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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화인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1521호 올해 창립 130년을 맞아 이화의 역사 를 축하하는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서울 시 서초구에 있는 인도박물관의 김양식 (영문·54년졸) 관장이다. 김 관장은 본 교 입학 후 바로 6·25전쟁을 겪어 부산에 서 임시로 설립된 학교에서 3년간 수업 을 들었다. 약 60여 년 전 6·25를 겪었던 격동기의 이화 역사를 들어보기 위해 김 관장을 25일 인도박물관에서 만나 당시 이화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관장은 창립 130년을 맞은 본교에 축시를 보냈다. 그는 축시를 모든 이화인 에게 보내는 축하의 꽃다발이라고 말했 다. 김 관장의 축시는 창립 130년의 개교 기념시를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만 들어졌다. “축시에 우리가 어려웠던 시 절 이화의 역사와 줄기를 응축해서 전달 하고 싶었어요. 수필이 아닌 짧은 시로 간결하게 이를 표현하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죠. 그만큼 축시가 길이 남아 도 부끄럽지 않게 마음을 다해 썼어요.” 김 관장이 보여준 대학 시절 사진에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본관과 대강당이 눈에 띄었다. 김 관장은 사진을 보며 이 화의 1950년을 추억했다. “그 당시 이화 캠퍼스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지금 캠퍼 스를 보면 운동장도 없고 건물로 가득한 데, 그 당시에는 건물보다 자연이 많았 죠. 학교 곳곳이 꽃밭이고 숲이어서 정 말 아름다운 숲 속의 학교였던 기억이 나 요. 제가 졸업한 영문과는 지금 캠퍼스 에 있는 본관에서 주로 강의가 있어 자 랑스러웠죠. 운동장에서 같은 과 친구들 끼리 체육수업을 듣기도 했었죠.”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언어와 시를 좋 아하던 김 관장은 문학도를 꿈꾸며 이화 에 진학했다. 그 당시에는 대학에 진학 하는 여학생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 고, 대학의 수도 적었다. 많은 여학생에 게 이화는 로망이기도 했다. “영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 어를 배워서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 기도 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19세기 낭 만파 시를 많이 배우고 읽다보니 영시에 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일찍이 시를 쓰기 시작했고 특히 정지용 시인이 본교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영문과를 선택했어요.” 김 관장은 신촌 캠퍼스에서 수업을 얼 마 듣지 못했다. 4월에 입학하고 두 달 만 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전쟁이 본교 학생들의 학구열을 막 을 수는 없었다. 학생과 선생들은 전시 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임시학교를 지어 배움을 이어나갔다. “1951년 가을쯤 임 시학교를 짓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전 부산 임시학교에서만 대학을 3년 다녔 죠. 우리 학교는 다른 대학에 비해 빨리 임시학교를 지었어요. 임시학교는 당시 경남도청 뒷산 언덕에 지어졌는데, 일단 대충 텐트를 치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 아 그 위에 앉아서 공부했어요. 칠판 하 나를 걸어놓고 책상과 의자도 없어 무릎 에 노트를 놓고 수업을 들었죠. 차츰 긴 의자와 책상도 생겨 점점 피난학교의 모 습을 갖춰갔어요.” 힘든 피난 생활이었지만, 동기와 스승 이 함께였기 때문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이화에 입학할 당시 동기가 63명이었지만, 부산에서는 23명 정도만 같이 수업을 들었어요. 때론 전 차를 타고 해운대 바닷가에서 영문과 친 구들과 바위에 앉아 노래도 부르다가, 피 난생활의 슬픔으로 눈물도 흘리면서 서 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지냈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스승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다. “부산으로 내려오신 교수님들은 그 수가 얼마 안됐지만, 강의는 이어나갔어 요. 전쟁 중이라 교수님의 수도 줄었어 요. 남은 교수님들께서 열정적으로 학생 들을 가르치셨죠. 당시 총장이던 김활 란 교수님께서도 영문과 반에서 영시 강 의를 하셨고, 모윤숙 교수님께서도 영시 를 가르쳐주셨어요.” 김 관장은 부산에서의 3년이 그의 삶 을 강하게 만들어 줬다고 말한다. “전쟁 을 겪어보니 이제 앞으로 뭐든지 해낼 수 있고, 뭐든 견딜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또, 소학교 시 절 일제강점기도 겪고, 중학교 때 해방 을 겪은 제게 역사의식을 갖게 해준 것 같아요.” 끝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시간을 귀하 게 여겨 스스로의 가치를 위해 꾸준히 탐 구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귀 한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학업에 열중 해 언제 어디서나 자신 있게 국제사회의 선봉으로 나갈 수 있는 이화인이 돼 영광 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소연 기자 [email protected] 김양식 관장 사진=본인 제공 김양식 관장이 보낸 1950년대 이화에서의 나날 사진=본인 제공

