이

자신의 각본에 집어넣었다.

결과는 마치 제목처럼 고단한 비틀즈의 나날 중 어느 하

루를 떼어 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인 시나리오였다.

이는 비틀즈에게 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는데 왜냐

하면 그건 당시 그들이 매일매일 겪는 일이므로 딱히 연

기를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시 말해 존, 폴, 죠지, 링고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을 시켰

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들이 맡은 배역은 다름아니라 ‘

비틀즈’였다. 세상에 이 네명보다 더 비틀즈를 잘 연기

비틀즈:그리고 영화 10

▶왼쪽 리차드 레스터(Richard Lester)

▶오른쪽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

할 사람들은 없었다.

오웬의 작가적 관찰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했지

만 비틀즈 멤버들 각자의 개성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데

는 충분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희극의 분위기를 연출

하다보니 다소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하드 데

이즈의 비틀즈는 기존의 록큰롤영화 속에 나오는 햇볕

에 그을린 피부를 자랑하며 여자들 뒤꽁무니나 따라다

니는 아이돌 스타들과 달리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타임’같은 보수적인 언론은 자신의 독자에게 이 영화

를 절대 보지 말라고 했지만 뉴욕의 지식인들은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 틈에서 영화를 보며 바다건너의 비틀즈가

자신들도 잊고 있던 ‘비트세대’의 전통을 잇고 있음

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이는 모두 앨런 오웬이라는 작

가의 공인 것이다.

비틀즈가 만난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영화의

감독을 맡은 리차드 레스터이다. 그는 미국출신으로 영

국에 건너가 텔레비젼 드라마와 TV광고 등의 작업을 하

면서 영화계에 입문한 사람이다. 59년 그의 영화 데뷔작

인 단편 The Running, Jumping And Standing Still Film

에는 피터 셀러즈가 출연했고 63년작 The Mouse On

The Moon은 월터 쉔슨이 제작을 맡았었다. 이러한 인연

으로 하드 데이즈의 감독을 맡게된 리차드 레스터는 자

신만의 감각으로 하드 데이즈가 ‘비틀즈’말고는 볼게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방지했다.

하드 데이즈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따라

Hard Days Nhght

영화는 수염을 붙이는 둥, 변장을 해서 극악스러운 팬들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비틀즈 일행이 다음 공연지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늘 따라다니는 키 작고 행세에 능한 매니저 놈과(톰) 키가 크다는 이유로 늘 욕을 먹는 바

보스런 비서 쉐이크,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있는 폴 맥카트니의 할아버지가 그 여행에 동행한다. 비틀즈 멤버는 사

생활을 즐겨보려고 호텔을 빠져나와 춤과 휴식이 있는 락 뮤직 클럽을 찾아 다니고 그들의 매니저는 비틀즈를 쫓아 늘 제

자리를 지키도록 한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생방송 콘서트 전날 폴의 할아버지의 이간질에 링고 스타가 사라지는

소통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경찰서에서 링고를 빼내어 콘서트를 무사히 마친다.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

폴의 할아버지와 톰, 쉐이크 그리고 비틀즈 일행은 다시 다음 공연지를 향해 헬리콥터에 오른다.

서 지엽적인 말장난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지루해

지기 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식 접근은

표현의 범위를 제한 할 수밖에 없다.

리차드 레스터는 역동적인 화면구성을 통해 이러한 제

약들을 파괴했다. 그가 데뷔작에서 이미 선보였던 것과

같은 점프-컷, 역동작, 가속도나 슬로우 모션 등은 하드

데이즈에서 다시 한번 채용되었다. 이러한 기법들은 그가

텔레비젼 드라마와 광고들을 제작하면서 익힌 기법들로

속도감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하고 내러티브나 대

사없이 이미지만을 통해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만들어내

는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화면 구성외에도 과감한 줌이나 핸드 헬

드 카메라는 영화를 씨네마 베리떼적으로 비춰지게 하였

다. 하드 데이즈를 고다르와 비교하는 건 우습게 보이겠

지만 위에 열거한 장치들은 모두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

향들이다.

미국와 영국, 프랑스가 기묘하게 얽혀있는 이 영화를 통

해 레스터는 뮤지컬, 다큐멘터리, 추상영화, TV광고 등을

혼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 결과는 감독이 의도한 것

은 아니겠지만 일종의 ‘MTV이전의 MTV’이다. 비틀

즈는 이미 프로모션 필름의 ‘발명’을 통해 MTV가 등

장할 기반을 만든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하드 데이즈

는 비틀즈가 MTV의 틀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만들

어냈음을 보여준다.

