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예 13:31-35 13-17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 13:1)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예 ( 13:2)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 13:3) 예예 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 13:4)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 13:5)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 13:6) 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예예예 예 3:14 ( 13:7)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 ( 13:8) 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 13:9)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0)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 13:11) 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 13:12)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 13:13)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4)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5)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6)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7)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 1:2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 예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 13:15) 요요 요요요요 요요 요 요요 요요요 요요요 요요 요요 요요 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요요요 요요요요요 clearly he said, do this! Not to think about it only. 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 요요요 요요요요 요요 요요요 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요요요요 ?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17 요요요 요요요 요요 요요요 요요 요요요요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 예예예 요요요요요 요요 요요 요요 요요 요요요 요요 요 요요요 요요요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 요요요” 예예예예예예 예예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 예예예, How God became king) CS Lewis, Miracle 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예 예예 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 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요요 요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요요요 요요 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요요요요 요요 요요요 요요 요요 요요요요 요요 요요요요 요 요요요 요요요요 요요요 요요요요

예수님의 새 계명

Embed Size (px)

DESCRIPTION

설교

Citation preview

Page 1: 예수님의 새 계명

예수님의 새 계명

요한복음 13:31-35

13-17 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주신 가르침의 내용이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마 3:14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 13:12)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사랑이라는 말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히 1:2 “사랑한다는 사람의 말이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말은 거짓이 된다. 사랑이란 반드시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 사랑으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올라가시기 위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 멈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대형교회들 가운데 드려지는 멋진 예배를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시고 clearly he said, do this! Not to think about it only.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가 ?

근대 사회에 지식과 삶이 분리가 일어난다. 지식은 더 이상 삶의 문제를 관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지적인 문제들에 파고들고, 그 문제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러한 지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자전거를 타는 지식. 운전을 하는 지식,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란 삶에서 경험되어진 지식만이 진짜이다) 예수님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하지 않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예수님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로 오셨다.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탄의 모든 통치를

Page 2: 예수님의 새 계명

무너뜨리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되셨다!

(톰 라이트, How God became king) CS Lewis, Miracle 을 보면 스킨 스쿠버에 비유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영원에 거하시는 분이 시간에 들어오셔서 육신을 입으셨다. 그래서 썩어질 인간의 육신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 컴컴하고 깊은 바다와 같은 우리의 무의미가 하나님의 영원한 소망이 들어오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셔야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가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 지를 보여주는 곳이면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만나는 곳이다.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행동으로 수건과 대야를 들고 직접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이에 베드로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예수님께서 마치 종처럼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의 더러운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 보통 고대 사회에서는 먼지가 많은 길을 걷기 때문에, 쉽게 더러워진다.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최고의 환대를 보여주는 행위이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가장 감동적인 행위였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조금 있으면 자신에게 키스를 하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갈 것이다. 세상은 11 명의 제자들에게 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유다에게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가 떠난 후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를 바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와 같이 발을 씻어주셨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11 명의 제자들의 편에서 유다를 바라보는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배신자들은 유다 하나가 아니었다. 제자들 전부다 다 예수님의 배신자들이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을 치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를 그런 너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너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유다는 믿지 못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쉽게 누군가를 정죄하는 자리에 올라선다. 그리고 우리는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인양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아무도 죄 없는 자가 없다. 누가 간음하는 여인을 향해 돌을 들겠는가?

누가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향해, 정결의 이름의 채찍을 들고 내리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밖에는 없다. 우리에게는 용서와 품어 줄 수 있는 자유밖에는 없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손길,

기도의 눈물로 잘못된 길을 향해 가는 가족을 돌이키기 위해 간절히 엎드리는 자유 밖에는 없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알라바마에서 통과된 anti-illegal

immigrant law. HB56 2011. 예수님은 어느 누구든지, 우리가 어떤 더러운 길을 걸어왔든지 그 사람의 발을 닦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하여 유다가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예수님 제가 미쳤네요.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발 씻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자마자, 바로 나가서 준비했던 일을 진행시킨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빰을 때리는 자들에게 우리의 다른 빰을 돌려대면,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들에게 십리를 가면, 누군가에게 77번을 용서하면, 그 사람이 그 선한 행위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나쁜 죄인이라고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대하는가?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선한 행위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은 유다가 사랑하는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발을 씻기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어떤 여인이 설교를 통해 용서하라는 말에 감동을 받고, 자기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내가 당신을

Page 3: 예수님의 새 계명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기 원한다. 당신이 나에게 한 행동을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을 용서하기를 원한다.” 다음날 해고를 당한다.)

