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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77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선불교를 중심으로 안 경 식 부산대학교, 교육학 1. 머리말 2. 교육의 의의와 내용: 불교와 불법 그리고 자성 3. 교육방법(1): 언어, 문자로의 전달 4. 교육방법(2): 화두 공부법 5. 스승의 역할 6. 맺음말 1. 머리말 이 글은 각 종교가 갖고 있는 영성적 가치가 어떻게 대학교육에 전달될 수 있는 ?’ 라는 이번 학회 1) 의 취지에 따라 불교의 영성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자성의 문제를 선불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것의 전달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실 영성이 1) 이 논문은 2013928,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열린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주최 심포지엄(‘교영성과 교육’)에서 발표한 글이다.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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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77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선불교를 중심으로

    안 경 식

    부산대학교, 교육학

    1. 머리말2. 교육의 의의와 내용: 불교와 불법 그리고 자성3. 교육방법(1): 언어, 문자로의 전달4. 교육방법(2): 화두 공부법5. 스승의 역할6. 맺음말

    1. 머리말

    이 글은 ‘각 종교가 갖고 있는 영성적 가치가 어떻게 대학교육에 전달될 수 있는가?’ 라는 이번 학회1)의 취지에 따라 불교의 영성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자성의 문제를 선불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것의 전달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실 영성이

    1) 이 논문은 2013년 9월 28일,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열린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주최 심포지엄(‘종교영성과 교육’)에서 발표한 글이다.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 78 신학과 철학 제24호

    든 자성이든 이는 해당 종교의 키워드이다. 그러기에 그 가치에 대한 논의는 그 종교의 가치를 논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가치의 논의는 본질 문제를 전제로 하기에 사상이나 철학적 문제로 비화하여 자칫 한가로운 문자 유희에 그쳐버릴 가능성도 있는 것

    이다. 물론 가치나 본질에 대한 사상, 철학적 논의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가 교육을 이끌던 우리의 전통사회와 달리 종교와 교육이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서

    가치나 본질에 대한 논의 못지않게 그 전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종교의 역사를 종교학의 측면에서 볼 때는 영성이나 자성과 같은 종교적 가치의 역사, 성현(聖顯, hierophany)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육학의 측면에서는 그 가치 전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불교라는 종교도 석가모니가 성도(成道) 후 49년간 행한 중생 교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달’의 역사는 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2)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종교적 가치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을 연구 문제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흔히 불교를 팔만사천 법문(法門)이라 하거니와 불교 2,500년 역사에는 수많은 전달법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가운데 이른바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내세우는 선불교(禪佛敎)를 중심으로 ‘전달’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선불교는 중국 당대(唐代)에 성립하여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한국불교 역시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성철(1912~1993) 스님의 견해를 중심으로 선불교의 가치 ‘전달’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철 스님은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의 방장(方丈)으로 취임하였으며, 그해 동안거(冬安居) 100여 일 동안 승속(僧俗)을 대상으로 선(禪)과 교(敎)에 걸친 부처님의 사상은 ‘중도(中道)’사상임을 밝히는 이른바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하안거(夏安居)에서는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하기 수련대회에서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 동안 설법하였다. 연구자는 이 설법에 당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의 ‘전달’문제에 대한 선불교의 답, 더 나아가 선불교의 교육관이 들어 있다고 보고, 당시 설법의 내용을 정리

    2) ‘宗敎’라는 한자어도 ‘근본적인 가르침’, 즉 ‘전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79

    한『영원한 자유』3)와 그 밖의 법어집『자기를 바로 봅시다』,『백일법문』등의 자료를 통하여 그 답을 찾고자 한다.

    2. 교육의 의의와 내용: 불교와 불법 그리고 자성

    1968년 여름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진행된 성철 스님의 설법은 하나의 ‘교육’상황, 종교적 가치를 가르치려는 ‘교육’상황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 전달되는 가치 있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은 성철 스님이고, 배우는 사람은 대학생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달 내용은 당시에 행해졌던 법문으로, 그 내용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영원한 자유』(성철스님 법어집 1집 6권, 장경각, 1988년 출간)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모두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 종교란 무엇인가, 제2편 중도의 세계, 제3편 영혼과 윤회, 제4편 영원한 자유, 제5편 영원한 자유인이 그것이다. 당시 실제 법문이 이 순서로 진행되었는지, 이 원고 그대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택 스님이 ‘엮은이의 말’에서『영원한 자유』는 대학생 수련법회의 설법을 ‘큰 줄기’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즉 성철스님은 대학생들에게 종교의 목표에 대해 설명하고, 석가모니의 교법인 중도에 대해 설명하고, 대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영혼과 윤회의 세계를 설명하고, 이어 영원한 자유를 얻는 길, 영원한 자유인으로 산 고승들의 삶을 차례로 설명함으로써 법문을 매듭짓고 있다. 이제 연구자는 당시의 이러한 법문을 교육의 관점으로 바꾸어 교육의 의의와 내용(불교의 영성적 가치인 자성이란 무엇인가), 교육의 방법(자성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스승의 역할(화두 공부에서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등에 대해 논의해보고, 결론으로 화두 참구법의 교육적 의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모든 교육은 잠재적이든 명시적이든 일정한 의도나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연구자로서는 당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교육의 장이 마련되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교육자(법사)의 교육 의도는 자료로 남아 있어 알 수 있다. 즉, 성철 스님은 교육(법회)을 시작하기 전에 모임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3)『영원한 자유』는 1968년의 대학생 수련회 법어집이지만 백일법문이나 윤회법문 등의 내용도 일부 들어 있으며, 1988년 성철스님의 상좌였던 원택 스님이 정리한 것이다. 연구자가 1968년 당시 법회에 직접 참석한 것이 아니어서 상황 구성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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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먼 곳을 찾아와서 이러한 수련법회를 가지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 바르게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4)