하드 데이즈를 통해 60년대의 청년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영화는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

했다. 하지만 영화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이슈

들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영국 사회내의 계급

의 문제나, 십대를 대상으로 하는 소비문화, 교육(링고가

강가에서 만난 소년은 학교를 중퇴했다), 언론(방송국에

서 기자들이 비틀즈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모두 우스꽝

스러운 것들뿐이다. 원래는 어리석은 질문만하는 기자

들을 풍자한 씬이 촬영되었으나 최종편집에서 삭제되었

다), 스타에 대한 대중들의 환상 같은 것들이 이 영화 안

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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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리차드 레스터(Richard Lester)

▶오른쪽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

할 사람들은 없었다.

오웬의 작가적 관찰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했지

만 비틀즈 멤버들 각자의 개성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데

는 충분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희극의 분위기를 연출

하다보니 다소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하드 데

이즈의 비틀즈는 기존의 록큰롤영화 속에 나오는 햇볕

에 그을린 피부를 자랑하며 여자들 뒤꽁무니나 따라다

니는 아이돌 스타들과 달리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타임’같은 보수적인 언론은 자신의 독자에게 이 영화

를 절대 보지 말라고 했지만 뉴욕의 지식인들은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 틈에서 영화를 보며 바다건너의 비틀즈가

자신들도 잊고 있던 ‘비트세대’의 전통을 잇고 있음

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이는 모두 앨런 오웬이라는 작

가의 공인 것이다.

비틀즈가 만난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영화의

감독을 맡은 리차드 레스터이다. 그는 미국출신으로 영

국에 건너가 텔레비젼 드라마와 TV광고 등의 작업을 하

면서 영화계에 입문한 사람이다. 59년 그의 영화 데뷔작

인 단편 The Running, Jumping And Standing Still Film

에는 피터 셀러즈가 출연했고 63년작 The Mouse On

The Moon은 월터 쉔슨이 제작을 맡았었다. 이러한 인연

으로 하드 데이즈의 감독을 맡게된 리차드 레스터는 자

신만의 감각으로 하드 데이즈가 ‘비틀즈’말고는 볼게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방지했다.

하드 데이즈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따라

Hard Days Nhght

영화는 수염을 붙이는 둥, 변장을 해서 극악스러운 팬들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비틀즈 일행이 다음 공연지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늘 따라다니는 키 작고 행세에 능한 매니저 놈과(톰) 키가 크다는 이유로 늘 욕을 먹는 바

보스런 비서 쉐이크,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있는 폴 맥카트니의 할아버지가 그 여행에 동행한다. 비틀즈 멤버는 사

생활을 즐겨보려고 호텔을 빠져나와 춤과 휴식이 있는 락 뮤직 클럽을 찾아 다니고 그들의 매니저는 비틀즈를 쫓아 늘 제

자리를 지키도록 한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생방송 콘서트 전날 폴의 할아버지의 이간질에 링고 스타가 사라지는

소통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경찰서에서 링고를 빼내어 콘서트를 무사히 마친다.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

폴의 할아버지와 톰, 쉐이크 그리고 비틀즈 일행은 다시 다음 공연지를 향해 헬리콥터에 오른다.

서 지엽적인 말장난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지루해

지기 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식 접근은

표현의 범위를 제한 할 수밖에 없다.

리차드 레스터는 역동적인 화면구성을 통해 이러한 제

약들을 파괴했다. 그가 데뷔작에서 이미 선보였던 것과

같은 점프-컷, 역동작, 가속도나 슬로우 모션 등은 하드

데이즈에서 다시 한번 채용되었다. 이러한 기법들은 그가

텔레비젼 드라마와 광고들을 제작하면서 익힌 기법들로

속도감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하고 내러티브나 대

사없이 이미지만을 통해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만들어내

는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화면 구성외에도 과감한 줌이나 핸드 헬

드 카메라는 영화를 씨네마 베리떼적으로 비춰지게 하였

다. 하드 데이즈를 고다르와 비교하는 건 우습게 보이겠

지만 위에 열거한 장치들은 모두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

향들이다.

미국와 영국, 프랑스가 기묘하게 얽혀있는 이 영화를 통

해 레스터는 뮤지컬, 다큐멘터리, 추상영화, TV광고 등을

혼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 결과는 감독이 의도한 것

은 아니겠지만 일종의 ‘MTV이전의 MTV’이다. 비틀

즈는 이미 프로모션 필름의 ‘발명’을 통해 MTV가 등

장할 기반을 만든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하드 데이즈

는 비틀즈가 MTV의 틀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만들

어냈음을 보여준다.

