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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글로컬워십네트웍(GWN)의 방향과 2012년 모임평가 글로컬워십네트웍의 시작 핵심그룹 2012 모임과 평가 제안과 논의 향후 계획 시카고 사역 프로그램 정리: 조준모, 이유정, 김재우 예배사역연구소(Worship Ministries Institute) - 글로컬워십네트웍(Glocal Worship Network) 2012 Glocal Worship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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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워십네트웍 2012년 모임후 정리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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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글로컬워십네트웍(GWN)의 방향과 2012년 모임평가

• 글로컬워십네트웍의 시작

• 핵심그룹

• 2012 모임과 평가

• 제안과 논의

• 향후 계획

• 시카고 사역 프로그램

정리: 조준모, 이유정, 김재우

예배사역연구소(Worship Ministries Institute) - 글로컬워십네트웍(Glocal Worship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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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워십네트웍의 시작

글로컬워십네트웍(GWN)은 한국교회와 한인디아스포라 교회의 건강한 예배사역의 방향성과 과제들을 연구하고 제시하기 위해서 한국, 북미, 남미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로 구성된 자발적 네트웍이다.

핵심그룹

강명식 (예배인도자/CCM아티스트, 숭실대컨서바토리 현대교회음악과 교수)김재우 (GWN코디네이터, A.C.T. 예배선교사, 킹스리전대표) 박종술 (CCC 예배선교사) 박기범 (어노인팅뮤직 대표)박지범 (남미워십 LAMP지도목사) 이유정 (예배사역연구소 공동대표, 리버티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좋은씨앗(CCM))조준모 (한동대 국제어 문학부교수, CCM아티스트/예배인도자)최지호 (예배사역연구소 공동대표, 베네주엘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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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모임과 평가

GWN의 핵심그룹 8명은 교제와 창조적 동역을 위해 모임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2012년 1월 25-28일 미시건 캘빈신학교에서 열린 캘빈워십심포지움에 참가하며 이 기간동안 GWN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 후에는 1월28-29일 시카고로 이동하여 한인교회를 섬기는 예배세미나와 집회를 가졌다. 2012모임의 유익은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들간에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교제권이 형성되었다는 것.2. 각자 개인 사역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3. 한인교회 예배사역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가능했다는 점.4. Calvin예배연구소 리더쉽과의 네트웍을 통해 향후 동역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점.5. 한인교회를 섬기는 창조적 동역을 시도했다는 점.6. 디아스포라 차세대 공유의 필요성과 멘토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

제안과 논의

모임중 GWN의 목적과 역할에 관해서 자연스럽게 거론 되었던 주요 단어는 “예배갱신”, “디아스포라”, “차세대”, 그리고 “선교” 이다.  1) 예배 갱신: 예배갱신을 위해서는 현장의 예배사역자(practitioner)와 지역교회 목회자, 신학자들의 dialogue를 형성하여 원론과 현장의 간극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문서화시켜서 나눌 필요가 있다. 현대적 경배와 찬양 곡들과 찬송가에 대한 연구와 개발도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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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아스포라: 예배 갱신의 대상은 한국과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들이다. 일방적로 북미나 한국의 교회가 디아스포라 교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서 상호교류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차세대리더 개발: 차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할 컨텐츠를 개발해야 하는데 영성, 관계성, 전문성이라는 3가지 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지역별 교제권을 발견/생성하여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상당한 접근적 노력 있어야 차세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4) 선교적 오리엔테이션: 예배와 선교의 신학적 연결성과 디아스포라 교회의 사명, 예배사역이라는 분야에 헌신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생각할 때 앞으로 더욱 예배와 선교의 필연적 관계 및 실제적 선교 분야로서의 역할 강조가 필요하다.

향후 계획

GWN의 모임은 성장(growing)과 섬김(serving)을 두 축으로 삼는다.

성장(growing)은 교제(fellowship)과 연구를 통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며, 섬김(serving)은 모일 때 그 지역의 교회들을 섬기고 차세대 리더들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GWN은 “우리 자신을 위한/차세대 리더를 위한/지역교회를 위한 모임”이라는 3가지 components을 목적으로 모임을 계획한다. 모임의 형식은 수직적이라기 보다는 수평적이며, 모일 때 마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각자의 발전된 경험/이해 공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나아가 서로의 논의와 발제에 대한 투명하고 발전적인 건설적 비판(Constructive Criticism)도 가능한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 1년에 한번 모임을 가지며 모임은 컨퍼런스나 수양회의 형태를 겸하여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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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8일 토요일 예배세미나 프로그램] 장소: 시카고 MC-TV공개홀, 2:00-9:00PM

오픈예배와 주제강의 2:00-3:00PM찬양: 인도 강명식 (team: 최지호-건반, 조준모-퍼커션, 박기범-싱어) 곡리스트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보혈을 지나(chorus만)- 나는 주만 높이리- 예수보다 더 큰 사랑- 온 맘 다해   전체강의: 이유정 목사 ("여호수아 세대":본문 민수기 27:15-20)