    즉 불교의 이해와 실천을 위해 대학생들이 모였다는 것을 교육자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라고 할 때, 그것은 대개 종교적인 형식으로 표현된 교의나 제의를 말하게 된다. 즉 석가모니는 어떤 사람인지, 반야심경과 같은 불교 경전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혹은 절에서 행하는 각종 의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불교의 내용을 구성한다. 실제 대학생들이 그 법회에 참석한 동기도 그런 것일 수 있고, 일반적으로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당시 교육자인 성철 스님의 ‘수업’인 법문의 초점은 꼭 거기에 부합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법문 가운데 교의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 당시 그 자리에서 성철 스님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교의나 제의 중심의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진리인 ‘불법(佛法)’이었던 것이다.5) 대학생들에게 불법을 알게 해야겠다는 것이 교육자의 교육 목표이자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불법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스님은 그것은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도 나타낼 수 없는”6)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언어, 문자로 접근할 수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 알 수는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스님의 답변은 그것은 ‘자성(自性)’을 깨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언어 문자로서 가능하지만 불법을 아는 것은 언어 문자 ‘밖의’ 일이기 때문에 자성을 깨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불법의 진정한 이해(언어적 이해가 아닌)가 자성의 깨침에 의한 것이라면 불법과 자성은 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당시 성철 스님이 가르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자성의 깨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질문은 불법에서 자성으로 옮겨가게 되고, 자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잇달아 제기된다. 그런데 자성 역시 언어, 문자 ‘밖의’ 일이어서 설명해 줄 수 없다.7) 다만 스님은 ‘영원한 생명

    4) 성철(원택 편),『영원한 자유』, (장경각, 1988), 머리말. 5) 성철 스님의『영원한 자유』를 편집하였던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의 상좌인데, 그가 출가 전 성철 스

    님을 찾아가 불교에 대해 물었을 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불법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크게

    환영한 적이 있다(원택,『성철스님 시봉이야기 1』, (김영사, 2002), 58). 6)『영원한 자유』, 머리말.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81

    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것이 자성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 뒷날 책 제목이 되기도 한 ‘영원한 자유’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자성이며,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자성의 깨침이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수업’에 학생들은 불교적 지식이나 의례를 배우고자 참가했을 수도 있지만 교사인 성철 스님은 불교적 지식보다는 그 지

    식 발생의 ‘근원’인 불법의 ‘전달’, 즉 자성의 깨우침에 목적이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법의 핵심인 자성의 깨우침은 그가 당시 법회에서 가르치고자 했던 교육

    내용이었던 셈이며, 그 가치는 대(大) 자유인이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3. 교육방법(1): 언어, 문자로의 전달

    교육 상황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교육내용이라고 한다면 성철 스님이 당시 대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교육내용은 ‘불법’이자 ‘자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불법’이자 ‘자성’은 언어나 문자 ‘밖의’ 일이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라는 난제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래서 불교에서 볼 때 ‘(교육적)전달’이라는 말이 적합한 말은 아니다. 성철 스님도 자성을 가르친다든지 전달한다든지 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르치거나 전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철 스님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언어, 문자를 빌어 설법한 것은 가르침이 아닌 것인가.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언어, 문자 교육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법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들 자성을 깨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말과 문자의 이해와 터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과 문자로써 불교를 설명하는 까닭은, 비록 말과 문자로써 불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여도, 불법을 알리려면 먼저 그 말과 문자를 가지고 설명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법 그 자체는 말과 문자에 매이지 아니한 것이나, 다만 말과 문자를 빌어 어떠한

    7) 자성이란 글자의 뜻은 자기의 본래 성품이란 뜻이다. 만법이 다 자성을 갖추고 있기에 법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체만법의 본모습을 말하는 것인데, 그 본모습은 변동이 없다 하여 진여(眞如)라고 하기도 한다. 이 진여자성을 깨치는 그것이 견성이며, 그것이 곧 성불이다[見性成佛]. 결국 불법을 안다는 것은 견성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며, 그것이 불교 공부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82 신학과 철학 제24호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야 자성을 깨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뿐인 것으로서, 지금 설법하고 있는 이 말과 문자가 실지의 불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8)

    불법이나 자성은 언어, 문자 밖의 일이지만 그에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방편)로서 언어, 문자의 효용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 스님 자신이 불교를 ‘설명’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설명하다보면 그 설명이 곧 실체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성철 스님의 말이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할 때에 그냥 말로만 “달을 보라”하면 사람들은 잘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달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을 보라”고 말함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주면 많은 사람들이 좀더 고개를 들어 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때에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 영원토록 달은 보지 못하고 만다는 것입니다.9)

