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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古典의 숲속으로 | 조선문 해제집 적 모순과 산적한 도시문제에도 불구하고 - ‘퇴락한 조 선인들의 도시’에서 벗어나 ‘발전하는 일본인들의 도시’ 로 전환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경성 건설’ 담론은 이러 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 기 시작했는데,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 시행에 뒤이 어 1936년 마침내 경성부는 영등포, 청량리, 신촌 일대 를 행정구역에 포함시킴으로써 시가지 면적을 대폭 확장 하여 일약 ‘제국 7대 도시’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만주사변(1931)과 만주국 건국(1932) 이래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개발의 거점이 되는 대 도시 건설이 국책으로 추진되었는데, 같은 시기 부산, 인 천, 목포 등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주도 하에 도시화가 본 격화된 주요 도시들에서도 관찬 사서를 펴내려는 움직임 이 나타난 것 또한 동일한 역사적 배경의 산물로 볼 수 있 다. 그 가운데에서도 <경성부사>는 한반도 종주도시인 경 성의 특권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당시 일각에서 제국 일본의 수도를 도쿄(東京)에서 경성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도요가와 젠요(豊川善曄), <경성천도론(京城遷都論)>, 1934 참조). <경성부사>는 총 3권이 통사적으로 구성되어 제1권은 선 사시대부터 통감부 이전까지, 제2권은 통감부 시대부터 1914년 부제(府制) 실시 이전까지, 제3권은 부제 실시부 터 편찬 당시까지 서울의 변천사를 각각 다루고 있는데, 토착 한국인들의 관점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일본인들의 시 각에서 서술한 역사임이 권별 구성 및 시기 구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제1권은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선사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서울의 변화(제1편), 조선 건국 및 한양 정도(제2편), 각종 사화와 당쟁, 왜란 과 호란, 국교 회복과 통신사(제3편), 영·정조시기의 선 정과 순조 이후 왕조의 쇠락(제4편), 고종 즉위에서 을사 조약까지(제5편)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에 는 을축년 대홍수(1925)를 계기로 발굴된 암사동 유적지 의 유물과 같은 당시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소개(제1편) 라든지, 조선 초기 정치·교육·학술·토목·건축·불교· 유교 등에 대한 서술(제2편), 그리고 사대문 안의 도시구 조와 청계천 준설공사에 대한 설명(제4편) 등 흥미로운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당쟁의 폐해에 대한 강조나 임 진왜란에서 활약한 왜장들의(명나라 원군의 망동과 대비 되는) 점령지 기강 확립을 위한 노력, 한·일간 선린우호 사례로 조선통신사에 대한 서술(이상 제3편), 그리고 책 전체 분량의 약 40% 비중을 할애하여 일본이 조선을 청 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강조하는 부분(제5편) 등에서는 도시사에 투영 된 일제 식민사관의 편향된 시각이 뚜렷이 드러난다. 제2 권은 6편으로 통감부 시기의 정치사(제1편), ‘한국병합’ 과 부제 실시(제2편), 한성부에서 경성부로의 변화(제3 편), 재경성 일본인 거류민 형성사(제4편), 용산과 신용 산의 변천사(제5편), 교통·통신·재해 등의 여록(제6편) <경성부사(京城府史)> 500년 왕조의 도읍지 한양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식민지 도시 경성으로 변화했을까? 재경성 일본인들은 어떻게 조선왕조의 수도를 자신들의 거점지로 탈바꿈시켰을까? 일본인들은 서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으며 경성을 어떤 도시로 만들려고 했는가? <경성부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살펴봐야만 하는 일 제강점기 서울 연구의 기본 자료다. 경성부에서 펴낸 전 체 3권 구성의 관찬 사서로, 제1권(1934)이 791면, 제2 권(1936)이 1,121면, 제3권(1941)이 985면에 이르는 묵직한 두께와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은 일본인들 이 1920~30년대 식민사학의 연구 성과를 서울의 역사 를 중심으로 집약적으로 재구성해 펴낸 한국통사라고도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일제가 이처럼 야심찬 역사서 발간을 추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인들의 경 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 위상의 제고 때문일 것이다. 일제 하 서울은 1920년대 문화정치기를 거치면서 도시의 치 안이 확보되고 인구가 늘어나는 등 전반적으로 도시사 회가 안정되고, 조선신궁 건립, 총독부 신청사와 경성부 청 건설, 경성제국대학 설립, 시구개수사업을 통한 도심 부 간선도로 정비 등 식민지 행정수도로서의 경관 조성 이 일단락됨으로써 그 외견상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 다. 이제 일본인들에게 경성은 - 내재하는 수많은 사회 이 연재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945년 이전 한국 관련 자료를 소개하기 위 한 것이다. 이들 자료는 대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일문으로 쓰여지고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거쳐 발간된 것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인들의 편향된 관심과 시각을 반영하고 있지만, 광복 이전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성부사>외 조선문 해제집 <목포부사(木浦府史)> <인천부사(仁川府史)> <대구물어(大邱物語)> <경성부사> 1권 표지 <경성부사> 2권에 실린 남대문로의 변화 <경성부사> 3권에 실린 시구개정노선도 <경성부사> 3권에 실린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지점 11

