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독널무덤 Jar Coffin Tomb 항아리 등의 용기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무덤을 말한다. 동아시아 에서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처음 출현하지만 청동기시대에 많이 만들어 졌으며, 이후 삼한~삼국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다. 함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경우, 중심독 主甕 과 막음독 副甕 을 옆으로 눕힌 채 아가리를 서로 마주보게 하는 합구식 독널로, 주로 유소아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이 독널무덤은 도항리 (경고) 52호 독널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 옹관묘 甕棺墓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 Upload
    others

  • View
    2

  • Download
    0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Page 1: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독널무덤

Jar Coffin Tomb

항아리 등의 용기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무덤을 말한다. 동아시아

에서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처음 출현하지만 청동기시대에 많이 만들어

졌으며, 이후 삼한~삼국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다.

함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경우, 중심독主甕과 막음독副甕을 옆으로

눕힌 채 아가리를 서로 마주보게 하는 합구식 독널로, 주로 유소아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이 독널무덤은 도항리 (경고)52호 독널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

옹관묘甕棺墓

Page 2: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Wooden Coffin Tomb

삼한시대 전기 낙동강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넓게 분포하는 무덤의

형태이다. 이는 평지나 낮은 구릉지의 끝단에 밀집하여 축조되었는데,

땅을 깊게 판 후, 그 안에 나무판이나 통나무로 만든 널을 배치하였다.

널안에는 시신과 간단한 장신구만을 넣었고, 토기나 철기 등의 껴묻

거리副葬品는 널과 뒤채움흙補强土 사이나 널 아래의 작은 구덩이腰坑

에 부장하였다.

함안에서는 주로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까지의 널무덤이 확인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말이산고분군의 북쪽 끝자락에서 다수 확인되었

으며, 최근에는 군북면 소포리 일대에서도 확인되었다.

널무덤목관묘木棺墓

Page 3: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Wooden Chamber Tomb

구덩이 안에 덧널木槨을 마련한 무덤으로, 그 안에 널木棺을 별도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무덤의 주인공은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위에

다양한 유물을 부장하였다. 영남지역에서는 2~5세기 전반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널무덤과는 달리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규모 차이가

분명하였다.

함안에서는 가야읍 말이산고분군, 법수면 황사리고분군, 윤외리

고분군, 칠원읍 오곡리고분군 등에서 발굴된 적이 있는데, 대부분

4~5세기 전반에 조성된 덧널무덤으로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성립과

발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고 있다.

덧널무덤 목곽묘木槨墓

Page 4: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Stone Chamber Tomb

구덩이를 파고 돌로 네 벽을 쌓은 다음 시신과 유물을 묻고 커다란

뚜껑돌을 덮어 만든 무덤을 말한다. 돌덧널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정치 권력과 경제적인 부,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봉토를 쌓아올리기도 하였다.

함안 말이산고분군에서 발굴조사된 구덩식돌덧널무덤은 주변에

분포하는 무른 퇴적암(함안층)을 사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높은

봉토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무덤을 긴 사각형으로 축조하였다.

또한 토압에 의한 뚜껑돌의 파손과 봉토의 붕괴를 지연하기 위해 네

벽면에 구멍을 뚫어 통나무를 걸쳐 놓는 이른바 ‘들보시설’을 만들었

는데, 이는 아라가야 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만의 특징이다.

구덩식돌덧널무덤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Page 5: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Stone Chamber with Tunnel Entrance

얕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돌로 벽과 천정을 쌓아 널방玄室을

마련한 무덤으로, 한쪽 벽면에 통로인 널길羨道을 만들어 놓아 시신을

추가로 매장할 수 있는 구조이다.

함안에서는 6세기 무렵부터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무덤의

구조로 보아 백제와 대가야 등 외부에서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도입 이후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은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 굴식돌방

무덤으로 변화하였다. 아라가야의 쇠퇴 과정과 그 시기 대외관계를

알 수 있는 무덤으로 말이산고분군의 북쪽 능선과 남문외고분군에서

확인된다.