    우리가 달을 보는 것이 자성을 깨치는 것인데, 스스로 자성을 깨치기 힘들 뿐 아니라 자성의 가치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 자성을 먼저 깨친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

    기도 하고, 말로 달을 보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을 보라고 달을 가리키면 가리키는 손가락만 볼 뿐 달을 보지 않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니며, 말로 일러주는 것이 무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자성에 대한 교육적 ‘전달’은 여기까지다. 자성은 언어나 문자로써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육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문자 교육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형태의 교육이 아니면 교육이 아니라고 보기 쉽지만 자성의 교육은 문자교육과 또 다른 교

    육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 성철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일반인들이 매우 의아해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책 보지마라’는 가르침이다. 성철 스님은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 즉 수좌(首座)들에게 책을 보지마라는 ‘계율’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스님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성철 스님 자신은 정작 동서고금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사람으로서 만 권이 넘는 장서를 곁에 두고 있으

    8)『영원한 자유』, 머리말. 9) Ibid.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83

    면서도 후학들에게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은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성철 스님 때는 마땅히 배울 스승이 없었어. 그래서 자신이 대장경이다 어록이다 해서 다 읽었지.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보니 마음을 깨치는 선방 수좌에겐 많이 보고 많이 읽는 것이 소용없더란 것을 알았지. 수좌라면 오로지 참선하는 것밖에는 마음을 깨치는 다른 길이 없음을 확실히 아셨던 거야. 그러니 수좌들에게 책 보지 말고 참선만 하라는 말씀이신 게지.10)

    이와 같이 성철 스님의 책 읽지 말라는 것은 선방에서 오로지 참선 공부하는 수좌들에게 하는 이야기였지 누구에게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선이 무엇이며, 자성을 깨치는 것이 어떤 것이길래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인가 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문은 인류 역사에 비해 볼 때 문자의 역사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난 공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불교의 진리인 불법은 곧 자성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자성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언어 문자적 ‘설명’을 통한 전달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 의의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언어 문자적 설명의 한계 때문이다. 그 한계란 첫째, 언어 문자가 불법이나 자성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 그러다보니 언어 문자를 통한 전달은 오해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기에 언어 문자는 불법 전달에 있어서 보조적 도구로 그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는 것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생각한 교육은 단지 언어 문자로 전달될 수 있는 불교적 지식의 이해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 불법과 자성의 깨달음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방법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 교육방법(2): 화두 공부법

    교육방법의 역사에서 언어, 문자를 미디어로 하는 교육 전통은 주류, 비주류를 넘어 방법의 역사 자체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그러한 언어, 문자에 의

    10) 원택,『성철스님 시봉이야기 2』, (김영사, 2001), 150.

  • 84 신학과 철학 제24호

    존하는 전달에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는 성철 스님 개인의 취향을 넘는 선불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선불교의 선(禪)이란 선정(禪定, dhyāna)을 말하며, 문자를 통하여 자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른바 교(敎)의 전통과는 다른 전통이다. 선사(禪師)인 성철 스님의 입장 역시 자성을 깨치는 방법으로 선정을 이야기하였고, 선정 공부 가운데서도 화두참구라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성철 스님은 불법과 자성, 그리고 화두참구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도 나타낼 수 없는 불법을 바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의 자성을 바로 깨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면 또 그 자성은 어떻게 하여야만 바로 깨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정(禪定)을 닦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선정을 닦는 데는 화두참구(話頭參究)가 가장 빠른 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화두참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들을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화두 가운데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내버리고 말만 들으면 이 법회를 하는 근본 뜻과는 완전히 어긋나게 됩니다.11)

    즉 불법을 아는 것은 자성을 깨침으로써 가능하고, 자성을 깨치는 방법은 선정을 닦음으로써 가능한 데, 선정을 닦는 방법 가운데 화두참구가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다. 화두참구가 빠진 상태에서의 공부, 즉 “화두를 내버리고 말만 들으면” 근본 뜻에 도달할 수 없게 되니 화두 가운데서 법문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날, 즉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문 시작하는 날, 대학생들에게 문제를 하나 던졌다. 이른바 화두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如何是佛)삼 서근이니라(麻三斤).12)

    그런데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라는 질문은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어서 그 말을 못 알아듣는 대학생은 없겠지만 그에 대해 ‘삼 서근이니라’라는 답변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들이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거룩하신 분, 위대하신 분, 세상의 진리를 터득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삼베의 재료인 삼이 세 근

    11)『영원한 자유』, 머리말.12) Ibid.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85

    (약 1.8㎏)이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선사(禪師)는 같은 질문에 ‘마른 똥 막대기[乾屎厥]’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일상세계의 상황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 즉 격외어(格外語)다. 성철 스님은 “이 화두에서 큰 스님(삼 서근이라는 말은 성철 스님이 처음 했던 것이 아니며 중국의 洞山 守初 禪師가 처음 한 말이다. 여기서 ‘큰 스님’은 수초 스님을 말한다)이 ‘삼 서근’이라고 대답한 말씀은 말 그 자체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깊숙한 곳에 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언외현지(言外玄旨)라 하니, 곧 말 밖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밖의 깊은 뜻, 곧 ‘삼 서근’이라고 대답한 그 근본 뜻을 바로 참구하여야만 불법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13)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화두는 어떻게 참구하는 것인가. 다시 성철 스님의 이야기다.

