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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양·한방 관계와 통합의학의 전망 조병희(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의료사회학) 1. introduction 우리나라가 생의학과 한의학의 2원적 의료공급구조를 갖고 있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세 계적으로도 생의학과 전통의학 또는 대체의학이 병존하는 다원적 의료체계를 갖는 나라가 많지만 한국의 경우는 양자간의 관계가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째, 역사적으로 두 의학 사이에는 깊은 불신과 대립 및 갈등이 존재해 왔다. 두 의학간 에는 공식적인 대화나 교류가 거의 차단되어 있다. 법적으로도 의사는 한방의료를 시술할 수 없고, 한의사는 의학적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성원의 수, 의료시설의 수, 정치사 회적 영향력에서 월등하게 앞서 있던 의사들은 수십년 전부터 ‘의료일원화’를 주장해 왔다. 이에 대응하여 한의사들은 의료일원화는 ‘흡수통합’이고 곧 한의학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갖 고 있었고 의사들의 공세에 맞서 ‘민족의학 사수’라는 정치적 고립주의를 선택하였다. 둘째, 한의사들은 국가나 의사들의 지원이나 협력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을 지향했고, 주로 시장의 힘에 기대어 발전하여 왔다. 1980년대에 한방에 대한 사회적 인기가 높아지면 서 교육·연구·시술 체계가 정비되고 성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익집단으로 발전하였다. 1992년에 약사들과 분쟁을 겪으면서 집단적 결속력을 강화하였고 국가에 대하여 한의학을 의학과 동등한 대우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셋째,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한국의 한의학은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의학과 동 일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의사나 한의사 모두 6년의 대학교육과정을 이수한 이후에 각 기 면허를 부여받는다. 한의학을 전담하는 행정부서가 있고,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으며, 국 립 한의학 연구소와 국립의료원 한방진료부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의 각 보건소에도 한방진 료부서가 존재하고, 한의사는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로 임용되며, 정부는 한방의료를 국가전 략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정책을 갖고 있다. 전세계에서 전통의학이 생의학과 유사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경우는 사회주의 전통의 중국과 북한 및 베트남을 제외하면 한국이 거의 유일하 다. 넷째, 한의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하고 제도화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의사들은 전통 적 철학과 이론에서 벗어나 과학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globalism의 영향 하에서 한 의학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국내적으로 medical-industrial complex 모형이 한방의료계에도 도입되면서 탈이론화, 과학화, 상업화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이러한 추세는 한의사들과 의사들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고 의학을 통합하는데 매 우 중요하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의사들 내부에서 한방의료의 미래나 진로에 대하여 인식차가 크다. 또한 대외적으로 의사들과의 갈등구조가 워낙 견고하여 통합의료의 제도적 추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의사들 또한 침술 등 제한된 범위에서 한방의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의학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적대적인 점도 통합의료의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 여섯째, 따라서 한국에서 통합의료는 의사 또는 한의사가 어느 일방이 주도하거나 양자가

양·한방 관계와 통합의학의 전망snu-dhpm.ac.kr/pds/files/%BE%E7%C7%D1%B9%E6%B0%FC%B0%E8... · 2006-04-17 · - 1 - 양·한방 관계와 통합의학의 전망 조병희(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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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한방 관계와 통합의학의 전망

    조병희(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의료사회학)

    1. introduction

    우리나라가 생의학과 한의학의 2원적 의료공급구조를 갖고 있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세

    계적으로도 생의학과 전통의학 또는 대체의학이 병존하는 다원적 의료체계를 갖는 나라가

    많지만 한국의 경우는 양자간의 관계가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째, 역사적으로 두 의학 사이에는 깊은 불신과 대립 및 갈등이 존재해 왔다. 두 의학간

    에는 공식적인 대화나 교류가 거의 차단되어 있다. 법적으로도 의사는 한방의료를 시술할

    수 없고, 한의사는 의학적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성원의 수, 의료시설의 수, 정치사

    회적 영향력에서 월등하게 앞서 있던 의사들은 수십년 전부터 ‘의료일원화’를 주장해 왔다.

    이에 대응하여 한의사들은 의료일원화는 ‘흡수통합’이고 곧 한의학의 소멸이라는 인식을 갖

    고 있었고 의사들의 공세에 맞서 ‘민족의학 사수’라는 정치적 고립주의를 선택하였다.

    둘째, 한의사들은 국가나 의사들의 지원이나 협력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을 지향했고,

    주로 시장의 힘에 기대어 발전하여 왔다. 1980년대에 한방에 대한 사회적 인기가 높아지면

    서 교육·연구·시술 체계가 정비되고 성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익집단으로 발전하였다.

    1992년에 약사들과 분쟁을 겪으면서 집단적 결속력을 강화하였고 국가에 대하여 한의학을

    의학과 동등한 대우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셋째,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한국의 한의학은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의학과 동

    일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의사나 한의사 모두 6년의 대학교육과정을 이수한 이후에 각

    기 면허를 부여받는다. 한의학을 전담하는 행정부서가 있고,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으며, 국

    립 한의학 연구소와 국립의료원 한방진료부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의 각 보건소에도 한방진

    료부서가 존재하고, 한의사는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로 임용되며, 정부는 한방의료를 국가전

    략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정책을 갖고 있다. 전세계에서 전통의학이 생의학과 유사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경우는 사회주의 전통의 중국과 북한 및 베트남을 제외하면 한국이 거의 유일하

    다.