하드 데이즈를 통해 60년대의 청년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영화는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

했다. 하지만 영화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이슈

들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영국 사회내의 계급

의 문제나, 십대를 대상으로 하는 소비문화, 교육(링고가

강가에서 만난 소년은 학교를 중퇴했다), 언론(방송국에

서 기자들이 비틀즈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모두 우스꽝

스러운 것들뿐이다. 원래는 어리석은 질문만하는 기자

들을 풍자한 씬이 촬영되었으나 최종편집에서 삭제되었

다), 스타에 대한 대중들의 환상 같은 것들이 이 영화 안

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

비틀즈:그리고 영화 12

Hard Days Nh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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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스타의 이면에 잠재된 자연인으로서의 비틀즈에

대한 묘사이다. 주로 링고에게 촛점이 맞춰지기는 했지

만 영화 속에서 비틀즈는 네명 모두 일과 동시에 개인적

인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고, 보통 사람들

처럼 타인이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자신들의 주관을 가

지고 있으며 팬들에게 늘상 쫓기지만 옷만 허름하게 입으

면 금방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그런 평범한 존

재들이다.

비틀즈는 자신들의 성공이라는 것이 자신들이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점이 동

시대의 많은 인기스타들과 비틀즈를 구분시켜주는 요소

이기도 하며 또한 비틀즈가 그 성공을 오래도록 지속시

킬 수 있었던 요소이기도하다. 하드 데이즈가 수많은 평

범한(혹은 그 이하의) 록큰롤 청춘영화들과 달리 긴 생명

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비틀즈의 이런 자각이 배경

에 있기 때문이다.

하드 데이즈의 또다른 장점은 비틀즈가 자신들의 배경,

또는 출신 계급에 대한 애정을 잃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영화 속의 비틀즈나 영화 밖의 비틀즈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스타이고 속된 말로 벼락부자

들이지만 하드 데이즈에서의 비틀즈는 그런 속물이 아니

다. 그들은 그들이 나고 자란 리버풀의 노동자들의 문화

를 잊고 있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며 영국의 상류사회와는

융화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의 비틀즈가 어떠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겠고 최소

한 영화 속의 비틀즈는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또 다

른 청년노동자들처럼 보인다. 만일 비틀즈가 다른 팝스타

들처럼 달콤한 이미지로 접근하려 했다면 하드 데이즈는

스타의 인기에 편승해 반짝 히트하고 사라지는 영화가 되

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비틀즈는 진솔한 이미지

를 보여줬고 이는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이 영화가 어

떤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놓칠 수 없는 재미는 쉴 새 없이 전

개되는 비틀즈의 재담이다. 이 대화들은 작가 앨런 오웬

이 만들어낸 것들이지만 오웬은 그가 관찰한 실제의 비틀

즈의 대화들을 분석하고 일부는 차용해서 영화 속의 대

사를 만들어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외국어이고 또

같은 영어권의 미국인들조차 생소해하는 리버풀이나 영

국식 표현들이 많지만 이 비틀즈식 위트는 영화의 또 다

른 생명력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는 약간은 반항적이고 지적이며 누구나 좋아할 만한 젊

은이로 그려진다. 또한 영국 북부의 사실적인 드라마의 전통대로 현실적이며 꾸미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점

을 꿰뚫어 보는 면모도 보여준다. 중산모자를 쓴 노인이 “나는 너희 같은 젊은이들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

웠어”라고 말하자 링고 스타는 “이긴게 억울하시겠네요” 라고 말한다.

Hard Days Nhght

비틀즈:그리고 영화 14

HELP!(1965)

두번째 영화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비틀즈

15

비틀즈의 첫 번째 장편영화 A HARD DAY’S NIGHT가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두자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

스트(UA)와 제작자인 월터 쉔슨은 65년 개봉예정인 비틀

즈의 두번째 영화에 많은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러한 기

대감은 투자의 확대로 나타났는데 아직 제목조차 정해지

지 않은 영화에 전작인 하드 데이즈의 제작비의 두배를

책정했고, 보다 전문적이고 이름 있는 배우들과 스텝들을

기용했으며, 무엇보다도 칼라로 제작하였다.

기획단계에서 두번째 영화의 방향은 ‘코믹 스릴러’로

결정되었다. 코믹 스릴러라는 단어에서 보여지 듯 비틀즈

의 두번째 영화는 모호한 성격의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절충적인 성격은 두번째 영화에서도 영화의 주인공

을 ‘비틀즈’로 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네명의 비틀이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서 출연한다면 모르

겠지만 이번에도 ‘실제의 비틀즈’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그만큼 좁아졌다.