조선문 해제집 외 - nl.go.kr · PDF file만주사변(1931)과 만주국 건국(1932) 이래 일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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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의 숲속으로 | 조선문 해제집

적 모순과 산적한 도시문제에도 불구하고 - ‘퇴락한 조

선인들의 도시’에서 벗어나 ‘발전하는 일본인들의 도시’

로 전환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경성 건설’ 담론은 이러

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

기 시작했는데,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 시행에 뒤이

어 1936년 마침내 경성부는 영등포, 청량리, 신촌 일대

를 행정구역에 포함시킴으로써 시가지 면적을 대폭 확장

하여 일약 ‘제국 7대 도시’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만주사변(1931)과 만주국 건국(1932) 이래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개발의 거점이 되는 대

도시 건설이 국책으로 추진되었는데, 같은 시기 부산, 인

천, 목포 등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주도 하에 도시화가 본

격화된 주요 도시들에서도 관찬 사서를 펴내려는 움직임

이 나타난 것 또한 동일한 역사적 배경의 산물로 볼 수 있

다. 그 가운데에서도 <경성부사>는 한반도 종주도시인 경

성의 특권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당시 일각에서

제국 일본의 수도를 도쿄(東京)에서 경성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도요가와

젠요(豊川善曄), <경성천도론(京城遷都論)>, 1934 참조).

<경성부사>는 총 3권이 통사적으로 구성되어 제1권은 선

사시대부터 통감부 이전까지, 제2권은 통감부 시대부터

1914년 부제(府制) 실시 이전까지, 제3권은 부제 실시부

터 편찬 당시까지 서울의 변천사를 각각 다루고 있는데,

토착 한국인들의 관점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일본인들의 시

각에서 서술한 역사임이 권별 구성 및 시기 구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제1권은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선사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서울의 변화(제1편),

조선 건국 및 한양 정도(제2편), 각종 사화와 당쟁, 왜란

과 호란, 국교 회복과 통신사(제3편), 영·정조시기의 선

정과 순조 이후 왕조의 쇠락(제4편), 고종 즉위에서 을사

조약까지(제5편)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에

는 을축년 대홍수(1925)를 계기로 발굴된 암사동 유적지

의 유물과 같은 당시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소개(제1편)

라든지, 조선 초기 정치·교육·학술·토목·건축·불교·

유교 등에 대한 서술(제2편), 그리고 사대문 안의 도시구

조와 청계천 준설공사에 대한 설명(제4편) 등 흥미로운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당쟁의 폐해에 대한 강조나 임

진왜란에서 활약한 왜장들의(명나라 원군의 망동과 대비

되는) 점령지 기강 확립을 위한 노력, 한·일간 선린우호

사례로 조선통신사에 대한 서술(이상 제3편), 그리고 책

전체 분량의 약 40% 비중을 할애하여 일본이 조선을 청

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강조하는 부분(제5편) 등에서는 도시사에 투영

된 일제 식민사관의 편향된 시각이 뚜렷이 드러난다. 제2

권은 6편으로 통감부 시기의 정치사(제1편), ‘한국병합’

과 부제 실시(제2편), 한성부에서 경성부로의 변화(제3

편), 재경성 일본인 거류민 형성사(제4편), 용산과 신용

산의 변천사(제5편), 교통·통신·재해 등의 여록(제6편)

◉ <경성부사(京城府史)>

500년 왕조의 도읍지 한양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식민지

도시 경성으로 변화했을까? 재경성 일본인들은 어떻게

조선왕조의 수도를 자신들의 거점지로 탈바꿈시켰을까?