    넷째, 한의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하고 제도화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의사들은 전통

    적 철학과 이론에서 벗어나 과학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globalism의 영향 하에서 한

    의학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국내적으로 medical-industrial

    complex 모형이 한방의료계에도 도입되면서 탈이론화, 과학화, 상업화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이러한 추세는 한의사들과 의사들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고 의학을 통합하는데 매

    우 중요하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의사들 내부에서

    한방의료의 미래나 진로에 대하여 인식차가 크다. 또한 대외적으로 의사들과의 갈등구조가

    워낙 견고하여 통합의료의 제도적 추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의사들 또한 침술 등 제한된

    범위에서 한방의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의학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적대적인 점도 통합의료의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

    여섯째, 따라서 한국에서 통합의료는 의사 또는 한의사가 어느 일방이 주도하거나 양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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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의하여 추진되기는 어렵고 오히려 의료와 한방의료의 산업화를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생산방식이 시장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집단

    과 정치보다는 시장과 자본의 힘이 통합의료에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의료계(한의계)에서는 두 의학의 공동점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의료계는 한의학의 과학화라는 명분으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두 의학의 통합하는 일

    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의계는 두 의학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병행 발

    전하고 보완하는 체계가 필요하고 이를 ‘협진체계’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은 각기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상대방과 다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업무영역에 대

    한 배타적 독점을 기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생

    의학이나 한의학은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의 과정에 있게 되고 다른 의학의 속성들을 배우거

    나 받아들여 동화되는 ‘문화적 적응’의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즉 두 의학의 차별성이 부각

    된다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공통성이 증대되는데 대한 반작용이라는 의미도 있다. 두 의학이

    통합되는 것이 필요한지 아니면 병행 발전하는 것이 좋은지의 판단은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

    에 없다. 이글은 그러한 정치적 판단을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이글은 현재에

    두 의학이 어떤 관계인지를 파악하고 사회일반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두 의학이 공통점이 크

    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글은 양·한의학의 관계를 정치적, 문화

    적, 과학적 관계의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통합의학의 전망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대체로

    1980년대까지는 두 의학은 정치적 대립관계가 강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두 의학 내부에

    서 모두 한의학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증대하는 시기였다. 다른 한편 비록 두 의학이 정치

    적으로는 대립되어 왔지만 문화적으로는 교류가 증대되어 온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세 과정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장기적으로는 의료통합으로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현

    단계에서 그 과정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2. 정치로서의 의료체계

    전통적으로 두 의학의 관계는 정치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일제 시대에 전통 한의제도가

    지위 격하되었던 점이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한의사 제도가 복원된 것은 한의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국가의 정치적인 결정이 크게 작용한 결

    과로 볼 수 있다. 한의사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한의학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지원은 없었기

    때문에 한의학의 발전은 매우 느렸다. 한의학은 국가의 지원보다는 시장의 수요에 근거하여

    발전하였다. 1980년대 들어와 경제발전의 결과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한의학

    에 대한 수요도 커졌고 그에 따라 한의학의 사회적 위상도 점차 높아졌다. 그렇지만 생의학

    체계와 한방 의료체계는 그 규모나 역할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울어져 있었고 한

    의사들은 항시 ‘흡수통합’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의사들은 1950년대에 한의사제도의

    신설 자체를 반대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의료통합(의료일원화)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의사들은 두 의학 사이의 힘의 우열이 분명한 상황에서 의료일원화는 한의학의 소멸로 이

    어질 것으로 판단하면서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한의사들의 대응양식이 ‘민족주의’였다. 대외적으로는 한의학이

    수천 년에 걸쳐 한국인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져 온 ‘민족의학’임을 주장함으로써 생의학의

    보편주의에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이었다. 한의사들은 1986년에 漢醫學을 韓醫學으로 명칭

    을 변경하였다. 또한 1989년에 발간한 ‘대한한의사협회40년사’는 ‘民族醫學中興’이라는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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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를 첫 쪽에 게재하고 있다. 이후 ‘민족의학’은 한의사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용어

    가 되었다. 민족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은 한편으로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전략

    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생의학과의 관계에서 의사들에 의한 의료일원화에 대응하고 한의

    학적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폐쇄주의 전략이기도 하다. 의사들도 의료를 일원화하기 위

    한 실질적인 연구를 하지는 않고 정치적 공세만을 했을 뿐이고 한의사들 역시 이에 정치적

    으로만 맞대응을 했을 뿐이다. 양자 간에는 공식적인 교류나 협력을 위한 노력은 거의 부재

    하였다.

    한의사들의 ‘정치적 결속’은 1992년에 발생한 ‘한약조제권 분쟁’을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

    었다. 1970년대까지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하였기 때문에 의료기관 이용이 저조하였고,

    상대적으로 값이 싼 약국을 많이 이용하였다. 그런데 1980년 들어와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의료보험제도가 확대적용 되면서 의료기관 이용은 증가하고 약국이용은 상대적으로 감소하

    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사들은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약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한의사들을 자극하면서 두 집단 사이에 영역분쟁이 발생하였다. 두 집단은 대규모의

    집단적 시위와 파업을 전개하면서 격렬한 분쟁을 벌였지만 국가는 이를 조정할 능력이 없었

    다. 결국에는 시민단체의 중재로 분쟁이 종료되었다. 약사들은 기존 약사에 한하여 일정한

    시험을 거쳐서 제한된 종목의 한약조제 판매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고, 한의사들은

    국가로부터 정부 내 한방정책부서의 설치, 국립 한의학연구소의 설립, 국립의료원의 한방진

    료부 설치, 한의사들의 군의관 및 공중보건의사 임용 등 일련의 한방지원정책의 선물을 받

    았다.

    한약분쟁은 국가와 한의학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한의사들은 국가가 약

    사들과 결탁하여 한의사들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와 생

    의학으로 부터 수난 받아 온 한의학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형상화되었고 따

    라서 한의사들은 약사는 물론 국가에 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한의사들

    의 일치된 노력은 국가의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한의학 정책을 수립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무관심하던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을 받게 된 것은 분명

    대단한 기회가 되었다. 한의사들도 이제 의사나 약사 못지않게 국가의료체계의 일원임을 인

    정받았고, 각종의 의료정책과 제도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족의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서 국가로부터는 지원을 얻고 의사와

    약사들의 공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면서 이후에도 한의사들은 ‘민족의학’의 정치적 지

    향성을 굳건하게 유지하였다. 민족의학은 의사나 약사들에 대항하여 한의학의 경계선을 분

    명히 긋고 외부의 침입을 방지하고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갖게 된다. 의사와 한의

    사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해 온 불신은 민족의학의 당위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밑바탕

    이 된다.

    2004년 겨울부터 2005년 전반기까지 진행되었던 일련의 갈등은 두 집단 간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2004년 겨울에 한의사의 ‘CT'(computer tomography) 사용을 둘러싼 분쟁이 있

    었다. 현재의 의료법은 한의학과 생의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의사와 한의사가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한의사들이 ‘양방’ 진단기기

    인 CT를 사용할 수 없지만 많은 한의사들이 정밀한 진단을 위하여 CT를 사용하고 있다.