예수님은 죄인된 제자들을 위한 장소를 준비하기 위해 가실 것이다. 이 저녁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영원히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예수님의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sample 를 보여주신 것이다.

(요 13:12)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이것이 제자들로서 해야 할 일들이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다. 보거라. 네가 해야 할 것은 더럽고, 냄새 나는 발, 네가 사랑하는 사람같이, 유다와 같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발을 붙잡고 부드럽게 잡고, 그 사람들의 발을 닦아는 주는 환대를 베푸는 것이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의 행위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관심을 바꾸신다. 예수님이 유다의 발과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 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의 발을 다 씻겨주라고 말씀하신다.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이니까 그러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인이라서, 예수님과 같이 행동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만 사랑하시고 예수님만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품으시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들도 똑같이 십자가를 지고 내가 걸어간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예수님의 오심은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재 창조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귀중한 구세주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이다.

예수님은 단지 개인적인 구세주를 넘어서 온 세상에 대한 진리가 되신다!

키에르케고르는 Training in Christianity 라는 책에서 Christ not only is located behind us to drive us on but also stands before us to beckon us on. Christ not only commands us to see him as an example, but also blesses us by saying that he will give us what we need to be an example.

By Bonhoeffer, we are summoned to confirm ourselves not only to Christ’ acts but also to his person.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은 예배를 통해서 생겨난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더욱 예수님을 예배하게 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어떤 룰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A posture

toward life! 바울은 고후 5:14 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갈 2:6, 빌 3:7, 골 2:11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변화가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비로소 유다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뀐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흠모하는 것을 흉내내면서, 우리는 그 대상과 점점 가까워지고, 그 대상과

Page 4: 예수님의 새 계명

점점 비슷해지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신다.

예수님의 새 계명,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왜 사랑하라고 명령하실까? 만약 누군가 내 친구를 사랑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사랑은 그냥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내 마음을 주는 일이고 내 삶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하신 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왜냐하면 사랑은 예수님의 본질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

우리가 가장 countercultural, radical gift to the way of the world 예수님이 서로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얼마만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닮은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은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배경으로 한다. 그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하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할수도 없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가 언제 맺어지는가? )

사랑은 예수님이 행하신 미션의 핵심이며, 교회의 핵심이다.

대위임명령 마태복음 28 장. 가서 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으라. 그러나 이 명령을 보완해주는 명령이 바로 새 명령이다. 우리의 선교의 내용이자, 선교의 형식이 된다.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터툴리안이라는 초대 교부는 어떻게 교회가 로마 제국을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큰 이유를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향해 가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신다.

이 계명은 단지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 적용된다. 그러면 이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 인가?

아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세워주는 수단이 되고 (우리를 서로의 사랑이 없이는 세워질수가 없다), 나아가 온 세상에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을 증거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를 마음대로 찾아다니는 현상. 교회 안에 맘에 들지 않는 사람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윌리엄 윌러먼, 듀크대학의 신학자 “교회는 하나님이 끌어 모으신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부르신 곳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혼자서 자란 아이들과 대 가족에서 자란 아이들의 차이가 무엇인가? 아이들이 집에서 자랄 때와 사회에 나가서 처음 겪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랑이란? 예수님의 대야와 수건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3 대 강화; 긴 가르침.

산상 설교 마태복음 5-7

감람산 강화 마 24-25

다락방 강화 요 13-16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서로 친절하게 대하라고 발을 씻겨주신 것이 아니다. 자기가 떠난 후에도 자신의

Page 5: 예수님의 새 계명

사명을 확장하도록.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 모든 사람을 섬기면서 세상속으로 들어가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