    우리 대중은 이 법문을 들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하며,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것이 바로 화두참구하는 법입니다. (…)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이를 테면 법문을 들을 때나 좌선을 할 때나 밖에 나가 돌아다닐 때나 또는 다른 사람과 말할 때나 늘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했는가?’하고 의심하는 화두참구가 우리 생활의 생명선이 되어야 합니다.14)

    화두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부처님을 물었는데 삼 서근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의심이 들 것이고, 그에 대해 의심하라는 것이다. 산에 대해, 물에 대해 국어사전에 적힌 대답을 하였다면 의심이 들 리가 없다. 부처님에 대해 물었을 때, 불교의 창시자라거나 깨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면 뭐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답이 아니다. 우리가 전달받은 지식,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무어라 대답해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답이 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을 듣는 여러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성철 스님은 대학생들에게 일주일간 하루 두 시간씩 법문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 법문 어디에도 ‘이것이 답이다’라는 것은 없다. 혹자는 그 책을 읽어보니 그 속에 답이 있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중도(中道)니 불성(佛性)이니 하는 말들을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 그 답이 궁금해서 스님을 몰래 찾아갔을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님이 그 학생을 가상하다 하여 알려주었겠는가. 학교교육 상황이라면 수업 시

    13) Ibid.14) Ibid.

  • 86 신학과 철학 제24호

    간에 교수의 질문을 생각하다생각하다 궁금해서 교수님을 찾아가면 교수님은 가상하다

    고 답을 ‘친절히’ 설명해줄 지 모른다. 그러나 화두는 그렇게 그런 식, ‘간접적’ 방식으로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는 오로지 의심을 생명으로 하여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심이란 궁금증을 말하지 불신이나 회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그것이 뭐란 말이냐 하고 알려는 마음으로 의심해야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내가 지금 바로 가고 있나, 이렇게 하면 정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 하는 등의 의심은 의심이 아니고 불신이다. 그래서 화두 공부에는 의심과 동시에 자성과 화두에 대한 굳게 믿는 마음, 즉 ‘대신심(大信心)’이 있어야 한다. 여우와 같이 의심하는 마음은 화두에서 말하는 의심이 아니라 불신이다. 그래서 화두참구에서의 의심은 ‘대의심(大疑心)’이라고 한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바탕이 된 궁금증이 있어야 화두참구에 집중력과 지속성이 생긴다. 우리는 ‘삼 서근’이라는 대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 즉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참구하지 않는다. 몇 가지 이런저런 생각, 즉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해보다가 그만 두어버리거나 책(요즈음 같으면 포털 사이트의 검색)을 통하여 답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모르겠다며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스승에게 답이 뭐냐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책에 있는 글이나 누구의 말도 답이 될 수는 없다. 그 어떤 말과 글도 견성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不立文字]. 무문(無門, 1182-1260) 선사가 말한 ‘악지악각(惡知惡覺)’일 뿐이다. 여기서는 팔만대장경도 악지악각일 뿐이다. 선은 불교가 아니라 불법을 타겟으로 삼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팔만대장경은 최고의 성보(聖寶)이지만 불법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공부이다. 스승도 화두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화두를 대신 타파해줄 수는 없다. 그러기에 공부도 ‘직접’공부[實修實參]여야 하고, 깨달음도 ‘실다운’ 깨달음[實悟]이어야 한다. 화두라는 것도 반드시 온몸으로 스스로 부딪쳐 보아야 하는 것이지 말로써 하는 깨달음은 벌써 다른 일이 되고 만다고

    한 것이다.15) 이와 같이 선의 교육은 누구의 가르침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아니 선은 가르침이 아니다. 선이 가르침이 아니라면 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성철 스님의 1981년 신년 법어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15) 無門曰, 參須實參, 悟須實悟, 者個胡子, 直須親見一回始得, 說親見, 早成兩個(無門關 第四則).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87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특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두고 말이 많았다. 이에 대해 어떤 기자가 묻자 성철 스님은 “선(禪)은 교수(敎授)하는 것이 아니고 적시합니다. 우주만물의 실상을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선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16) 여기서 교수한다는 말은 전달한다, 가르친다는 말이다. 선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산이 뭐냐, 물이 뭐냐 하면 우리는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훨씬 높이 솟은 부분’이라거나 ‘수소 2와 산소 1의 화합물로서 색·냄새·맛이 없는 액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교육 현장에서 이렇게 전달한다. 그러나 선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적시(摘示)할 뿐이다. 적시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다. 앞서 성철 스님이 비유했듯이 달을 가리킬 뿐이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볼 수 있으므로 그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라면 불교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인가. 아래 제5장 스승의 역할에서 이 점을 포함하여 스승의 존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5. 스승의 역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철 스님은 자성을 깨치는 데 화두참구가 가장 빠르고 수승한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화두는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책의 내용이라면 외우든지 이해하든지 하지만 화두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스승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본다고 해야 대답을 해 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중국 선종사에서는 선종의 유파를 ‘5가7종(임제·조동·위앙·운문·법안의 5가와 임제의 양기·황룡 2파)’으로 나눈다. 그

    16) 성철(원택 편),『자기를 바로 봅시다』, (해인사출판부, 1987), 150.