강의 후 찬양: 모든 열방 주 볼 때 까지

강의 3:00-6:30PM (20분씩 TED형식의 강의)

1. 예배사역자의 3가지 특권 (박종술) 2. 예배와 수평성 (박지범)3. 예배와 우상숭배 (조준모)4. 예배자의 관점 VS 하나님의 관점 (강명식)  Break: 조준모 미니콘서트 5. 다시 예배예술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최지호) 6. 선곡이 곧 신학입니다 (이유정)7. 예배팀사역 세우기 (박기범)8. 이민교회에서의 예배사역 (김재우) Dinner 

토크콘서트 7:30-9:00PM진행: 김재우기도와 마무리: 최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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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9일 주일 연합예배 프로그램]장소:시카고 헤브론교회 5:00-7:30PM

이유정- 이 날은 주의 날일세 / 이유정 사, 곡- 우리 함께 기뻐해 / Gary Hansen-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 / David Fellingham-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 시 138편, 이유정 곡- 오직 주 만이 / 시 62편, 이유정 곡 박기범 - 예수 피를 힘입어 (E key) 양재훈 사/곡-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찬송가) (E Key)- 예수 피를 힘입어 (reprise, 후렴만)- 하나님의 존전에서 (E key) 안정환 사/곡- 예수 하나님의 공의(D key) Geoff Bullock 사/곡- 주 품에 (D key) Reuben Morgan 사/곡 조준모/강명식 (특송)- 하나님 아버지- 그의 생각   박지범 (말씀:25분) - 요한복음 14:22-23절. "거하심과 사심(Dwelling and living)"  최지호- 주의 옷자락 만지며- 하나님의 은혜- 주님 곁으로-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박종술 - 감사해요(Thank you Lord) - 헌금시간인도 - 왕 되신 주께(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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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I.

예배사역의 이슈와 과제 발제

• 다시 한번 예배예술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최지호)

• 예배와 우상숭배 (조준모)

• 예배와 수평성 (박지범)

• 디아스포라교회 예배사역의 방향성 (김재우)

• 20분짜리 찬양디자인, 선곡이 곧 신학이다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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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예배예술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최지호(예배사역연구소 대표, 베네수엘라 선교사)

지난 한 해 한국 내 방송 프로그램 중 가장 많이 이슈가 되었던 프로그램을 든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은 M본부의 ‘나는 나수다’를 떠올릴 것입니다. 일명, 나가수로 명명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매주 수백만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하고, 또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이 경연을 직접 보기 위해 방청을 신청하였습니다. 거의 로또(?)의 확률과 같은 상황에서 공연에 초청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 감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7명의 가수들이 선곡하거나 선정을 받은 후, 탁월한 음악인들을 통해 편곡하고 준비된 공연을 감상하면서 청중들의 모습 속에선 꽉찬 애정과 기대로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고 때로 만족감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또한 쉽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청중평가단이 되어 평가를 마치고 나올 때면, 다시 오질 않은 기회였고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 결 같이 공연장을 떠나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시청자들은 ‘얼마나 좋았으면...’ 하고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가수 공연에 참여한 가수들이나 청중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저는 마치 하나님을 만난 예배를 경험한 예배자들에게 기대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자들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과연 교회에서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예배모임 안에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생애에 최고의 순간이었고 단 한번만의 기회였다고 말하는 나가수의 청중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오히려 희망과 확신의 찬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에겐 이미 사람들을 감동시킬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가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창조주와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호의와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우리가 그 메시지를 다루는 일에 우리가 너무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와̃ 이것 예술이다”라고 표현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어느새 진부해진 공간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배나 설교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배모임 속에서 이 감동을 경험하며, 또 경험해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중들은 예배예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강력한 감동의 메시지를 담을 예배예술의 그릇을 준비할 책임이 있습니다.

