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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에 대한 리뷰 SI : REVIEW 어느덧 입동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이 확실히 느껴지는 쌀쌀한 날씨지만 해가 뜬 시간이라면 겉옷 하나 걸치고 밖에서 산책 을 즐기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가을이 동 장군에게 쫓겨 완전히 떠나기 전에 올해 우리학교 가을 풍경은 어떤지 보고 느끼고자 산책을 나가봤 다.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과 학교 곳곳에 울긋불긋 물든 단풍, 그리고 차갑지만 쾌청한, 얼음 꽃 같은 공기를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가을의 끝자락이 선 사하는 풍경과 분위기에 빠져든다. 우리학교는 특 히 이러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가을 산책을 하기 좋은 곳이다. 후문 언덕 외에는 경사진 곳도 딱히 없는 곳이다보니 지쳐서 거칠고 차가운 호흡을 내 쉬는 대신 기분 좋게 찬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은 없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여 유롭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주변을 바라보면 경농관과 21세기관 사이의 나 무 덤불 사이로 작은 새들이 보인다. 겨울을 준비 하는지 봄에 비해 깃털이 두텁고 몸집도 더 통통하 다. 새들이 겨울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가을을 즐기는 존재도 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깜짝 놀라는 어린 시냥이들은 우르르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고, 성묘인 시냥이들은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따스한 가을 햇빛을 찾아 낙엽을 바 스락 바스락 밟는다. 인문학관과 경농관의 담쟁이 덩굴들은 초록을 잃고 잎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정 문부터 후문까지 주르륵 늘어선 곱게 물든 나무들 역시 잎을 버리며 겨울을 대비한다. 온 세상 만물 이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는 가을을 만끽하고 다가 올 겨울을 대비한다. 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제1공학관에서 잠 시 걸음을 멈춰 행인들을 바라보면 모두 제각각이 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트렌치 코트를 고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여름 동안 옷 장에 넣어둔 과잠을 입는 사람이 있고, 두꺼운 돕 바로 몸을 꽁꽁 싸매 이미 동장군의 공격을 대비하 는 사람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강의실로 가는 사람,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사람 등 옷차림 과 이 시기를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게 제각각이다. 가을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이처럼 굉장히 다양하 다. 마지막을 즐겁게 보내기도 하고, 대비와 적응의 시간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공 통적인 것이 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 누 구도 가을이 떠남을 아쉬워할지언정 슬퍼하지 않 는다. 그저 다음을 기약할 뿐이다. 다음 가을은 올 해와 조금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시냥이들은 성묘 가 될 것이고 새들은 더 많은 무리를 꾸린 상태일지 도 모른다. 사람들의 옷차림 유행도 새롭게 바뀔 것 이다. 내년에 찾아올 가을엔 우리대학에 어떤 모습 이 펼쳐질지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사진_ 이길훈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다. 요즘같이 여름 과 겨울이 길고 봄, 가을이 짧은 시기에 가을은 하 나의 고유한 계절이라기보다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전 잠깐 거치는 간이역 같다. 기자는 겨 울보다는 여름이 좋다. 동결되어 있는 듯한 겨울에 비해 여름에는 무언가 역동적이고 설레는 일이 일 어날 것만 같다. 같은 이유로 여름에서 겨울로 가 는 가을보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봄이 더 좋다. 이렇게 보면 봄과 가을이 조금 서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 각도 든다. 자신들도 사계(四季) 를 구성하는 엄연한 계절이므로 나름의 합당한 대우를 받을 자격 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 까. 그래서 가을의 무늬를 담아낼 수 있는 시집을 한 권 골랐다. 바 로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 지 않는 역에서』다.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 던 태양처럼 짧”(「레몬」)은 여름을 뒤로하고 가을은 온다. 그런데 시 인에게 가을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계절이다. 시인에게 가을은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 픈 길”이고,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을 가을의 무늬라고 말한다.(「이 가을의 무 늬」)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농부의 심정으 로 지난 10개월간의 경험을 되짚어본다. 시간이라 는 씨앗을 뿌려 경험들을 길러내었으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추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 확할 의미가 손에 확연히 잡히지 않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면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오지 않는 역에서』는 시간 속에서 무리해 서 의미를 추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흘 러간 시간은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을 보여준다. 가끔 누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 이든 마땅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 해주는 문장을 만나는 것은 반가 운 일이다. 시인이 “사라져갈 여름 은 해독할 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 다”라고 쓸 때, “우리의 현재는 나 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 큼 아름다웠다”라고 쓸 때 반가운 감정이 든다. 언어는 생각의 그릇이다. 상투 적인 언어는 상투적인 생각을 낳 는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는 낯선 언어들 을 만나보고 싶다면 가을이 다 가기전에 시집 한 권 을 손에 쥐어보는 것 어떨까. 