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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느끼는 순간 The Moment That I Know That I Feel

Sean Se Hwan RO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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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 That I Know, That I Feel 2015.1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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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Sean Se Hwan ROH 2015

안다고 느끼는 순간

The Moment That I Know That I F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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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느끼는 순간

The Moment That I Know That I Feel

노세환 Sean Se hwan R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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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 0.000007456 마일 2만리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1869년에 쓴 고전 과학소설 해저 2만리를 재미

있게 읽었다. 생물 분류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당시의 분류체계에

따라 바다 생물들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웠고, 잠수함 노

틸러스호의 움직임이나 해류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 설명하는 부분

들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 깊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 심취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심

해에 대한 감동에만 정신이 빠져, 한번도 2만리가 어느 정도의 깊이인

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깊은 바다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

측만 있을 뿐이었다.

20,000리. ‘리’는 편의상 번역된 단위일 뿐, 원제에는 ‘리그’를 사용하

고 있다. 실제 20,000리그는 69,046.7 마일의 길이이고, 이는 111,120

킬로미터에 해당한다. 11만 1천 1백 20킬로미터라고 표기하면, 우리에

게 더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듯하며 지구 한 바퀴의 거리가 약 4만 킬로

미터라고 알려져 있으니, 지구 3바퀴가 조금 안 되는 거리라 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느껴지지만, 이도 역시 그 깊이를 상상하기 쉬운 숫자

는 아니다. 단위를 친숙한 것으로 바꿔 갈수록 크기를 가늠하기 쉬워지

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포탈사이트에서 운영하는 단위계산기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1cm 뜻

하는 길이의 단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간, 정, 리 등은 한번도 본

적 없는 단위들이고, 마일, 야드, 피트 등은 미국에서 사용하는 단위들이

라 귀에는 익숙하지만, 실제 길이를 가늠할 때는 여간 어렵지 않다. 수

년 전 캐나다에서 운전을 해 보았던 경험이 있는데 자동차에 마일 단위

가 가장 비중 있게 표시되어 있고, 거리의 표지판에도 온통 마일로 속

도표기가 되어있어서,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

졌던 기억이 있다.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rint 52x52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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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0.000007456 마일이 얼마나 될까? 사실은 1.2cm 가 조

금 안 되는 길이이다. 손가락 반 마디 깊이의 물이 깊이를 가

늠하기 쉽지 않도록 마일로 환산하여 보여준다면 ‘마일’단위

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0.000007456마일이 얼마나 된다

고 생각할까? 각각의 깊이가 다르게 보이고 주변의 환경을 철

저히 차단한 채 본다면 그 길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단지 단위의 개념에 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를 통해 나는 대중들이 잘 모르는 사실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처음 접할 때 대중

들은 그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노력하기 보다는 일단 그것이

보이는 그 상태를 나름의 방법으로 대충 머리 속에서 짜맞추기

시작하고 그것이 사실인양 믿기 시작한다. 설혹 나중에 그것에

해저 0.000007456 mile

대한 진실을 알았을 때, 본인이 별 생각 없이 짜맞추어 놓

은 결과와 실제의 결과가 다를 때, 사람들은 알아보기 힘

든 단위를 쓴 사람들을 탓하기 시작할 것이다. 요즘 같이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위에 언급한 단위

계산기를 사용하기만 하면0.000007456 마일이 1.2cm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정확한 실제

거리에 대한 궁금증에 우선하는 귀찮음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언제나 제

공하는 편에서 알아보기 쉬운 방식으로 정보를 나타내야

한다는 대중들의 기대는, 사실에 대한 아주 약간의 조작

가능성만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무산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인지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이다.

너무 얕아서 작은 물고기 조차 살수 없는 1.2cm깊이의 수조를 제작했다. 사람들

은 많은 경우 물의 수면만을 볼 수 밖에 없다. 해변에서도, 한강을 건널 때도 물

의 표면에 보이는 물결만을 보며 물을 인지한다. 한강의 깊이는 평균 7-8m정도

이며, 마포 근처의 깊이는 30m가까이 된다고 하나, 이런 정보들도 누군가에 의

해 측정된 깊이이며, 한강을 직접 보며 가늠할 수 있는 깊이는 아니다. 바다의 경

우 깊이는 훨씬 더 추상적이다. 옛날에는 바다의 깊이를 잴 때 줄에 추를 묶어

바다로 내려 보낸 뒤 줄의 길이를 가늠하여 측정했다고 하나, 해류 때문에 일직

선으로 내려 보내기 어려움이 있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며, 지금은 음

파를 쏘아 보내 음파가 돌아오는 시간을 거리로 환산해 측정한다고 하니 소리와

깊이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 측량방식이 매우 추상적으

로 느껴진다. 또한 소리가 바다 깊숙이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과정에 소리의 길

