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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향토를 담은 천재 화가 - dgi.re.kr...1931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으로 첫 특선 1932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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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향토를 담은천재 화가

이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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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8월 28일 대구에서 출생

1922 수창공립보통학교 입학

1928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

1929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그늘> 첫입선

1930 대구지역 미술인들의 모임인 향토회 창립. 제9회 조선미전에 <겨울 어느 날> <풍경 제1작> 입선

1931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세모가경>으로 첫 특선

1932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입학. 제13회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름 어느 날>로 첫 입선

1935 제14회 조선미전에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 수상. 6월 대구 공회당에서 김옥순과 결혼

1935 남산병원 3층에 ‘이인성양화연구소’ 개설

1938 동아일보에서 개인전 개최

1945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

1947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에 출강

1948 6월 자유신문사 후원으로 동화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50 11월 3일 작고

이인성 연보

밀레의 그림이다.고호의 해바라기이다.혼잣말을 하며 보리밭 사잇길을 마음 닿는 대로 걷는다.보리타작의 계절, 정말 아름다운 구경거리이다.정말로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다른 나라에는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겠지? 가볍게 장단을 맞추며 ‘도리깨’를 흔드는 그 순간의 리듬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아리랑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이인성, 《대한일보》 1934년 9월, “향토를 그리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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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는 화가를 꿈꾸는 전국의 지망생들에게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매년 봄에 열리는 이 공모전은 1년 동안 미술계의 성과를 보여 주는 발

표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시 기회가 자주 없었던 탓이다.

미술인들의 기대와 환영을 받았지만 당연히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이 주관한 공모전이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예술을 개척하기

보다 관의 눈치를 보는 성향을 기를 우려가 있었다. 일제 당국 역시 공모전을 문화적인 통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이렇게 논란이 큰 공모전이긴 하지만 이 전시회를 통해 재능 있는 작가들이 발굴되고 창작

의 동기를 자극한 점도 사실이다. 공모전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 공을 인정한

다면, 어려운 형편의 개인들이 등단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인성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최초 입선을 하여 20세이

던 1931년 제11회 전에서는 첫 특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 뒤로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연속 5

회의 특선을 차지했으며, 마침내 1935년에는 최고상인 창덕궁 상을 받았다. 1932년부터 시작

된 일본 유학 기간에는 일본의 각종 공모전에도 출품하였다. 가장 권위 있다고 하는 〈제전〉에

도 수차례 입선하였다.

20대 초반에 거둔 그의 빠른 성공을 보면 분명 천재적인 재능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작가

다. 게다가 매회 출품하는 작품 수를 보면 그의 노력 또한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에

게는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열정과 집념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배경에는 미술

에 관한 그의 취미를 길러준 당시 대구화단의 독특한 환경이 놓여 있었다.

수채화를 통해 꽃 핀 대구의 서양화단

대구에는 서양화가 일찍이 들어와 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높았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

이 이인성과 같은 뛰어난 작가를 배출하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소개

되고 한국인으로서 처음 서양 그림을 전공하고 온 사람은 1915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춘

곡 고희동이다. 대구에서 가장 먼저 서양화를 공부하고 온 이는 독립운동가 이상정이다. 그는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서양화를 배우고 익혔다. 이상

정은 1916년 무렵 대구 계성학교에 도화교사로 부임하면서 처음 수채화 용구를 들여와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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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가르쳤다. 물론 그 자신이 직접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작품 발표회도 가졌다. 이렇게

신미술에 대한 견문이 싹트고 확산되는 가운데 소수의 선구적인 서양화가들이 대략 1920년

대 초부터 활동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26년과 1927년에는 대구 출신의 두 젊은 청년이 각자 개인전을 열었다. 먼저 박명조가 제

5회 조선미전에 2등으로 입선하면서 그해 여름 대구에서 조선인 화가로서는 첫 서양화 개인

전을 열었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서동진의 첫 수채화 개인전이 이어졌다. 대구의 작가들은

대부분 수채화로 서양화를 시작했다. 새롭고 생소했던 서양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아무

래도 수채화가 좀 더 다루기 쉬운 수단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동진의 수채화전은 시민들의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높은 관심의 여파인 듯 그해

12월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과회〉란 단체를 결성하고 미술전을 개최했다. 이어서 1930년

에는 전문적인 서양화가 그룹인 〈향토회〉가 발족하여 창립전을 여는 등 대구화단의 틀이 갖

춰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수채화가 중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이인성도 수채화 작품을 통해서 〈○과회〉에 참여하고, 조선미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할 때

까지 수채화가 그의 주 표현 수단이었다. 물론 그 이후의 발전도 수채화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인성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수채화 작품이었다.