회중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배예술에 대한 더 많은 기대가 있으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는 다윗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성전 건축으로 인해 실망하지 않고 어린 솔로몬이 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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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계승하고 건축하게 될 성전 예배를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여기 흥미로운 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왕의 아들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한데, 주님을 위하려 건축할 성전은 아주 웅장하여 그 화려한 명성을 온 세상에 떨쳐야 하니, 내가 성전 건축 준비를 해두어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하였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다윗은 레위 지도자(족장)들로 하여금 골방에 들어가 다른 일은 하지 않게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위하여 골몰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일은 하지 않으면서 골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그러했듯이 이들에게 그 마음의 신실함으로 그 손의 공교함으로 사역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사귐입니다. 영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영적이라는 말과 예술적이라는 말은 절대 배치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최상의 것으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재물도 성물도 성전도 그리고 이를 다루는 사람까지 말입니다. 예배(Worship)란 단어가 말하고 있듯이 최상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은혜로 준비하겠다는 표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릴 예배는 최상의 가치에 돌려야 할 최선의 예술적 가치를 반영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대는 주일에 부를 한 곡을 위해 적게는 2-3시간, 많게는 6-7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잘 부르기 위해서가 이유이지만, 그 만큼 공들여 공교하게 만들 때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감동시킬 메시지가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미비한 준비로 하나님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이 제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예배의 예술적 준비에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배예술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3가지 아이디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익숙하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배워 익숙한 노래하는 자들로 찬양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익숙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어떤 일을 여러 번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몸이 아파 의사를 찾았는데, 증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의대에서 배웠던 어떤 병의 증상인지 책을 찾아봐야 하겠다고 몇 권의 책을 뒤적거리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다시는 이런 의사를 찾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일을 보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불러보고 연주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카피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눈을 감아도 부르고 연주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는 독특한 창조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피아노과 교수는 1년에 두 번의 연주회를 갖습니다.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참 대단해 보입니다. 작곡가의 두꺼운 책 한권의 악보집을 암기하여 연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완전히 마스터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우리는 악보대로 연주했다는 것으로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곡가의 예술혼을 받지만 연주하는 연주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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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와 신자들의 삶의 정황이 반영되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환경, 우리 예배찬양팀 그리고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차별화된 창조물이 되도록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노래 만들어졌을 때, 밴드로 연주했다고 꼭 풀 밴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클래식한 악기를 사용할 수도 있고 간단한 악기로 느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느낌이 나던 노래를 현대 감각의 화성과 리듬을 사용하여 재해석하여 연주할 수도 있습니다. 드럼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베이스 기타가 없으면 없는 대로, 오히려 차별화된 연주와 찬양 상황을 연출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주님과 사랑에 빠질 것을 권면합니다. 아내와의 결혼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해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지만 그 때부터 용돈을 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함께 해주며 힘이 되어주었던 아내에게 줄 선물이니 특별한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두 해를 준비하고 나서 결론은 결혼식 때 못해주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나 선물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생일을 몇일 앞 둔 어느 날,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T자로 시작하는 반지를 구입해 선물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죠? 이 선물은 사랑에 빠진 남편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에 빠지면 우린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팀도 찬양대도 예술가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안에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담아내는 그것이 바로 예배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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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우상숭배

조준모 (한동대 언어학교수, 예배인도자/CCM아티스트)

1.     들어가며 소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누구나 동의 할만한 대답은 소녀이다. 왜 소년의 반대말은 아줌마가 아닐까? 왜 강아지나 돌이 아닐까? 인간의 언어에서 반대말이라는 개념은 참 특이한 개념이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 반대말이 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단어의 의미 영역이 거의 다 같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의 반대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단어와 거의 모든 의미 영역에서 동일한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하나의 주요 의미 자질이 달라야만 한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미가 같고 한 가지 주요 부분의 의미, 곧 성별의 의미가 달라서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반대말과 비슷한 말은 한 끝 차이이다. 그러면, 예배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예배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은 그 예배의 대상에 있다. 우리가 주로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해하는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아닌 것이 되었을 때 그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 예배이며, 우상 숭배는 우상 예배인 것이다. 역대하 33장을 살펴보면 유다의 왕 므삿세에 관한 역사의 기록이 있다. 3절은 므낫세 왕이 우상을 위하여 산당과 단을 세운 것을 묘사한다.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대하 33:3) 유다의 왕이 우상을 위하여 단을 세운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기록이다. 므낫세 왕은 그 우상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세웠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영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5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대하 33:4) 성경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칭할 때 “내 이름을 영원히 두리라 약속하신 (4절, 7절)” 곳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이 있는 그 곳에서 바로 우상숭배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곧 예배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지어진 바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영영히 두리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 성전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행악함은 이스라엘 백성 주위의 이방 백성보다 더 심하였다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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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대하 33:9)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호세아 2장 16장에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하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 2:16) 하나님께서 그를 반역한 백성에게 회복의 날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날에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라고 부를 것이고 더 이상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바알, 곧 풍요의 신을 하나님 섬기듯 섬겼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런 행악함이 구약시대에 가능하였다면 현재 우리 삶에는 어떠할까? 여전히 그 가능성은 존재 할 것이다. 예배와 우상 숭배가 반대말이라면 이 두 행위는 지극히 비슷한 개념일 것이며 그 차이도 미세할 것이다. 누군가를 예배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섬긴다는 말이며 그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예배의 대상이 그 누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은 “당신은 예배자”라는 노랫말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당신은 예배자 당신이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간절한 예배자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종교가 있든 그렇지 않든누군가를 섬기고 있지, 무언가를 예배하고 있어 당신은 예배자 간절한 예배자 누구는 돈을 누구는 편리를누구는 명예를 누구는 지위를누구는 쾌락을 누구는 느낌을누구는 성공을 누구는 안정을 섬기고 있지 누군가를 섬기고 있어무언가를 예배하고 있어그래서 당신은 예배자