  • 88 신학과 철학 제24호

    가운데 조동종(曹洞宗)의 종조(宗祖)인 동산 양개(洞山 良价)는 ‘스승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음을 귀하게 여긴다.(不重先師佛法道德, 只貴不爲我說破)’라고 하였다.17) 스승과 도, 덕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승이 왜 존재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데,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스승의 침묵이야말로 오히려 귀한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산 스님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성철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버립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해 줄 따름입니다.18)

    일반적인 교육 장면에서는 교사의 존재 의의가 교육내용을 설명해주는 데 있지만 화두참구에서는 오히려 설명을 안 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말해주는 적절한 사례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 향엄(香嚴, ?-898)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매우 총명했다. 불가와 인연이 있어 백장(百丈, 749-814) 선사에게 출가 하였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승이 열반에 들어 다른 스승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위산(潙山, 711-853) 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하루는 스승(위산 스님)이 향엄에게 “그대는 백장 스님의 처소에 살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

    여 이해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줄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의 근본이다. 부모가 낳아 주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에 대해 한마디 말해 보아라.”고 하였다. 향엄은 이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으로 돌아와 평소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는 “그림 속의 떡은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라며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주시기를 여러 번 청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만일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할 것이네. 무엇이든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내 일일 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향엄은 평소에 보던 책들을 모두 불태우며 금생에는 다시는 불법을 배우지 않고 돌아다니면 몸이나 편하게 지낼

    17) Ibid., 61.18) Ibid.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89

    것이라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으나 스승은 잡지 아니하였다.19) 이것이 선이다. 스승이 가르칠 수 있다면 왜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제자의 간청에 이것저것 일러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설명에 지니지 않기에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뒷날 다른 곳에서 격죽(擊竹)의 기연(機緣)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거처로 돌아와 목욕 분향하고 멀리 있는 스승에게 절을 올리며, “스님의 큰 자비여!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십니다. 만일 그때 저에게 말로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20) 깨닫고 보니 당시 스승의 ‘불친절’이 오히려 친절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칫 잘못 생각하여 불교에서는 스승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긴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화두 공부에 있어서 스승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화두를 제시하는 역할이다. 성철 스님이 법문을 시작하는 날 ‘삼 서근(麻三斤)’이라는 화두를 학생들에게 주었는데, 이는 단지 풀어야 할 어떤 시험 문제와 같은 것을 제시한 것으로만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 뒷날 성철 스님의 상좌가 되었지만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원택이 화두를 받는 과정을 보자.

    “큰 스님, 불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불교?, 불교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데이. 불교를 알고 싶으면 큰절에 내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거든. 해인사 강원에 강주 스님이라고 불교를 내보다 더 잘 아니까, 거기 가서 물어봐라.” (…)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가란다고 그대로 내려갈 수는 없다. 불교를 가르치지 않겠다면…. 그렇다. 나는 참선에 관심이 있어 성철 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 다시 간청했다. “큰 스님, 불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저는 본디 참선 공부를 하고 싶어했습니더. 큰스님께서 제가 참선할 수 있게 화두를 주셨으면 합니더.” 순간, 큰 스님 얼굴 표정이 확 변했다. 지금까지 무뚝둑하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호상(虎相)의 굵은 주름이 확 펴진다. “참선하고 싶다 했나? 오냐 그래. 그라문 내가 참선하도록 화두를 줄게. 나따라 오이라.”

    19) 백련선서간행회,『위앙록』, (장경각, 1989), 53-54.20) Ibid., 54-55.

  • 90 신학과 철학 제24호

    성철 스님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간다.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 절을 세 번 했다. 신도들은 스님에게 절을 세 번 올리는 것이 절집의 인사법이다. 스님이 내린 화두는 ‘삼서근’이었다. 예상치 않았던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이셨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삼서근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이라고 했는고, 이것이 삼서근 화두다. 염불하듯이 입으로만 오물거리지 말고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가’ 하는 의문을 놓지 말도록 해라.” 뜻밖의 자상함에 어찌나 고맙고 감사한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열심히 하겠습니더” 하니 다짐에 다짐을 더했다. 백련암을 내려오면서도 큰 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21)

    화두는 이와 같이 선 스승의 교육에서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교육학의 관점에서 보면 화두를 주는 것은 학습자를 교육의 출발점에 세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화두를 받는 것이므로 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청년 원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뒷날 출가를 하여 세상의 출세의 길보다는 출격대장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니 스승이 화두를 준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스승의 또 하나의 역할은 화두참선을 격려하는 것이다. 화두의 답은 각자가 찾는 것이다. 그러나 답을 찾는 과정에 스승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위산 스님은 향엄에게 본래면목이 무엇이냐는 화두를 내렸다. 그러나 향엄은 그에 대답할 수 없었고, 급기야 스승에게 여러 번이나 간절하게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스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스승은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은 듯하지만 대답하지 않은 것 자체가 실은 은밀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방’과 ‘할’도 폭력이나 고함이 아닌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선가의 전통인 것이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 역시 다르지 않다. 천제굴에서 수행할 때의 일이다.

