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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자유, 평등, 박애 - (1789~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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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자유, 평등, 박애 -

(1789~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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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

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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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의 특징은 보통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말해진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인간세계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가운데 합리성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부터 유럽에서 천문학이나 수학 등 자연과학이 발전하며 사람들이 우주와 자연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수 있는 곳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뉴턴의 종합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하나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 받는것으로 생각됨으로써 이제 인간사회도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런 만치또 합리적인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래서 계몽사상은 서양이 합리적인 근

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상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계몽사상이 르네상스와 함께 서양 근대문화의 발전에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계몽주의의 왕 볼테르(Voltair, 1694~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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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 “자연으로 돌아가라”

“일부 사람들만이 사치스러운 것은 자연의 상태

에서 동떨어진 것이다. “

-국민들에게 “혁명의 권리”를 주장

-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

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

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

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

히 묻었다.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

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

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

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

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

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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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프랑스

불평등한 사회체제: 18세기의 프랑스의 구체제(앙시앵 레짐)에서는 귀족과 성

직자들만이 사회의 특권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추기경 등의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계급(귀족)은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그나마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는 175년 동안이나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3계급은 실질적으로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것이다.

바닥난 국가재정: 왕실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재정은 휘

청거리기 시작했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려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점점 과중해졌고,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더욱이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사치로 국가 예산의 3배를 소모하게 되었다. 예컨대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예약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3배의 가격인 32만 프랑을 주고 구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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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민중의 개혁 의지: 이러

한 구제도의 불합리함에 대하여 제3계급은 정당한 시민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에는계몽주의 사상과 미국의 독립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전문직 일명 부르주아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육체 노동자,노숙인, 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 즉, “모든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점차 커져갔다.

제3계급의 등이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의해 휘어진 모습을 나타난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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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의 선언: 평민 대표들은 머릿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

년 6월 20일 회의장을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선언). 3월 24일에는 국민의회에 정치와 결탁하여 보수적인성향을 보이던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진보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들과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삼부회 소집: 루이 16세는 재정난을 타개하고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 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요구하였다. 국왕은 결국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귀족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 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려고 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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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의 <테니스코트의 선언> - 루이 다비드(1791)연필, 펜, 흑갈색 물감의 담채 위에 유약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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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 국왕과 옛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귀족(왕당파)은 이

와 같은 움직임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용해 무력으로 억누르려 했다. 이를 위해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 민중들은 한 걸음 빠르게 행동했다.1789년 7월 14일 아침,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국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기를빼앗고 죄수를 풀어주었다.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절대왕정에 대한 저항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농촌에서도 궐기한 농민들이 귀족의 저택을 습격했다. 프랑스 전국은 단숨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 국민회의는 이와 같은 움직임에 영향 받아 8월 4일 귀족의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또한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정부를 움직이는 힘은 국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

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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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발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혁명의 불길 속으로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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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파리 시민들

파리 시민들은 1789년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국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죄수를 풀어주었다.죄수의 수는 겨우 7명에지나지 않았으나, 시민들은이들을 위해 하루 종일 싸웠고 98명이 희생되었다.바스티유 감옥은 왕권독재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이를공격한 것은 왕권독재를 타도하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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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프랑스 국립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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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선언

정식 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전문과 17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선

언에는 미국 독립선언과 계몽

사상의 시민적 자연법이 잘

표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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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국민이 정치를 한다고 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짐이 곧 국가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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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베르사유 행진> (1789년 10월 5일)혁명 발발 당시 프랑스에서는 전년의 흉작과 정치 불안 때문에 곡물의 판매가 제대로이뤄지지 않았고, 빵을 비롯한 식료품 가격 상승에 파리 시민들은 고통 받았다. 서민의궁핍한 생활과는 달리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여전히 호사스러운 잔치가 열렸다. 이에 분노한 주부들이 1789년 10월 5일 새벽, 파리의 광장에 약 7천 명이 모여 빵을 달라고 외치면서, 국왕과 의회에 빈곤을 호소하며 베르사유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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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예트가 이끄는 2만 시민군이 뒤를 쫓았다. 그들은 폭우 속에서 약 20km의 길을 6시간 동안 행진하여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대포까지 꺼내행진하였다고 한다. 이에 놀란 루이 16세는 압력을 받아 프랑스 인권 선언을 인정하고그녀들에게 이끌려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가족과 함께 이주한다. 왕과 그 가족이 파리에서백성과 함께 어려움을 겪자는 의미였다. 이후 루이 16세 일가는 파리 시민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된다. 이 사건을 <베르사유 행진> 혹은 <10월 행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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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와네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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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뜨와네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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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국왕 루이 16세 일가는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살았고 사실상 파리시민의 감시를 받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국왕과 함께 의회의 기능도 파리로 이동했다. “봉건 특권의 폐지 선언”과 “인권 선언”을 국왕이 승인함에 따라 정국의 혼란은일단 진정되는 듯 하였다.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의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1791년 국왕과 민중의 중개자인 미라보가 죽자, 과격한 혁명을 거부한 루이 16세는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한 관계에 있는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느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충격을주었고, 동시에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폭로되었다. 이를 <바렌느 사건>이라하며, 국왕 일가가 도주를 하려다가 미수에 그침으로써 왕실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점차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발표하여, 루이 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루이 16세는 국왕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있던 국왕 옹호파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바렌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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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처형. 1793년 1월 21일 아침 10시. 2만여 군중이 지켜보는가운데 길로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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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콩시에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뒤로 묶여져 있었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 처형된 후 같은 해 10월 16일,38세의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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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끄는 여신” – 젠 들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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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 들라크 (샤랑 -생- 스, 1798년 - , 1863년)1830년캔 스에 채, 260*325cm