우리는 하나님을 갈급해 하여 그 분을 만나고자, 그 분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구하고자, 그 분의 이름을 높이고자 예배의 처소로 모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곧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부르는 교회는,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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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 안의 우상숭배 그리스도인의 개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현실 가운데 현재 우리가 허락한 우상들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우상들이 있는가? 지난 몇 년간 한국교회를 지켜본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특별히 우리를 유혹하는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돈 (경제제일주의)성공 (성공제일주의)권력, 인기, 명예    안락, 편리, 쾌락 우리는 돈에 상당히 약하다. 돈이 중요하다고 굳이 말 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행동은 여전히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결정은 돈 중심적이다. 한국 교회는 비교적 돈이 많은 교회이다. 한국 교회 안에 빈부의 차이가 사실은 엄청나지만 (국내의 약 80%의 교회가 미자립 교회인 것을 기억하자) 다른 국가의 교회들과 비교한다면 한국 교회는 비교적 부유하다. 문제는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아니라 돈이 많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반대로 가난하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 하기도 한다. 그 것도 역시 문제이다. 한 예로, 한국 교회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이 선교에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여과 없이 하곤 한다. 지난 수 백년 동안 행하여진 서구교회의 경제, 권력중심적 선교의 오류를 그대로 범하려 한다. 한국의 국력, 경제적 성장과 한국교회 선교와의 상관관계는 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이며 지혜로운 성경적 해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명예에 약하다. 교회 밖에서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유명해 지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고 심지어 유명해 져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웃지 못할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높은 위치에 있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필수 조건인가? 높은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지 하나님 나라의 원리 인지를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호칭과 직분을 혼돈하는가? 장로와 집사는 직분이다. 그 것이 호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직업은 (교수, 변호사, 의사 등)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같은 호칭으로 종종 쓰이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직명은 교회 안에서도 쓰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계급주의 문화가 어떻게 아직도 교회 안에 그대로 있는가? 왜 연예인이 예수를 믿으면 간증할 기회가 더 많아야 하는가? 왜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이 모든 이유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높은 위치와 유명세가 하나님 나라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영성은 반 지성적이지도 반 경제적이지도 반 성공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고상한 지성을 가졌을 때에,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을 얻었을 때에,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는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는가 하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주의 길을 예비하다 비참한 죽음을 당한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하나같이 요셉과 같은 사람만을 우리는 이야기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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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명예, 성공, 쾌락…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을 때, 곧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 아닌 우상을 예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누가 혹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결정의 순간에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누구의 눈치를 보는가? 우리는 어떤 요인을 너무도 당연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개인의 삶에서는 물론이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의 방향성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요소인가? 교회 안에서의 돈과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성공의 여부가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가?  3.     예배 안의 우상숭배 더 나아가 우리가 드리는 공동 예배 가운데에서 우상숭배가 이루어 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자문 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의 자리에서 타락한 루시퍼를 고려해 보면 이런 자문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세가지 유혹을 받으셨다. 그 첫째 시험은 적절성에 관한 시험이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필요들이 있다. 복음은 그 필요에 적절하다. 그러나, 표면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 대한 유혹은 항상 우리를 따른다. 표면적 필요의 저변에는 근본적 필요가 있다. 근본적 필요를 무시한 채 표면적 필요 충족에 머문다면 그 것은 결코 복음적 사역이 아니다. 그 두 번째 시험은 사역의 화려함에 관한 유혹이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릴 때 천사들이 그를 받아 준다면 우리의 사역은 얼마나 수월했을까? 그러나, 이 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태어나신,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신, 멋진 전차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하나님의 성육신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유혹을 물리치시며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지막 시험은 예배에 관한 시험이다. 어떻게 예수님에게 예배에 관한 시험이 있을 수 있는가? 믿기 어렵지만 예수님이 하나님 외의 다른 것 곧 사단을 예배하도록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 시험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 세상나라의 영화로움’의 유혹이다.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8-11) 예배와 세상나라의 영화로움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사단은 높은 산 위에 올라서 모든 왕국과 그 영화로움 곧 그 화려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단을 예배하면 그 영화로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그 저변에는 이 세상에서 멋있어지고 싶은 유혹, 곧 이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누리기 원한다. 인기를 얻기 원한다. 수없이 많은 시간에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사역’을 할 때에도 멋있게 보이기를 원하는 유혹이 있다. 화려한 것을 선호한다. 세상의 화려함과 영화로움을 원하면 사단에게 엎드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결국 사단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둘 수 없다. 하나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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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왕국과 그 영화로움을 갖고자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다. 이 세상 왕국의 영화를 좇을 때 우리 예배 안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 지를 살펴보자. ㄱ. 화려함과 거대함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화려함과 거대함을 신봉한다. 예배 안에는 영화로움이 있다. 그 영화로움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화로움이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세상에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으로 우리 가운데 좌정하신다 (시29편2절). 이 영화로움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광이 아니다. 예배가 점점 인위적으로 화려해 지고 있으며 거대해 지고 있다. 예배 안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보다 사람과 이세상 왕국의 영광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우리는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자극적이며 화려한 음악, 영상, 조명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왕국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인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예배의 정신을 담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ㄴ. 