이화인 - Ewhapdfi.ewha.ac.kr/1521/152105.pdf · 2016-05-29 ·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1521호 이화인 5 올 해 창립 130년을 맞아 이화의 역사 를 축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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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화인2016년 5월 30일 월요일 1521호

올해 창립 130년을 맞아 이화의 역사

를 축하하는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서울

시 서초구에 있는 인도박물관의 김양식

(영문·54년졸) 관장이다. 김 관장은 본

교 입학 후 바로 6·25전쟁을 겪어 부산에

서 임시로 설립된 학교에서 3년간 수업

을 들었다. 약 60여 년 전 6·25를 겪었던

격동기의 이화 역사를 들어보기 위해 김

관장을 25일 인도박물관에서 만나 당시

이화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관장은 창립 130년을 맞은 본교에

축시를 보냈다. 그는 축시를 모든 이화인

에게 보내는 축하의 꽃다발이라고 말했

다. 김 관장의 축시는 창립 130년의 개교

기념시를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만

들어졌다. “축시에 우리가 어려웠던 시

절 이화의 역사와 줄기를 응축해서 전달

하고 싶었어요. 수필이 아닌 짧은 시로

간결하게 이를 표현하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죠. 그만큼 축시가 길이 남아

도 부끄럽지 않게 마음을 다해 썼어요.”

김 관장이 보여준 대학 시절 사진에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본관과 대강당이

눈에 띄었다. 김 관장은 사진을 보며 이

화의 1950년을 추억했다. “그 당시 이화

캠퍼스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지금 캠퍼

스를 보면 운동장도 없고 건물로 가득한

데, 그 당시에는 건물보다 자연이 많았

죠. 학교 곳곳이 꽃밭이고 숲이어서 정

말 아름다운 숲 속의 학교였던 기억이 나

요. 제가 졸업한 영문과는 지금 캠퍼스

에 있는 본관에서 주로 강의가 있어 자

랑스러웠죠. 운동장에서 같은 과 친구들

끼리 체육수업을 듣기도 했었죠.”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언어와 시를 좋

아하던 김 관장은 문학도를 꿈꾸며 이화

에 진학했다. 그 당시에는 대학에 진학

하는 여학생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

고, 대학의 수도 적었다. 많은 여학생에

게 이화는 로망이기도 했다. “영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

어를 배워서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

기도 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19세기 낭

만파 시를 많이 배우고 읽다보니 영시에

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일찍이

시를 쓰기 시작했고 특히 정지용 시인이

본교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영문과를 선택했어요.”

김 관장은 신촌 캠퍼스에서 수업을 얼

마 듣지 못했다. 4월에 입학하고 두 달 만

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전쟁이 본교 학생들의 학구열을 막

을 수는 없었다. 학생과 선생들은 전시

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임시학교를 지어

배움을 이어나갔다. “1951년 가을쯤 임

시학교를 짓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전

부산 임시학교에서만 대학을 3년 다녔

죠. 우리 학교는 다른 대학에 비해 빨리

임시학교를 지었어요. 임시학교는 당시

경남도청 뒷산 언덕에 지어졌는데, 일단

대충 텐트를 치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

아 그 위에 앉아서 공부했어요. 칠판 하

나를 걸어놓고 책상과 의자도 없어 무릎

에 노트를 놓고 수업을 들었죠. 차츰 긴

의자와 책상도 생겨 점점 피난학교의 모

습을 갖춰갔어요.”

힘든 피난 생활이었지만, 동기와 스승

이 함께였기 때문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이화에 입학할 당시

동기가 63명이었지만, 부산에서는 23명

정도만 같이 수업을 들었어요. 때론 전

차를 타고 해운대 바닷가에서 영문과 친

구들과 바위에 앉아 노래도 부르다가, 피

난생활의 슬픔으로 눈물도 흘리면서 서

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지냈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스승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다. “부산으로 내려오신 교수님들은 그

수가 얼마 안됐지만, 강의는 이어나갔어

요. 전쟁 중이라 교수님의 수도 줄었어

요. 남은 교수님들께서 열정적으로 학생

들을 가르치셨죠. 당시 총장이던 김활

란 교수님께서도 영문과 반에서 영시 강

의를 하셨고, 모윤숙 교수님께서도 영시

를 가르쳐주셨어요.”

김 관장은 부산에서의 3년이 그의 삶

을 강하게 만들어 줬다고 말한다. “전쟁

을 겪어보니 이제 앞으로 뭐든지 해낼 수

있고, 뭐든 견딜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또, 소학교 시

절 일제강점기도 겪고, 중학교 때 해방

을 겪은 제게 역사의식을 갖게 해준 것

같아요.”

끝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시간을 귀하

게 여겨 스스로의 가치를 위해 꾸준히 탐

구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귀

한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학업에 열중

해 언제 어디서나 자신 있게 국제사회의

선봉으로 나갈 수 있는 이화인이 돼 영광

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소연 기자 [email protected]

김양식 관장 사진=본인 제공

김양식 관장이 보낸 1950년대 이화에서의 나날 사진=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