일본인들은 서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으며 경성을 어떤

도시로 만들려고 했는가? <경성부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살펴봐야만 하는 일

제강점기 서울 연구의 기본 자료다. 경성부에서 펴낸 전

체 3권 구성의 관찬 사서로, 제1권(1934)이 791면, 제2

권(1936)이 1,121면, 제3권(1941)이 985면에 이르는

묵직한 두께와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은 일본인들

이 1920~30년대 식민사학의 연구 성과를 서울의 역사

를 중심으로 집약적으로 재구성해 펴낸 한국통사라고도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일제가 이처럼 야심찬 역사서 발간을 추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인들의 경

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 위상의 제고 때문일 것이다. 일제

하 서울은 1920년대 문화정치기를 거치면서 도시의 치

안이 확보되고 인구가 늘어나는 등 전반적으로 도시사

회가 안정되고, 조선신궁 건립, 총독부 신청사와 경성부

청 건설, 경성제국대학 설립, 시구개수사업을 통한 도심

부 간선도로 정비 등 식민지 행정수도로서의 경관 조성

이 일단락됨으로써 그 외견상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

다. 이제 일본인들에게 경성은 - 내재하는 수많은 사회

이 연재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945년 이전 한국 관련 자료를 소개하기 위

한 것이다. 이들 자료는 대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일문으로 쓰여지고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거쳐 발간된 것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인들의 편향된 관심과 시각을

반영하고 있지만, 광복 이전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성부사>외조선문 해제집

<목포부사(木浦府史)> <인천부사(仁川府史)> <대구물어(大邱物語)>

<경성부사> 1권 표지

<경성부사> 2권에 실린 남대문로의 변화

<경성부사> 3권에 실린 시구개정노선도<경성부사> 3권에 실린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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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으로 상세히 서술한 책으로, 목포의 행정기관

변천, 거류민단과 학교조합, 면작지장(棉作支場)과 수산

시험장 등의 관공서, 각종 산업경제와 사회시설, 민속·

여가·교통을 포함한 지지(地誌) 등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근대 목포 연구의 기본 자료라 할 수 있다.

◉ <인천부사(仁川府史)>

불과 10여 채의 초가가 점점이 산재한, 고요하고 한적한

해안이었던 제물포 일대는 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

로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1884년 인천제물포각

국조계장정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인과 청국인, 구미 각국

인들이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게 되

었다. 개항 이후 인천은 한반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

불호텔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가 건립되는 등 새

로운 근대 문물의 유입 통로이자 실험장이 되었다. 근대

인천은 한반도 철도의 시발지이자 한국에서 개신교회, 기

상대, 외국무역상사, 해군사관학교 등이 처음 생겨난 곳

이며, 전화, 등대, 사이다, 자장면 등의 발상지이기도 하

다. 인천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의 관

문으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확인됨으로써 점차 한반도 제

2의 무역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제는 1914년 인천부

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만을 포함시키

고 과거 인천도호부가 입지해있던 관교동과 부평 일대는

부천군에 편입시켜 변두리로 만들었으나, 1936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옛 인천도호부 관할지역을 모두 포함시

킨 광역으로 시가지를 대폭 확장했으며, 1940년에는 부

천군 4개 면과 부평 일부까지 인천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 책은 이처럼 ‘대인천 건설’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1933년 인천 개항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 등이 편찬하여 인천부에서 발간한

책이다. 총설, 정치외교, 행정, 인천의 생성발달, 재정, 인

천의 항만, 교통 및 운수, 인천항 수출입 무역, 산업, 통화

및 금융, 교육, 신사·종교, 사회 등 총 13편의 내용이 거

의 1,500면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쳐 서술되어 있

다. 그 중 인천의 생성발달에 대해 300여 면의 분량을 할

애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과 인천의 산업에 대해서

도 거의 200면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도시발달사와 장래 산업도시로의 발전 가능성