상업주의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상업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첫 사역 중 하나는 성전을 깨끗게 하신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성전을 깨끗게 하셨는가? 그 성전 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거기에는 상업주의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사고 파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성전의 뜰 안에 상품들이 오고 갔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 가운데 우상을 섬기게 되면 놀랍게도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질되어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를 예배자로 바라보기 보다 관중으로 더 나아가 소비자로 취급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 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에게 일차적인 감동을 주고 지적인 자극만을 주려고 노력한다. 찬양 인도자는 성도들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수종 드는 거룩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예배자를 소비자로 보는 그 견해는 그들에게 인위적인 자극으로 ‘은혜를 끼치려는’ 노력을 낳게 한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고귀한 결과물들이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치유를 경험한다, 기쁨을 얻는다, 놀라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예배의 결과물들이지, 예배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위로를 위하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기쁨을 얻기 위하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사실 위에 나열한 결과물보다 더 중요한 예배의 결과물은 순종일 것이다. 순종과 함께 하지 않는 위로와 치유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업주의는 예배를 이벤트화 한다. 그래서 예배가 관중들을 충분히 사로잡기에 아주 잘 꾸며진 뮤지컬 같이 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관중들을 위하여 꾸며지며 모든 것이 무대 중심적이다. 무대나 스테이지라는 단어를 심지어 사용하기까지 한다. 그 무대의 중앙은 찬양팀과 악기들로 가득 차있고 무대의 가장 큰 부분은 대부분 대형 스크린으로 꾸며져 있다. 예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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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자극적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에게 조금 더 큰 자극을 주기 위하여 더 많고 강력한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고 더 비싼 음향 시스템을 구입하며 조명을 사용한다. 예배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마치 예배의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찬양 팀의 악기와 싱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 가고 있으며 스크린에서는 바로 눈 앞에 있는 찬양 인도자와 설교자의 모습들이 커다랗게 생중계되어지고 있다. 찬양팀에게 집중되어 있는 조명은 찬양팀 단원과 회중들 모두를 무대와 관중의 구도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명과 음향, 찬양 팀과 찬양 인도자들의 자세와 위치, 설교자의 자세와 설교의 내용 이런 모든 것들은 예배의 단순한 구성 요소만이 아닌 예배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지 아니면 우상에게 드려지고 있는지를 판가름 한다. 이런 노력들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의 요소들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하나님 중심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적인 것인가? (교회 안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창조성을 발휘하여 연극, 뮤지컬, 콘서트 같은 공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공연도 넓은 의미에서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중이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공동의 찬양과 공연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 집회와 예배도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예배에는 전도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지만, 전도 자체가 예배의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 ㄷ. 개인주의 이 세상왕국의 영화를 좇을 때 우리는 개인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배는 골방의 예배가 있고 공동체 예배가 있다. 우리가 홀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 소중한 시간이 있는가 하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 예배의 양면은 그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셨듯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기도의 시간을, 예배의 시간을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인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삶, 공동체의 예배가 필요한 존재이다. 고독 없이 공동체가 있을 수 없고 공동체 없이 고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개인화 되어가고만 있다.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있다. 성경 말씀도 지나치게 개인화 하여 해석한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를 “내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로, “너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말씀을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말씀으로만 해석하려 한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이 온 세상의 구원, 온 인류와 온 문화와 사회 모든 분야의 구원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 혼자 구원 받으면 그만이다. 이웃도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도 없다. 서로를 배려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개인의 비전, 개인의 신앙, 개인의 성공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비전은 구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주신 비전은 주로 구하지 않는다. 이런 신앙의 개인화는 예배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개인의 영성 (찬양 인도자, 설교자)을 지나치게 의존한다. 찬양인도자가 올바로 서고 설교자가 올바로 섰을 때에는 예배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만 그들이 올바로 서 있지 않으면 그 예배 자체가 위험에 빠지기 쉽다. 함께 말씀을 읽는 교독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배자/회중의 참여도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모두가 함께 드리는 찬양곡의 선곡에 있어서도, 함께 찬양드리기 어려운 곡들, 곧 찬양팀만이 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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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음악적 장르로 선택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서양의 contemporary 음악만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음악으로 오해되어지기 쉽다. 찬양 인도자는 회중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들을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예배의 장소에서는 회중의 소리를 듣기 어렵고 찬양팀의 소리로 가득할 경우가 허다하다. ㄹ. 일중심주의 이 세상의 영광을 좇을 때 우리는 일 중심/성공 중심이 되어간다. 예배는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예배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는 점점 수단이 되어가고 있으며 예배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산다. 예배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하여 예배한다. 일의 원동력을 찾기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드리는 예배에서 얻어가는 예배로 변질된다. 예배가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일이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일이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의 메시지이다. 적어도 성경은 일과 예배의 조화와 균형, 리듬을 보여준다. 인생의 여정에서 돌 단을 쌓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배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또한 새벽 미명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꾸준히 찾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일/노동/사역과 예배의 리듬과 조화를 볼 수 있다. 4.     나가며 우상숭배는 구약시대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구약시대의 인간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 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숭배는 상관없는 개념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다. 예수님도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으셨듯 우리는 항상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보아야 한다. 나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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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수평성