김세훈 기자 [email protected] 영원할 같았던 여름의 이글거림이 지나가고 어 느새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에 색색의 단풍들이 펼쳐져 있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가을을 소재로 한 노래라고 하면 이문세 의 ‘가을이 오면’, 양희은의 ‘가을 아침’,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많은 노래를 떠 올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기자는 싱어송라이터 다 린의 노래를 가장 좋아하고 가을의 분위기와 잘 어 울린다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다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 은 ‘뭐, 달인이라고?’다. 달인이 아니라 다린은 2017년 ‘가을’이 라는 곡으로 데뷔해 서정적인 가 사와 깊은 울림을 주는 노래로 인디 음악신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다. ‘그대 나 없는 가을을 미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흘러가고 나는 지금도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 니/혹시나 우리 서로 지나친대도 그 가을은 여전히 그대로 어느 곳은 꽃 피우고 어느 곳은 쓸쓸한 그 대로 사랑하고 있을 테니’ 다린이 부른 ‘가을’이라 는 노래의 가사다. 잔잔한 멜로디에 그냥 이야기하 는 듯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가사는 가슴 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가을이 새벽공기의 잔잔함이 느껴지는 노래라면 ‘까만 밤’은 해가 짧아져 깊어진 가을밤에 잘 어울 리는 노래다. ‘난 까만 밤에 묻어있던 인사들을 기 억해 빈자리처럼 나보다 오래된 눈으로 잠들거나 혹은 지나쳐버린 취한 듯 망설이는 가장자리/모든 풍경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기적처럼 못다 한 말들 은 저 멀리 산산이 흩어지며 발견하길 기다리는 듯 하루 곳곳에 숨은 채 하나의 비밀이 되어 내일을 만드네’ 경쾌한 멜로디에 밝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 래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매일 밤 학 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앙로에서 이 노래 를 듣다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진한 회색빛 의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 는 별과 달까지 매일 보는 똑같 은 풍경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Rubato’라는 곡은 낙엽이 떨 어지는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린 다. ‘넌 포말처럼 흩어져 어느 단 편으로 나를 데려가 너의 눈꺼풀 사이로 부서지는 빛 파도처럼 나 를 삼켜요/우리가 밟게 될 모든 곳은 희미하지만 사라지고 있지 만 나의 잔향은 널 위한 기도 너 는 다시 있을 나를 위한 위로’ 귀 를 사로잡는 다소 투박한 듯한 기타 소리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걷다 보면 갈색빛의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져 일부로 낙 엽이 쌓여있는 곳으로 지나가게 된다. ‘가을 타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 각이 들 정도로 왠지 모르게 감성적이게 되는 요 즘,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 줄 다린의 노래를 들으 면서 중앙로를 걸어보면 색다른 감정들과 풍경들 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유정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옆구리가 시린 계절이 돌아왔다. 내 옆구리에 아 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게 다가오는 이런 계절에는 로맨스 영화를 봐줘야 한다. 그렇게 마음 이 이끄는 대로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를 봤다. 우리가 흔히 꿈꾸는 연애는 아름답고 성숙한 어 떤 그 무엇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현실의 연 애는 매우 찌질하고, 한밤중에 이불을 차게 만든다.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는 기존의 미디어에서 그리던 환 상적인 연애를 벗어나 현실적 연애를 그렸다. 엉망진창이고 환상적이지 않은 현실적 연애. 남자주인공부터 구질구질하다. 파혼당한 ‘재훈(김래원 역)’은 매일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 에게 ‘자니?’ 등의 메세지를 보 낸다. 다른 로맨스 영화에서의 멋있는 남자주인공과는 차이를 보인다. 또 주인공들이 처하는 상황도 답답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재훈이 다니고 있 는 회사로 이직한 ‘선영(공효진 역)’은 바람을 핀 남 자친구와 요란스럽게 헤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선 영의 집에서는 ‘왜 결혼 안하고 헤어졌냐’며 압박을 한다.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만으로도 힘든 데 직장 동료들마저 선영을 힘들게 한다. 전 직장 에서의 헛소문으로 선영의 뒷담화를 하다가 걸리 고 만다. 이렇게 ‘고구마’같이 답답한 가운데에서 ‘사이다’ 같이 시원함을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선영이다. 선영은 항상 담담하고 당차다. 초면에 다짜고짜 자 신에게 반말을 하는 재훈에게 똑같이 반말로 응수 하기도 하고, 자신을 뒷담화했던 직장 동료들에게 그들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 통쾌하게 복수한다. 이런 선영과 재훈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바로 ‘술’이다. 재훈은 영화에서 “소주 한 잔 외에는 기 댈 곳이 없다”고 한다. 직장인 들이 으레 현실 속의 답답함을 술로 푸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서인지 선영과 재훈의 ‘썸’은 술 집에서 시작된다. 둘은 술을 통 해 대화하고 술 게임을 통해 진 심을 전한다. 여기에서 가장 인 상 깊었던 게임이 등장한다. 상 대방이 입모양을 통해 말하면 그 내용을 맞추는 게임. 그들은 이 게임을 통해 은밀한 속마음 을 내보인다. 또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선영의 사랑스러운 패션이다. 빨간 도트 블라우스부터 롱부츠까지. ‘레 트로’스러운 분위기를 내면서 세련됐다. 이 외 색감 있는 영상미, 유쾌하고 거침없는 대사 등 이 영화 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술 냄새 나지만 사랑스러 운 그들의 연애를 보러 가자. 박은혜 기자 [email protected] 시대의 가을을 떠나보내며 시간이 그리는 가을의 무늬 감성적인 가을을 노래하는 가수, 다린 술 냄새 나는 현실 로맨스 ▲ 다린의 첫 앨범 「가을」의 앨범커버. 다린만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진다. ▲ 허수경,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 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 김한결, 가장 보통의 연애, 집, 2019. ▲ 제1공학관에 멈춰서 바라본 우리대학 가을 풍경 제737호 2019년 11월 12일 화요일 9 교양