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1.2cm는 나에게 매우 익숙한 길이이다. 작업할 때 주로 쓰는 목재의 두께가

1.2cm 이고 내가 쓰는 노트북 컴퓨터의 두께도 1.2cm, 자동차 키 홀더의 두

께도 1.2cm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 에서 선보였던 만

두 빚는 장인이 일정한 양의 반죽을 고르게 떼어내는 것처럼 나도 1.2cm는 보

지 않고도 인지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센티미터 단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

나 1cm정도는 대략적으로 상상해내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수심 1.2cm 의 수조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rint 52x52cm 2015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rint 52x52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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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길이를 이해하기까지에 많은 방해물이 있다면, 여전히 그 깊이를

가늠하기 쉬울까?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들로 내가 사용하는 것들은 사람들

이 평소에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지식이다. 지도에 표기되는 바다의

깊이는 색으로 표기된다. 얕은 바다는 옅은 계열의 파란색으로 깊은 바다는

더 진한 계열의 파란색으로 보여준다. 이는 분명히 자연에서 보여지는 현상

을 기준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일 테지만 이런 상식을 다른 조건 아래 보여

준다면, 이 상식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자

리한다. 모두 다르게 보이는 물의 깊이들, 하지만 다 같은 물의 깊이 그것도

극도로 얕은 1.2cm 깊이의 물, 이것은 0.000007456mile(마일) 깊이의 물이다.

◀︎ 갤러리 버튼 설치 전경▲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sdfsdfsr izznt 52x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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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범주

유인원들의 지능 수준이 인간의 그것에 매우 가깝지만 그들이

인간처럼 문명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학습 능

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학습능력은 상호주관

성이라고 하는 인간 뇌의 기능에서 비롯한다. 이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인지능력이

며, 이런 학습 능력 없이는 아마도 내가 이런 글을 쓸 수도 없

고, 비판적인 지적 놀이에 빠지기는 커녕, 나무를 타며, 열매

를 따먹고 다녔겠지만, 가끔은 이런 학습능력이 사실을 인지

하는 것을 방해한다.

집 넓이를 잴 때 사용하는 공식 단위가 평 단위에서 제곱 미터

단위로 바뀐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곱 미터로는 가늠

하기 어렵고, ‘평’에 의존적인 사람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런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는 혹시 기존에 학습

한 관습에 지나치게 의존하는데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혹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귀찮음이 우리

의 뇌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로부터 듣는 잔소

리가 조언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반복됨이 거슬림과 동시에, 말 하는 이들과 듣는 이

들이 지닌 이해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잔소리

를 하는 주체가 가지는 이해의 범주를 깨뜨리기 어려운 것처

럼 내가 가진 이해의 범주는 그들을 향해 맞춰있는가에 대한

생각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갤러리 버튼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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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버튼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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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다면 깊고얕다면 얕지

If You Say It’s Deep It’s DeepIf You Say It’s Shallow It’s Shallow

노세환 개인전2015.10.7-28

갤러리 버튼서울특별시 성북구 창경궁로 35길 83, 1F83 Changgyeonggungro 35-gil, Seongbuk-gu, Seoul, Korea 82 70 7581 6026