    밤새 정진하고 난 대중들은 새벽예불을 마치고 다시 법당에 앉아 선지식을 기다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적요함만이 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선지식이 들어 앉아 잠시 선

    정에 들었다. 그리곤 곧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내리쳤다. “쿵!” 성철 스님의 그 뚝뚝하고 시퍼런 눈길이 대중을 향했다. 온 몸에선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일러보라’는, ‘그대들 공부의 분상을 드러내라.’라는 무언의 암시였으나 대중 모두는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성철 스님의 눈길이 법전(法傳) 스님과 혜춘 스님에게 떨어졌다. “일러보라.”

    21) 원택,『성철스님 시봉이야기 1』, (김영사, 2002), 59-60.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91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하라.’고 가르쳤던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한 대중의 침묵만이 흘렀다.

    “모두 마당으로 나오라!” 주장자를 내리치기엔 법당이 좁아서였을까, 대중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 앉자 성철 스님은 자신을 시봉하고 있던 법전 스님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깨 위며 등에 무차별하게 주장자가 내려 앉았으나 법전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법전 스님을 내리처던 매가 이번에는 혜춘 스님에게로 옮겨졌다. 혜춘 스님 역시 소낙비처럼 내리 쏟아지는 주장자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장자는 멈춰지지 않았다. “자식까지 두고 온 수행자가 그렇게 정진해서 되겠는가?” 혜춘 스님은 스승의 매를 그대로 맞고 있었고, 그 질책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어린 사미니 한 사람을 불렀다. “너, 뒷방에 가서 저 비구니의 바랑을 가져 나오너라.” (…) “불을 질러라.” 어린 사미니는 바랑에 성냥을 그어댔다. 바랑은 바람결에 활활 타기 시작했다. 그 불꽃 앞에서 스승도 대중도 침묵했다. 성철 스님의 조도(助道) 방법은 남달랐으니, 후학들에게 내리쳤던 주장자는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요, 후학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격려였다.22)

    선 스승의 가르침은 이와 같은 것이다. 춘풍과 같은 온화한 격려가 없지는 앉지만 이른 봄, 매화꽃을 피우기 위해 혹한과 비바람의 역할을 마다않는다. 선 스승의 또 하나의 역할은 감변(勘辨)이다. 학습 장면으로 치면 공부가 제대로 되었는가에 대한 시험이요, 평가다. 흔히 선객을 달마 대사에 빗대어 ‘눈 푸른 납자’라고 표현한다. 그 납자의 눈은 유성(流星)과도 같으며, 선기(禪機)는 번개불과 같다. 그 선기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스승이다. 법전(法傳, 1926~) 스님이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장면은 이러하였다.

    노장은 내 눈을 바라보고는 ‘뭔가 있구나’ 싶었는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쏘아보았다. 그러곤 거두절미한 채 물었다. “무자(無字) 화두를 일러보거라.” 노장은 그날, 내 공부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많은 고성과 경책이 오고간 후였다. (…)

    22) 박원자,『길 찾아 길 떠나다』, (김영사, 2007), 119-121.

  • 92 신학과 철학 제24호

    하룻밤을 자고 성전암을 나와 파계사 금당선원으로 공부하러 가는 내게 노장이 말씀하셨다. “우쨌든 무자 화두를 한마디로 일러보거라. 그 한마디만 똑바로 이르면 끝난다.” 며칠 동안 파계사 금당선원에 머물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화두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던 그때 매 시간마다 경계가 바뀌는 경험을 했고, 하루 몇 차례씩 금당선원에서 성전암으로 올라가 노장께 공부를 점검받았다. 그때는 온 마음에 화두가 가 있어서 발이 땅에 닿는 줄도 모르고 걸어 다녔다. 노장이 철망 안에서, 나는 철망 밖에 서서 화두를 묻고 답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때 참된 변화가 왔다. 어느 날, 노장이 물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우째서 없다고 했노?” 내가 대답했다. “일월동서별(日月東西別)하니 좌인기이행(坐人起而行)이라! 해와 달이 동서를 구별하니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서서 가더라.” 노장이 듣더니 큰 소리로 내가 답한 것을 되풀이하며 읊었다. “일월동서별하니 좌인기이행이라. 일월….” 며칠 후 노장이 또 물었다. “우째서 개에게서 불성이 없다캤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가버리자 “말로 해봐라!”하였다. 그때 경계를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 노장이 시자였던 천제, 만수 등을 불러 분부하셨다. “너그들 가서 떡 좀 해 온나.” 의심을 파한 재, 파참재(罷參齋)를 해서 대중공양을 하려는 것이었다. 대중들에게 제자의 공부를 이룬 소식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공부하다가 깨친다든지 득력(得力)하면 파참재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23)

    법전 스님은 스물 넷에 스승 성철을 만나 태산처럼 믿으며 시봉하고 공부한 지 10년 만에 드디어 인가를 받은 것이다. 자성을 깨치고 나니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척척 하게 되었으며, 물구덩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 해도 겁날 게 없는 상황이었다. 1천 7백 공안을 다 물어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스승도 “니는 이제 됐다. 어떤 것을 물어도 대답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24) 불교에서는 스승을