비틀즈의 일상에 관한 영화는 이미 제작했기 때문에 감

독과 제작자들은 또다시 그런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다.

결국 영화는 실제의 비틀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비틀즈에게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닌 아주 애매모호한 성격

의 필름이 되어 버렸다.

감독 리차드 레스터가 처음 생각했던 플롯은 ‘링고가

(비틀즈로서의) 자신의 힘든 일상을 푸념하면서 이런 삶

이 끝나버리기를 바라자 이를 옆에서 듣던 남자가 자신을

직업적인 암살자라고 소개한 뒤 링고가 스스로 목숨을 못

끊겠다면 자신이 대신 일을 처리(?)해주겠다는 제안을 하

고 링고도 이를 수락하지만 이내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링고는 이 암살자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플롯의 다른 영화가 이미 제작

중이어서 기획을 다시 해야만 했다.

HELP!

비틀즈:그리고 영화 16

리차드 레스터는 ‘삼총사’를 생각해 냈지만 채택되

지는 못했다. 그건 코믹 스릴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

국 최종 결론이 난 것은 어는 동양의 광신 집단이 비틀

즈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며 이를 피해 비틀즈가 도

망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야기가 허황되었다

거나 비현실적이라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얼토당토않은 코미디 쟝르는 60년대의 전형적인 것이었

다. 굳이 코메디가 아니더라도 HELP!가 끌어들이고 있

는 007영화 시리즈만 해도 그게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

야기인가.

HELP!의 최대의 문제는 내러티브의 취약성보다는 이

17

것이 ‘비틀즈의 영화’인데 실상 비틀즈는 영화 내내

조연으로 밀려나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고 흥행을 보장받기 위해 전문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러한 배우들의 연기는 비틀즈의 그것

을 압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비틀즈를 주변으로 밀어

내고 있다. 영화 내내 비틀즈가 하는 거라곤 이리 뛰고 저

리 뛰고 하는 것뿐이다. 이는 결국 비틀즈로 하여금 자신

들이 바로 자기들의 영화에서조차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HELP!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 또 다른 사람은 감독인 리

차드 레스터이다. 비틀즈의 첫번째 영화에서 보여준 그

의 연출력은 두번째 영화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한

데 물론 영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곳곳에서 그의 독특

한 연출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의도는 억제되고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흥

행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시나리오의 허술함과 그가 작가로서 개입할 여지가 기획

단계부터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의 또 다른

피해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틀즈의 신뢰는 HELP!

▶오른쪽 초원에서 연주 하는 비틀즈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미 비틀즈는 일년전 첫번째 장편영화를 찍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영화 속에 반

영시키려 하지 않았다. HELP! 최대의 문제는 바로 그것

이었다. 비틀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비틀즈가 계속

‘행복한 네 젊은이’로 남아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비

틀즈는 이미 자신들의 이미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HELP!는 이러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

만 그러질 못했다.

HELP!는 기본적으로 007씨리즈나 당시 유행하던 첩보

물 장르의 구조를 빌려온 것이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주는 미녀(본드걸?)나 각종 신무기

들, 그리고 추적씬등이 그러한 예인데 감독은 이러한 장

치들에서 진지함이나 엄숙함을 벗겨버리고 희화화시키

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나름대로 장르해체라는 독특함

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B급영화적 접근은 거의 백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하고는 어울리지 못했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한 경우는 10년뒤 스타워즈에 이르

러서이다. 하지만 스타워즈의 테크놀러지에 비해 HELP!

HELP!

비틀즈:그리고 영화 18

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비틀즈의 클립들은 영화와 병립

하는 인상을 주었다. 만일 이 영화가 애초부터 B급영화의

정신으로 제작되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저주받은 걸작’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영화의 초반에 비틀즈가 각각 다른 집으로 들어서지

만 이는 내부가 하나로 되어있는 집으로 밝혀진다. 그런

데 각각의 공간은 네명의 성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

고 있다. 그것도 당시 10대소녀취향의 잡지에서 자주 쓰

던 ‘똑똑한 비틀’이니 ‘귀여운 비틀’이니 하는 상

투적인 캐릭터에 존, 폴, 죠지, 링고의 성격을 끼어 맞추

려하는 것이다.