    의사회가 이를 문제 삼아 법원에 제소했지만 법원은 2004년 12월에 '한의사들도 CT를 사

    용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의사들은 한의사들이 ’제대로 교육도 받지 않은 채‘ CT를 사

    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의료법 규정에 의한 한방진료의 범위를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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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위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의사들은 한의학의 발전에 따라 보다 정밀한 진

    단을 위하여 CT의 사용이 필요하며 또 필요한 교육도 받았다고 주장한다.

    2005년 초반에는 ‘한방감기약’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한의사들이 “부작용이 없어

    임산부도 부담 없이 치료받을 수 있고 겁 많고 까다로운 아이들도 주사기의 두려움이 없이

    빠른 치료가 가능하다”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전국의 한의원에 게시하였고, 이에 맞서 의

    사들은 한약의 부작용을 알리는 포스터를 전국의 의원에 게시하였다. 이들은 서로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면서 법원에 제소하는 등 큰 갈등을 빚었다(조선일보, 2005.2.15).

    두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양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의사들은 의료일원화 문

    제를 제기하였다. 2005년 3월에 의사협회는 ‘국민의 건강과 의료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의

    료일원화를 추진하겠다는 정책구상을 발표하였다(Daily Med, 2005.3.19). 그러면서 “현재

    한의학 교육과정의 현실은 교과과정의 80%가 현대의학 과목이며, 공인되지 않은 교재를 통

    해 현대의학을 숨어서 배울 것이 아니라 의학교육 및 제도통합을 통해 정당하게 과학화된

    의학을 배울 수 있도록 조속히 통합하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

    서 한의계는 의료일원화 주장이 ‘한의학 죽이기 전면전 선포’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면서 강

    력하게 반발하였다(한의신문, 2005.3.14).

    세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인접하여 발생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별개의 사건들이다. CT 문

    제는 한의사의 업무영역에 관한 사안이고, 한방감기약은 과학성에 대한 문제이며, 의료일원

    화는 의학교육과 면허제도에 관련된 사안이다. 그렇지만 세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통

    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불신에 근거한 정치적 대응방식이다. 한의사가 CT를 사용할만한 식

    견을 갖추고 있는지, 한의학에서 CT 사용이 필요한 것인지, 한약이 부작용이 있는 것인지

    등은 토론을 통한 합의나 과학적 검증을 거치면 해결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면서 토론이나 검증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폭언과 협박전화, 명예훼손 고소제기, 한약

    복용 피해환자 수집과 공표, 상대방 학교 출강거부 등과 같이 다분히 정서적인 반응이나 정

    치적 행동이 나타났다(Daily Medi, 2005.2.16).

    한의학에서도 오래전부터 감기약을 처방해왔지만 기존의 생의학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감

    기약들이 워낙 많이 상품화되어 있었고 가격도 싸고 복용방식도 간편했기 때문에 한방감기

    약은 대중성을 얻기 어려웠다.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에 한약복용의 어려움 때문에 한의사들

    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의사들의 수가 증가하고 관심영역이 확대되면서 한

    의사들은 한방감기약을 적극적으로 마케팅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기존 감기환자 시장

    을 독점하고 있던 의사들은 유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으로 인식하고 갈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방감기약의 경우에 이것이 상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것이 의사들의 시장지배력을 감소시키는 방향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의 창출로 갈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양약시장에서도 계속 새로운 약이 개발되고 보급되고 있지만 성공

    하는 약도 있고 실패하는 약도 있다. 그런데 의사들이 한방감기약의 시장성에 대하여 엄격

    하게 분석한 이후에 대응책을 만들기보다는 약의 등장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료일원화 주장의 경우에는 한의대에서의 생의학 교육이 매우 부실하다는 전제 하에 의

    대에서 사용하는 교재로 의대교수가 강의를 해야 ‘제대로 된’ 의학교육임을 암묵적으로 가

    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의대에서의 한의학 교육이 빨리 이

    루어져야 하고 그것도 한의대 교수가 직접 강의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최근

    에 국립대학교에 한의과대학을 설치해달라는 한의사들의 청원에 대하여 의학계에서는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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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하였고 의대 내의 한의학 연구소나 한의학 교실의 설치만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의대 내 한의학 연구나 교육을 자신들이 ‘통제 가능한 형태’로만 받아들이겠다는 것

    과 다름없다. 의학계 스스로는 한의사에 의한 한의학 교육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한의계에

    대하여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은 다분히 ’강자의 입장‘에 서서 요구

    하는 주문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한의사들이 일반적으로 한의대의 신설을 반대하면서도

    유독 국립대(사실상 서울대) 한의대 신설만은 예외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다분히 정치적 효

    과를 기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사와 한의사는 양자 간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학술적 연구

    와 교류는 거의 차단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만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두 집단 사이에 해묵은 불신 또는 고정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우 강력

    한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은 분쟁의 소지라도 있으면 곧바로 큰 갈등으로 발전하는 것

    이 양자 간의 관계이다. Abbott(1990)은 의학의 전문화에 따라 영역중복이 발생하여 관련

    집단 사이에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한의학이 전문화되고 관심영역이 확대되면서

    CT 사용 문제나 한방감기약 문제에서처럼 생의학과 영역의 중복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양자 간에 불신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난망해 보인다.

    3. 한의학의 과학성의 문제

    양자 간의 불신과 갈등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한의학의 과학성과 관련된 것이

    다.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제도가 공인되는 과정에서부터 최근의 한약의

    부작용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의 일관된 태도는 한의학의 과학성에 대한 의문제기였다.