낭만주 화가 들라크 그 1830년 프랑스 7월 혁 생생한 화가 상상 현한

다. 억압 는 민 들 에 한 힘차고 열정적 담아낸 그 실제 어난 사건에 가

특 비현실 계 결합시켜 낭만주 술 수 보여주고 사실주 사적 특징 함께 녹아

다.

비너스 한 앞가슴 만한 상징하는 여 한 에 창검 총 들고, 다

에는 조 삼색 높 들고 격 하 힘차게 전 한다. 무너 케 드 앞에는 계 단

과 아랫 가 드러난 남 가 각 향 죽어 넘어져 다. 여신 락 에는 원 호

하는 상당한 여 볼 수 다. 여신 에는 검정 실크 에 정 한 들라크 신 한

총 들고 케 드 넘고 고, 그 에는 검 들고 허 띠에 총 노동 가 전 하고 다. 여

신 에는 한 년 혁 열에 참가하여 총 휘 다. 들 들 검 연 에 무수

한 혁 열 고 다. 하늘 끝에 는 상징하는 노랗고 흰 연 사 노트

담 당 탑 보 다. 들라크 는 혁 들과 한 들, 한 혁 과 무 , 무 에

에 타는 산한 케 드 친 침한 시가전 습 해 비극적 낭만 그 정수 집약했다.

1827년 살 전에 그 출 었 너무 과 었다는 에 하고 호감 샀다. 그 후 알제

에 그 많 낭만주 걸 에 들라크 는 1857년 침내 그가 원했 프랑스 아카 미 회원 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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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의 국기(TRICOLORE)는 프랑스 대혁명의 해인 1789년에 처음 사용되었는데,Bourgeois 귀족(청색) · Roi 왕(흰색) · Proletariat 무산계급 또는 서민계급(붉은색)을 상징하는 3색기이다. 프랑스 혁명 도중 루이 16세가 파리 시청을 방문, 한때 혁명세력과 화해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백색>과 파리시의 상징인 <청색>과 <적색>을 합하여 국왕과 국민의 화합의 상징으로 3색기가 만들어졌다. 자유·평등·박애는 프랑스의 국민정신을 뜻하는 것으로국기의 3색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 프랑스 국기는 3색기의 원조로서 의장 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가영향을 받아 각각 다른 색깔의 3색기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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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다비드 <성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1800년 유화 260x221cm

나폴레옹(1769~1821)

-1799년 11월 9일, 군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다.-1804년 5월 18일 황제로 즉위- 그 해 12월 2일 황제 대관식-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영국에 항복- 1821년 유배지인 대서양의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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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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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4) – 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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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프랑스 제1제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같은 해 5월 18일에 이미 제정(帝政)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 바

있다. 그는 새로운 이벤트로 황제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한다. 그림은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대신 교황을 파리로 초청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의 대관식 장면이다. 그들은 전날 같은 장소에서 8년 동안의 동거생활을 접고 혼인성사를 올린

바 있다. 당시 나폴레옹의 나이는 35세, 조세핀은 연상인 41세였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왕실 전속 사진사였으며 신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한 루이 다비드

(1748-1825)이다. 나폴레옹의 명으로 현장을 스케치한 다비드는 3년에 걸쳐 그림을 완성한다.

680㎝ x 980㎝의 대작으로 루브르에서 두 번째로 큰 작품이다. 화려함과 웅장함에서도 보는 사

람을 압도한다.

등장인물은 주연과 조연을 합쳐 70여명. 하이라이트는 자신을 스스로 대관한 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손을 번쩍 들고 서있는 장면이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3번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영웅은 사라지고 황제만이

존재한다는 소식에 곡의 이름을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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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세계 최대의 개선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