하드 데이즈에서 인물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성격을 만

들어 나갔던 것에 비해 HELP!는, 비틀즈 뿐만 아니라 다

른 인물들까지 등장시점부터 명확하고 구분되는 성격들

로 고정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이 시점에서 비틀즈의 네

명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막

구축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영화에서 비틀즈를 쫓아다

니는 것은 피에 굶주린 종교집단이 아니라 바로 스타로서

의 비틀즈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Eight Days A Week’ 또한 비틀마니아(Beatlemania)

라는 광적 현상이 닳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

거로 오늘날 간주되고 있다. <Help!>는 ‘고갈’의 징후

가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된 경우다. 이 영화에는 비틀즈

가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

다. 냉소적인 레논이 “우리가 주연인 영화임에도 우린

단역배우처럼 보인다”고 말했듯 말이다. 아시아의 종교

숭배 집단이 링고 스타(Ringo Starr)를 뒤쫓는다는 놀라

울 정도로 뻔한 플롯에다, 영화 내내 비틀즈는 지치고 뻣

뻣해 보인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만이 활발한

연기를 홀로 보여줄 뿐이며, 세트의 상당수는 들쭉날쭉하

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영화를 다시 보면 흡인력 있는 구성

에 놀라게 된다. 지금은 이국적이 된 패션, 장소, 헤어스

타일은 물론 유쾌한 팝 뮤직 비디오의 원형으로 가득하다

(특히 오스트리아 오버타우어른 스키장에서의 ‘Ticket

To Ride’ 시퀀스를 보라). <Help!>는 비틀즈가 자신들

을 착취하던, 가볍기 짝이 없는 1960년대 중반 엔터테인

19

피와 암흑의 여왕 카일리에게는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이 제물로 바쳐지는데 제물이 되는 자는 그 표식으로 반지를 끼고

있다. 이제 막 심장을 도려내려던 제사장은 희생자가 반지를 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반지를 낀 자를 찾아 제물로

바칠 계획으로 영국으로 향한다. 그러다 비틀즈의 멤버인 링고 스타의 손에서 반지를 보고는 그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반지를 빼려고 해도 붙은듯 빠지지 않고, 결국 제사장에게 잡힐 위기의 순간에 반지

는 링고 스타의 손에서 빠진다. 그리고 링고 스타는 반지를 제사장에게 끼워주고는 떠난다.

◀오른쪽헬프의 스틸 컷

HELP!

비틀즈:그리고 영화 20

1964년 12월 발매된 <Beatles For Sale> 음반처럼, ‘Eight Days A Week’ 또한 비틀마니아(Beatlemania)라는 광

적 현상이 닳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오늘날 간주되고 있다. <Help!>는 ‘고갈’의 징후가 영

화에 고스란히 투영된 경우다.

이 영화에는 비틀즈가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냉소적인 레논이 “우리

가 주연인 영화임에도 우린 단역배우처럼 보인다”고 말했듯 말이다. 아시아의 종교 숭배 집단이 링고 스타

(Ringo Starr)를 뒤쫓는다는 놀라울 정도로 뻔한 플롯에다, 영화 내내 비틀즈는 지치고 뻣뻣해 보인다. 폴 매카

트니(Paul McCartney) 만이 활발한 연기를 홀로 보여줄 뿐이며, 세트의 상당수는 들쭉날쭉하고 퇴폐적인 분

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영화를 다시 보면 흡인력 있는 구성에 놀라게 된다. 지금은 이국적이 된 패션, 장소, 헤

어스타일은 물론 유쾌한 팝 뮤직 비디오의 원형으로 가득하다(특히 오스트리아 오버타우어른 스키장에서의

‘Ticket To Ride’ 시퀀스를 보라). <Help!>는 비틀즈가 자신들을 착취하던, 가볍기 짝이 없는 1960년대 중반

엔터테인먼트 산업 풍토에서 과감히 탈피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최상의 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런던 시퀀스에서, 레논은 자기 혐오의 세계를 마약을 빌려 드러낸다. 런던 바 씬에

서 매카트니는 ‘Yesterday’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인도 레스토랑 시퀀스가 진행되는 동안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은 시타(sitar)의 이국적인 사운드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이들이 본격적인 ‘예술가’의 궤

적으로 나가기 직전, 발랄한 엔터테이너의 잔해 속에서 ‘고무 영혼(Rubber Soul)’이라 불릴만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했다.

21

먼트 산업 풍토에서 과감히 탈피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

은 최상의 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런던 시퀀스에서, 레논은 자기 혐

오의 세계를 마약을 빌려 드러낸다. 런던 바 씬에서 매

카트니는 ‘Yesterday’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인도

레스토랑 시퀀스가 진행되는 동안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시타(sitar)의 이국적인 사운드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이들이 본격적인 ‘예술가’의 궤적으로 나

가기 직전, 발랄한 엔터테이너의 잔해 속에서 ‘고무 영

혼(Rubber Soul)’이라 불릴만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했다.