    한의학이 오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작용

    기전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믿기 어렵고 따라서 엄격한 과학적 의학적

    실험과 논증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의료의 일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의구심은 상당부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까지는 국가나 의사 또는 약사들이 한의학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한의사들도

    정치적 대응만 하였다. 그런데 1992년의 한약조제권 분쟁 이후 한의사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분쟁과정에서 약사들은 한약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여 발전시키기 위

    해서는 약학적 방법론이 필요하고 자신들이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약시

    장 진출을 합리화하였다. 약사들은 한약재도 약재의 효능에 대한 화학적 검증을 통하여 보

    다 정밀하게 효능을 입증할 수 있고 나아가 양약처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

    다. 의사나 약사에 의한 한약연구는 한의사들에게는 한의학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의사들로서는 큰 위기상황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외국에서는 이미

    침술과 한약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의사들은 어떤 형태

    로든지 이에 대응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의사들이 취한 방식은 ‘독자적인’ 과학성 검증이었다. 의사회나 약사회는 갈등관계였기

    때문에 이들과 협력하기보다는 화학자나 생물학자 같은 기초과학 전공자를 고용하여 이들과

    의 공동연구를 통하여 한의학의 과학적 효과를 검증하고 그것을 세계적으로 입증 받는 방식

    이었다. 한 예로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에는 현재 수십 명의 석박사급 기초과학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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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고 있고 매년 30-40편의 SCI(Science Citation Index)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1) 국내에

    서 발간되는 한의학 논문집에도 상당수의 논문들이 분석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한의학의

    효능을 입증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의사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한의학의 효능을 세

    계적으로 인정받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이 반드시 긍정

    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SCI에 논문이 제출되어 심사하는 과정에서 세계보편적인 용

    어나 개념 및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한의학 이론이나 개념이 제거되고 순수

    과학논문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SCI 논문게재는 한의학이 탈색되면서

    보편과학으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김종영 박사(2005)의 현장 관찰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연구는 한의대, 한방 의료기관 및 한방의료 벤처기업 간에 상호협력과 지원

    네트워크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마치 제약회사와 의과대학 및 종합병원 사이에 연구비

    제공, 임상시험, 제품사용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SCI에 논문이

    등재되면 그 결과는 한방 의료기관에서 환자들에게 자신들의 치료의 ‘과학적 효과’를 선전

    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김 박사는 이러한 현상을 한방의 ‘잡종’(hybrid) 과학화 현상

    이라고 명명하였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한의학의 잡종과학화가 한의사들의 합의된 방향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잡종과학화는 한편으로는 의사와 약사 등 생의학계의 공세에 대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의학의 산업화 전략에 부응하려는 목적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한의학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선행될 필요가 있지만 현

    재까지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논의는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하다. 한의학 미래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모형이 없이 한의학의 과학화가 추진되면서 ‘잡종과학’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에서 진행된 침구의학의 정체성과 미래에 관한 논의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渡邊勝之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서는 생명관 및 자연관에 따라 현대적 침구치료

    집단, 경락치료집단, 중의학집단의 세가지 다른 논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향후 침구의학

    의 목표에서도 서로 다른 네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2)

    첫째는 대항적 접근으로서 동양의학의 장점을 살리고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견해

    둘째는 追補的 접근으로서 서양의학 체계 하에 편입되고자 하는 견해

    셋째는 보완적 접근으로서 서양의학과 상호보완관계를 지향하는 견해

    넷째는 통합적 접근으로서 서양의학, 전통의학, 민간요법을 통합하여 새로운 일차보건의

    료(primary health care)를 창조하려는 견해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인 차이들은 강조점의 차이 정도로 보이며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거

    나 제도적으로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것으로까지 생각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우

    선 침구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에는 동의하는 것 같다. 서양의학적 입장에서 침구치료를 실

    시하는 坂井 友實은 침구치료의 현대의료와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3) 우선 현대

    의료가 동일질환에 대하여 획일적으로 치료하는 데 비하여 침구치료는 환자 개개인에 따른

    치료할 수 있는 점. 둘째, 현대의사가 진단 못한 無明証状에 대해서도 치료하기가 가능한

    1) http://web.kyunghee.ac.kr/~gsm/

    2) 渡邊勝之. “鍼灸醫學の 現狀と 課題.” 醫學のあゆみ 192(2): 805-808. 2000

    3) 坂井 友實. “西洋醫學的 發想の 鍼灸治療を實踐する立場で.” 46回 全日本鍼灸學會學術大會 抄錄集,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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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 셋째, 생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점. 넷째, 간편한 점. 다섯째, 어깨통증이나 요통 같은 不

    定愁訴 증상에 유효한 점. 여섯째, 생체에 대한 침습 또는 부작용이 없는 점 등을 들 수 있

    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침구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를 받아도 효과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

    서양약에 대해 부작용이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근본적 치료가 어려운 사람, 많은 질환증

    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사람, 終末期 의료(말기 치료)에 있어서의 QOL의 유지 등에 유효하

    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고 과학적 근거가 충분히 밝혀

    지지 못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

    동해대학 생리학 교수인 白石 武昌도 이와 유사한 입장에 선다. 그는 침구의학을 넓은 범

    위의 「자극치료」로 파악하면서 자극을 줌으로써 기능적 응답성이 떨어지면 이를 높여주고

    (補), 반대의 경우에는 낮혀 줌으로써(瀉) 정상 레벨을 유지시킨다고 본다. 또 침구는 생체

    전체의 免疫系에 작용해 방위반응을 강화시킨다고 본다. 게다가 기능계에 작용해 염증이나

    감염중의 조직에 작용하고 세포 회복 기능을 발휘한다. 이런 점을 중시하면 이른바 「未病

    治」라고 하는 생체 전체의 방위 반응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이고, 고령화 사회에서 「예방

    의학」이나 Primary Care로서 「침구의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은 기본적으로 침구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현대적 난치병 치료에 응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서양의학적 관점의 확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학

    의 단점을 침구치료로 보완하되 침구를 서양의학에 편입시켜 서양의학을 보다 완전한 의학

    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침구의학의 독자성에 주목하면서 서양의학과 조화시켜 새로운 의학을 창출해야한다

    는 구주국제대학 교수인 石田秀實의 견해가 이와 대립된다.4) 石田교수에 의하면 현대생물

    의학(biomedicine)에는 심신 전체의 밸런스 중 질병 부위를 파악하는 방법론이나 시스템이

    별로 많지 않다. 반면 침구의학은 통증이나 신체기능에 대해 현대생물의학과 같은 대증요법

    을 가지면서 동시에 매우 체계적이고 전체론적인 의학의 방법론을 발전시켰다고 본다. 다만

    이 전체론적(holistic) 의학은 신체의 부분을 기계적으로 치료하는 의학과 달라 과학적 실증

    에 의해 증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과학 언어나 시스템에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혹은

    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침구 현상은 설명 불가능한 것과 실증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경

    우가 많다. 따라서 침구의 전 영역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하면 古典語와 과학적인 언어를 쓰

    고 상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현대생물의학은 객관성뿐

    만 아니라 환자의 이익 중심으로 ‘치료 효과’를 측정해야 한다는 풍조가 강해졌다. 따라서

    침구의학은 현대생물의학을 단순히 보완할 것이 아니라 보다 완성된 ‘또 하나의 의학’으로

    미래의 의학 모델로써 형성되어 한다고 石田교수는 주장한다.