굴식돌방무덤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Page 6: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주지咸州誌

Hamjuji

현재 전해지는 『함주지』 중 얇은 붓으로 쓴 필사본은 단 두 점뿐으로, 이는 그

중 규장각 소장본 ‘규12249’를 복제한 것이다. 『함주지』는 1587년 편찬 당시

엮어놓기만 하고 제대로 간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해인사에 숨겨놓은 덕에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왜란이 끝난 1600년, 편찬자 중

한명인 오운(1540~1617) 선생이 『함주지』 원본을 등사謄寫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더 나아가 현재 규장각 소장의 『함주지』(규12249)는 18~19세기에

증보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증보 이전인 17세기 무렵에 오운 선생의

등사본을 다시 필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규장각 소장

간행연대 : 미상 (17세기 추정)간 행 자 : 미상판본ㆍ권수 : 필사본, 1책 실제크기 : 42.7 × 27.9㎝

복제품

Page 7: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주지咸州誌

Hamjuji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에 위기를 느낀 선각자 우헌 조용숙(1895~1960)

선생은 잊혀가는 함안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해 1939년 3월 서산서당西山

書堂을 발행소로 하여 『함주지』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이덕희 군수(재임1837~

1841)의 증보 편찬본을 저본底本으로 한 것이다.

한편, 6ㆍ25전쟁을 겪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함주지』는 1980년 함안

향교에 의해 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95년에는 함안문화원에 의해 일반인도

읽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된 『국역 함주지』가 간행되었다.

조장래 님 소장

간행연도 : 1939년(일제강점기)간 행 자 : 우헌 조용숙(愚軒 趙鏞淑)판본ㆍ권수 : 석판본, 2권 1책책 크 기 : 30.5 × 20.5㎝

Page 8: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咸安 大山里 石造三尊像

Stone Buddha Triad in Daesan-ri

대사골, 한절골로 불리는 마을 앞 절터에 세워져 있는 세 구의 불상佛像이다.

이들은 본존불本尊佛과 좌우협시불左右脇侍佛로, 원래 별개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조각수법은 거의 유사하다. 어깨의 매듭과 양 무릎에서

시작된 타원형의 옷 주름은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에서 보이는

석조보살상石造菩薩像의 특징이다. 대좌臺座는 2단으로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 8각의 단면에는 통일신라 초기 양식을 계승한 귀꽃을 표현해 놓았다.

조성연대 : 고려시대소 재 지 :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지정사항 : 보물 제71호 (1963. 1. 21.)

Page 9: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

Rock-Carved Standing Bhaisajyaguru Buddha Triadin Bangeosan Mountain

군북면 방어산 정상에서 약 100m 아래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마애불이다.

너비 약 7.5m, 높이 약 6m의 암벽면에 4.5m에 이르는 본존불입상本尊佛立像

과 좌우 협시보살입상脇侍菩薩立像이 선각線刻되어 있다. 우측의 협시보살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최고의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조성연대 : 801년(통일신라시대)소 재 지 :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지정사항 : 보물 제159호(1963. 1. 21.)

咸安 防禦山 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

Page 10: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근재집 책판謹齋集 冊板

Wood printing blocks for The Collected Writings of Geunjae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이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근재집』에는 안축 선생이 강릉도 존무사存撫使(도에 파견된 지방관)로 있을 때,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을 담아 지은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비롯하여 시문 140

여수가 수록되어 있다.

제작시기 : 1910년(융희4, 대한제국기)책판크기 : 34 × 20㎝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안축安軸(1282~1348)

안일중 님 기탁

Page 11: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咸安 主吏寺址 獅子石塔

원래 여항면 주리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함안면사무소로 옮겼다가

해방 이후 함성중학교로 옮겨왔다. 탑의 조성방식이나 규모로 보아 5층탑으로

짐작된다. 특징은 탑신을 받치는 기단부를 4마리의 사자로 구성한 것이다.

이런 양식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석탑과 충북

제천 사자빈신사터獅子頻迅寺址 석탑에서 확인된다.

조성연대 : 고려시대소 재 지 :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함성중학교 내)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Page 12: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휴복 교지李休復 敎旨

Royal edict of Yi Hyubok

1631년(인조9)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인원군(仁原君) 이휴복李休復(1568~1624)에게

종2품 가선대부에서 정2품 자헌대부(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함을 알리는

교지이다.

이규원 님 기탁

제작시기 : 조선(朝鮮, 1631)크 기 : 77.5×57.5㎝, 1매(枚)

HAMAN
스티커 노트
* 한자의 괄호를 삭제해 주세요.
Page 13: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도천재 단서죽백

Royal certificate of Meritorious Subject issued to Lee Hue-Bok

조선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인원군 이휴복

仁原君 李休復에게 내려진 ‘진무공신삼등책훈振武功臣三等策勳’ 교서이다.