https://www.facebook.com/GalleryButtonhttp://www.gallerybutton.com

Solo Show

2014 학습된 예민함, 표 갤러리, 서울

2013 Meltdown, 표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미국

자장면집 백자, 자하미술관, 서울

Is An Apple Red?, 갤러리 마노, 서울

2012 Meltdown-환영에 대한 구체적 재현, 표 갤러리, 서울

Meltdown-환영에 대한 구체적 재현, 아디론데크 호수 아트센터, 뉴욕, 미국

2010 크리스마스에 사과잼 만들기, 표 갤러리, 서울

2008 One Second For Each, 중앙갤러리, 대구

A Point of View For New World, 고바야시 갤러리, 동경, 일본

One Second For Each, 문신미술관, 서울

2007 Little Long Moment, 마노 갤러리, 서울

2006 노세환 사진전, 갤러리 정, 서울

Movingscape, 인사아트센터, 서울

Selected Group Show

2015 교차-시선, 리각 미술관, 천안

Happy Museum Soo, 금정문화회관, 부산

Touching Moment in Macao Through Artist’s Perspective,인사아트센터, 서울

2014 사각사각 현상소, 부산 금정문화회관, 부산

Total Support, 토탈미술관, 서울

10분 마주하다, 아다마스253 갤러리, 헤이리, 파주

포착된 시간, 갤러리 관악_2014 서울 시립미술관 대외협력전시, 서울

3D Print & Art, 사비나 미술관, 서울

백자예찬, 서울 미술관, 서울

2013 Total Support,토탈미술관, 서울

Art and Cook, 세종문화회관, 서울

The Show Must Go On, 라셀레 미술대학, 싱가폴

Arts Contemporaians De Coree du sud, 치바우 센터, 뉴 칼레도니아, 프랑스

Unordinary Sight, 홍콩 하버시티, 홍콩, 중국

Selected Project

2015 The Road show, 7번국도, 토탈미술관

2015 아티스트 팸,마카오 프로젝트,마카오 관광청, 장흥 아트파크

2014 The Road Show 경주, 토탈미술관

Collaboration with Le witt, 서울옥션

2012 New Caledonia Project, 뉴 칼레도니아 관광청, 금산갤러리

Awards

2014 서울 문화재단 시각 미술 지원 기금

2013 서울 문화재단 시각 미술 지원 기금

2009 송은 미술대상, 입선

2008 아시아프 작가상, 조선일보

30회 중앙 미술대상, 선정작가, 중앙일보

신진작가 뉴 스타트 지원, 문예진흥원

Collection서울시립미술관, 코리아나 미술관, 강남구청 등

노세환 Sean Se hwan Rho

Copyright ⓒ 2015 by 노세환&갤러리 버튼/디자인: 민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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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러 간 자리에서 그는 우리의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를 닮은 전시를 내밀었다. 그

건 버튼의 전시가 늘 그러했듯 내가 그와 그의 작품을 ‘안다고 느끼는 순간_The moment that I feel

that I know’을 철저히 배신하는 기획이었다. 반듯한 그의 작업이 벽에 여남은 개 걸려있고, 얌전히 자

리 보전하고 앉아 작품을 팔거나 설명하는 그 뻔하고 일반적인 전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결국 ‘어딘가 편집증적이지만 그렇다고 어수선하지는 않은’ 전시를 하게 되었고, 가만 돌아보니

그건 작가를, 그리고 나와 그의 관계를 쏙 빼 닮았다. 적어도 전시가 열리는 지점에선 깊이가 있고 없

고, 담론이 어느 지점에서 생기는지 따위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고,

내가 그 얘기를 받아 멋대로 말할 수 있는 전시가 되는 것.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를 닮았다고 킥킥

대며 대화할 수 있는 것. 일년에 몇 번 대낮부터 마시며 수다 떠는 그런 날이, 전시가 되었다고 생각하

면 이 전시는 충분히 괜찮다.

대화가 좀 겉도는 것 같나?

그건 우리가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rizznt 52x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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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와 또 그것을 닮은 전시다. 농담으로라도 ‘회고전’ 운운할 수 있을 만큼 그의 10년이 순식간

에 지나가는 전시고, 그런 그와 그의 10년을 지켜본 사람이 이제야 하게 된 전시다. 더 큰 공간과 더 큰 기회를 얻어 전시하

는 작가에게 쉽게 함께 전시를 하자, 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우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아 보이는 관계를 조금 더 유지

해야 했으며, 조심조심 전시를 이야기하고 작업실에 놀러 갔던 날에는 예의 일 년에 몇 번 있는 통음을 대낮부터 해야 했다.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물은 누군가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데 이 묘한 10년의 (감히) 우정이 ‘깊다면 깊

고, 얕다면 얕은’ 전시가 어떤 물길을 찾아 흘러가게 될 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전시는 갤러리와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다. 우리는 분명 ‘일 하는 상대’로서의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건 어떤 형태로든 실망이나 분노로 이어지기 십상이라

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노련한 가정주부처럼 전시를 요리할 것이고, 무딘 칼처럼 움직이는데 익숙하고 편한 공간과 나