그리고 영화는 전반적으로 인종적인 편견이나 오리엔탈

리즘(orientalism)의 시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영화

가 비틀즈를(특히 죠지를) ‘인도’라고 하는 새로운 세

계와 조우하게 하였던 공은 인정하지만 낯선 것들을 야만

스러운 것으로 몰아세우거나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것

은 오만한 서구인의 무지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오스트

리아에서 촬영된 Ticket To Ride 시퀀스이다. 리차드 레

스터가 편집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손길이 여러 곳에 미

쳤음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역설적으로 엔드 크레딧

의 편집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명장면은 아니지만 휴식

아닌 휴식(intermission)의 황당함은 대담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HELP!

비틀즈:그리고 영화 22

23

비틀즈

영화 Magical Mystery Tour는 1967년 4월 폴 매카트니

가 미국을 방문하던 동안 구상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67년 4월 11일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대략적

인 개요가 만들어졌다. 폴 매카트니가 구상한 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며 경

험하는 환상적인 여행을 다룬 60분짜리 이야기로 전체는

8개의 섹션으로 나눠진다.’ 폴 매카트니는 25일에 아직

촬영조차 시작하지 않은 영화의 주제가 녹음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작업은 진행되지 못했다.

그해 여름 비틀즈의 오랜 친구이자 보호막이었던, 어떤

의미에서는 비틀즈를 조율하던 힘이었던 브라이언이 세

상을 떠났다. 비틀즈는 ‘브라이언 이후’의 자신들에

관해 토론했고 몇 가지 합의를 보았다. 그 중의 하나가

중단되었던 영화 ‘Magical Mystery Tour’의 작업재개

였다.

Magical Mystery Tour

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다

Magical Mystery Tour

(1967)

비틀즈:그리고 영화 24

9월 11일, 인도여행을 연기한 비틀즈는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상했다. 대본(script)도 없고 촬영계획

이나 콘티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촬영기사는 정확

히 자기가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감독은 네 명

이나 되었다. 그 네 명은 바로 존, 폴, 죠지, 링고였다.

미스테리 투어란 영국 노동계급의 놀이 문화의 일종이

다. 주말에 당일 혹은 1박 정도의 일정으로 다녀오는 여

행을 뜻하는데 특징이라면 여행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행

선지와 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

스터리’ 투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행은 보통 큰 버스

를 이용하는데 노동조합이나 클럽 등에서 여행을 마련하

고 사람들은 티켓을 구입하여 여행에 참가한다.

폴 매카트니는 어차피 겪어보기 전에는 행선지와 내용을

알 수 없는 여행이라면 그 여행이 매우 환상적이고 놀라

운 것이면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요컨

대 영화 속 여행의 목적지는 실제(일상)로부터 벗어난 환

상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갈등구조나 어떠한

서사도 필요하지 않다. 논리나 목적도 필요 없고 그저 환

상적이고 신비한 경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Magical Mystery Tour는 매우 초현실적인 영화다. 일반

적으로 전위적이라고 하는 예술형태보다도 더 전위적이

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UCLA 영화과 시절 이 영화를 보

면서 전위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했다. 보통 전위적

이라는 딱지가 붙는 예술들이란 그것이 있어야 할 장소

에 있을 땐 제대로 평가를 받지만 섣불리 대중 앞에 선

보였다간 심한 말만 듣게 마련이다. 비틀즈는 그걸 몰

랐을 뿐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이 영화는 “주체도 목적도

없이” 과정을 여러 개의 이미지로 분할하면서 모더니

즘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1967년에는 이런 생

각이 너무 급진적인 것이었고 더군다나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될 영화로서는 너무 생경한 접근

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크리스마스 저녁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캐롤이나 산타클로스

같은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했다면 그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영화는 링고와 그의 아주머니인 제시가 신문가판대에서

어느 미스터리 투어의 티켓을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둘

25

영화의 특별한 주제는 없고 비틀즈와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방문하여 겪는 에피소드들을 필름

에 담은 것인데, 사이키델릭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비틀즈는 물론 영화에 삽입될 사운드 트랙을 위

해 신곡 작곡에도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 영화가 BBC를 통해 영국 시민들의 안방에 흘러들어간 날, 평론가

들은 물론, 팬들 마저도 의아해 했다. 워낙 진보적이어서인지, 일반인들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전

혀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래영화의 주제가가 담긴sgt pepper 앨범 커버

비틀즈:그리고 영화 26

은 버스 안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매우 신비롭고 신나는

여행을 하게 되는 게 영화의 줄거리 아닌 줄거리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스토리(그런 건 있지도

않지만)가 아니라 각각의 시퀀스들의 이미지이다. 영화

는 각기 분할된 이미지들의 모음과도 같은 형태이다. 우

리가 내러티브 영화를 볼 때처럼 인물이나 사건에 연연

한다면 영화가 전개되는 50분 동안 지루한 시간을 보내

게 된다. 따라서 그런 근대적인 틀에 머물지 말고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이 영화의 본질을 보는 관건이 된다.