SI:REVIEWpdfpress.uos.ac.kr/737/73709.pdf남자주인공부터 구질구질하다. 파혼당한 ‘재훈(김래원 역)’은 매일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 에게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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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SI:REVIEWpdfpress.uos.ac.kr/737/73709.pdf남자주인공부터 구질구질하다. 파혼당한 ‘재훈(김래원 역)’은 매일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 에게 ‘자니?’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리뷰

SI:REVIEW

어느덧 입동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이 확실히 느껴지는 쌀쌀한 날씨지만

해가 뜬 시간이라면 겉옷 하나 걸치고 밖에서 산책

을 즐기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가을이 동

장군에게 쫓겨 완전히 떠나기 전에 올해 우리학교

가을 풍경은 어떤지 보고 느끼고자 산책을 나가봤

다.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과 학교 곳곳에 울긋불긋

물든 단풍, 그리고 차갑지만 쾌청한, 얼음 꽃 같은

공기를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가을의 끝자락이 선

사하는 풍경과 분위기에 빠져든다. 우리학교는 특

히 이러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가을 산책을 하기

좋은 곳이다. 후문 언덕 외에는 경사진 곳도 딱히

없는 곳이다보니 지쳐서 거칠고 차가운 호흡을 내

쉬는 대신 기분 좋게 찬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은 없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여

유롭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주변을 바라보면 경농관과 21세기관 사이의 나

무 덤불 사이로 작은 새들이 보인다. 겨울을 준비

하는지 봄에 비해 깃털이 두텁고 몸집도 더 통통하

다. 새들이 겨울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가을을 즐기는 존재도 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깜짝 놀라는 어린 시냥이들은 우르르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고, 성묘인 시냥이들은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따스한 가을 햇빛을 찾아 낙엽을 바

스락 바스락 밟는다. 인문학관과 경농관의 담쟁이

덩굴들은 초록을 잃고 잎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정

문부터 후문까지 주르륵 늘어선 곱게 물든 나무들

역시 잎을 버리며 겨울을 대비한다. 온 세상 만물

이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는 가을을 만끽하고 다가

올 겨울을 대비한다.

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제1공학관에서 잠

시 걸음을 멈춰 행인들을 바라보면 모두 제각각이

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트렌치

코트를 고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여름 동안 옷

장에 넣어둔 과잠을 입는 사람이 있고, 두꺼운 돕

바로 몸을 꽁꽁 싸매 이미 동장군의 공격을 대비하

는 사람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강의실로

가는 사람,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사람 등 옷차림

과 이 시기를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게 제각각이다.