조선미전 첫 입선과 향토회 회원

이인성은 지금 나이로 생각하면 조금 늦은 열한 살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미

술에 관한 그의 재능은 이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눈에 띄었다. 그의 성적표를 보면 도화 성적이

1학년 때만 8점이고 나머지 전 학년 동안 모두 10점 만점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으로 알려지면서 대구의 중견 서양화가인 서동진과 그 주변 인물들

을 만나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성과 서동진이 처음 만난 것

은 아마도 서동진이 수채화 개인전을 열며 대구에서 의욕에 차 활약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1927년 이인성이 6학년 때의 일이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이인성은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서동진을 만나 계속 그림

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더 큰 행운이었을지 모른다. 졸업 후 서동진을 더욱 자주 만나

며 그의 영향 아래서 수채화를 연습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전에서 이인성은 18세의 나이로 첫 입선함으로써 주위의 관심을 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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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받는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서동진은 이미 2년 전부터 이인성을 도우

며 그가 화가의 길을 가는 데 매우 중요한 디딤돌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인성은 서동진을 통

해 수채화 기법을 익히며 대구의 기성 작가들을 소개받고 전시회 출품 기회도 함께 얻었다. 그

리고 같은 해 6월 제3회 전으로 끝나는 〈○과회〉의 마지막 전시회까지 서동진, 박명조와 함께

참여했다.

조선미전에는 이듬해인 1930년에도 연이어 입선했다. 그리고 그해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서

양화가들이 창립하는 <향토회>에 기성작가들과 동등한 회원 자격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향토회>는 〈○과회〉에 참여했던 중견작가들이 다시 모여 만든 대구 유일의 서양화 그

룹이었다.

<향토회>의 회원들은 그 무렵 시가지 주변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 그것도 하루 중의 시각과

날씨를 함께 나타내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빛의 추구는 인상파 미술의 영

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인성도 마찬가지로 동네 부근의 평범한 모습을 그리거나 야외로 나

가 탁 트인 들녘의 경치를 화폭에 담아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곧 이인성은 능숙해진 필법으로 화면에 점차 리듬과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고

다른 작가들의 그림과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반복해서 그린 결

과였다. 그 무렵 이인성은 생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목표였던 그림 그리는 일에만 온 힘을 쏟으

며 지냈던 것이다.

조선미전 첫 특선과 일본 유학

그 결과는 세 번째 출품한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특선의 기쁨으로 돌아왔다. 당시 대

구화단으로서는 커다란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작품의 제목은 〈세모가경〉이었다. 대구의

어느 시가지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인성의 조선미전 첫 입선작과 비교해 볼 때 두 그림 사이

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자신감 있고 빠른 붓놀림으로 생겨난 화면의 활력이다. 수채화가 가진

장점인 생생한 느낌과 즉흥적인 기분도 크게 강조되었다.

서동진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차분하고 성실하게 재현한 데서 오는 아카데믹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인성은 다작으로 아주 능숙해진 붓질에서 곧 달필의 효과가 난다. 1931년의 첫 특

선작은 지금 흑백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그 분위기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다. 서동진의

1932년 작 〈골목길〉에서 보이는 활발하고 리듬감 있는 터치는 이인성의 앞선 작품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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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적인 필치와 비슷해 보인다. 아마도 이인성과 함께 가져온 변화일 듯하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이 최근 3-4년 동안 보여 준 발전은 서동진과 그 주위 사람들

에게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인성에게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

를 주자고 뜻을 모았다. 그해 가을 제2회 향토회전을 마친 이인성은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이인성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931년 말, 그러니까 1932년 정초부터는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화구를 취급하는 오오사마 상회의 아틀리에에서 지내며 주경야독하는 처지였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독자적인 개성을 꽃피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작품상의 현저한 변화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룬 성과를 전부

합쳐 놓아도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이제 그의 그림 세계는 보다 넓은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어

대구 지역 수채화단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본에서 가능했던 다

양한 참조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적용시켜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는 1932년 4월 작인 〈카이유〉에서부터 확인된다. 마치 새로 시작한 유학생활에 대한 기

대와 흥분을 반영하듯, 빠르고 힘찬 붓질은 훨씬 대담해졌으며 필획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한결 눈에 띈다. 수채화의 특성에 맞게 잘 적응한 자유로운 터치를 구사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솜씨로 형태를 그리고 있다. 이것이 대구 수채화단 범주에서 한 단계 도약한 그의 새로운 모습

<가을 어느 날>,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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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화려하고 깊이 있는 색채의 조화에서 나오는 격조가 이제 그의 최대 장점이 되었다. 붓놀

림이 경쾌한 것뿐만 아니라 ‘색깔의 미묘한 조화’나 ‘풍요로운 색채와 현대적인 감각’이란 표현

이 이인성 작품 세계의 특징을 두고 한 가장 적절한 평이 될 것이다.

조선미전의 최고상 수상

시가지의 가로 풍경을 묘사하면서 수채화로 시작한 그림 세계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리드미컬

한 필치로 자신의 양식을 완성하는가 하면 이제 풍경과 인물을 결합한 새로운 구상화(상상

화)를 탄생시켰다.