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대구물어(大邱物語)>

전통시대 경북 내륙의 중심지였던 대구에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 병참

사령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특히 대구의 식민도시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경부선 부설로, 대구 상권은 철

도를 통해 부산과 연결됨으로써 이후 상당 기간 부산 상

권에 종속되었다. 그 결과 대구의 일본인 인구는 1904

년 불과 730여 명이던 것이 1919년에는 1만2,000명을

초과하여 당시 대구지역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서게

된다. 이 책은 1904년 대구에 들어와 27년 동안 거주하

면서 1931년 조선민보사(朝鮮民報社) 사장을 역임한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집필하여 조선민보사에서

발행한 것으로, 자신이 대구에 정착한 이래 대구에서 보

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자신의 기억과 관계자들의 증언

을 바탕으로 백여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시기 순으로 정

리했다. 그 가운데에는 청일전쟁기 일본군 진지였던 달

성산의 공원화와 대구신사 조성과정, 1907년 박중양 관

찰사에 의한 성곽 파괴, 1909년 순종황제의 대구 순행

(巡幸), 도로위원회를 둘러싼 갈등, 자갈마당 유곽 형성

과정, 대구신문사를 둘러싼 분란 등 일제 하 대구의 사

회사에 대해 알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

게 소개되고 있다.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특히 통감정치에서 총독정치로

의 전환과정(제1,2편)과 서울의 식민도시화 과정에서 이

루어진 각 구역별 지명 변화, 재경성 거류민과 거류지 변

천사, 용산의 지역사(이상 제3,4편)에 대한 상세한 서술

은 주목할 만하다. 제3권은 1914~19년간 경성부 행정

사에 대한 연도별 정리(제1부)와 신편입지구의 옛 모습

에 대한 소개(제2부)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분량의 약

3/4을 차지하는 제1부에서는 각 연도별로 부정(府政)의

전개 양상, 관련 법규, 학교조합, 교육 상황 및 조선의 전

반적 추이를 다루고 있으며, 제2부에서는 고양군, 광주군

및 돈암·창신·숭인·신설·용두·안암·종암·청량리·회

기·사근·금호·옥수정, 한남·보광·서빙고·이태원정,

성북·부암·홍지·신영·홍제정, 그리고 잠실리 등 1936

년 경성부 행정구역에 새롭게 편입된 외곽지역들의 과거

상과 변천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 <목포부사(木浦府史)>

1914년 조선총독부는 부제 실시와 더불어 한반도에 12

개의 부(오늘날의 시)를 지정했다. 특징적인 것은 12개

부 가운데 경성, 평양, 대구를 제외한 나머지 9개의 도시

들(인천, 군산, 목포, 부산, 마산, 진남포, 신의주, 원산,

청진)은 모두 일본인들이 한반도 진출의 거점도시로 개

발한 항구도시이자 신도시라는 점이다. 일제 초기 한반

도의 도시화는 전통적인 내륙 읍성 지역들이 대부분 배제

된 가운데 해항 신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

운데에서도 가장 급격한 성장세를 경험한 도시가 호남지

역의 대표적인 미곡 수출항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목포

와 군산이다. 광활한 나주평야를 끼고 도는 영산강의 하

구이자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아우르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목포는 조선시대 세곡선이 통과하던 서남해안 지

역의 길목으로 만호진(萬戶鎭)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개

항 무렵에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

서 근대 목포의 역사는 1897년 각국공동거류지가 설치

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무역항

으로 성장을 시작한 목포는 러일전쟁 이후 수출이 급증하

게 되는데, 주된 수출품은 미곡으로 주로 오사카, 고베 등

지로 수출하였다. 그 결과 1902년 4,000명 정도에 불과

했던 목포의 인구가 1926년에는 3만3,244명으로 급증

하는데, 그 가운데 약 1/4이 일본인이었다. 이 책은 1930

년 목포부청에서 목포의 현황을 정리하여 약 1,000면의

1. <목포부사>에 실린 목포부 전경 2. <인천부사>에 실린 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

글. 김백영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를 받았다. 한국사회사학회 운영위원장과 도시사학회 총

무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 <지배와 공간 : 식

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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