이 교서는 해서체楷書體로 씌어 있으며, 공신이 된 사연과 품계(嘉善大夫는 從三品에

해당함) 및 하사된 토지, 노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서를 내려 준

賜給 날짜와 왕의 도장御印이 찍혀 있으며, 진무공신 32명 전원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뒷면에는 ‘강석기가 만들고, 이무림이 쓰다姜碩期製 李茂林書’라고

씌어 있어 제작자와 글쓴이를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당시의 인물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제작시기 : 조선(朝鮮, 1625)

크 기 : 198×38㎝, 1축(軸, 두루마리)

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

道川齋 丹書竹帛

이규원 님 기탁

Page 14: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영종대왕 국휼복상도

조선 영조 연간 충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주도복周道復(1709~1784)을 그린

방상도方喪圖로, 18세기 후반의 사대부 초상화 양식을 따른 그림이다.

주도복은 영조英宗가 승하하자 사당 앞에 제단을 쌓아 3년 동안 조석朝夕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통곡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조정에서는 그의 지극한

충심을 가상히 여겨, ‘방상도’를 그려 후손들로 하여금 길이 보존하게 하였다.

주도복의 초상 뒤로 방상을 위한 석단, 초막과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운 부친

주재성의 사적비각事蹟碑閣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곡단시哭壇詩가,

왼쪽에는 곡단서哭壇序가 행서로 적혀 있다.

주익재 님 기탁

英宗大王 國恤服喪圖(周道復 方喪圖) 1782년(정조6)

Page 15: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형난원종공신록亨難原從功臣錄

Royal certificate of Meritorious Subject issued to Cho Ik-Do

제작시기 : 조선(朝鮮, 1615)크 기 : 22×34.5㎝, 1권(券)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7호

제작시기 : 조선(朝鮮, 1625)크 기 : 22.4×33.2㎝, 1권(券)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7호

진무원종공신록振武原從功臣錄

함안조씨 참의공파종회 기탁

Page 16: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회찬송악악무목왕 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 精忠錄

Supplemented Reissue of the Songak Akmumokwang Jeongchungnok

제작시기 : 조선(朝鮮, 1709)크 기 : 22×37㎝, 상하 2권(券)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6호

함안조씨 참의공파종회 기탁

Page 17: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특사신간정충록特賜新刊精忠錄

JungChungrok(records of three loyal courtiers)

제작시기 : 조선(朝鮮, 1769)크 기 : 22.5×36㎝, 권1~6 및 도판포함 4책(冊)지정사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6호

함안조씨 참의공파종회 기탁

Page 18: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해동지도

1750년대 초

함안군

海東地圖

Page 19: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해동지도

1750년대 초

칠원현

海東地圖

Page 20: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조선후기

1872년

지방지도

함안군

朝鮮後期地方地圖

Page 21: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조선후기

1872년

지방지도

칠원현

朝鮮後期地方地圖

Page 22: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19세기후반

東輿圖

HAMAN
스티커 노트
19세기후반 ---> 19세기 후반
Page 23: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대동여지도

1861년

大東輿地圖

Page 24: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차사咸安差使

Haman official sent to arrest a criminal or a messenger sent by a govemor

옛날 함안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효성이 지극한 노아라는 딸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관리를 보내어 죄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아버지를 구하려는 딸은 스스로 기생이 되어 조정의 관리들을 흘려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벌주지 못하게 하였다. 본분을 잊고 주색에 빠졌던 관리들은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함흥차사와 같이 본분에 충실치 못한 관리들이 함안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여 함안차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Page 25: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황새鷬鳥의 보은報恩

Stork’s Gratitude

옛날 백사리(가야읍 사내리)에 박일동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집에는 고목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느 해 태풍이 불던 날 나무가 부러지면서 살고 있던 황새 새끼가 떨어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 후 그 황새는 어미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동안 쌓인 정에 아쉽고 서운해 하던 일동은 관가에 볼 일이 있어 의복을 입고 신을 신으려 할 때 갑자기 날아온 황새가 신 안에서 독사를 물어내어 쪼아 죽이고 날아갔다. 은인의 생명을 구한 황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Page 26: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효자 다물孝子 多勿

Devoted Son Damul

다물은 노비의 자식으로서 배운 것은 없었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지극하였다. 조선 중종 때 경상도 관찰사 장순손張順孫은 그의 효행孝行

을 듣고 ‘사노私奴 다물多勿은 나이 열 두살 때 그 아비 은손銀孫이 급질急疾을 얻어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는데, 다물이 도끼로 그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내어 그 아비에게 먹이고 그 잘린 손가락을 말려 갈아서 먹이니 아비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절개와 효성이 가상하니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해 주기를 청합니다.’<중종실록 3권, 중종 2년(1507년)>

라고 임금께 장계狀啓하였다. 이후, 중종 때 마을 입구에 효자문을

세웠으며, 선조20년(1587년)에는 관에서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또한 부임하는 군수들마다 묘를 단장하고 제사를 올려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어 본받게 하였다.