    명치침구대학 교수인 矢野 忠은 양자의 관계를 한 차원 높게 융합하려는 태도를 지향한

    다. 침구의학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현대의학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대적 침구로 이것은 일종의 물리요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반면 전통적 침구에서는 독자적

    인 진찰법(4진법)을 통해 치료목적을 결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침구를 이용한다. 전

    통적 침구는 진찰과 일체화하고 있어 이 점이 다른 물리요법과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치료

    대상이 되는 ‘신체’ 개념에서 비롯된다. 현대적 침구는 ‘객관적인 신체’에 대응하고, 전통적

    인 신체는 ‘심리적(주체적)인 신체’와 ‘객관적인 신체’의 통합체로서의 신체에 대응한다고 생

    각된다. 그리고 ‘심리적인 신체’와 ‘객관적인 신체’를 연결하는 것이 氣라고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연구는 적고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는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4) 石田秀實. “鍼灸に對する私の立場.” 46回 全日本鍼灸學會學術大會 抄錄集,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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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

    c

    자각 증상이 있는 미병 검사치 이상

    미병

    동양의학적 접근 서양의학적 접근

    이러한 동양 의학적인 신체관은 근대의학을 초월할 새로운 방법론으로서의 관점을 제시해

    주고 침구의 역할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矢野 忠교수는 주장한다. 심신이 연

    결되어 있다는 동양의학의 중요한 관점은 서양의학에서는 위약효과(placebo effects)로 매

    우 제한적으로만 인정되고 있다. 만일 기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그것이 심신일여의

    기전을 밝힐 수만 있다면 침구의학은 서양의학을 이론적으로 선도하는 첨단학문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으로는 아직 가설의 단계일 뿐이다. 矢野교수의 주

    장에서 중요한 점은 의학은 기본적으로 인체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체에 대

    한 새로운 관점이나 재발견이 새로운 의학체계를 만들 가능성은 계속 열려있는 것이다. 현

    재는 한방이나 침구가 전체론적 의학이라는 장점을 강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심신일

    여의 기전을 밝히게 되면 침구의학은 첨단학문으로 재구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矢野의

    주장의 함축적 의미로 생각된다.

    矢野 교수는 다른 논문에서 현대적인 건강과 질병개념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침구의

    학의 역할을 재규정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未病이란 말이 1997년 후생백

    서에 수록된 이후 의료계에서 유행하고 있다.5) 미병은 질병의 전단계 상태로 이를 방치하

    면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용어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일반인의 주체적인 건강

    관리와 병자의 적극적인 참여로 미병상태를 사전에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대의 건강

    개념에 기인한다. 矢野 교수는 미병에서도 동양의학적 접근과 서양의학적 접근에 차이가 있

    다고 본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미병에는 자각증상이 없는 검사치의 이상상태로서의

    미병(c)과 검사치의 이상은 없지만 자각증상은 있는 미병상태(a)가 있을 수 있다.

    미병과 자각의 관계는 개인차가 있는 것으로 체질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체질이 實

    한 사람은 반응력이 높고 신진대사가 왕성한 사람인데 자각증상의 민감도는 낮다. 반면 虛

    한 사람은 반응력이 낮고 신진대사가 부진한 사람인데 민감도는 높다. 이런 개인차를 전제

    로 할 때 미병관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실한 사람은 검사이상치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따라서 자연상태에서의 생명예후가 짧기 때문에 개입의 필요성이 높다. 발병은 급속

    하게 전개된다. 당뇨병이 그 예이다. 반면 허한 사람은 건사치 이상에 대한 내성이 약하고

    생명예후는 길다. 따라서 개입의 필요성이 적다. 병은 완만하게 발전한다. 민감성 腸症이나

    5) 未病의 개념 자체는 이미 황제내경소문에서 나오는 용어이지만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부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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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 미병 급성질환 만성질환 종말기

    침구의학 적용 생의학 적용 생의학 + 침구의학

    자율신경 실조증 같은 것이 예이다.

    이러한 개념을 원용하면 한방 또는 침구는 미병단계에 대하여 특별한 이론과 대처방법을

    갖고 있지 못한 서양의학적 접근에 비하여 체질에 따라 예상되는 질병군에 대처할 수 있는

    건강법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유용성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 의학은 감염증

    대책 등과 같은 일종의 대량생산 방식으로 볼 수 있는데, 21세기 사회는 衣食住는 물론 건

    강과 의료의 욕구도 기본적인 것은 충족됨으로써 환자 개인의 특성과 요구에 따른 보다 높

    은 질의 수요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양의학이 이론은 少量多品種식 진단과 치료방법

    을 만드는데 더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6) 따라서 21세기 사회상황에 적합한 침구의 역

    할을 규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질병의 자연사 개념을 확대하여 건강에서 사망까지의 과

    정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안은 아직 개념적인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전통의학이 미병

    과 건강관리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개발되어야 하고, 그것이 효

    과적임을 의학적으로 입증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비용효과 역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러한 개념적 제안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일본의 의료제도의 중

    요한 특징은 과거 각기 분리되어 존재했던 보건, 의료, 복지의 세 영역이 하나로 통합되어

    서비스가 제공되는 추세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노인의료 문제가

    심각해지면 두드러지고 있다. 노인들이 갖는 문제는 만성질환 치료뿐만 아니라 치매 등과

    관련한 장기적인 요양의 필요성과 신체적 정신적 기능저하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 수입

    원의 감소에 따른 경제적 궁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

    에서 개호보험을 발전시켰고, 그에 따라 기존의 대형병원들은 이제 양로원, daycare

    center, 가정개호서비스 기관 등을 부설하여 보건의료복지를 하나로 아우르는 시스템을 만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전통의학계에서 침구를 이용한 건강·미병 관리, 침구를