〈가을 어느 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야심적이다. 우선 크기에서 대작일 뿐 아니라 유화로 제

작했으며 주관적인 풍경화의 시작을 알린다. 가을볕에 초목들이 말라 들어가는 들녘의 풍광,

푸른 하늘빛, 발바닥 아래 부드러운 붉은 흙의 감촉 그리고 가슴을 드러낸 채 생각에 잠겨 걸

어가는 반라의 여인과 단발머리 소녀, 쓸쓸하면서도 찬란한 몽환적인 풍경이다.

지금까지의 풍경화에서 인물은 경치의 일부로 혹은 부속으로 그렸으나 여기서는 화면의 중

심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이인성은 이를 이후 그의 후기 양식의 한 특징으로

만든다.

<경주의 산곡에서>,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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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이 그림은 그가 일본에 간 지 겨우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 제작한 것이다. 조선미전에서 거둔 연이은 특선과 여름에 고향에서 가진 첫 개인전 그

리고 일본 제전에서 연속 입선의 영광을 안은 자신감에서 시도된 표현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받은 여러 영향과 함께 고향에 대한 생각도 들어가 있다.

아직 유화 기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나 경험을 습득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 아니었지만,

수채화를 통해 쌓은 조형 감각을 대담하게 유화로 옮겼다. 유화에 대한 아카데믹한 수업의 결

과가 아니라 수채화의 기법을 유화에 응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연주의적 시각에 머물지 않고 주제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추구한 것

은 가을 하늘의 푸른색과 토양의 붉은 색채다. 관념적이기는 하나 감각적이고 다소 거친 묘사

와 원시적인 색채가 그림을 이국적으로 느끼게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고향에 대한 감수성의

표현으로 보이게 한다.

이 작품에 이은 〈경주의 산곡에서〉는 1935년 조선미전에서 최고상을 받는다. 하늘과 대지

에 대한 원색적인 파악이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풍경 속에 고도(古都)의 상징적인 이미지들

이 경주라는 역사적 고장에 대한 관념을 자극한다.

일본 유학 중에 한국을 오가면서 의식하기 시작한 향토에 대한 생각을 회상적인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게 묘사했다. 아카데믹한 재현을 벗어난 표현의 대담성이 있고 전체적으로 평면적

인 구성은 자유로우면서도 장관이다. 스물넷의 이인성이 야심차게 완성한 이 작품이 한국근

대미술사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김영동

생각거리

이인성이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자.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이었던 이인성이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가 된 것은 우선적으로 서동진이라는 훌륭

한 스승을 만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문화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대구의 문화적 환경도 그의 성장에 바탕이 되

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요인은 미술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그는 같은 그림을 수도 없이 반복해

서 그리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갔다. 수채화에서 유화로 표현 수단이 바뀌어도 우수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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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과 이인성나무

대구 계산성당에는 이인성나무가 있다. 그의 작품 ‘계산동 성당’에 나오는 감나무는 ‘이인성

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된 지 80년이 지났으니, 수령 100년은 됨직

하다. 이인성의 작품에는 대구 도심 풍경들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 ‘계산동 성당’ 외에도 계

성학교, 팔공산 등 당시 대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장인이 운영했던

남산병원 3층에 ‘양화연구소’를 열어 그곳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했었다. ‘양화연구소’나 그

의 아지트였던 아루스다방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두류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이인성미술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이인성의 고향 대구의 체험학습 추천 코스

청라언덕

청라는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푸른 담쟁이 뒤덮인

동산동의 언덕을 가리킨다. 그

언덕에는 대구의 3・1운동이 시

작된 3・1만세길이 있다. 그리고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살았던

이국적인 집들이 있다. 학창 시

절 아침마다 만나던 여고생을

그리며 만든 박태준 선생의 ‘동

무 생각’이란 곡에 나오는 청라

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계산성당

3・1운동길을 따라 도심으로

들어가는 90계단을 내려서면

계산성당이다. 이곳은 얼마 전

에 선종하신 고 김수환 추기경

께서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이인성의 화폭에 담긴 계산성

당의 종탑과 감나무도 유명하

고, 이상화 시인의 ‘나의 침실

로’도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 한다.

이상화고택

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가

면 바닥에 한 걸음 한 걸음, 시

구가 새겨져 있다. ‘지금은 남

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바로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의 시다. 고택으로 들어서기 전,

시 몇 구절에 벌써 가슴이 뭉클

해져 온다. 이곳은 이상화 시인

이 1943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생의 말년을 보낸 곳이다.

진골목

‘질다’는 ‘길다’의 대구 사투리

이다. 그러니까 진골목은 긴 골

목이란 뜻. 남성들이 금연으로

국채보상운동을 펼칠 때 여성

들은 은반지 모으기 운동을 펼

쳤는데, 바로 이 진골목에 사는

여성 7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다. 고풍스런 주택 정소아과는

정필수(93)옹께서 62년간을 대

구의 어린아이들을 진료해 온

역사적인 곳이다.

청라언덕

진골목

이상화고택

이인성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

계산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