는 그가 원하는 요리를 만드는데 순간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 작품을 옮겨 놓으며 농담처럼 ‘이게 무슨 회고전인가’라고 말했었다. 그는 전시가 노세환을 알기 위한, 혹은 그

의 작업이 흘러간 방향을 작은 공간을 연구소처럼 꾸며 보여주고 싶어했다. 작품을 걸기 시작하자 갤러리는 곧 작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수사가 아니라 정말 ‘가득 찼다’. 벽에는 18조각의 신작이 걸렸고, 안쪽 공간으로는 그 신작을 만들기

위해 그가 고민했거나 실험한 내용들과 장치가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와 바닥에까지 작품을 내려놓은 그는 빈 공간을 남

겨두지 않으려는 듯 했다.

‘어딘가 편집증적이면서 딱히 어수선하진 않은 선생님 같은 디스플레이가 나왔네요.’ 내가 말하자, 그가 부정했다. 아니, 부

정하고 싶어했다. 그는 어수선하게 널부러진 전시를 원했던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는 그랬다. 어수선하거나, 조금 널부러

져 편안한 인간이 되고 싶어했고 넉넉하고 적당히 틈이 있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고슴도치처럼 촉이 서있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호불호가 명확했으며, 아주 작은 것에서 멋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흔한 말로 ‘디테일이 살

아있는 뾰족한 사람’이었던 게다.

▲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sds archival pigment prizznt 52x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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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큐레이터 생활을 시작할 무렵, 노세환은 정말 대나무

처럼 자라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이 표현을 참 싫어하겠지만, 찾는 사람과 공간이

많은 작가들을 바라보는 당시 마음은 딱 그런 것이었다. 나는 크지 않은 공간에

갇혀 버팀과 견딤으로 완성될 리 만무한 큐레이터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었다. 딱

히 앞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다시 도망칠 용기도 없었던 시절, 고맙게도 노세환은

그래도 옆에 붙어 있어줬다. 가끔씩 술이나 밥을 사주며 그는 “일단 자기 앞가림

을 잘 해야 좋은 큐레이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 땐 그 말이 정

확히 어떤 뜻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말하는 그가 얄밉기도 했었다. 선의를 선의

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할 게 무어냐,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물론 지금

은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생각해보면 9년 세월 동안 그를 자주 본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오래 두고 본 사람, 쯤이 되겠다. 서로에 대해 듣기 좋고, 싫은 얘기들을 건

너 건너 들어 왔을 텐데 딱히 그도, 나도 ‘그러므로 인연을 접자’거나 ‘따져보자’

는 생각은 하지 않은 듯 하다. 가끔 술이 취하면 호형하며 반쯤 말을 놓기도 하

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선생님’으로 돌아간다. 어느 위치에서든 할 것

들은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엇비슷하다. 그래도 그는 나의 거의 모든 상황들을 알

고 있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년에 두어 번 만나 통음하며 나누는 얘

기들이 생각보다 깊은 탓이다.

남들 하는 일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세상에 나보다 특별하고 특이한 사람

이 있을 리 없다는, 망아지 같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남의 돈 받아 산다는 게

그 때라고 딱히 쉽진 않았고, 일의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일은 일 같지

도 않았던 시절이었으며, 그러니 당연히 현실에서 도망치기 좋은 시절이기도 했

다. 그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홍대 앞, 하필이면 어느 갤러리

지하였다. 거기에 노세환이 있었다.

노련한 주부의 무딘 칼

0.000007456 mile_Under the Sea (Ceruleaan Blue) archival pigment p

그는 자기 신발 사진을 찍고 오려낸 작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게 정말 노세환

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심심풀이 같은 것이었고 진짜 작업은 장

흥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1초의 노출값을 두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역이나

신호등에서 찍은 사진들은 ‘세련’이란 말이 참 어울리는 작업이었다. 설치와 미

디어의 시대였고, 대안과 비영리의 시기였다. 그의 ‘세련됨’이 모두에게 환영 받

을 리 만무했고, 그 즈음의 그는 대형 갤러리에서 꽤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젊

은 작가였음에도 환영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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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다면 깊고얕다면 얕지

If You Say It’s Deep It’s DeepIf You Say It’s Shallow It’s Shallow

함성언 Hamm Su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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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다면 깊고얕다면 얕지

If You Say It’s Deep It’s DeepIf You Say It’s Shallow It’s Sha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