가을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이처럼 굉장히 다양하

다. 마지막을 즐겁게 보내기도 하고, 대비와 적응의

시간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공

통적인 것이 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 누

구도 가을이 떠남을 아쉬워할지언정 슬퍼하지 않

는다. 그저 다음을 기약할 뿐이다. 다음 가을은 올

해와 조금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시냥이들은 성묘

가 될 것이고 새들은 더 많은 무리를 꾸린 상태일지

도 모른다. 사람들의 옷차림 유행도 새롭게 바뀔 것

이다. 내년에 찾아올 가을엔 우리대학에 어떤 모습

이 펼쳐질지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사진_ 이길훈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다. 요즘같이 여름

과 겨울이 길고 봄, 가을이 짧은 시기에 가을은 하

나의 고유한 계절이라기보다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전 잠깐 거치는 간이역 같다. 기자는 겨

울보다는 여름이 좋다. 동결되어 있는 듯한 겨울에

비해 여름에는 무언가 역동적이고 설레는 일이 일

어날 것만 같다. 같은 이유로 여름에서 겨울로 가

는 가을보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봄이 더 좋다.

이렇게 보면 봄과 가을이 조금

서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

각도 든다. 자신들도 사계(四季)

를 구성하는 엄연한 계절이므로

나름의 합당한 대우를 받을 자격

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

까. 그래서 가을의 무늬를 담아낼

수 있는 시집을 한 권 골랐다. 바

로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

지 않는 역에서』다.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

던 태양처럼 짧”(「레몬」)은 여름을

뒤로하고 가을은 온다. 그런데 시

인에게 가을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계절이다.

시인에게 가을은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

픈 길”이고,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을 가을의 무늬라고 말한다.(「이 가을의 무

늬」)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농부의 심정으

로 지난 10개월간의 경험을 되짚어본다. 시간이라

는 씨앗을 뿌려 경험들을 길러내었으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추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

확할 의미가 손에 확연히 잡히지 않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면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오지 않는 역에서』는 시간 속에서 무리해

서 의미를 추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흘

러간 시간은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을 보여준다.

가끔 누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

이든 마땅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

해주는 문장을 만나는 것은 반가

운 일이다. 시인이 “사라져갈 여름

은 해독할 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

다”라고 쓸 때, “우리의 현재는 나

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

큼 아름다웠다”라고 쓸 때 반가운

감정이 든다.

언어는 생각의 그릇이다. 상투

적인 언어는 상투적인 생각을 낳

는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는 낯선 언어들

을 만나보고 싶다면 가을이 다 가기전에 시집 한 권

을 손에 쥐어보는 것 어떨까.

김세훈 기자 [email protected]

영원할 같았던 여름의 이글거림이 지나가고 어

느새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에 색색의 단풍들이 펼쳐져 있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가을을 소재로 한 노래라고 하면 이문세

의 ‘가을이 오면’, 양희은의 ‘가을 아침’,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많은 노래를 떠

올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기자는 싱어송라이터 다

린의 노래를 가장 좋아하고 가을의 분위기와 잘 어

울린다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다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

은 ‘뭐, 달인이라고?’다. 달인이

아니라 다린은 2017년 ‘가을’이

라는 곡으로 데뷔해 서정적인 가

사와 깊은 울림을 주는 노래로

인디 음악신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다.

‘그대 나 없는 가을을 미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흘러가고 나는

지금도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

니/혹시나 우리 서로 지나친대도 그 가을은 여전히

그대로 어느 곳은 꽃 피우고 어느 곳은 쓸쓸한 그

대로 사랑하고 있을 테니’ 다린이 부른 ‘가을’이라

는 노래의 가사다. 잔잔한 멜로디에 그냥 이야기하

는 듯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가사는 가슴 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가을이 새벽공기의 잔잔함이 느껴지는 노래라면