    이용한 신체적 정신적 기능강화와 이를 통한 삶의 질의 향상 같은 개념들을 정립하고 구체

    적인 시술법들을 적용해 나감으로써 21세기라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적

    응하고 고비용의 서양의학 중심체계에 대한 대안과 협력을 모색함으로써 전통의학의 활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은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논의가 갖는 함의는 한의학의 과학화가 단순히 생의학에 대응하여 우

    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거나 아니면 한방 산업화를 위한 전략차원에서 추구될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건강문제에 한의학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그리고 한방적

    6) 丁宗鐵. “現代の 醫療制度と 代替醫療のあり方.” 醫學のあゆみ, 191(8): 853-857,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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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성과 양방적 특성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특성화시킬지에 대한 이론적 모형을 갖추고 그에

    맞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과학철학자 최종덕 교수(2003)는 의사나 한의사 모두 과학에 대하여

    매우 고전적이고 협소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만일 실험실 수준에서 진행되는

    엄격한 인과관계의 규명에만 과학적 증거를 한정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만 의학을

    구성한다면 현대의학 조차도 유지되기가 쉽지 않다. 의학은 과학 자체라기보다는 임상경험

    을 중시하는 영역이다. 의사들이 임상자율성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동일 약품이라도 그것이

    투여되는 상황조건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즉 ‘임상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실

    험실에서 통제할 수 있는 변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당대의

    이론의 한계나 인식의 한계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종종 분석화학적인 약리작용 기전은 불분명하지만 임상적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나

    는 사례에 접할 수 있다. 인삼의 경우가 그러하고 침술의 경우가 그러하다. 인삼의 화학성

    분을 분석하여 왔지만 임상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충분하게 화학적 분석을 통하여 밝혀주지

    는 못하고 있다. 침술의 경우도 유사하다. 미국의 NIH는 침술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전

    문가 패널을 구성하고 1970년부터 1997년까지 발표된 관련논문 2,302개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adult postoperative & chemotherapy nausea & vomiting과 postoperative dental

    pain에서만 효과가 입증되었다. 그리고 addiction, stroke, headache, menstrual cramps,

    tennis elbow, fibromyalgia, myofascial pain, osteoarthritis, low back pain, carpal

    tunnel syndrome, asthma 등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였다(Fontanarosa,

    2000). 이것은 침술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있어서 위약효과를 통제할 수 있는 방

    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증거가 검증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침술의 작용기전은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서구사회에서 의사들이 침

    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방 의료의 많은 부분은 현재 분석 과학적으로

    작용기전이 밝혀지지는 않지만 효과는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종덕 교수는 이러

    한 현상을 ‘우회적 인과성’이라고 설명하는데, 즉 원인과 결과의 사이가 복잡하기 때문에 현

    재로서는 인과성을 충분히 입증하기 어렵지만 인과관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2005년 초에 문제가 된 감기약의 ‘부작용’ 문제도 이와 관련이 된다. 한약의 부작용에 초

    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결국에는 과학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부작용은 양약을 포함하여 대부

    분의 약에 해당되는 것이고 Viagra의 경우처럼 부작용이 오히려 새로운 약으로 개발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따라서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약의 효능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부작용 또는 타 약물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히려 약 처방

    관행을 개선하고 약품의 질적 개선을 도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아

    쉬운 것은 부작용 문제가 상대방 의학과의 상대적인 비교우위 또는 평가절하를 보여주려는

    근시안적 동기가 노출되고 있는 점이다. 의사의 입장에서 만일 한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문

    제가 발견되면 이것은 가능한 한 많이 문제제기 하는 것이 좋다. 다만 그 방식은 철저하게

    과학자적 자세에 입각해야 한다. 과학적 검증이 필요한 것은 의학이나 한의학이나 마찬가지

    이다. 다만 성분분석적인 방식으로 검증이 안 되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

    다. 그렇다고 한의학에 대하여 분석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오류이다. 분석 과학적 방식의 검증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치밀하게 수행해야하지만 ‘과학성’

    입증에 있어서는 보다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의료의 일원화와 한의학의 과학성 확립과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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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어렵다. 즉 일원화가 한의학의 과학화를 촉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원화를 하지 않

    고는 한의학의 과학화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과학의 원리를 넓게 받아들인다면 과

    학화를 위한 노력이 방법상의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인 원칙에서는 의학계나

    한의계가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학계의 광범위한 인적 물적 자원

    과 결합되어 과학적 검증 노력이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한의학의 미래 정체성이나 과학화에 대한 성찰적 접근

    을 하기도 전에 세계화의 급류에 편입되어 이러한 논의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의학은 자본주의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생의

    학 체제가 지배적인 의학적 패러다임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본주의적 가치와의 부합성

    이나 자본가들의 지원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경제의 세계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그 영향은 의학부문에도 미치고 있다. Janes(1999)은 이러한 세계화 과정이 전통의학에 한

    편으로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를 강요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또는 세계화의 진행은 필연적으로 역학구조를 ‘근대화’시키고 그 결과 중심부 국가들

    은 물론 주변부 국가들 또한 만성퇴행성 질환, 스트레스성 질환, 사고와 중독 등의 문제를

    갖게 만들며, 이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생의학적 자원의 부족 또는 비용의 증가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 결과 한편으로는 의료개혁을 통하여 의료체계를 합리화 또는 시장화할 것을 요구

    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저렴한 대안을 추구하게 만듦으로써 전통의학이 그 역할

    을 수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개의 국가들이 과거와는 달리 전통의학과 대체의학에 정책

    적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경제, 사회구조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전통의학에 대한 국가개입이 증가하게 되면 전통의학은 일정하게 내부구성을 합리화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적 차원의 의료계획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통의학도

    임상역학적 연구를 통하여 시술과 치료법의 효과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만들어내야 하

    고, 사회의 다른 부분과 의사소통을 증진시키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수준

    에서의 과학성도 입증 받아야 한다. 이러한 세계적 수준에서의 전통의학의 제도화를 위해서

    전통의학은 교육체계와 시술체계는 물론 텍스트의 내용과 용어의 사용까지 국지성을 넘어서

    세계적 ‘보편성’의 기준에 맞추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전

    통의학은 ‘국지성’(locality)에 내포되어 있는 독자적 역사와 이념과 방법과 용어를 탈색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전통의학의 해체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의학의 근대화는 사회의