박지범 (남미워십팀 LAMP 지도목사)

건강한 수직과 건강하지 못한 수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지 못한 수직성을 조상으로부터 받으면서 태어났고, 살면서 그것을 더욱 강화하여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악순환을 겪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수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한을 풀고 싶어 생긴 수직2. 힘을 얻기 위한 수직3. 명분뿐인 수직

그렇다면 건강한 참 수직은 무엇인가?그것은 자발성에 의해 누려지는 행복한 수직입니다. 즉, 수평을 지나 수평과 수직이 균형을 이룬 수직성을 의미합니다.수평이 결여된 수직은 사역이나 관계에서 또한 예배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건강하지 못한 수직만 있을 때 생기는 문제들

1 - 모든 일에서 보완보다는 보상을 기대한다. (보상이 없을 때 문제발생).2 - 리더의 뜻을 공유하지 못하고 뜻을 명령과 강요를 통해 이룬다.3 - 관계 지속의 기준이 존재보다는 탁월함과 성취에 좌우된다. 4 - 신뢰 받음이 존재 자체보다는 이용가치가 있을 때만 있다. 5 - 항상 존재 보다는 일과 성공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6 - 문제의 중요성이 존재의 중요성을 항상 능가한다. 7 - 관계가 나빠져야만 헤어진다. 필요에 의해 관계맺기 때문이다. 8 - 헤어진 후 오는 이용당한 느낌이 기억에 남아 아프게 한다.

수직은 더 높아지는 것, 더 힘을 가지는 것, 더 멋있어 보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단어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로 많이 사용한다.

비젼, 열정, 헌신, 희생, 순종, 복종, 경쟁, 탁월, 성취, 의무, 책임, 실패, 두려움, 실수, 후회, 비교, 열등함, 우월함, 훈련, 변화, 목표, 보상, 자극, 등등

수평은 같아지는 것을 추구하기에 아래와 같은 단어에 주로 집중하며 사용하는 단어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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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 널널함, 자유함, 친밀함, 하나됨, 누림, 노는 것, 먹는 것, 이야기하는 것, 교제, 나눔, 존재, 즐김, 평등, 자발성, 사랑, 은혜, 용납, 보완 등등

한국교회의 예배의 가장 큰 걸림돌

- 한에서 온 수직성, 수평이 결여된 수직성

한에서 오는 수직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한을 풀고 싶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헌신과 희생과 열정은 있지만 친밀함과 편안한 자유함은 없습니다. 에너지원이 두려움이 되고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과 경외와 높임 받으심은 강조되지만 그분과 하나됨과 친밀함과 누림은 결여됩니다. 부인에게 존경 받는 남편이 진정 훌륭한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밀함을 통과한 존경이기에 참 존경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경외, 높임받으심도 친밀한 하나됨을 통해 나타날 때 진정성이 있을 것입니다. 수령이 결여되면 수직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친밀함과 누림은 없는데 남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부부처럼 말입니다.

- 수평이 있는 수직은 어떻게 얻나?

수평을 경험하므로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한국사람들을 삶 전체를 통해서 수평을 경험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 전체가 반만년 역사동안 수직을 추구하며 문화화하며 내려왔기에 수평이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 어떻게 수평을 경험하나?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므로 우리는 수평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직은 수평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시기에 수지과 수평적 요소를 둘 다 균형있게 가지고 계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면서 한편으로는 친구가 되기 원하십니다(요 15:5). 친구라는 것은 수평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 수평과 수직을 얻을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되는가?

1. 친구의 삶(요 15:15) 2. 신부의 삶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이웃과 친구가 되는 삶을 삽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부의 삶을 살면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됨이 예배자의 삶이요, 선교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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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수직 속에서 수평을 경험하는 길

누군가가 나를 위해 힘을 포기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힘이 포기되어진다는 것은 강자가 약자의 입장을 스스로 선택함을 의미합니다. (성육신)

이것이 왜 중요하냐하면 힘이 포기되어지는 곳에만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사람은 상황과 입장에 따라 강자와 약자의 입장을 모두 경험하고 삽니다. 어린자식이 부모보다 더 강자 입장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강자의 입장을 가질 때만 힘을 포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갖습니다. 내가 약자의 입장에 있을 때 누군가가 힘을 포기하고 내 입장으로 내려와 준다면 나는 수평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은 아무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은 두려움의 양보다 사랑의 양이 더 많을 때만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힘을 포기하는 것만 강요되어지는 것은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내가 힘을 포기할 수 있는가의 기준은?“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라는 입장을 가질 수 있을 때입니다. 내가 피해를 보는 상황 앞에서 내 자신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 “맞어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잖아? 이것으로 인해 내 행복이 없어지 않아!”라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힘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수평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수직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경험을 많이 할 때, 우리의 수직은 더 건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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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교회 예배사역의 방향

김재우 (A.C.T.선교사, 달라스 킹스리전 대표)