또한 영화는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어선다. 영화의 화면은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

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이지

만 이 영화는 마음이나 우리의 생각 속에 비춰진 영상을

보는 눈으로 보아야 한다.

영화는 앞서 말한 대로 어떤 고정된 스크립트 없이 촬영

되었다. 촬영팀과 비틀즈 그리고 동원된 연기자들(대부

27

분 직업배우가 아닌 보통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

니며 찍고 싶은 장면을 찍는 형태로 작업이 되었다. 감독

은 주로 폴 매카트니가 맡았으며 존 레논과 죠지 해리슨

은 자신의 노래의 배경이 되는 씬들을 연출했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초현실적인 것이라 당연히 편집이나

촬영자체가 모두 매우 초현실적이었는데 이는 비틀즈(특

히 폴 매카트니)가 리처드 레스터와 두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을 응용한 것이다. 물론 정식

으로 전수(?)받은 것이 아니다 보니 전반적으로는 매우 어

설픈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Magical Mystery Tour는 시대를 너무나 앞선

영화였다. 영화가 제작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에 보아도

혁신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단지 이 영화가 시대를 잘못

타고나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가 비

틀즈의 여러 시도들 중에서 크게 평가받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가 없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폄하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Magical Mystery

Tour가 확장하고자 했던 영역이 대중에게 강하게 어필하

고 상업적인 찬사를 얻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영화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그에 합당해야한다.

Magical Mystery Tour

비틀즈:그리고 영화 28

상상력으로 만든 오디세이

이야기

비틀즈

Yellow Submarine

(1968)

29

비틀즈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러했지만 영화 ‘옐로

우 서브마린’은 하나의 역사-문화적 현상이었다. 옐로

우 서브마린이 카페 이름으로 애용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는 잘 납득이 안가는 일이지만 옐로우 서브마린은 60년대

를 상징하는 아이콘을 넘어 그 자체가 한 시대의 이미지

를 만들어냈고 또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이다.

영화가 개봉된 지 30년, 보통 한세대의 구분을 이루는 시

간인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옛 기록들과 오늘날의 반응들

을 비교하면 이 영화(정확히는 장편애니메이션)가 서구인

들에게 주었던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었는가 알 수 있다.

옐로우 서브마린은 그냥 한편의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강하지만 옐로우

서브마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사람들은 디즈니

가 만들어냈던 이미지들과 낯익은 서사구조들, 그러니까

Yellow Submarine

비틀즈:그리고 영화 30

왕자님과 공주님이 나오고, 사슴과 코끼리가 나오는 그

런 화면에 익숙했다. 그뿐만 아니라, 디즈니 이외의 영상

을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의 포로상태, 다시 말해 어떤 세

뇌상태에 있었다.

더군다나 디즈니 효과의 부정적인 영향은 사람들로 하여

금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로부터 성인들을 배제시켰고

무엇보다도 ‘판타지아’의 실패로 음악과 애니메이션

의 결합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 최소한 대중들이 납득하

기 어려운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했다.

옐로우 서브마린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모든 미신

들을 한 번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옐로우 서

브마린을 보며 애니메이션이 단지 아동들만을 위한 장르

가 아니며 또한 단순히 움직이는 동화책이 아니라 매우

독창적인 표현수단임을 인식했다. 또한 애니메이션이 실

사영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상의 영역을 현실화시키는

도구임도 배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적 이미지를 시

각화시키는데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유용한 수단이며 또

대중들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도 확인됐다.

옐로우 서브마린이 혁명적인 또 다른 이유는 그 이미지에

◀왼쪽 노란 잠수함의 영화 스틸 컷

31

있다. 흐느적거리는 듯한 도안과 전혀 자연적이지 못한

채색, 원근법이나 기타 회화의 원칙을 모조리 무시해버린

화면의 구성뿐만 아니라 셀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사진을

제록스한 거친 이미지의 사용 등 실험적인 기법들을 도입

하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던 옐로우 서브마린은 가상의 이

미지가 실재보다 훨씬 강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옐로우 서브마린은 67년부터 작업에 들어갔지만 그 기

원은 64년에 제작되었던 텔레비전용 단편시리즈인 The

Beatles Cartoon에 있다. 매회 반시간분량의 이 TV카툰시

리즈는 희화화된 비틀즈의 슬랩스틱류의 개그만화로 66

년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에 관여했던 알 브로댁스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비틀즈를 기반으로 한 장편 애니

메이션을 제안했고 비틀즈는 그것을 승인했다.