Page 27: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파수 곶감 전설巴水 乾柿 傳說

The legend of Pasu’s Dried Persimmom

함안면 파수리 산골마을에 임씨 문중의 어른이 중한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아들의 지극한 정성과 온갖 약에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약초를 구하러 산을 헤매다 벼랑에 떨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 후 누군가의 호통에 눈을 떠 보니 백발의 노인이 절벽을 가리키며 ‘저기 붉은 열매를 물에 녹여 먹이라’ 한 뒤 사라져 버렸다. 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열매를 따 노인의 말대로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어른의 병이 씻은 듯이 다 나았다. 아들은 약으로 쓰고 남은 열매의 씨를 심어 키웠는데 그 붉은 과일의 나무가 지금의 감나무이며, 그 열매를 말린 것이 곶감의 시초였다 한다.

Page 28: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의 제방 축조堤防築造

Embankment of Haman

함안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역으로 평야가 넓고 비옥하나 하천의 역류로 농지로의 활용이 어려웠다. 조선 중기의 함안 지리지인 『함주지』에는 이러한 함안의 지형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옛부터 도읍都邑은 거의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아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형성되어 왔다. 유독 함안만은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아 고산계곡이 동남에 이루어져 물이 북으로 흐른다. 서북은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없어 광활한 평야를 이루는데, 홍수 때마다 강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된다.”

지형의 특수성에 따라 함안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제방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함안에서는 가야읍 일원에서 가야시대 제방유적이 확인되었으며, 이후에도 치수와 관련한 기록이 많다. 실제 조선 후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제방의 길이가 확장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대대적인 제방의 축조가 시행되어, 현재 제방 길이는 총 338㎞로 전국 최장이다. 제방의 축조를 통해 잦은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으며, 옥토를 활용한 안정적인 농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Page 29: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의 3 · 1 독립운동三 · 一 獨立運動

Journals of Independence Movement of March 1st, 1919

고종의 장례에 다녀온 14인의 지사가 선봉이되어 천 여명의 군중이 일으킨 평화적 시위, 경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의거

3월 9일 칠북 연개장터 의거

권영수 지사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 수 백명의 군중이 시위행진, 일본 경찰에 의해 권영수, 김성근 지사가 체포됨

3월 12일 대산면 평림 의거

손종일 지사의 독립 선언서 낭독 후 일천 여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고 4월 3일, 4월 8일 등 4회에 걸쳐 의거

3월 23일 칠원 장날 의거

군북 장날 시작된 의거로 오천 여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전날 체포된 지사들의 석방을 요구.다급한 일본 경찰은 진해의 군 포병대대 병력을 동원, 진압 과정에서 21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여 전국에서 다섯번째로 희생자를 많이 낸 의거

3월 20일 군북 시장 의거

삼천 여 군중이 경찰서, 군청, 우체국을 습격하여 군수를 앞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사실 증명을 요구함. 안지호 지사 외 62명의 지사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름

3월 19일 함안읍 의거

이룡리 주민이 궐기하여 독립을 외치며 시위3월 18일 칠서 이룡리 의거

Page 30: Jar Coffin Tomb · 아래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8~9세기 통일신라시대

함안 농장 분규 사건咸安農場紛糾事件

Haman Farm Battle Incident

함안농장이란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 식량 증산이란 이름 아래 개간한 가야 · 산인 · 대산 · 법수면 일대의 경작지를 말한다.해방 후 함안농장은 당시 영남의 거부였던 하모씨의 소유가 되었는데, 하씨는 해방 직후 무질서한 정세 속에서 당시 농토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소문에 서둘러 농민에게 원가로 분매하였고, 이후 사회 질서가 안정되고 물가가 오르자 매도 계약서를 빼앗고 그 땅을 다시 새로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1947년 8월 가야읍 축암마을 벌판에서 땅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분규를 일으켜 되찾았으며 오늘과 같은 옥토로 가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