1. 디아스포라 예배사역자로서의 나의 여정 이민신학(오상철)이라는 책에 의하면 현재 전세계 약 700만명의 한인 디아스포라가 흩어져 있고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수는 약 5천개로 알려져 있다. 이중 북미에 4천개가 넘는 한인교회가 있으며 미국에는 한인 교포 1.5세와 2세 대학생 15만 명 정도와 한국 유학생 약 7만 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92년도에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로 가족이민을 온 나는 달라스의 한인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약간의 음악적 열정이 있던 나는 바로 교회 찬양팀에 들어갔고 얼마 안 가서 찬양인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 나오던 거의 모든 호산나의 Praise & Worship 음반과 빈야드 예배음반을 구입했고, 당시 주로 영국과 미국의 찬양곡들을 한국어로 번역한 음반들도 구입했는데 당시 한국어 번역들은 원곡의 Groove와 Syncopation을 빼는 반역(?)을 일삼아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서구에서 일어난 Contemporary Worship과 한국의 찬양선교단의 영향을 받아 90년대에 미국의 한인 청년들도 찬양선교단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LA토요찬양모임(나중에 클레시스미션으로 변경)과 휴스턴 예수찬양모임(후에 2세들을 중심으로 한 G2G결성)이 대표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하지만 대표적인 찬양선교단들이 대부분 10년정도를 한계로 해체되었다. 당시에는 교회밖에서 젊은이들의 대안적 기독문화/신앙운동의 역할을 했던 찬양모임이 일반 이민교회 예배 안으로 정착되면서 점차 외부 찬양모임의 역동성은 줄어 들었고 이제 30대가 된 멤버들은 뚜렷한 방향성과 재정 공급이 없는 선교단을 떠나 자연스럽게 교회사역으로 흡수되었다. 아쉬운 점도 있으나 당시에 열정적이었던 멤버들이 지금도 흩어져 한인교회의 목회자와 일군들로 섬기고 있으며, 이들은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예배에 마음이 열려 있고 문화적 수용성이 높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00년에 내가 속해 있던 찬양선교단도 해체되면서 달라스 지역에서 King’s Region Worship Community라는 예배사역팀을 시작하여 한인들이 중심이 된 선교적예배사역의 방향을 갖고 지금까지 이끌고 있으며, 한인 1세교회에서의 찬양전도사 사역과 2세교회에서의 worship pastor사역을 거쳐 2011년부터 A.C.T.라는 국제선교단체에서 예배예술선교사’로 허입되어 한인과 다민족 사역자들의 네트웍을 통해 예배예술선교를 활성화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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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omemade Worship 최근에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약 30명의 contemporary worship운동의 선구자들이 모여서 지난 사역들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함께 예배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CCLI의 설문조사 결과를 나눴었다. 26개국 25만교회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CCLI 에서 미국교회의 상황을 조사한 결과 75%의 교회가 성도수가 200명 미만이었고, 75%의 교회에 음악/예배사역자가 있지만 이중 23.8%만 풀타임, 34.7%가 파트타임, 그리고 무려 41.6%가 자원봉사자(무보수)였다. 이 데이타가 contemporary worship을 주도한 미국교회의 현 상황이라고 할 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역시 미국교회의 통계처럼 대부분의 교회가 중소형 교회이며 전문적인 예배사역자를 페이하면서 구하는 교회는 일부 대형 교회들일 것이다.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서 한어권 예배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한텀의 사역을 마치고 사역의 재정비와 유학, 자녀교육등의 이유로 해외로 나간 기존의 사역자들, 사역자로 준비되기 위한 해외유학 기간동안 이민교회 예배역을 하게 된 경우, 마지막으로 나처럼 이민교회 토양에서 성장해 온 1.5세 사역자들이다. 첫번째 유형의 예배사역자들은 이미 전문가로 인식되는 부류인데 자신이 사역하는 이민 교회의 토양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한국에서의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에 의지해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 내려하다가 변화를 힘들어하는 이민 교회안에서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두번재 유형 (유학생 사역자)는 예배사역자로서의 정체성 보다는 학생으로의 정체성이 우선시 되며 재정적인 부분에서 해외에서의 생존자체가 이슈가 될 때는 성도들을 목양적으로 돌보는 삶을 살기 어렵고 유학생활이 끝나면 비자문제등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장기적인 사역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수 있다. 마지막 유형인 1.5세 사역자들은 안정적인 삶과 이민사회와 교회의 문화적 이해를 하고 있는 좋은 자원이지만 진취적인 사역을 해 나가지 못하고 안주하기 쉬운 약점이 있다. 폴발로쉬는 예배사역자들이 공연장 멘탈리티가 아닌 Living Room(거실) 멘탈리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로 미디어와 컨퍼런스를 통해 일어난 contemporary worship의 세계적 붐은 교회들의 수요가 커지면서 일반 마케팅과 비지니스 영역으로 확장 되었고, 작고 소박한 대부분의 일반 교회의 모습보다는 크고 화려한 일부 교회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컨퍼런스에서의 예배실황을 최고의 프로덕션을 거쳐 상품화 시켰다. 중소교회의 예배사역자들이 이러한 규모와 프로덕션이 요구되는 예배미디어를 자신들의 사역의 모델로 삼을 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만 커지며, 정작 공동체에 필요한 예배는 생명력을 잃게 되고 어설픈 프로덕션만 남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물이나 시설이 아닌 지체들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면에서 규모와 시설적으로 열악한 디아스포라 교회는 예배를 화려하게 만들려는 불필요한 힘을 빼고 Homemade 예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Homemade 예배란 목적 자체가 가족(family)를 섬기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이민자의 가정에는 어린 아이도 있고 2세 청소년과 1.5세 청년, 친척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유학생과 국제 결혼한 장년. 고국을 그리워 하는 노인도 있는 것 처럼 교회도 그렇다. 