    근대화만큼이나 오래된 주제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1952년에 국민의료법을 제정하고 한의

    사제도를 만들 당시에도 ‘전근대적인’ 한의학의 문제점들이 제기된 바 있고, 1960년대에 침

    구사 제도를 없애는 과정에서도 전근대적인 잔재를 없애고 의학을 근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가 제기된 바 있다. 이웃나라들의 사정도 비슷하여 Lee(1982)는 중국과 대만, 홍콩 등

    지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전통의학을 과학적 방식으로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대안적인

    전통’들이 생의학에 흡수되어 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대안적 치료법을 부흥하려는 여러 노

    력들이 오히려 기술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생의학에 의하여 흡수를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4. 문화로서의 의학

    흔히 일상에서 의학과 한의학을 개념화할 때 우리는 두 의학의 차이에 주목한다. 이미

    1930년대 ‘동서의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의사 조헌영(원본 1942, 1997 신판발행)은 한

  • - 12 -

    동양의학 서양의학

    종합치료 국소처치

    자연치료 인공치료

    현상의학(動體); 징후학 조직의학(靜體); 해부학

    治本醫學 治標醫學; 응급처치

    양생의술 방어의술

    내과의학 외과의학

    응변주의 획일주의; 보편적 치료법

    평민의술 귀족의술

    民用의술 관용의술

    표 2 조헌영(1934)이 분류한 두 의학의 차이

    동양의학 서양의학

    지식체계의 바탕 철학적 과학적

    사물의 관찰방식 주관적 객관적

    관찰방식 총체적 분석적

    치료방식(병인론) 방어적(나의 부족한 부분을

    補한다)

    공격적(건강한 나에 침입한

    해로운 他를 박멸한다)

    의학과 의학의 성격을 종합치료 대 국소처치, 자연치료 대 인공치료, 조직의학 대 현상의학,

    정체의학 대 동체의학, 치본의학 대 치표의학, 양생의술 대 방어의술, 응변주의 대 획일주

    의, 평민의술 대 귀족의술로 대비시켰다.

    60년이 지난 후 중문의대 전세일 교수(1999)는 의학과 한의학의 성격을 과학적 대 철학

    적, 객관적 대 주관적, 분석적 대 총체적, 공격적 대 방어적, 실험적 대 경험적, 정확성 대

    적당성, 해부학 위주 대 역할 위주, 병 중심 대 건강 중심으로 대비시켰다. 두 의학은 매우

    다른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두 의학은 다르다. 그런데 의학은 과학에 기

    초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의학은 하나의 문화체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근대의학이나

    한의학이나 모두 문화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학적 상식이다. 두 의학은 모두 독자적

    인 기술적 언어, 중심 가치, 신념체계, 의례(ritual), 상징을 갖고 있다. 앞서 말한 두 의학의

    특성은 곧 문화적인 특성인 것이다.

    전세일(2000; 동서의학의 만남과 삶의 질)

  • - 13 -

    과학론 경험적 실험적

    처방방식 적당성 정확성

    장기의 개념 역할 위주(신이 실하다, 허하

    다)

    해부학 위주(신장기능의 저

    하)

    지향점 건강 중심 병 중심

    * 두 의학의 차이점이 곧 두 의학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차이점 하나하나마다 그 일부가

    서로 중첩되어 있어 공통점이 되기도 한다.

    두 의학이 차이가 크다면 그것 사이의 ‘문화적 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세계

    적 의료인류학자인 Charles Leslie(1977)는 인도의 의료체계를 분석하면서 이 문제에 답을

    주고 있다. 인도 역시 다원화된 의료공급 구조를 갖고 있다. 근대의학을 전공한 의사들 이

    외에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 의학과 유나니 의학의 시술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독일에서 보급된 동종요법(homeopathy) 시술자들도 있다. 아유르베다 등은 정규대학 과정

    도 있고 소규모 각종학교 수준에서도 교수되고 있다. 레슬리 교수는 전통의학이 결코 근대

    의학체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교육기관과 병원, 의사회나 관

    할 정부기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전통의학의 건강과 질병 개념이 일상문화, 요리법, 종교

    의식, 심지어 근대의학을 배운 의사들의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스며있다. 전통 시술가들도

    근대 의학의 도구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전통 시술가들의 부모, 형제, 자매 중에 의사

    가 있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의사이면서 전통의학 학위를 갖고 있는 경우나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들도 있고, 우리의 협진병원 비슷한 의료기관들도 다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

    여 레슬리 교수는 두 의학이 비록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두 의학 간에는 상당한 수준

    의 문화적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인도에도 두 의학간

    의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은 주로 의료체계 내의 공식적 지위나 정당성을 두고 벌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문화적 사회적 통합추세를 거스르지는 못하는 것으로 레슬리 교수는

    파악한다.

    두 의학의 문화적 거리라는 개념을 한국에 적용해 보면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추세를 볼 때 의학계와 한의계의 교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협진병

    원’도 증가하고 있고, 한의학에 관심을 갖는 의사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침술을

    배우려는 의사들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의대에 한의학 강좌가 설치되거나 한의학 교실

    을 설치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의대에 편입하는 의사들도 증가하고 있고, 서양의학적 패

    러다임에 가까운 보건대학원에 진학하여 보건정책과 연구방법론을 배우는 한의사들도 증가

    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한의대의 연구논문들은 분석과학적 방법론을 채용하고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인적 접촉이 증가하였다. 의학과 한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가족

    내에 의학과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통령 주치의도 의사

    만 임명되다가 최근에는 한의사도 함께 임명되었다. 공동연구나 정책논의를 위하여 의사와

    한의사가 마주 앉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흐름들이 아직은 제도적 갈등을 치유하기에

    는 부족한 상태이지만 의학과 한의학이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였던 1990년대 이전의 상황과

    비교할 때 괄목할만한 변화임에 분명하다.