감독인 조지 더닝의 개인적인 삶은 특별나서 그는 영화

산업에서 최초로 공인된 동성연애자로 알려져 있다. 1962

년 오벨하우젠(Oberhausen)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 “

사과, The Apple ‘62”는 머리에 얹혀 있는 사과 하나만

빨갛게 칠해 놓은 독특한 표현을 하여 새롭고도 획기적

인 실험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실험적

인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유명하다.비틀즈를 모델로 하여

BBC방송에 “The Beatles” 시리즈를 방영하게 되었으

며, 후에 그를 상징하는 영화인 The Yellow Submarine을

Yellow Submarine

비틀즈:그리고 영화 32

비틀즈 4인의 캐릭터를 그대로 등장시킨 애니메이션으로, 비틀즈가 직접 목소리 출연을 한 것은 아니다. 전편에 걸쳐 그

들의 음악이 흐르고 있으며 마지막 부문에서 직접 출연도 하고 있다. 상당한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85분) 아주 먼 옛날,

평화로운 바다 밑 페퍼랜드에 블루미니가 쳐들어온다.프레드는 노란잠수함을 타고 길을 걷던 링고를 따라가 도움을 구하

고 비틀즈와 노란잠수함의 여정이 시작된다. 과학의 바다를 지나 고래학교를 가던 중 길을 잃고 방황하다 구멍의 바다를

통해 페퍼랜드에 도착한다. 블루미니가 음악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비틀즈. 음악으로 페퍼랜드를 구할 수 있을까?

▲위노란 잠수함 속 비틀즈 4인의 모습

33

만들게 되었다. 1968년도에 만든 The Yellow Submarine

는 조지 더닝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노란 잠수

함의 총 제작비는 250만 파운드..감독인 조지 더닝에게는

3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중 특별상이 돌아갔다. 수록곡중

노란 잠수함은 당시 소련과의 냉정 시대를 은유적으로 표

현 했다고 한다. 또한 블루 매니족은 세상의 온갖 나쁜 것

들을, 페퍼랜드의 시장은 구세대를, 노 웨어맨으로 불려

지는 제레 미는 어줍잖은 지식인을 대변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TV시리즈에 참여했던 애니메이션

팀과 감독인 죠지 더닝, 디자이너 하인츠 에델만 등이 결

합했다. 스토리는 리 미노프가 만든 골격을 바탕으로 제

작자인 알 브로댁스와 잭 맨델슨 그리고 훗날 ‘러브스토

리’로 유명해지는 에릭 시걸이 참여했다.

영화가 비틀즈와 그들의 노래에 기반 해 제작됐지만 비틀

즈가 프로젝트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몇 차례 스튜디오

를 방문하고 중간과정을 보고받기는 했지만 프로젝트 자

체는 비틀즈와 무관하게 진행됐다. 물론 비틀즈는 영화를

위해 새로운 노래 몇 곡을 쓰기도 하고 영화 끝부분에 깜

짝출연을 하기도 했지만 애니메이션 자체가 비틀즈의 것

▲위노란 잠수함의 감독 조지 더닝(George Duning)

이라고 부를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영화 속의 목

소리조차도 성우들이 더빙을 했다. (그리고 비틀즈 멤버

들은 그 목소리를 매우 싫어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간간히 영화제 등에서 상영이 되기는

했지만 법적인 문제로 영화는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공개

되지 못했다. 80년대 말 일본에서 레이저디스크가 출시

됐으나 얼마 뒤 다시 회수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긴 공백

기 끝에 영화는 새롭게 단장된 모습으로 재공개 된다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맞춰 노란 잠수함 3D 리메이크 버

전이 개봉 될 예정으로 메가톤을 잡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실제 비틀즈와 닮은 꼴 배우를 물색해 CGI 및 퍼

포먼스 캡쳐 기술을 활용하는 한편, 생존 멤버를 참여시

켜 원작의 감동을 최대한 재현하려는 계획이다.

노란 잠수함이 페퍼상사밴드를 태우고 돌아오면 세상엔

다시 색채와 음악, 평화가 넘친다는 전설처럼 재개봉되는

옐로우 서브마린과 함께 20세기의 마지막이 또 다시 사랑

과 평화로 넘쳐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Yellow Submarine

비틀즈:그리고 영화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