    23) 법전,『누구 없는가』, (김영사, 2009), 128-129.24) Ibid., 129-130.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93

    흔히 ‘선지식(善知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화엄경』「입법계품」에서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지식의 가르침은 봄 날씨와 같아서 모든 착한 법의 싹을 자라게 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보름달과 같아서 비치는 곳마다 서늘케 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여름의 설산과 같아서 모든 짐승의 갈증을 없애주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연못에 비치는 해와 같아서 모든 착한 마음의 연꽃을 피게 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큰 보배의 삼과 같아서 갖가지 법의 보배로 그 마음을 충만하게 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염부나무와 같아서 모든 복과 지혜의 꽃과 열매를 모으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큰 용왕과 같아서 허공에서 자재하게 유희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수미산과 같아서 한량없는 선한 법의 삼십삼천이 그 가운데 머무르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제석과 같아서 모든 대중이 둘러 호위하여 가릴 이가 없고 능히 외도의 아수라 군중을 항복

    받는다.25)

    선의 스승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자와 같은 간접적인 공부 전통을 배격하고 직접적 경험을 강조하는 선의 특성으로 인하여 스승의 가르침 역시 활발발(活潑潑)하다 못해 기이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 스승의 교육법이야말로 무한 복제되고 정형화된 지식만을 주입하다시피 하고 있는 지금의 교육 전

    통에 가르침과 배움을 다시 정의 내리게 한다.

    6. 맺음말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펼친 교법을 흔히 팔만사천 법문이라 한다. 이렇게 많은 법문을 펼친 것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며, 모두 교화하여 진리로 이끌어 들이는 문(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종교가 갖고 있는 영성적 가치가 어떻게 대학교육에 전달될 수 있는가?’라는 오늘 학회의 질문에 대한 불교의 대답 또한 하나 둘로 이야기될 성질은 아니다. 연구자는 오늘 불교의 팔만 사천 가지 교화의 문 가운데 선불교, 특히 화두참선라고 하는 하나의 문을 소개하였다. 이제 이 문의 의미를 오늘날 교육학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오늘날 교육 개념은 ‘지식’과 ‘전달’을 키워드로 하여 성립한다. 교육내용은 지식이며, 교육방법은 전달이다. 그리고 현대교육에서 말하는 ‘지식’은 앞서 보았듯이 산을

    25) 무비 편찬,『화엄경』(제8권), (민족사, 1994), 243.

  • 94 신학과 철학 제24호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훨씬 높이 솟은 부분’이라거나 물을 ‘수소 2와 산소 1의 화합물로서 색·냄새·맛이 없는 액체’라는 것이 그 실체다. 물론 이러한 류의 지식도 그 성립 과정이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볼 때, 나름대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 오늘날 교육은 바로 이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주 과제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선불교의 화두참선법은 이러한 교육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의 출발점은 인간을 보는 관점이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종교는 ‘구원’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리하여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고 보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인간은 이미 구원되어 있는 존재라고 본다. 성철 스님의 초파일 법어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자기를 바로 봅시다.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26)

    우리는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인식,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계(三界)의 도사(導師)라고 하는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오신 것도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

    해 오셨다고 한 것이다. 이 지점이 교육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흔히 우리는 교육을 ‘인간형성’이라고 본다. 인간은 불완전하거나 미성숙한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에

    26)『자기를 바로 봅시다』,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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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부가’하거나 ‘형성’시켜야 한다는 교육관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 중생, 삼라만상이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이와는 다른 새로운 교육관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교육은 부가나 형성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 자기를 보는 ‘반조(返照)’에 초점이 주어져 있으며 이를 견성의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27) 성철 스님이 “선은 교수(敎授)하는 것이 아니고 적시(摘示)합니다. 우주만물의 실상을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선입니다.”28)라고 한 말은 이러한 측면에서 선의 교육관을 적확히 지적한 것이다. 선에서는 교육이니 교수니 하는 개념 자체가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부가적 교육관, 형성적 교육관에서 중시하는 ‘전달’이란 말도 여기서는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선의 목적은 자기를 바로 보는 것, 즉 자성을 깨치는 것에 있으므로 이는 ‘전달’에 의해 이루어질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만물의 실상을 그대로 파악하는 것, 자성을 깨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화두참구법인 것이다.29) 화두참구법의 강점은 화두 밖의 무엇을 통하지 않고 그대로 부처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것이다[一超直入如來地]. 우리 현대인의 교육은 특히 언어나 문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언어나 문자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데 화두는 그런 언어, 문자로 지어진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언어나 문자는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유용성이 있으며, 특히 그 교육적 유용성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종교적 가치인 자성을 깨치는 데 언어, 문자의 효용성은 상당히 제한되거나 부정된다. 그러기에 성철 스님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행한 ‘교육’도 두 측면, 설명의 방식과 화두참구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30) 언어, 문자는 불법을 설명하는 단계로서의 의미에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화두참

    27) 안경식,「마조 선사의 사상과 그 교육적 의미」, 한국교육사상연구회,『교육사상연구』, 25(2011, 3), 119-138.