예배인도자는 자신의 페이스(pace)에 자신이 선호하는 노래만 부르기 보다는 교회 구성원들의 페이스에 맞춰 그들이 함께 하나님을 배우고, 높이고, 느끼고, 하나될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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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made예배의 또 다른 측면은 재정적으로 예배사역에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의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내부안의 자원들로 예배사역팀을 세우고 운영해야 하는데 이것은 관점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예배프로덕션이 아닌 예배하는 예배공동체이다.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풀밴드나 좋은 음향시스템이 갖춰진 예배당이 아니다. 내가 처음 찬양전도사로 사역한 한인교회는 미국교회의 건물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3년동안 매주 모든 악기와 장비를 셋업했다가 치워야 했다. 매주 금요일 다락방같은 곳에서 함께 한 찬양과 기도의 시간은 기타 한대로 진행되었지만 감격이 있는 시간이었다. Homemade예배는 예배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한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예배이다. 화려함 보다는 진정성과 서로간의 사랑과 지속성이 강조된다. 3. Glocal Worship 내가 이민 온 90년 초만 해도 ‘디아스포라’라는 단어 보다 동포나 교포라는 말을 더 많이사용했다. 이민교회는 자체적인 정체성에서 우러 나오는 사명감 보다는 고국의 교회를 그리워 하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를 인식했었다. 하지만 시대는 급속도로 바뀌고 있고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단순히 우리가 한국교회의 연장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명을 갖고 흩어진 (그것을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독특한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위클리프 선교회의 정민영선교사는 급격한 세계상황의 변화로 인한 선교동향을 분석한 글에서 이동(migration), 세계화(Globalization), 도시화(Urbanization)를 지목했는데 이런 총체적인 세계의 상황 변화를 나는 글로컬화(glocaliz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로컬과 글로벌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컬화된 세상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정립 한다면 에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선교적 사명들을 감당할 수 있고 나는 이것을 글로컬예배사역이라 부르고 싶다.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선교적인 관점(땅끝)과 종말론적인 관점(끝날)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교회는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 공동체이며 교회란 순례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백성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위치한 현 시대는, 장차 도래할 시대의 권세가 현재 그 능력을 발휘하여 만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이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보편적인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그러하다면 글로컬시대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디아스포라 교회야 말로 끝날과 땅끝을 지향하는 예배와 선교사역의 사명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어떻게 글로컬 예배사역을 실천할 수 있을것인가?’라는 실용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다 쓰는 것에 익숙한 예배사역자들에게 이것은 긴급하고 타당한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간단하고 편리한 대답은 없다. 글로컬예배는 단순히 이 시대의 트렌드가 아닌 결국 선교적예배를 통한 궁극적 예배의 완성을 지향하는 성경적 예배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교회 예배사역은 한인교회를 종착역으로 삼기 보다는 허브(hub)로 여기고 벽을 넘어 나아가야 한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게 있어서 끝날과 땅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예배사역자들을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고민하고 시도해야 한다. 부족하지만 2000년부터 시작되어 글로컬예배라는 방향을 향해 가는 디아스포라 예배사역팀 킹스리전(King's Region)을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내가 속한 달라스 킹스리전팀은 20대와 30대 한인들로 이뤄진 예배사역 공동체이다. 함께 사역하고 성장하는 Communit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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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ctice를 추구하고 있으며 ‘글로컬워십’을 모토로 선교적 예배사역을 고민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각자 속한 한인교회에서는 예배인도자나 찬양팀 멤버로 섬기고 있고, 킹스리전으로 모여서 주로 선교적 예배를 지향하는 집회와 강의로 지역교회를 찾아가고 있다. 킹스리전은 또한 지역을 초월하여 한인디아스포라 예배사역자들과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있고, 다민족 예배사역자들(multicultural/multiethnic)과 연계하여 미국내 다민족 예배사역을 활성화하고 있으며, 선교지에 문화적으로 적합한 예배를 세우는 종족예배사역자(ethnodoxologists)들과 연계하여 선교지 토착화 예배사역을 추구하고 있다. 달라스에서 우리 사역팀이 하는 사역규모나 영향력은 미비하지만 그 방향성과 접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의미 있다고 본다. 많은 내용이 있지만 접근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로컬시대에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5천개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예배와 선교의 허브(hub)로 자신들을 정체성을 인식한다면 예배의 열정은 결코 교회건물 안에 머물지 않고 끝날과 땅끝을 향해 벽을 넘어 흘러갈 것이다. 이미 우리는 땅끝에 와 있고 땅끝이 우리 곁에 와 있다. 어떻게 예배를 흘려보낼 것인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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