  • - 14 -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두 의학의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협진병원’이 증가하

    고 있다는 것이다. 한방의료기관들이 대개 양방 진료부를 설치하고 있고 양방 병원들도 그

    보다는 못하지만 한방진료부를 설치하고 있다. 동일 환자에 대하여 의사와 한의사가 동시에

    문진하고 치료계획을 세워 ‘통합적인 진료’를 실행하는 ‘협진체계’가 실험적으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의사와 한의사 모두의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과거에는 의사들이 의학과

    한의학의 관계를 과학 대 비과학 또는 근대 대 전근대의 관계로 설정하면서 근대화되는 사

    회에서 비과학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의학적 (독점적)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였

    다. 이런 이유에서 의사들은 한방이나 침구를 제도화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침구사

    제도에 대하여 한의사들보다 오히려 의사들이 더욱 반대하는 바람에 침구사제도가 폐지되었

    다(조병희, 2004).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 의사들이 침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또 실제로 침술을 배우고 있으며 일부는 임상에 사용하기도 한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의학

    적 지식을 기초로 침의 효과를 재구성하여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경락에 대한 자극이

    아니라 신경에 대한 자극으로 이해한다. 한의사들이 CT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도 같은 방식

    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의사들은 신체구조의 영상적 진단을 통하여 의학적 효과가 아닌 한

    의학적 효과를 입증하고자 한다. 의사와 한의사는 이제 거의 유사한 기기나 장비를 사용하

    여 진단하고 치료하려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은 동일하지 않지만 점차 유사해

    지고 있다. 이제 한의사들도 “통증환자에게 침 시술을 하면 뇌의 혈류량이 증가하고 호르몬

    의 분비가 바뀌어.....”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데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의사들은

    의사들이 사용하지 않는 그들 고유한 언어영역도 있다. 예를 들어 風寒이나 瘀血과 같은 언

    어는 의사들은 사용하지 않는 한의사 고유한 언어영역이다. 그렇지만 의학적 언어가 도입되

    어 비록 그것이 한의학적 변용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한의학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의학적

    영역과 중복되는 부분이 커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문화로서의 의학이 갖는 중요한 기능은 사회통제이다. 사회적 규범과 관련되는 일탈행위

    에 대하여 의학적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의학의 사회통제 기능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나 비만에 대한 치료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회문제에 대한 치

    료를 잘 할수록 의학은 사회적으로 권력적이게 된다. 한의학이 비만환자나 피부미용 치료에

    열성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보다 많은 수입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만이나

    피부미용은 과거에는 ‘질병’으로 간주된 영역이 아니었다. 비만은 부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의 관념이 변화하면서 비만은 건강의 적이 되었고 동시에 문화적 일탈로까지 생각

    되어 많은 사람들이 ‘slim' 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한의학은 비만과 피부를 치료하면

    서 사회통제를 수행하게 된다. 스트레스 관리나 입시생을 위한 ’총명탕‘ 투약도 마찬가지로

    사회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증거가 된다. 비만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입시

    준비생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기능하도록 도와주는 한 한의학의 사회적 위상은 확고

    해 질 수 있다.

    그런데 한의학이 사회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이 단순히 전통적인 한약처방이 아니라

    ‘잡종과학’으로서 탈바꿈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규범에 부합된 의

    학적 실천이 되기 위해서 보다 현대화되고 과학화된 언어와 상징의 사용이 필요해진 것이

    다. 비만과 스트레스에 대한 현대화되고 과학화된 언어에다가 한의학적 요소를 ‘부가하여’

    설명할 때 사회적으로 ‘의미가 통하기 때문에’(making sense of stress and obesity in

    terms of hybrid oriental medicine) 한의사들은 자신들은 ‘고유어’를 문화적으로 변용시켜

  • - 15 -

    ‘현대어’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자와 철학으로 표현되던 한의학이 이제 영어와 생

    물학 및 통계학으로 바꾸어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의 변화라기보다는 담론

    (discourse)의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의사와 한의사 관계의 변화를 유발한다. 이제 양자 간의 갈등

    도 과학 대 비과학의 대립구조에서 벗어나 ‘과학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전하고 있는 단계

    로 생각된다. 어떤 방식으로 누가 과학성을 입증할 것인가를 두고 견해의 차이가 있기는 하

    지만 과거와는 달리 한의학을 일방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는 거의 사라

    지고 있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

    다. 그런데 두 의학간의 사회적 거리가 좁혀지면서 갈등도 잦아질 수밖에 없다. 과거의 갈

    등이 거의 일방적인 정치적/패권적 지배와 종속/생존의 갈등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지금의 갈등은 시장경쟁에 의한 갈등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 우위에 서고자 하는 갈등이

    라고 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경우라면 이러한 갈등이 상당부분 Nature나 Science 같은 학

    술잡지를 통해서 장시간에 걸쳐 학문적 공방으로 이어지는 ‘냉정한(cool) 갈등’으로 나타나

    겠지만 한국에서는 학문적 논쟁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시장을 둘러싼 논쟁으로 쉽게 전화되

    어 매우 ‘뜨거운(hot) 갈등’으로 나타난다. 약품이나 시술의 효능이나 부작용은 기본적으로

    학문적 논쟁의 영역이지 ‘재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문화로서의 의학이

    라는 차원에서 두 의학은 서로 가까워지고 있고 닮아가고 있지만 문화적 패권 혹은 정당성

    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는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회귀하여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를

    규정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의사나 한의사 모두 진정으로 ‘하나 되는 의학’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차이보다는 공통

    점을 부각시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일례로 질환 명에 있어서 의학과 한의학은 많은 부분

    을 공유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규정되는 질병과 한의학적으로 규정되는 질병이 어디까지 동

    일하고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지 연구하는 작업은 일원화의 선결조건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두 의학 사이에 공통적인 부분을 밝히려는 노력이 선행된다면 이것은 서로의 공감대

    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 문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할 때 중요한

    것은 인류적 보편성을 찾는 것이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가치는 대개의 문화에서 공통적으

    로 나타나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매우 상이할 수 있다. 이것을 문화의 다양

    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실천방식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이 함유한 보편적 가치에 주

    목할 때 우리는 타 문화를 이해하고 타문화와 쉽게 공존할 수 있게 된다. 문화의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면 이것은 문화제국주의로 인식되어 필연적으로 저항을 유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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