‘까만 밤’은 해가 짧아져 깊어진 가을밤에 잘 어울

리는 노래다. ‘난 까만 밤에 묻어있던 인사들을 기

억해 빈자리처럼 나보다 오래된 눈으로 잠들거나

혹은 지나쳐버린 취한 듯 망설이는 가장자리/모든

풍경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기적처럼 못다 한 말들

은 저 멀리 산산이 흩어지며 발견하길 기다리는 듯

하루 곳곳에 숨은 채 하나의 비밀이 되어 내일을

만드네’ 경쾌한 멜로디에 밝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

래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매일 밤 학

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앙로에서 이 노래

를 듣다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진한 회색빛

의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

는 별과 달까지 매일 보는 똑같

은 풍경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Rubato’라는 곡은 낙엽이 떨

어지는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린

다. ‘넌 포말처럼 흩어져 어느 단

편으로 나를 데려가 너의 눈꺼풀

사이로 부서지는 빛 파도처럼 나

를 삼켜요/우리가 밟게 될 모든

곳은 희미하지만 사라지고 있지

만 나의 잔향은 널 위한 기도 너

는 다시 있을 나를 위한 위로’ 귀

를 사로잡는 다소 투박한 듯한 기타 소리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걷다 보면 갈색빛의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져 일부로 낙

엽이 쌓여있는 곳으로 지나가게 된다.

‘가을 타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

각이 들 정도로 왠지 모르게 감성적이게 되는 요

즘,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 줄 다린의 노래를 들으

면서 중앙로를 걸어보면 색다른 감정들과 풍경들

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유정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옆구리가 시린 계절이 돌아왔다. 내 옆구리에 아

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게 다가오는 이런

계절에는 로맨스 영화를 봐줘야 한다. 그렇게 마음

이 이끄는 대로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를 봤다.

우리가 흔히 꿈꾸는 연애는 아름답고 성숙한 어

떤 그 무엇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현실의 연

애는 매우 찌질하고, 한밤중에

이불을 차게 만든다.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는

기존의 미디어에서 그리던 환

상적인 연애를 벗어나 현실적

연애를 그렸다. 엉망진창이고

환상적이지 않은 현실적 연애.

남자주인공부터 구질구질하다.

파혼당한 ‘재훈(김래원 역)’은

매일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

에게 ‘자니?’ 등의 메세지를 보

낸다. 다른 로맨스 영화에서의

멋있는 남자주인공과는 차이를

보인다.

또 주인공들이 처하는 상황도

답답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재훈이 다니고 있

는 회사로 이직한 ‘선영(공효진 역)’은 바람을 핀 남

자친구와 요란스럽게 헤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선

영의 집에서는 ‘왜 결혼 안하고 헤어졌냐’며 압박을

한다.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만으로도 힘든

데 직장 동료들마저 선영을 힘들게 한다. 전 직장

에서의 헛소문으로 선영의 뒷담화를 하다가 걸리

고 만다.

이렇게 ‘고구마’같이 답답한 가운데에서 ‘사이다’

같이 시원함을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선영이다.

선영은 항상 담담하고 당차다. 초면에 다짜고짜 자

신에게 반말을 하는 재훈에게 똑같이 반말로 응수

하기도 하고, 자신을 뒷담화했던 직장 동료들에게

그들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 통쾌하게 복수한다.

이런 선영과 재훈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바로 ‘술’이다. 재훈은

영화에서 “소주 한 잔 외에는 기

댈 곳이 없다”고 한다. 직장인

들이 으레 현실 속의 답답함을

술로 푸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서인지 선영과 재훈의 ‘썸’은 술

집에서 시작된다. 둘은 술을 통

해 대화하고 술 게임을 통해 진

심을 전한다. 여기에서 가장 인

상 깊었던 게임이 등장한다. 상

대방이 입모양을 통해 말하면

그 내용을 맞추는 게임. 그들은

이 게임을 통해 은밀한 속마음

을 내보인다.

또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선영의 사랑스러운

패션이다. 빨간 도트 블라우스부터 롱부츠까지. ‘레

트로’스러운 분위기를 내면서 세련됐다. 이 외 색감

있는 영상미, 유쾌하고 거침없는 대사 등 이 영화

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술 냄새 나지만 사랑스러

운 그들의 연애를 보러 가자.

박은혜 기자 [email protected]

시대의 가을을 떠나보내며

시간이 그리는 가을의 무늬

감성적인 가을을 노래하는 가수, 다린

술 냄새 나는 현실 로맨스

▲ 다린의 첫 앨범 「가을」의 앨범커버.

다린만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진다.

▲ 허수경,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

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 김한결, 가장 보통의 연애, 집, 2019.

▲ 제1공학관에 멈춰서 바라본 우리대학 가을 풍경

제737호 2019년 11월 12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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