    28)『자기를 바로 봅시다』, 150.29) 그렇다고 성철 스님이 화두참구법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도나 염불이나

    주력 등 여러 가지 견성의 방법들이 있지만 화두참구법이 가장 빠르고 수승한 법이라고 하였다. 실제 성철 스님을 만나려면 법당에서 부처님께 삼천 배를 하고서야 만나게 하는 등 절 수행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을 바로 보게 하는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배 기도를 시키는 것인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나를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3천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가 오고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자기를 바로 봅시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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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 의미, 특히 교육에서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진리로 이끌어 대자유인이 되게 하는 ‘길[門]’로서의 의미다. 많은 대학들이 ‘진리’, ‘자유’, ‘정의’ 등을 교시(校是)로 내세우고 있지만 오늘날 대학교육에서 ‘진리’, ‘자유’가 대학생들의 삶에 어떤 실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대학의 교육과정 역시 인간교육, 교양교육은 부수적으로 취급하고 직업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영성적 가치를 어떻게 대학교육에 전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비단 종립대학 뿐 아니라 모든 대학, 적어도 자유와 진리를 학교의 교육이념이나 교시로 내세우는 학교교육에서는 첫 번째 질문이 되어야 한다. 화두의 교육적 의미는 ‘비지식적 교육미디어’라는 특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두는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화두는 인간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미디어다. 그러나 화두는 지식이 아니다. 화두는 진리로 이끄는 도구 역할을 하면서도 기존 지식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기존 지식이 언어와 지식을 활용하여 논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화두는 언어와 문자를 활용

    하기는 하지만 초논리적 형태로 만들어져있다. 그러기에 지식교육에만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현대교육에서는 생소할 수 있지만 이미 천 몇 백 년의 역사 속에서 뛰어난

    인간교육의 미디어로 인정받아왔고,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교육사를 보면 지식의 형태로 된 수없이 많은 인간교육의 자료들이 있다. 그러나 지식교육으로 인간교육에 성공한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수없이 많은 지식을 두고서 오로지 하나의 화두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교육에 있어서 대단한 ‘발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화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의 수행법으로 고안되고 발명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에 한정될 수는 없다. 불교에서 보자면 그것은 불법(佛法)을 아는 공부이지만 그 불법이라는 것은 인간 종교 이전의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문자로 혹은 종교라는 제도로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교육이 인간교육의 과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화두참구법은 종교에 관계없이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 교육미디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 석가모니 역시 자성을 깨친 후, 49년 동안 수많은 설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들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 것 역시 같은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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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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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식

    이 논문은 불교의 영성적 가치인 자성(自性)이 무엇인지, 또 그 자성을 어떻게 대학교육에서 가르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현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禪僧)인 성철 스님(1912-1993)이 실제 대학생들에게 자성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였는지, 자성을 가르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성철 스님이 말한 자성은 불법(佛法)의 핵심적 내용으로, 인간은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성은 언어와 문자로 가르칠 수 없다는 교육상 문제점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에서는 화두라는 것을 개발했다. 의심을 기초로 하는 화두는 자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종의 정신개발법인데, 학교교육에서 보편적으로 활용하는 논리적 설명 방식을 배제한다. 화두는 기존의 지식의 전달을 위주로 하는 가르침과는 다른 교육전통을 제시한다. 화두를 통해 대학생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우주만물의 실상(實相)을 파악할 수 있으며,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 화두는 동아시아 불교교육문화의 한 부분이지만 종교나 학력, 인종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종교교육 미디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자성(自性), 화두(話頭), 교육미디어, 불교교육, 성철 스님, 선불교교육, 종교교육

    초 록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선불교를 중심으로

  • 불교에서의 자성의 교육 99

    An, Gyeong Sik

    This paper focuses on what Jaseong, spiritual value of Buddhism, is and how to apply it on university education. In order to do this, we closely looked into Venerable Monk Seong Chol(性徹, 1912-1993), the famous Seon(禪) monk in Korea, how he described what Jaseong is and what kinds of method he used to teach it, in front of university students. Seong Chol descirbes Jaseong as a vital content of the Buddha-dharma and by realizing it, human being can achieve eternal life, happiness and freedom. However Jaseong has a educational difficulty since it cannot be teached by languages and letters. To solve this problem, Seon Buddhism invented Contemplation of a Hwadu(話頭). Hwadu is kind of a mind development process to figure out what Jaseong, and it excludes logical explanation method, that commonly used in school education. Hwadu suggests another educational tradition that different from conventional teaching that focuses on transferring knowledge. Through Hwadu, not only university student but every people can understand Dharmata, seek true happiness and become Buddha. Even though Hwadu is a part of East Asian Buddhistic teaching culture, it can be a religious educational media that can be applied universally, regardless of religion, educational background or ethnicity.

    Jaseong, Spiritual Value of Buddhism and its Teaching on University Education: Focused on Seon Buddhism

    Abstract

  • 100 신학과 철학 제24호

    Key Words: Jaseong(自性), Hwadu(話頭), Educational media, Buddhism education, Monk Seong Chol(性徹), Seonbulgyo & education, Religion education

    논문 접수일 2014년 3월 10일

    논문 수정일 2014년 5월 7일

    논문게재 확정일 2014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